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버 문제가 큰 이슈인데 스트레스 받으며 잘 즐기고들 계십니까?
어제는 야구, 축구 해외파 대표격인 선수 둘의 결과가 안 좋았는데, 오늘은 양현종 선수가 콜업 되었네요
양현종 선수나 김하성 선수는 기회에서 잘해주는 일이 남았는데 선수 본인들도 잘하고 싶겠지만 , 그저 보기만 하는 팬인 저 또한 좋은 성적으로 리그에 안착하길 빌어봅니다.
은퇴가 불과 몇 년 전이라 자주 보던 선수들도 있지만 레전드 선수들도 등장해서, 새로이 등장한 선수들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카드를 알고 쓰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정리해 봤습니다.
★마이크 햄튼 (Mike Hampton)
마이클 윌리엄 마이크 햄튼 (Michael William Mike Hampton)
조용히 쓰윽 나왔네요
투수인데 실버 슬러거 카드로 나왔는데 실버 슬러거 5회 수상자 답네요 (통산 16홈런, 79타점, 3루타 5개, 타율 246) (같이 나온 빌리 해밀턴 카드는 스피드는 백번 천번 납득하지만 나머지 지표는 너무 후한 거 아닌가요?)
중계방송 보다 보면 보면 해태의 송유석 선수 생각이 나던 선수인데 카드의 휴스턴과 메츠 시절까지는 좋았는데 2000년 12월 12일 콜로라도와 맺은 계약 이후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성적을 찍다 먹튀계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죠
우려가 많았지만 그래도 계약 첫해 여름 전까지는 쿠어스필드를 홈으로 쓰면서도 성적이 좋아서 중계중에 햄튼의 홈경기 선발이면 스코어를 띄워주기도 하고 기사들도 언제까지 이런 성적을 쿠어스 필드에서 찍을 수 있을까 예측하는 기사들도 제법 많았고요
2001년 홈경기 성적을 보다 보니
4월 2일 월요일 STL, 개막전 8.1이닝 5피안타 무실점으로 화려하게 스타트
4월 7일 토요일 SD , 5이닝 11피안타 9실점 6자책으로 털리고
이후 홈경기에서는 가끔 나오는 호투&털리는 경기를 반복하며 5월말 까지 2점대 중반 평자를 찍으며 선전하다가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털리기 시작했네요. 딱 6월 10일 경기 끝나고 평자 2.98, 이후 시작 2를 볼 수 없는 평자 (2001 시즌 최종 성적 14승 13패, 평자 5.41)
2001년 박찬호 선수와 2번의 맞대결이 있었네요(모두 다저 스타디움)
5월 30일 박찬호 6승 경기 4:1, 햄튼 6이닝 4실점 패
7월 28일 박찬호 11승 경기 10:6, 햄튼 2.1이닝 9실점 패
8년 계약의 선수가 콜로라도에서 2시즌(2001~2002) 뛰고 트레이트 되는데, 2002년 11월 16일 플로리다로 갔다가 11월 18일에 다시 애틀랜타로 트레이드 됩니다.
애틀랜타에서 2시즌은 반등하기도 하지만 아! 서러워라 팬들에게 잊히는 존재여...
★알폰소 소리아노 (Alfonso Soriano)
알폰소 기예아르드 소리아노 (Alfonso Guilleard Soriano)
소리아노 기록들을 보니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네요 (올스타 7회, 실버슬러거 4회, 올스타전 MVP)
프로 경력 출발은 NPB에서 시작했습니다.(1996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고국 도미니카에 생긴 히로시마의 아카데미에서 눈에 띄어 계약을 하고
1997년 1군 승격, 데뷔는 했지만 (9경기, 17타수 2안타(.118, 2볼넷)
빡빡한 훈련 일정을 힘들어하고 향수병이 생겨 인상된 연봉 제안을 거부하고 (기존 4만 5천 달러, 인상안 18만 달러) 계약 무효화를 요구하며 NPB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때 선임한 에이전트가 돈 노무라입니다.
돈 노무라는 노모 히데오, 이라부 히데키의 에이전트였습니다.
이라부 히데키는 동경하던 양키스에 우여곡절 끝에 입단했지만 2년 후에는,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 눈밖에 나 두꺼비라는 극딜도 받았습니다. 이런 눈빛도 있었는데 말이죠
자국 선수들의 MLB 에이전트를 하던 돈 노무라인데 훗날, 텍사스로 떠난 찬호형의 자리를 노모 선수로 다저스에 재입사 시키고, 노모 선수는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즌도 있었지요
"노무라"라는 이름이 일본에는 많겠지만 국내 야구팬은 노무라 이름하면 NPB 야구 뉴스나 국제 대회에서 종종 나오는 일본 야구계 이름이 있지요, 돈 노무라 에이전트의 아버지는 일본 야구계에서 추앙받는 노무라 카츠야 감독입니다.
노무라 감독이 생부는 아니고 재혼한 아내의 아들이고, 감독경력은 다나카 마사히로 NPB 라쿠텐 데뷔 시절이 마지막 팀이었습니다.
(노무라 감독은 현역 시절이 플레잉코치 기간을 합쳐 26년 경력, 통산 657홈런, 1988타점, 2901안타의 공격형 포수)
1998년 9월 29일 양키스가 이적료를 지불하고 소리아노와 계약을 합니다.
소리아노 이야기하다 좀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이라부의 MLB 첫승을 기억합니다 그날이 박찬호 선발 중계가 있던 날입니다.
1997년 7월 11일 화요일
홈경기 VS 디트로이트, 6.2이닝 5피안타 2실점 2자책 4볼넷 9삼진, 이라부 히데키 MLB 첫승, 10:3 양키스 승
이라부 선수가 데뷔를 7월에서야 하게 된 계기로 인해 MLB & NPB의 포스팅시스템이 만들어집니다.
(최초의 계약팀은 양키스가 아닌 샌디에이고)
1996년 시즌 종료 후에 이라부 히데키는 해외 진출(MLB) 발표를 했는데(핀 스트라이프를 입고싶다)
1997년 1월 13일 소속팀 지바 롯데가(1988~1996) 선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본사 롯데가 롯데 했네요)
보유권 양도계약을(영구적인) 샌디에이고와 맺었고 오직 양키스만을 원하는 이라부 히데키는 에이전트 노무라를 통해 공방을 이어가다가 (이라부&오타니 사례를 보면 샌디에이고의 영입 운이 없었네요)
1997년 4월 22일 샌디에이고 양키스간 현금 300만 달러와 선수 트레이드를 묶어 입단을 합니다.
양키스와 4년 1,280만 달러 계약을 하고 마이너에서 몸을 만들며 8경기의 실전 등판을 하고 데뷔 전을 치릅니다.
