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즌 기간: 우리시간 11월 3일 08:00~12월 1일 08:00
★900점 WORLD SERIES 업데이트 +1
더쇼 20 윌리 메이스 "99" (1954년 23세 시즌)
전작과 능력치 비교
꼽사리 생성 중견수 능력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분은 야구 연감뿐 아니라 많은 곳에 이름을 남기셨네요
미국 스포츠 선수, 출신 중에 역대 대통령을 가장 많이 만난 분 같아요
심지어 에어포스 원을 함게 타고 이동도 하셨더군요.
본인의 이름이 주소와 도로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라클 파크 주소가 이분 이름과 배번을 합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24 Willie Mays Plaza San Francisco, CA 94107
오라클 파크 주변에 메이스의 배번을 기념하기 위해 야자수 나무 24구루를 심어 놓았다고 하네요.
우리는 잠실 야구장으로 치면
서울 송파구 박철순로 21
서울 송파구 김용수로 41 이쯤 되겠군요
2008 년 6월 4일 뉴욕 자이언츠 시절의 폴로 그라운드 주변, 할렘의 155th Street에서 163rd Street까지 이어지는
Harlem River Drive의 8 블록 도로에 Willie Mays Drive라는 도로명이 부여됐습니다. (만장일치 승인이었다네요)
지도의 점선 부분입니다.
플로리다 올랜도에는 60년대 후반에 메이스의 이름을 딴 윌리 메이스 파크 웨이와 윌리 메이스 집이
생겼는데 아프리카 계 미국 내 거주자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1980년에는 Bay Area Sports Hall of Fame에 헌액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 큰 영향을 준 스포츠 인물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
2007 년 12 월 5 일에는 캘리포니아 주 명예의 전당에 헌액
(당시 주지사는 터미네이터 형이죠)
2010년 명예의 아프리카 계 미국인 스포츠 전당에도 헌액
페어필드 산업 고등학교 출신으로 대학을 가지 않았지만 여러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회장님들이나 정치인들이 많이 받았지요)
2004 년 5 월 24 일 더 캐치 50주년을 맞아 예일대학에서 명예 인류학 박사 학위
2009 년 다트머스 대학에서는 명예박사 학위
2009 년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학에서도 명예박사 학위
2017년 월드 시리즈부터 MVP에게 수여하는 트로피는 메이스의 모습이 들어간 트로피죠.
2017 년 9 월 29 일 발표했었는데, 정식 명칭이 Willie Mays World Series Most Valuable Player Award인데 그냥 MVP MVP 하죠...
오바마 시절인 2015년 11월 24일에 Medal of Freedom(대통령 자유훈장, 혹은 메달)이란 걸 받은 기록이 있길래 뭔가 하고 찾아보니
미국의 국가 이익, 보안, 세계 평화, 문화 또는 기타 중요한 공공이익 또는 공적 기여를 한 사람을
위해 수여하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민간인 상이라네요(의회 금메달 보다 더 높다고 합니다)
군인의 최고 훈장 메달 오브 아너 같은 건가 보네요
연평균 11명 미만으로 선정 수여된다 해서 우리가 알만한 사람을 찾아보니
1970년 아폴로호 대원 13명
1985년 테레사 수녀
2005년 무하마드 알리
2014년 배우 메릴 스트립
2017년 조 바이든(여기서 신뢰가 급 떨어지는데...)
2019년 타이거 우즈, 마리아노 리베라
2002년 수상자 중 아재들은 알고 있는 빌 코스비(성범죄자, 유죄판결)가 있는데
2015년에 오바마 대통령은 수상 철회한 전례가 없다며 넘어갔다는 기사도 있네요
입대와 군 생활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때도 군 입대한 많은 선수들이 있는데 메이스도 한국전쟁 때 영장을 받았죠
한국전 참전용사는 아니었고 자료들을 보다 보니 재미난 게 있네요
영장을 받고 처음엔 자신이 돌봐야 하는 11 명의 부양가족을 언급하면서 3-A라는 고난 면제를 신청했었다네요
그런데 부양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면제 대상 혜택을 못 받고 입대를 하게 됐다는군요
(역시 모병제가 아니면 남자들은 군 입대 싫어하는 것도 우리와 닮은 점)
1952년 5월 29일 입대해서, 52년의 남은 시즌과 1953년 시즌을 모두 결장했습니다.
