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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떡이 많으니 낙원이로구나
1945년 총통을 잃은 낙지들이...
도망 친 곳에 어쩌고
와 그럼 낙원상가에 가면 떡집도 많나요?
1910년 어쩌구 저쩌구 무교동에 모인 나인들이 낙지를 팔았대
그렇군...... 그럼 무교동 낙지는 왜?
그 밑에 떡집 꽤 있었어.
맛있는 떡이 많으니 낙원이로구나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은 주변에 떡집이 없는 곳으로 도망갔다는 뜻
와 그럼 낙원상가에 가면 떡집도 많나요?
Dr.Kondraki
그 밑에 떡집 꽤 있었어.
요즘은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예전엔 낙원상가 근처에 떡집 꽤 있었어
예스
아니 근데 진짜 많아
ㅇㅇ 그것이 낙원 떡집이니까
네 사실입니다.
가면 떡집이 꽤 많은데 굳이 일부러 찾아가서까지 먹을 맛은 아니고 낙원상가나 인사동 가면 지나가다 조금 사서 먹을 정도입니다. 아는 맛이 대부분 거시거 거기라 일부러 찾아갈 정도의 맛은 아닙니다.
낙원상가!
그렇군...... 그럼 무교동 낙지는 왜?
북창동 순두부도...
건설 로봇
1910년 어쩌구 저쩌구 무교동에 모인 나인들이 낙지를 팔았대
낙지 볶음 시작한곳이 무교동
건설 로봇
1945년 총통을 잃은 낙지들이...
아... 그 낙지...
아 낙원동 그래서 낙원 하나 배우고 가네
도망 친 곳에 어쩌고
모리안 네이년
도망친 곳에 떡은 있었다.
그곳에는 떡이 가득했어...
실낙원...!
추방된 곳에는 낙원(동)이 있었다....
에덴떡집 발할라떡집
열심히 떡매를 치는 모습
굉장히 슬픈 이유자나 ㅜ
이름에 재미난 유래들이 많은듯 ㅎ
영광굴비 이동갈비 풍천장어 같은 거였구나
풍천은 지명 아니긴해요
몰랐어...부끄러워...!
근데 풍천이라고 잡히는 곳이 고창 한 곳밖에 없으면 지명으로 봐도 문제 없을거 같기도 하고 좀 애매한 문제라고 하네요
낙원상가 그동네인가보네
오 꽤 슬픈 유래였구나
아 그래서
떡집의 밤
뭐야 난 낙원상가 근처 떡집이 유명해서 그런건줄 알았는데
공무원에서 짤리고 낙원동 갔구나
오 그랫낭
ㄷㄷㄷㄷㄷ
떡의 성지라하니 좀 야하네요
떡치는 ASMR 같은거 찾아보면 있을듯도 한데
상처는 잊혀져도 흉터는 오래가
떡집추방
지밀나인은 상전이 죽으면 쫏겨나지만, 수랏간 침방 이런덴 보통의 잘못으론 안쫏겨날텐데
울 동네도 저런 이름 하나 있음 할아버지가 함
동묘 종로길 건너편 시장...금남시장 인 이유 세조 에게 왕위에서 쫒겨나고 죽임을 당한 단종의 왕후가 동묘근처 청계천 에서 살면서 길쌈을 해주며 먹고 살았음 시장 상인 특히 여자들이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챙겨주곤 했는데 중앙정부 가 그것을 못 하게 하였음 그래서 남자들은 못들어 오는 시장 이라고 선포 하고 여자들만 거래를 하면서 단종의 왕후 였던 분을 보호 하였음 그뒤로 그 시장 이름이 금남시장 이라고 불리워짐 정순왕후는 출가하지 않았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경혜공주[10]의 아들로 그녀에게는 시조카가 되는 정미수가 수양아들로 들어오면서 그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11] 무척 장수해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중종 16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조선 역대 임금 중 2번째로 단명한 국왕인 남편[12]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역대 왕비 중 2번째로 장수한 왕비다.[13][14] 즉,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가 요절하고 뒤이어 세조, 예종, 성종의 치세를 거쳐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이 한명회를 부관참시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행각을 벌이다가 폐위된 것, 세조의 또 다른 증손자인 중종이 즉위해 첫 번째 아내 단경왕후 신씨를 내쫓고 2번째 아내 장경왕후와 사별한 뒤 3번째 아내 문정왕후와 혼인하는 것까지 모두 보고 죽은 것이다.[15][16] 죽을 당시 세자였던 인종은 그의 먼 증손자뻘이 된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막에서 동냥을 하고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17][18] 낙산에 정순왕후가 천을 염색할 때 사용했다는 자주동천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물에 천을 넣자 천이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조의 도움은 끝까지 거절했다. 세조는 그녀를 노비로 전락시켜 버렸지만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의 묘지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그녀의 장례는 나라에서 대군부인의 예로 치렀는데, 정작 단종이 대군의 지위로나마 복위된 것은 그보다 160년 지난 1681년 숙종 때이다. 만일 그녀가 생존했다면, 예종 대 - 성종 대 - 연산군/중종 대에 이르기까지 대왕대비 추봉을 3번은 받았을 세월이었다.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思陵)이다.[19]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思)한 그녀의 일생에 걸맞는 능호. 경춘선의 사릉역은 그녀의 이 능호에서 유래한다. 다만 사릉에는 사릉역보다 그 다음역인 금곡역이 더 가깝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에는 시자부(媤姉夫, 시누이의 남편) 정종과 시조카이자 양자였던 정미수의 집안인 해주 정씨 가문에서 그녀의 무덤을 관리해 주었다. 현대에도 사릉 인근에는 해주 정씨 집안의 개인묘들이 들어서 있다.
오 잡지식 하나 추가됬다. 와이프한테 써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