A+ 2경기 1승
AA 2경기 1승 1패
AAA 4경기 2승
이후 좋지 못한 성적과 조지 스타인브레너 영감님에게 미움을 받고 1999년 12월 22일 몬트리올로 트레이드 되는데 위에 쓴 것처럼 두꺼비 소리가 나온 계기는, 1999년 정규 시즌 뉴욕 양키스의 일정은 4월 5일 월요일 오클랜드와의 원정 경기로 시작이었고, 시범경기 막바지인 4월 1일 경기에서 이라부선수가 내야 땅볼 타구에 1루 커버를 제대로 못했고, 이것을 본 영감님이 고급 와인을 드시고 취한 건지, 조증이 있었는지, 성정이 그러한지 이라부를 살찐, 뚱뚱한 두꺼비라 비하하며 개막 일정에 맞춰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이동하려는 선수단과의 이동을 불허하기에 이릅니다.(개막 로스터 제외)
후에 여론이 나빠지자 양키스는 그를 필요로 한다, 체중에 대한 발언이 나온 것은 유감이라며 사과하고 선수단 합류를 지시했지만 시즌 후에 트레이드...
a fat, pus-sy toad 살찐 두꺼비
한편 이라부와 같은 날 등판한 박찬호 선수는
1997년 7월 11일 홈경기 VS 샌프란시스코, 7이닝 3피안타 1볼넷 5삼진
시즌 6승 경기(5패) 11:0, 3안타 중에 1개가 배리 본즈에게 맞은 거네요(삼진도 1개)
자이언츠 선발이 커크 루터(Kirk Rueter)라고 좌완투수였는데, 현진 선수 다저스 시절 범가너와 매치업 빈번했던 것처럼 찬호 형은 커크 루터와 매치업이 97시즌이 자주 있던 기억입니다.
커크 루터는 밀워키 조시 린드블럼의 형이라 해도 밑을 정도로 흡사한 외모의 선수였습니다.
KBS 중계방송 중에 현지 자막에서 이라부 히데키의 데뷔 첫승 자막이 떴는데, 중계하던 하일성 님이 이라부 선수가 데뷔 경기를 성공적으로 했군요~~~라는 멘트가 생각납니다. 쓰다 보니 이라부선수나 하일성님, 모두 같은 사망 방식이라 씁쓸하네요.
소리아노의 올스타전 MVP는 착한 시절 NL 소속의 휴스턴 홈구장 미닛 메이드 파크에서 (2004년 7월 13일 개최된 75회 올스타전) 1회 NL 선발 약켓맨을 상대로 3점 홈런을 쳤죠
AL9:NL4의 경기였고, AL 선발은 멀더 요원, NL 선발은 약켓맨
1회초
1번 이치로의 더블,
2번 퍼지의 트리플로 1:0
3번 블~게레로는 1땅 아웃
4번 매니 라미레즈의 투런샷 3:0
5번 A-로드 삼진
6번 지암비는 NL 2루수 제프 켄트의 에러로 출루
7번 캡틴 지터 우익수 방면 싱글
8번 소리아노 MVP샷
MVP샷
https://www.youtube.com/watch?v=pZEajFBzKUM
2006년 8월 25일, 929 경기만에 200홈런 200도루를 기록했는데 종전 기록은 이분의 1,053경기였다고 하는군요 (에릭 데이비스 )
통산 500도루 넘던 약본즈가 생각나서 살펴보니 6년 차이던 1991년(26세, PIT)에 200도루는 넘겼는데 (8백대 중반 경기 수인데)
200홈런이 1993년(28세, SF) 시즌 이더라고요
2006년 9월에는 외야수로 20번째 어시스트 기록해서 40홈런, 40도루, 20어시스트를 달성한 첫 번째 기록 작성자
2006년 9월 16일 워싱턴 연고 이전 후 홈으로 사용했던 RFK 스타디움(종합 경기장)
밀워키와 경기에서 역대 4번째 40-40클럽 가입 선수가 되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1번 좌익수로 출전해서 싱글로 출루, 2번 펠리페 로페즈(SS) 타석의 볼카운트 투볼에서 시즌 40번째 도루에 성공합니다.
경기는 워싱턴의 8:5승리, 밀워키 데이브 부시는 시즌 11승 11패를 기록
워싱턴의 선발은 1992년(23세) 다저스에서 데뷔해서 2006년(37세) 워싱턴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던 추억의 이름 페드로 아스타시오 였네요
40/40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M7UfCAJ2psc
이전에 40/40 달성을 한 3인의 선수는 약물에 취해를 발표해서 약물 문제를 공론화시킨 역시 약쟁이 호세 칸세코, 약쟁이 본즈, 약로드 되겠습니다.
40/40 경기 밀워키의 베터리는 데이브 부시(P), 마이크 리베라(C) 였는데요
시간이 지나 부시는 KBO SK와이번스에서도 뛰었었죠(2012년 이만수 감독 시절)
데이브 부시는 보스턴에서 투수 코치를 하고 있습니다.
부시는 이 선수들에게도 선물을 준 기록들이 있더군요
2007년 4월 28일 휴스턴 최고 유망주 헌터 펜스가 콜업되어 프로 첫 안타를 (6번 중견수로 출장 6회말 우익수 방면 안타)
2007년 5월 7일 데이브 부시를 상대로 빅리그 첫 홈런을 (8번 포수로 출장 2회말 중견수 방면 홈런)
소리아노는 40/40달성 5일후 9월 22일 메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1번 좌익수로 출전, 메츠 선발 공작새 올란드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5회초 3번째 타석에서 좌익수 방면 2루타를 기록 했는데 이 기록도 최초의 기록으로 연감에 올라갑니다.
(단일 시즌 40홈런, 40도루, 40더블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
시즌 중에도 연장 계약을 원했던 워싱턴 구단인데 정규 시즌 종료 후 최종오퍼 7천만 달러 오퍼를 거부하고 2006년 11월 20일에 시카고 컵스와 8년 1억 3천3백만 달러의 메가딜을 맺습니다.
2001년 신인상 투표 3위를 했는데,
AL 수상자는 이치로 스즈키
2위, CC 사바시아
3위, 알폰소 소리아노
4위, 데이비드 엑스타인
NL 수상자는 알버트 푸홀스
2위, 로이 오스왈트
3위, 지미 롤린스
4위, 상남자 애덤 던
2001년 월시는 양키스와 디백스의 대결이었죠. BK 기억들을 더 많이 하실 테지만 소리아노도 7경기 모두 선발 출전했습니다.
1차전 7번(2B) 무안타 1삼진 디백스 9:1 승:핏빛 양말 패:무스
2차전 7번(2B) 1안타 디백스 4:0 승:랜디 존슨 3피안타 11K 완봉 패:페팃
3차전 9번(2B) 1안타 양키스 2:1 승:약켓맨 세:커터신 패:브라이언 앤더슨
4차전 9번(2B) 무안타 2삼진 양키스 4:3 승:커터신 블론&패:BK
8회부터 마운드에 올라온 BK...