(이 기간 266 경기 결장)
Camp Kilmer라는 곳으로 입대를 했고(위치가 뉴저지 주에 있습니다 )
1942년 2차대전 때 유럽으로 파병 나가기 전 대기하거나 해외파병 군인들이 귀국해서 재배치 대기나 전역 대기하던 부대인데
1949년 폐쇄되었다가 1950년 가을에 한국전쟁으로 다시 문을 열고
냉전시대에는 해외유입 난민캠프나 전역 대기장소 등으로 사용되고 하던 부대입니다.
이후 전역까지는 Fort Eustis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Fort Eustis는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시에 있는 미 육군 시설이었습니다.
(1918년 생긴 군부대인데 지금은 공군부대로 사용 중입니다)
같이 입대했던 다른 메이저 리거나
John August Antonelli (투수, 보스턴 브레이브스, 밀워키 브레이브스)
Vernon Sanders Vern Law(투수, 피츠버그)
군부대 야구팀과 야구를 했습니다
군부대 야구팀의 외야수 Al Fortunato(알 포르투나토)로부터 바스켓 캐치를 배웠다고 하네요
당시의 다른 프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미디어 캠페인과 야구를 하며 육군에서 복무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상무+문선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이네요
1954년 3월 1일 전역을 했고 팀의 스프링 캠프에 참여를 하고 시즌을 시작했는데
1954년이 바로 카드의 MVP 시즌이고 더 캐치가 나온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 이기고 하고요
당시 프로 스타들이 군 생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봤던 국회 군 방위 소위원회에서
징집된 10 명의 선수들의 복무 기록을 조사했고, 7월 22일에 보고된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제복을 입은 동안 애지중지해 줘야만 하는 유아 같았다는 보고서가 올라왔었네요ㅋ
그러나 보고서에는 윌리 메이스가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뉴욕 시절부터 서부 이전을 함께했던 자이언츠&다저스 두 레전드 선수의 대결이 궁금했습니다.
메이스 1931년 5월 6일생
1951~1973(22년) 20세 19일~42세 126일
쿠팩스 1935년 12월 30일생
1955~1966(12년) 19세 176일~30세 276일
두 자강두천의 대결
(.278/.426/.536, 5홈런, 14타점, 25볼넷, 20삼진)
메이스가 어릴 적 가장 좋아하는 야구 선수는 조 디마지오였지만 테드 윌리엄스와 스탠 뮤지얼의 열혈팬이기도 하셨다고 하는군요.
1951년(NYG, SG)~1973년(NYM) 22년 선수 생활.
1951년 #14
1951년~1972년 #24
1972년~1973년 #24
풀네임은 윌리 하워드 메이스 주니어 (Willie Howard Mays Jr.)
NL 신인상, 1951년
NL MVP 2회, 1954,1965
NL 골드 글러브 12회, 1957~1968
NL 타격왕 1954년(.345)
올스타 20회 1954~1972, 1973
여러 기록 들을 다 봐도 올스타 24회라고 되어 있는데
메이스의 선수 경력은 22년인데 숫자, 집계 오류인가 해서 눈 크게 뜨고 살펴보니 20회 선정된 것이 맞고
경기 출장은 24회입니다 1959~1962년 4년간은 올스타전이 1~2차전으로 2경기씩 개최되었던 해입니다.
올스타전 MVP 2회
1963년 클리블랜드 개최 경기
1968년 휴스턴 개최 경기
CF, 2829경기 24,331.1이닝
RF, 12경기 85.1이닝
LF, 2경기 10이닝
1B, 84경기 637이닝
3B, 1경기 5.2이닝
SS, 2경기 4이닝
통산 에러 155개 (RF-1, 1B-15, CF-139) 통산 필딩율 .981, 1979년 명예의 전당 첫 턴 헌액 409/432 (94.7%) 홀로 입성
월시 반지는 1954년 1개, 4번 진출했는데 3번은 자이언츠 시절, 73년은 메츠 시절입니다.
1951년 준우승 시리즈 전적 4:2으로 양키스가 우승
1954년 4:0으로 우승 클리블랜드
1962년 준우승 시리즈 전적 4:3으로 양키스가 우승
1973년 준우승 시리즈 전적 4:3으로 오클랜드가 우승
은퇴 후 1979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메츠에서 타격 코치를 하기도 했고,
재미난 게 메츠에서 여전히 현역 생활을 하던 1972년 5월에 자이언츠는 메이스의 배번 24번을 영구결번 지정합니다.
갓파더
개인적으로 배리 본즈를 두둔하는 것만 빼고는 다 좋은 윌리 메이스입니다.
윌리 메이스 1931년 5월 6일생
바비 본즈 1946년 3월 15일생
큰 약쟁이 1964년 7월 24일생
바비 본즈 1968~1981(14년 경력)
1968~1974년, 7년 자이언츠 소속(#25), 메이스와 4년 반 팀메이트
1946년생인 바비는 10대 후반에 결혼하고 아빠가 됩니다.
(1963년 결혼, 1964년 아빠)
자이언츠에서 데뷔한 바비 본즈는
슈퍼스타였던 윌리 메이스를 아들이 본받고 배우게 하고 싶어 대부 제의를 하게 됩니다.
1992년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올스타 때의 대부 대자
어려서부터 바비 본즈는 윌리 메이스를 따라 하게 하고 자주 만나게 해주며 메이스를 멘토로 꾸준한 가르침을 받고, 그의 모든 것을 배우라고 교육을 합니다.
한국의 많은 골프 대디처럼 아들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왼손잡이가 더 유리한 야구의 특성상 오른손잡이였던 아들을 좌투 좌타로 만들고
본즈가 자신을 능가하는 대스타가 되는 것이 목표라 어릴 적부터 그런 방향의 교육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본즈도 리틀야구 시절부터 메이스의 24번을 달았고 지금까지도 긴밀한 유대관계입니다.
해적단 시절 본즈 배번이
1986 #7
1986~1992 #24
해적단 시절엔 메이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24번을 달고 메이저리거 생활을 시작하죠
그러다 FA가 된 1992년 12월 8일 자이언츠와 계약을 하고 2007년 은퇴 시즌까지 뛰게 됩니다.
어느 시점부터 약을 동반한 성적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즌 볼넷 198개나 고의사구 120개 시즌이 나올 정도였고
벅 쇼월터가 디백스 감독이었을 때는 만루에 들어선 본즈를 고의사구로 내보내 실점하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진풍경이 있을 정도였죠.
(그때도 약물 검사가 있었다면 청청한 기록들이 더 많았을 텐데요 아쉽네요)
선수 시절 메이스와 바비의 관계가 좋았던 일화 중
메이스가 캘리포니아 산 카를로스에 집을 사기 위해 바비에게 돈을 빌릴 정도의 관계였다고 합니다.
자이언츠와 계약한 본즈에게 메이스는 영구결번인 자신의 배번 24번을 사용 제안할 정도의 관계였다는데요
하지만 본즈가 대부의 제안을 거절했고, 아버지가 자이언츠 시절 달았던 25번을 선택하게 되죠.
약 쟁이는 윌리 메이스와 대부, 대자 관계이고, 또 다른 레전드 스타 레지 잭슨과는 이종사촌 관계
선수노조 미가입자로 초상권을 자신이 직접 관리해서 EA에서 출시하던 트리플 플레이 시리즈에서 본즈가 없던 생각이 나네요
불스 시절의 조던도 NBA LIVE 97 플레이할 때부터 없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름 없이 그냥 넘버 23이라고 호명했던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바비 본즈는 데뷔 첫 안타를 그랜드슬램으로 기록한 6번째 선수였고, 1900년 대엔 바비의 기록이 유일한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바비 본즈 데뷔 경기 1968년 6월 25일 VS 다저스
3회말 첫 번째 타석, 유땅 아웃 (클로드 오스틴, Claude Osteen)
5회말 두 번째 타석, 힛바이 피치 출루(클로드 오스틴, Claude Osteen)
6회말 세 번째 타석, 좌월 만루홈런(존 퍼딘, John Purdin)
8회말 네 번째 타석, 루킹 삼진(무드캣 그랜트, Mudcat Grant)
다저스 선발 투수였던 클로드 오스틴 이름은 많이 들어보셨죠? 맞습니다 찬호 형 다저스 1기 시절에 투수코치도 하셨던 분입니다.
STL, PHL, TEX에서 투수코치하다가 1999~2000년 다저스 투수코치였습니다.
통산 196승 투수고 다저스 개막전 선발도 3차례인가 했고, 8홈런에 76타점으로 가끔씩 대타도 뛰던 분입니다.