9회 티노 마르티네즈에게 동점 투런으로 블론
10회 스캇 브로셔스 우플 아웃
소리아노 좌플아웃
투아웃 잡고 지터에게 산타마리아
5차전 9번(2B) 2안타 1타점, 양키스 3:2 승:스털링 히치콕 패:알비 로페즈 블론:BK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선발&불펜에 이어 9회 마무리로 올라온 BK
첫 타자 포사다에게 더블 허용, 쉐인 스펜서 3땅 아웃, 척 노블락 삼진 아웃,
또다시 투아웃 상황에서 스캇 브로셔스에게 투런 허용 2:2동점(블론)
마이크 모건으로 교체, 소리아노 좌플아웃 잡고 연장전 돌입...
12회말 안타치고 나간 척 노블락을 2루에 주자로 두고, 1아웃에 등장한 소리아노가 우익수 방면 끝내기 안타로 양키스 승
6차전 7번(2B) 1안타 1삼진 디백스 15:2 승:랜디 존슨 패:앤디 페티트
7차전 7번(2B) 1홈런 1타점 디백스 3:2 승:랜디 존슨 패:커터신, 소리아노는 선발 커트 실링에게 솔로포를 쳤고
실링 7.1이닝
바티스타 0.1이닝
랜디 존슨 1.1이닝
실링이 던질 때 불펜에서 존슨, BK가 몸을 풀었었죠
토니 워맥의 2루타로 동점이 되고 밀워키 감독님은 힛바이 피치로 출루 주자 1, 2루 상황에서
루이스 곤잘레스의 끝내기 안타로 경기가 종료되었죠.
2004년 5월 8일 토요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는 9회까지 6타수 6안타를 기록했는데
레인저스 구단 최초의 한경기, 6안타 경기였다고 합니다.
1회, 싱글
2회, 싱글
5회, 더블, 싱글
7회, 더블
9회, 싱글
16:15 텍사스의 승
15:15 연장 10회말에 에릭 영 볼넷 진루, 데이비드 델루치의 희생번트(당시 텍사스 감독은 벅 쇼월터)
브레드 풀머 타석에서는 고의사구 (1사 1, 2루 상황)마이클 영의 우익수 방면 끝내기 안타가 나왔네요
이경기 텍사스 선발이 너클볼 장착 이전의 R.A 디키(Robert Allen Dickey)였습니다.
한두 번 던져보긴 했지만 투구 레퍼토리에 너클볼이 있던 것은 아니고 취미 수준에 불과해 흔히 말하는 조금은 던질 줄만 알고 있는 주무기는 아닌 상태였습니다. 이후 선수 본인, 구단&코칭스텝 권유, 너클볼의 대가 찰리 허프의 도움으로 너클볼을 장착하게 되지요
2년 후 디트로이트는 디키에게 또 아픔을 줍니다.
2006년 4월 6일 목요일(개막 4번째 경기) 디트로이트전, 3.1이닝 8피안타 7실점, 하얗게 불태웠는데, 8피안타 중에 6개가 홈런입니다.
브랜든 잉게(3B)
크레이그 먼로(CF)
마커스 테임스(LF)
매글리오 오도네즈(RF)
크리스 쉘튼(1B)-2방선사
디키 선수는 불명예 기록이 또 있습니다. 시애틀 소속이던 2008년 시즌 8월 17일 일요일, 미네소타와의 원정 경기 (메트로돔)
선발투수에 이어 두 번째로 등판을 했는데 (4회말 등판) 5회말 투구에서 한 이닝 와일드 피치 4개의 뉴 레코드를 작성합니다.
6번 제이슨 쿠벨(RF) 중견수 방면 싱글
7번 랜디 루이즈(DH) 와일드 피치(1)
8번 브렌던 해리스(3B) 루킹 삼진
9번 애덤 에버렛(SS) 와일드 피치 2개(2,3)
1번 데나드 스판(CF) 와일드 피치(4)
이 경기는 미네소타의 11:8 승리로 끝났는데요 디키에 앞서 선발 등판했던 시애틀의 투수는 이 선수입니다.
라이언 피어밴드 3이닝 10피안타 6실점 6자책 1볼넷 1삼진 패전투수
(디키는 후에 보스턴의 팀 웨이크필드와 너클볼 마스터 필 니크로의 도움&지도를 받습니다.)
디키의 자서전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라는 책이 번역본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셔도 재미있습니다.
소리아노는 양키스 소속이던 2013년 8월 11일 일요일 디트로이트와의 홈경기에서 통산 2천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했는데, 상대 투수가 벌렌더였네요( 6번 좌익수 선발 출장 4회말 선두타자로 나와서 초구를 좌익수 방면 홈런)
2천 안타 달성 이틀 뒤
8월 13일 VS LAA
2번 좌익수로 3안타(2홈런) 6타점 경기
8월 14일 VS LAA
6번 좌익수로 3안타(2홈런) 7타점 경기를 했는데
라이브볼 시대에 연속경기 6타점 이상을 기록한 단 3명의 선수 중에 한 명이 되었습니다
(다른 두 선수는 1997년 텍사스의 러스티 그리어, 2001년 밀워키의 제프 젠킨스)
8월 15일 VS LAA
2번 좌익수로 4안타 1타점
8월 16일 VS BOS
4번 좌익수로 3안타(1홈런) 4타점
2경기, 6안타 13타점
4경기,13안타 18타점
2경기에서 13타점을 기록한 7명의 선수 중에 한 명이 되었고
양키스 선배 토니 라제리가(1926~1939년 2루수로 뛰던 선수) 세운 역대 기록은 2경기 15타점
8월 13~16일까지 4경기에서 18타점을 기록하며 4경기 연속 최다 타점 기록 또한 세웠습니다.
4일간의 경기에서 13안타 18타점을 기록했는데 유일한 기록, 4경기에서 18타점을 기록한 선수는 있었으나 12 안타 기록이었습니다.
4경기에서 18타점을 기록한 다른 선수는
짐 바텀리 (STL, 1929년 7월 6~9일)
루 게릭 (NYY, 1930년 7월 29~31일)
토니 라제리 (NYY, 1936년 5월 21~24일)
조 디마지오 (NYY, 1939년 8월 28일~9월 1일)
새미 소사 (CHI, 2002년 8월 8~11일)
뉴욕 양키스가 2013년 12월 2명의 야수를 영입하게 되죠
12월 7일 제이콥 엘스버리(2014~2017) 7년 빅딜 1억 5300만 달러
12월 19일 주동자 벨트란 (2014~2016) 3년 4천5백만 달러
2014년 양키스의 외야 수비 가능 선수
LF, 브렛 가드너
CF, 엘스버리
RF, 이치로
DH, 벨트란, 소리아노
LF, RF, 크리스 영
2014년 백업으로 경기를 (DH, RF) 뛰다가 7월에 방출.