바비 본즈의 만루홈런 보다 더 희귀 홈런이 KBO에도 있죠, 프로 첫 타석 초구 만루홈런이 있습니다.
2001년 06월 23일 토요일 두산 SK 경기였는데요
6:6 동점인 9회말 만루에서 대타로 데뷔한 두산 송원국 선수가 있습니다.
프로 첫 타석 초구를 쳐서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했고, 당시 SK 투수가 요즘 코치를 하는 어린 왕자 김원형이었습니다.
당시 토요일 당직이라 사무실에서 TV 보다가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경구형처럼 외치고 싶네요)
광주 일고 출신인가 그랬을 겁니다 최희섭 선배인가 동기로 기억하고 프로에서 꽃을 못 피우고 은퇴했는데
예전에 현대 차인가 벤츠인가 영맨 한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군요.
더쇼 19 윌리 메이스 "99" (1954년 23세 시즌)
전작의 미키 맨틀
900점 4인
★700점 DIVISION SERIES 방망이
★500점 PENNANT RACE 업데이트 +2
더쇼 20 가빈 럭스 "99"
가빈 토머스 럭스 (Gavin Thomas Lux)
더쇼 20 사이 영 "99" (1909년 42세 시즌)
6살이나 나이가 많아진 카드인데 능력치가 똑같네요
덴튼 트루 영, (Denton True Young)
기록, 업적에 비하면 푸대접이랄까요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재수를 하셨습니다
최초의 5인이 아니라 6인이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1937년 투표 때도 턱걸이 헌액입니다 153/201 (76.1%)
(명예의 전당에 기념품을 기증한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이로 89세에 돌아가셨는데 예전 평균수명과, 고무팔처럼 던진 경력을 생각하면
몸이란 게 관리도 중요하지만 유전적인 요소, 타고나는 것도 중요한 걸 또 느끼네요
1867년 3월 29일생이신데
아버지 어머니가 결혼 때 영의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54에이커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농사를 지으신 부모님이신데 그래서 어릴 적에는 Farmer Young과 Farmboy Young으로도 불렸다고 하네요
(54에이커가 평수로 환산하면 66,105.3997 이니 66,105평 정도 되겠네요)
몇 가지 일화가 있는 이름 사이 영의 사이는 사이클론의 약자 사이(cy)에서 따온 별명인데
등록명을 사이 영으로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죠
1867년이 조선은 고종 4년
10월 18일 미국이 알래스카 매입 계약을 한날
11월 9일 섬나라에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
4월 21일에는 우리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태어난 날이네요
데뷔 경기가 1890년 8월 6일
1890년이 조선은 고종 27년
7월 10일 와이오밍 주가 미국의 44번째 주가 됨
8월 6일 미국 오번 교도소에서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 세계 최초로 집행
12월 29일 운디드니의 학살이 일어남, 미국 7기병대가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에서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400명 이상의 인디언을 학살한 사건인데 미국은 운디드니 전투라고 하죠
탄생
5월 19일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
9월 15일 영국의 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
10월 14일 미국의 장군,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1월 22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 정치인 샤를 드골
사망
7월 29일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3월 7일에는 영국에서 가장 긴 다리인 포스 철교 준공
마지막 경기 1911년 10월 6일 브루클린 다저스전
6.1이닝 11피안타 11실점으로 패전투수였네요(시즌 7승 9패)
사이 영이 사망한 1년 뒤인 1956년부터 당시 커미셔너였던
포드 크리스토퍼 프릭(Ford Christopher Frick,1894~1978)이 사이영 상을 만들었는데
이 커미셔너는 영화 소개 때 말씀드린 것처럼 로저 매리스의 홈런 기록을 대놓고 차별했죠
1956년부터 메이저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기 시작한 사이영상 1회 수상자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돈 뉴컴 (Don Newcombe)이었죠(NL MVP도 수상)
1967년이 돼서야 각 리그에 하나씩 두 개의 사이 영상을 수여했는데 이때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도 아깝게 상을 놓친 대표적인 선수가
전에 말씀드린 양키스의 화이티 포드 (Whitey Ford)였지요.