2013년 7월 26일 컵스에서 트레이드로 왔다가
2014년 7월 14일 양키스에서 방출(67 경기에서 타율221, 6홈런, 23타점)
2014년 11월 4일 공식적인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2016년에 페이퍼컴퍼니(파나마)를 이용한 탈세자 명단이 유출됐는데 소리아노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거주지 위치나, 소속팀이 속한 주를 이용하는 절세가 아닌,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한 탈세)
맥팔레인 시리즈에서는 피규어 종류도 타 선수에 비해 가장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워싱턴 버전도 있고 홈&원정 유니폼 나눠서 나와서 종류가 많은 선수입니다.
한국 선수 3인 vs
끝으로 최훈 작가의 카툰에서의 한 문장, 단어가 아직도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레인저스 시절의 돌 글러브)
A-로드 트레이드 때 텍사스로 건너와서 딱 2시즌을 뛰었는데(2004~2005시즌) 레인저스 시절 두 시즌 모두 올스타, 실버슬러거(2B) 수상을 했고, 2루수로 2004년 23개, 2005년 21개의 에러를 했었네요.
★프랭크 타나나(Frank Tanana)
라스트 네임에서 뭔가 에미넴의 위드 아웃 미 후렴구처럼 랩 잘할 것 같은 이름인데 la la la la la la (ta na na na na~)
폴란드계 미국인입니다 몇년 전 인터뷰 기사를 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폴란드 언어도 사용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다나카 선수 메이저리그 포스팅 당시 타나나 선수가 뜬금없이 소환되기도 했었죠(4월 23일 한만두처럼은 아니지만)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이 던지고 포스팅을 신청했던 다나카 선수의 혹사? 논란에 나이와 이닝수 비교로(26세 이전 1,300이닝 투구)
카드의 시기가 빠른 공이 있던 시절이라 삼진 능력이 좋았던 시기입니다.(패스트볼, 커브볼 조합)
데뷔 초부터 부상 이전까지는 놀란 라이언과 원투펀치 역할을 할 정도로 구위도 좋고 삼진 능력도 훌륭했습니다.
1975년 257.1이닝 269삼진
1976년 288이닝 261삼진
1977년 241이닝 205삼진
다만 1977년부터 시작해 1979년까지 자주 찾아온 어깨 부상으로 빠른 볼에서 변화구로 레퍼토리를 바꾼 이후엔 유희관 선수 같은 삼진 능력을 보입니다. 피칭 스타일, 커리어, 승수 등이 나이 먹으며 구속이 떨어지고 힘이 빠진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1978년 239이닝 137삼진
1980년 204이닝 113삼진
남다른 모습이 많은 선수입니다 데뷔 초에는 놀기 좋아해서 파티와 술을 끼고 살고, 인터뷰를 보면 자기애도 강했는데 겸손이란 게 없습니다. 자신의 우상은 자신이며 이미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라는 당찬 혹은 똘끼있는 인터뷰도 있고 , 대학에서 무용 전공한 와이프도 디스코 클럽에서 만날 정도로 사교적이었던 사람이, 멀더&스컬리 요원을 만나야 하는 사연이 생기는 사람으로 변해가는데요
전년도에 당했던 부상으로 평균자책 1점이 오른 3점대 중반을 찍는 시즌을 보내던 , 1978년 9월 23일 동료 라이먼 보스톡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라이먼 보스톡 (총격으로 사망한 MLB 선수)
토마스 터너 (보스톡의 삼촌)
조안 호킨스 (보스톡의 10대 시절 가정교사)
바바라 스미스 (조안 호킨스의 동생, 한달전 이혼서류 작성하고 절차 진행 중이었으며 언니 조안 집에 거주)
레너드 스미스 (바바라 스미스의 별거중인 남편)
라이먼 보스톡이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의 원정 경기 후면 자주 방문했던 인디애나주의 삼촌 집에 방문해 삼촌 가족들과 식사를 마치고
보스톡을 10대 시절 지도했던 가정교사 조안 호킨스 집을 방문해 9년 만에 만나게 됩니다.
조안 호킨스의 집 거실에서 반가운 재회를 하며 15분간의 대화를 나누고 집을 나서려 할때 조안 호킨스가 자신과 여동생을 근처 친척집에
데려다주고 갈수 있느냐고 물었는데(이부탁을 거절 했어야 하는건데) 보스톡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촌에게 의견을 물었고 삼촌도 승낙을 합니다.
두 여성을 친척 집에 태워다 주게 되면서 사고가 나는데 운전은 삼촌, 조수석엔 가정교사 호킨스, 뒷좌석엔 보스톡과 호킨스 여동생 바바라
집 밖의 차량에서 무릎에 샷건을 얹고 지켜보던 남편 레너드 스미스는 4명을 발견하게 되고 보스톡 선수를 알지 못하던 전 남편은 차량이
출발할 때 보스톡과 아내가 뒷좌석에 동승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혼 전부터 폭력적이던 남편은 보스톡을 외도남이라 생각합니다.
22시 44분 5번가 잭슨 스트리트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 남편 레너드 스미스가 옆 차선에 차를 대고 뒷좌석을 향해 산탄총을 1발 발사합니다. 라이먼 보스톡은 병원 이송 2시간 후에 사망하게 되고 바바라 스미스 또한 얼굴에 상처를 입습니다.
경찰 조서에서 아내의 귀에 속삭이거나 뺨에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아내를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진술이 있네요
당시 31세의 레너드 스미스는 2급 강/도 사건을 포함해 경찰에 7번 체포된 기록이 있는 자였습니다
(남편은 살/인 혐의 재판에서 정신병과 아내의 불륜 등으로 재판을 끌고 가 결국 21개월 복역 후 1980년 출소, 2010년 자연사)
이 사건의 충격과 1979년의 부상으로 야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는 현실 자각 등, 우리말로 철이 드는 시기를 보내다가 1983년 호텔방에서 주님을 만나 기독교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이후의 인터뷰를 보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게 주님입니다.
(고향팀 디트로이트에서 뛰게 된 것도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고, 잘 던져도 못 던져도, 건강한 것도, 커리어가 길게 마칠 수 있던 이유도, 지금도 침례교회 장로님)
아버지 때문인지 운동 유전자는 타고난 선수입니다. 아버지도 농구선수로 뛰고 클리블랜드 더블 A 마이너리거 생활을 5년 했습니다.
고향 디트로이트에서 성장하며 당연하게도 타이거스의 팬으로 성장했는데 타나나가 좋아하던 선수 중 한 명은 알 칼라인 입니다.
7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의 꿈은 빅 리그에서 던지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훗날 고향팀 타이거스에서 뛸 때 , 아버지가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곤 했는데 그게 너무 기뻤다고(아버지는 마이너 리거 생활 청산 후 디트로이트에서 경찰로 30년을 근무하셨고 1995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신문 스포츠면의 농구팀 기사를 보고 농구에 매료되어 고등학교 시절엔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는데, 정말 잘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정말 잘했습니다. 2번이나 올 스테이트 플레이어어 선정되기도 했었고 (포워드, 가드) 졸업 때는 가장 많은 장학금 제안을 받은 농구 유망주 중에 한 명이었는데 타나나의 입학을 원했던 대학이 100곳이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야구 실력이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의 성적이 32승 1패입니다.
졸업반 시절 경기에서 변화구를 던지다 어깨 부상을 당하고 졸업 때까지 마운드에 오르지 못한 채 재활치료를 하는데, 어깨 부상으로 야구 선수가 아닌 남부 명문 듀크대학의 농구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기로 했는데, 1971년 6월 8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가 1라운드 13번 픽으로 지명하자 타나나는 야구로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1971년 파이오니어 리그(1, 2년차 선수들로 구성, 6~9월초 까지 운영하는 단기 리그)
아이다호 폴스 에인절스에 배정되었지만 어깨 건염으로 인해 투구는 할 수 없었고 코르티손 치료(호르몬 치료, 스테로이드)를 받습니다.
1972년 어깨 건염에서 돌아와 싱글 A "쿼드 시티 에인절스" 소속으로
19경기, 7승 2패, 평자 2.79, 3완투, 2완봉
1973년 시즌 시작은 더블 A "엘파소 선 킹스"에서 시작하고 9월에 콜업 되기 전까지는 트리플 A "솔트레이크 시티 에인절스"에서
뛰게 되는데 더블 A 첫 경기에서는 14삼진을 기록하는 등 총 28경기, 17승 6패, 평자 2.70 16완투, 5완봉을 기록
1973년 9월 9일 일요일 캔자스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데뷔를 합니다. 선발 4이닝 5피안타 4실점 패전(20세 68일)
1973~1979년까지 놀란 라이언과 함께 좌, 우완 원투펀치 듀오 시절은 바로 붙어서 나오는 로테이션으로 인해 , 상대팀에게는 부담이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언론, 팬들 사이에선 이틀 동안 울기, 이틀간의 울음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네요.
당시 이런 압도적인 좌우완 듀오의 별명은 1940년대 후반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ATL)의
워렌 스판, 조니 세인의 비가 내리기나 빌어라, 비 오기를 기도하라는 말과
당대 좌, 우완 듀오의 최고봉 다저스의 샌디 쿠팩스, 돈 드라스데일이후 최고의 극찬이었네요
1975년 6월 21일 텍사스와 경기에서 4:2승, 17삼진, 당시 AL 좌완 최고 기록으로 등극
1975년 9월 2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13이닝 무실점 경기도 있었고 (6피안타 3볼넷 13삼진, 팀은 연장 16회 3:0승)
삼진 타이틀 3연패 중이던 라이언의 부상으로 타나나는 269개의 삼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AL 삼진 타이틀 획득
놀란 라이언 삼진 타이틀
1972~1974년 3연패
1975년 부상으로 198이닝 투구에 186삼진(28경기)
1976~1979년 4연패
1987~1990년 4연패
1976년 놀란 라이언의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선발의 영광
1976년 8월 27일 양키스와 경기, 캣피쉬 헌터와 13이닝 무실점 투수전 (연장 15회 양키스 5:0승)
타나나 13이닝 7피안타 2볼넷 13삼진
헌터 13이닝 11피안타 4볼넷 8삼진
이 시즌도 잘 던졌지만 당시 괴물들이 많았기에 타이틀 획득에 실패 (19승 10패 평자 2.43, 사이영 3위)
커리어 내내 수상 내역이 없어요, 상복 없는 선수 (평자, 삼진 타이틀과 올스타 3회 출전뿐)
1978년 7월 말까지 14승 6패 평자 2.99를 기록했으나, 이후 11번의 선발에서 4승 6패 평자 5.22
18승 12패 평자 3.65로 처음으로 3점대 중반의 자책점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239이닝을 던졌는데 삼진은 137개)
1977~1979년 피칭 스타일 변화의 시기
88마일의 직구로 인해 오프스피드 투구에 눈을 뜨게 되는데 포크볼, 스크루볼과
기존 공들을 섞어 효과적인 볼 배합으로 타자들을 잡아내는 투구를 시작하는 시기
1977년 어깨 건염 이후 복귀했지만 다시 찾아오는 통증과 빠른 볼을 던지면 어깨가 아픈 두려움으로 변화구를 던지는 투구의 시작
1978년 빠른 볼 대신 타이밍 싸움을 하는 변화구 투구에 의존하며 강력했던 패스트볼에 대한 미련을 접는 시기(신체, 마인드 모두)
1979년 6월 1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2이닝 6실점 기록 후 다시 어깨 부상으로 IL 2개월
1980년 5선발로 시즌 시작, 6월 4일까지 2승 6패, 평자 7.93의 대폭발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남은 기간 역투로 후반기 3.33을 기록하고 시즌 4.15를 찍지만 첫 4점대 진입의 시즌
11승 12패, 204이닝, 223피안타, 113삼진
이후
1981년 BOS 4승 10패, 평자 4.01
1982~1985년 TEX
1985~1992년 DET(홈타운)
1990년 4월 28일 밀워키를 상대로 7이닝 5실점 통산 200승
1991년 10월 6일 시즌 최종전 볼티모어 원정, 메모리얼 스타디움의 마지막 승리투수로 기록, 7:1승(9이닝 4피안타 1실점 완투)
지금 사용하는 캠든 야드가 1992년 개장합니다.
1993년 NYM, NYY
1993년 메츠와 FA 계약을 했는데 당시 메츠의 감독 제프 토버그는 타나나의 데뷔 경기에서(1973년 9월 9일) 포수였습니다.
메츠에서 7승 15패의 성적을 찍고 9월 17일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는데 7승 17패, 평자 4.35, 202.2이닝, 116 삼진으로 시즌 마감.
1994년 2월 15일 친정팀 에인절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하고 선수 생활 연장을 위해 뛰지만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3패 13.50 평자를 찍고 메이저리그 선수의 경력을 마감합니다.