1892년 (사이 영 데뷔 2년 후) 내셔널 리그는 투구 위치를 홈 베이스에서 1.5m 뒤로 옮겼네요
1881년까지 투수들은 홈 베이스에서 15m 떨어진 박스 안에서 투구를 했고(타석처럼)
1887년부터는 공을 던질 때 박스의 뒤쪽 라인을 밟고 던지는 규칙이 존재했었군요(지금 투구판처럼)
투수 박스의 뒷라인은 홈 베이스에서 16.92m 떨어진 거리였고요
1893년에는 1.5m가 추가되어 현재의 거리 18.44m가 되었군요 (거리만 그렇고 마운드 높이는 아닙니다)
1910년 7월 19일 워싱턴전에서 통산 500 번째 승을 기록했고 수많은 피칭 기록을 세웠는데 그중 일부는 한 세기가 넘게 유지되고 있지요
로봇 심판이 아니라 로봇 투수가 등장하기 전에는 유지될 불멸의 기록이죠
통산 승수 1위 511승, 2위 빅 트레인과는 94승 차이가 납니다.(빅 트레인 417승)
투수 WAR 1위 165.7
투구이닝 1위 7,356이닝,
2위 퍼드 갤빈 6,003.1이닝
게임 선발 1위 815경기,
2위 놀란 라이언 773경기
완투 경기 1위 749경기,
2위 퍼드 갤빈 646경기
완봉 4위 76경기,
1위 빅 트레인 110경기
피안타 7,092개,
2위 퍼드 갤빈 6,405개
최다패 1위 315패,
2위 퍼드 갤빈 310패,
3위 놀란 라이언 292패
최다 자책점 2,147점
2위 필 니크로 2,012점
3위 제이미 모이어 1,926점
4위 돈 서튼 1,914점
5위 놀란 라이언 1,911점
11위 버트 블라일레븐 1,830점
15위 그렉 매덕스 1,756점
18위 톰 글래빈 1,734점
상대 타자 29,565명
2위 퍼드 갤빈 25,415
3위 빅 트레인 23,405
30승이 넘는 시즌이 5시즌이나 됩니다.ㅎ
1892년 36승 (53경기 49선발)
1892년 33승 (53경기 46선발)
1895년 35승 (47경기 40선발)
1901년 33승 (43경기 41선발)
1902년 32승 (45경기 43선발)
22년간 5팀에서 선수 생활
1890~1898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1899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
1900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01~1907 (보스턴 아메리칸)
1908 (보스턴 레드삭스)
1909~1911 (클리블랜드 냅스)
1911 (보스턴 러슬러스)
사이 영 소속팀 5팀의 팀명 변천사
데뷔 팀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1887–1899)는 1899년 팀해체 역사 속으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타킹(1882)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1883~1898)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 (1899)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00~현재)
보스턴 아메리칸 (1901~1907)
보스턴 레드삭스 (1908~현재)
그랜드래피즈 러슬러스 (1894~1899)
클리블랜드 레이크 쇼어스 (1900)
클리블랜드 블루버즈 (1901)
클리블랜드 브롱코스 (1902)
클리블랜드 냅스 (1903~191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15~현재)
보스턴 레드스타킹스 (1871~1875)
보스턴 레드캡스 (1876~1882)
보스턴 비니터스 (1883~1906)
보스턴 도브스 (1907~1910)
보스턴 러슬러스 (1911)
보스턴 브레이브스 (1912~1935)
보스턴 비즈 (1936~1940)
보스턴 브레이브스 (1941~1952)
밀워키 브레이브스 (1953~1965)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66~현재)
카드에서 많이 보이는 사진들이죠
더쇼 19 사이 영 "99" (1903년 36세 시즌)
1월 초 Off-Season 이벤트 보상
500점 4인
TA4
국뽕섞어 99오버롤 한국인 선수카드 보나 했더니 토론토는 류가 아니네요
어제 나온 6인은 전부 타자이던데 카드 아트도 마음에 들고 기대되네요.
좋은글 잘 일고갑니다. 생각지 않은 순간에 새글이 올라와서 놀랐습니다. 리콜님글을 통해 mlb관련 일화 및 정보를 알게되서 정말 유익한것 같습니다. 거기에 게임관련 업데이트정보도 올려주시니 그저 감사하다는말 밖에는 항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도움이 된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혹시 김형준님 아니신가 하는 매번 의심중. . . (아니면 송재우 님??)
ㅎ 아닙니다 그냥 야구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스바라시한 정성글에 추천!!
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