21년 경력, 통산 240승 236패 3.66평자 4188.1이닝 2773삼진
21년 경력이 말해주듯 여러 기록에 연감에 올라 있습니다
승 240 58위
패 236 17위
이닝 4,188.1 35위
실점 1,704 21위
삼진 2,773 23위
피홈런 448 6위 (AL 422, NL 26)
시즌 20승을 못해보고 200승을 넘은 선수 중 2위에 해당하는 다승 기록입니다 (1위는 데니스 마르티네스의 245승)
통산 삼진 26위 안에 들고 명전 헌액 되지 못하고 있는 5명의 투수 중 한명(은퇴 5년이 지난 선수)
3위 약켓맨 4,672
15위 실링 3,116
20위 미키 롤리치 2,832
26위 데이비드 콘 2,668
데뷔부터 가장 많이 뛴 에인절스에서도 역대 탑 100 플레이어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다승 5위 102승(존 래키와 공동)
평자 5위 3.08
삼진 5위 1,233 (1975년의 269삼진은 에인절스 좌완 삼진 기록)
천사 초청 시구에서 슬리퍼를...
재미 있는 기록이 타나나는 홈런왕 행크 애런, 배리 본즈에게 피홈런을 허용한 단 두명의 투수 중 한명 (다른 한명은 릭 로셀)
★로베르토 클레멘테(Roberto Clemente)
로베르토 엔리케 클레멘테 워커 (Roberto Enrique Clemente Walker)
작년에 레딧이나 더쇼 팬포럼 같은 더쇼 이야기 있는 곳을 보면, 사진이나 글 올리고 카드 내놓으라고 하는 많은 선수들 중 자주 보이던 두 선수가 있었는데 클레멘테와 소리아노였습니다. (그분들은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메이저리그와 지역 사회에서의 공헌, 스포츠맨십등 모범적인 선수에게 수여되는 클레멘테 상은 클레멘테 사망 이후, 1973년부터 로베르토 클레멘테 어워드로 불리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 재키 로빈슨 데이처럼 매년 9월 18일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날로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2020년 수상자
1934년 8월 18일 푸에르토리코 캐롤라이나 지방의 산안톤에서 태어났는데요
생소한 지명이라 야구 영웅이 태어난 동네를 찾다 보니 1898년 미국 프랑스의 전쟁 결과로 파리조약에서 푸에르토리코를 획득 후 지금까지 미국령으로 있는데, 미국이 1899년 최초의 인구조사를 할 때 지역의 인구는 615명이었고, 2010년 인구는 13,578명, 2019년 푸에르토리코 총인구는 310만명 조금 넘는 기록이 있습니다.
육상에도 소질이 있어 야구와 병행하며 10대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가 사탕수수 제당 공장의 감독으로 일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장에서 상하차 일도 도우며 고국 푸에르토리코 리그에서 뛰다가, 다저스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1954년 2월 19일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을 맺고(트리플 A 팀, 몬트리올 로얄스) 미국으로 무대를 옮겼는데,(계약금 1만 달러 연봉 5천 달러)
당시 다저스 트리플 A 팀의 연고지 캐나다 몬트리올의 날씨와 언어 탓에(영어, 불어)
2개국어 이상을 하는 팀 동료들의 도움이 컸다고 합니다 도움을 준 선수들 중 한 명이 토미 라소다 감독이었고요
감독님 츤데레셨네요
1954년(19세) 몬트리올 로얄스에서 성적이
87경기, 148타석, 타율 257, 2홈런, 12타점, 38안타(더블5, 트리플3), 도루1, 볼넷6, 삼진16
시즌이 끝나고 1954년 11월 22일 룰 5 드래프트에서 첫 번째 픽으로 피츠버그에 합류합니다.
지금과 다른 조항이 있는 당시의 룰 5 규정 중에 하나가 계약금 4천 달러 이상의 선수가 MLB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 룰 5 대상이 되는 규정이 있었고 다저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보내게 된 샘입니다.
12회 올스타 선정에 15회 출전(1960-1962년 2차전 진행), 월시 반지 2회(1960,1971) 골글 12회 (1961~1972 NL, RF, 12회 연속 수상) 빠른 발은 아니셨는데 수비 센스가 뛰어나신 듯 (12개의 골드 글러브 수상은 당시 자이언츠의 스타이자 레전드 윌리 메이스와 동률의 수상 기록입니다)
NL 타격왕 4회
1961년 351
1964년 339
1965년 329
1967년 357
1969년 345/2 (2위) 타이틀러는 안타왕 피트 로즈 347/7, (마지막 경기에서 결정됐습니다)
(이런 치열한 경쟁 때면 2009년 졸렬택이라고 뉴스까지 등장한 박용택 VS 홍성흔의 수위타자 경쟁이 생각납니다)
1966년 NL MVP 수상
2위 다저스의 쿠팩스
3위 자이언츠의 메이스
5위 펠리페 알루(모이세스 알루의 아버지)
6위 후안 마리샬
8위 행크 애런
통산 안타가 딱 3,000개, 통산 홈런이 240개에서 보듯 거포는 아니셨는데, 가장 적은 시즌은 4개, 많은 시즌은 29개, (20개 넘게 친 시즌이 3시즌) 통산 도루 83개, 도루 실패 46개, 볼넷 621개, 삼진 1,230개
첫 안타 경기 1955년 4월 17일 VS 다저스 (단타)
3천 안타 경기 1972년 9월 30일 VS 메츠 (2루타)
1972년 시즌이 끝나고 12월 23일 니카라과의 도시 마나과에(혹은 마나구아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리히터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피해 규모가 1만명 사망, 2만명 부상, 25만 가구 파괴
이때 구호물품을 전달하러 가게 되는데, 어려서는 부모님께, 결혼하면 아내에게 듣게 되는 말이 있죠, ~~가지 마, ~~안된다)
클레멘테의 부인도 후에 인터뷰에서 말하길 클레멘테에게 가지 말라고 만류를 했다고 합니다.
(미망인도 2019년 11월 16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Auxilio Mutuo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클레멘테는 1972년 12월 31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게 되는데요
당시 기사들을 보다 보니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이라기보다는 인재도 한몫을 했다는 느낌)
구호물품을 항공기 3대에 걸쳐 보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구호물품을 보내려 클레멘테는 수소문 끝에 아메리칸 에어 익스프레스 회사와 전세기 계약을 맺게 되는데요(4천 달러)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당시 27세의 젊은 사업가 아서 리베라(Arthur S. Rivera)입니다.(비행기 소유주, 대표)
아서 리베라는 항공법에 따라 조종사, 부조종사, 비행 엔지니어를 고용후에 비행해야 했는데, 비용 절감을 위한 마음에서 였는지 조종사만 고용을 하고, DC-7비행 자격증이 없음에도 자신을 부조종사로 등재하고 비행 엔지니어 없이 비행하는 안전 불감증을 실천하는 인물입니다.
(아서 리베라는 트윈 엔진의 작은 기종인 DC-3기종의 자격증만 보유)
그리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비행기 문제가 있었는데요 사고 비행기는 아서 리베라가 구매한 직후 1972년 9월 마이애미에서 도착한 이래 비행을 한 적이 없었고 (회사의 첫 번째 비행을 첫 계약을 맺고 하게 되는)
사고 29일 전인 12월 2일 공항에서 유도로를 벗어나 콘크리트 방벽 사이의 수로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이때 2, 3번 프로펠러 고장과
3번 엔진의 고장이 발생했고 엔진을 교체하라는 권고를 받은 대표 아서 리베라는 정비사에게 엔진 검사를 맡기고 비행을 하기 위해 수리를 받기는 했습니다 (정비 후 엔진을 3시간 가동하여 오작동 징후 체크)
리베라는 자신의 유일한 생계 수단임을 주장하며 사고로 정지되어 있던 화물기 운영 허가를 다시 받게 됩니다.
미국 연방항공국 정비 검사관은 프로펠러 회전 등을 검사하고 허용 오차 범위 내에 있음을 확인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충돌 사고에서 항공기 정비의 표준 절차는 엔진을 분해하여 균열을 살피는 자기 입자 검사를 해야 하는데 이 절차를 건너 뛰었고
후에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계약을 하게 됩니다.
운명의 그날인 1972년 12월 31일 클레멘테는 먼저 보냈던 구호물품이 니카라과 정부와 군의 간섭으로 지진 피해를 입은 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되고, 구호물품과 함께 자신도 동행을 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21시 11분 계류장을 나와 21시 20분 30초에 이륙, 자료를 찾다 보니 어떤 글에서는 악천후와 엔진 화재가 있었다는 글도 보았는데,
연방 항공국의 조사 기록과 교신 내용에서는 날씨는 좋았고 시야는 10마일(16km) 이었다고 합니다.
이륙 직후 고도가 올라가지 않는 문제가 생겨 21시 23분 15초 관제탑에 회항 결정을 통보하고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교신을 마지막으로 추락하게 되는데, 해안에서 불과 1.5마일(2.4km) 떨어진 대서양에 추락하게 됩니다.
마지막 무선 전송 시점 또는 직후에 비행기 2번 엔진의 고장과 3번 엔진도 고장 났을 가능성이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공항에서 이륙하는 것을 목격한 정비공은 엔진 소리는 고르고 정상이었지만 이륙 높이가 너무 낮았다는 증언을 했고 다른 목격자들도 비행기의 이륙 후 고도가 30미터 정도만 올라 갔다고 추정한다는 말도 있네요.
그 후 항공기가 나무 뒤 시야를 벗어난 후까지 엔진 소리는 괜찮았지만 몇분 후에 3번의 굉음과 큰 폭발음을 들었는데 이 폭발음들이 바다에 충돌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는 증언 내용도 있습니다.
1월 7일이 되어서야 잔해가 있는 현장을 해군 잠수부들이 발견하게 되는데, 5천평 면적에 수심 30~40미터의 바닷속에 심하게 부서 진채, 두 날개는 동체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보고를 시작으로 인양 작업을 시작하고 , 1월 11일 3개의 엔진을(2,3번 엔진 포함) 인양해서 엔진 로그북을 검토한 결과 , 4~5개월 전과 리베라가 구매하기 전에 이미 100시간 엔진 검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엔진 고장뿐 아니라 비행 계획 기준서에 보고된 무게보다 과적을 발견하게 됐는데 최대 이륙 중량에서 4.193파운드=1,901kg의 과적된 무게를 발견했고, 화물 문제만이 아닌 항공유 무게를 지적하기도 했고, 지진으로 니카라과에서 항공유 주유를 할 수 없다는 문제로 편도 주유가 아닌 왕복에 필요한 연료를 풀로 채웠다고 합니다.
당시 산후안 공항에서 니카라과의 편도 비행시간은 4시간이었고, 과적으로 추정되는 1,901kg의 무게는, 연료 2,676 리터에 해당하며 이는 1시간 비행에 충분한 양 입니다(DC-7 연료 용량의 9%)
푸에르토리코 지방 법원에서 과실 문제로 정부, 미국 연방항공국을 상대로 한 소송도 있었고 클레멘테 가족이 고용한 변호사 로펌을 통해서도 500만 달러 손해 배상 청구소송도 있고 했었군요
DC-7 기종의 여객기와 화물기
사고 후 인양작업에서 조종사의 시신은 발견했지만, 클레멘테의 것으로 보이는 빈 여행가방 케이스가 비행기에서 회수된 유일한 개인 물품이었고 클레멘테와 다른 세 명의 탑승자 시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사도 있고, 또 어떤 기사는 반년이 지나서 클레멘테를 포함한 4명의 시신을 인양했다는 내용도 있는데 정확한 내용은 찾다가 지쳐 포기했습니다.
파나마 출신으로 피츠버그의 포수였던 매니 산길렌이란 선수는 클레멘테의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은 피츠버그의 유일한 팀원이었는데 이유가 추락 해역에서 수색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1972년 12월 31일 클레멘테의 사망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은 헌정 자격 규칙을 변경합니다.
은퇴 5년이 지나 생기는 헌정 자격에서, 6개월 이내 사망한 선수의 헌정 자격이 신설됐는데, 예외 조항이 적용된 다른 경우는 철마 루 게릭 선수입니다. (1939년 훗날 병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루 게릭병으로 은퇴 후(36세 시즌) 1941년 6월 2일 사망 (37세 348일)
1973년 특별 투표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는데 이는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선수 기록.
당시 클레멘테의 득표율 92.63%은 전설 6인,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 밥 펠러,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 다음으로 높은 득표율이었습니다.
한명재 캐스터였는지 김형준 해설 위원이었는지 음주킹캉 피츠버그 시절의 중계방송에서클레멘테와 닐 워커(2B)의 인연? 을 이야기 종종 해줬었죠
사고 당일 12월 31일 동승해서 구호 활동에 동행하려 했던 닐 워커의 아버지가 있었고 클레멘테의 만류로 남게 된 선수가(홀리데이를 즐기라고) 닐 워커 선수의 아버지라고 (그 후 결혼해서 톰 워커의 막내로 태어난 닐 워커는 피츠버그 1차 지명 선수로 지명이 됐고 뭐 이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
기록을 찾아보니 아버지 톰 워커는 몬트리올 소속이었고 당시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에서 뛰고 있었네요
영구결번은 물론이고 정말 많은 곳에 클레멘테를 기리기 위한 경기장이나 조형물 등이 있습니다.(도로명, 기념공원)
1973년 4월 6일 영구결번 지정 21
1984년 8월 17일 미국 우체국에서 클레멘테를 기리는 기념우표를 발행
1999년 4월 7일 로베르토 클레멘테 다리의 명명식이 끝난 후 PNC 파크의 기공식을 했었네요
(원래 다리 이름은 6th Street Bridge였습니다)
푸에르토리코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콜리세움이라는 실내경기장도 있고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 스타디움이란 야구장도 있고
니카라과에도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있네요
영화 잭 리처의 한 장면입니다.
★그래디 사이즈모어 (Grady Sizemore)
그레이디어스 그레이디 사이즈모어 3세 (Gradius Grady Sizemore 3)
통산 성적이 .265 150홈런, 518타점, 1,098안타, 660득점, 143도루, WAR 27.8
부상으로 기량을 만개하지 못한 대표적인 케이스의 선수죠
몬트리올 3라운드 드래프트, 마이너 생활 중, 2002년 6월 27일 몬트리올, 클리블랜드 4:2 트레이드로 클리블랜드로 오게 됩니다.
트레이드 대상 선수들 중 미래의 사이영 수상자 클리프 리(몬트리올 2000년 4라운드 계약)
골글 4회와 실버 슬러거 1회 수상을 하는 브랜든 필립스(몬트리올 99년 2라운드 계약)
몬트리올로 넘어간 6년차 바톨로 콜론이 있었습니다.(2003년 시즌 후 FA)
2004년 7월 21일 빅리그 데뷔를 하게 되고 2005년 주전을 꿰차고 시즌 팀내 WAR 1위(6.6)을 찍으며 순항합니다.
2005시즌 클리블랜드 라인업도 괜찮았지만 선발진도 좋았네요
제이크 웨스트브룩, 클리프 리, CC 사바시아, 케빈 밀우드
2006~2007년(3~4년차) 전경기 출장(162X2)으로 커리어 절정기였습니다.
하지만 2009년부터 시작이 됩니다.(부상)
2009년
5월 31일 커리어 최초로 IL (왼쪽 팔꿈치)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당한 부상이 재발
6월 23일 복귀
9월 4일 IL (왼쪽 팔꿈치 재발) 9월 9일 클리블랜드에서 1차 수술
9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2차 수술
2010년
4월 1일 다저스와의 시범 경기 때 무릎 부상을 당했다가
5월 16일 볼티모어전에서 부상 재발(왼 무릎뼈에 멍이 들 정도의 부상)
5월 19일 IL에 오르고 시즌 종료
6월 4일 콜로라도에서 왼무릎 미세 골절 수술
2011년
5월 10일 슬라이딩 하다가 부상, 스포츠 탈장 수술
7월 18일 IL
9월 4일 복귀
9월 22일 무릎 관절 통증으로 시즌 종료
10월 3일 콜로라도에서 관절경 수술
11월 23일 클리블랜드와 1년 재계약
2012년
2월 운동 중 허리디스크 부상
3월 1일 마이애미에서 허리 디스크 수술, 이후 회복과 재활로 시즌 마감
2013년
지속적인 무릎 통증으로 인해 수술 후 재활(오른 무릎의 미세 골절 수술)시즌 마감
2014년
1월 22일 보스턴과 1년 75만 달러 계약
3월 31일 개막전에서 홈런도 치고(크리스 틸만) 부활하는가 했으나 시즌 중 지명할당, 6월 18일 (.216, 2홈런 15타점)
6월 24일 필리스와 계약 (.253, 3홈런 12타점)
시즌 종료 후 필리스와 1년 2백만 달러 계약
2015년
6월 1일 필리스 지명할당 (39경기 타율245, 6타점)
6월 15일 탬파와 계약 (58경기 타율257, 6홈런, 27타점)
선수 경력에서 2년을 뛰지 못했고, 10년 뛰고 커리어 마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봉 수령액이 3천만 달러를 조금 넘네요.
이런 시절이 있었지요
다이빙캐치와 홈스틸도 머릿속에 그려지고, 너무 많이 다친 선수 시절 모습이 안타까운 선수입니다.
★커비 퍼켓 (Kirby Puckett)
미네소타의 레전드 선수입니다. (12년 경력 트윈스 원팀)
야구선수로는 좀 작은 체격입니다 173cm (포지션 CF)
선수 시절은 작고 단단한 모습이지만 은퇴 후의 모습들은 체중이 엄청 불어난 모습들이었지요.
10년 연속 올스타, 6번의 골드 글러브, 6번의 실버슬러거
AL 타격왕, ALCS MVP, 올스타전 MVP, 화룡점정으로 2개의 월시 반지(1987,1991)
사우스 시카고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범죄, ㅁㅇ이 성행한 동네였지만 메이저리거가 될 싹수였는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범죄에 빠지지 않고 야구에 빠져 성장을 했는데 동네, 가정환경 때문에 10대가 되어서야 잔디구장에서 야구를 해봤다고 합니다.
사우스 시카고 지역이 공화당이 쭈글이가 되는 지역이군요
12년 오바마 12,147 롬니 207
16년 힐러리 9,908 트럼프 258
20년 대선도 바이든이 이겼고, 시카고 시의회나 상하원도 대부분 민주당이네요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포지션이 3루였는데 학교 팀이 비인기 팀이었는지 프로, 대학팀들의 스카우트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팀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졸업 때 받은 유일한 장학금 제안은 마이애미의 데이드 대학 뿐이었는데, 퍼켓은 집 시카고에서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아 입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며 진로를 모색했는데, 그때 계약직으로 취업한 곳이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썬더버드에 카펫을 설치하는 일이었다고 하네요
1977–1979 생산된 썬더버드
당시 시카고에서 개최되는 메이저리그 트라이 아웃 소식을 듣고 참가를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고향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브래들리 대학팀의 코치 듀이 칼머의 눈에 들어 코치의 주선으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대학팀의 내야는 선배들이 주전 라인업을 차지하고 있어 뛸 기회가 줄어들자, 외야수로 전향을 하고 성적도 폭팔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미망인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시카고 외곽의 트리튼 대학으로 편입을 합니다.
트리튼대학 출신의 빅네임 선수가 있나 찾아보니 90여 명 가깝게 지명된 선수들이 있는데 퍼켓이 가장 성공한 선수입니다.
루 콜리어 (Louis Keith Collier)라는 선수도 트리튼대학 출신인데 KBO에서 뛰었네요 KBO 등록명을 루 클리어로 했는데 사연이 LG 홍보팀, 운영팀, 단장의 회의에서 "루"상에 주자가 있으면 깨끗하게 불러들이라는 의미로 등록명을 클리어로 했다는군요
루 콜리어
1997~2004(PIT, MIL, MON, BOS, PHL)
한국 투수들 많을 때라 찾아보니 김선우, 김병현과 모두 1타수 무안타 기록이 있네요
2005년 LG 110경기 .303 15홈런 61타점 122안타 36볼넷 85삼진 19도루
2006년 한화 93경기 .271 7홈런 86타점 77안타 33볼넷 60삼진 6도루
퍼켓이 트리튼 대학으로 편입한 해가 메이저 리그 파업이 있던 1981년 (파업 6월초~8월초)이었습니다.
퍼켓은 이때 야구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파업으로 일이 없어진 코치진이나 스카우트들 중에 미네소타 마이너리그 코치로 있던 짐 랜츠(James John Rantz)가 일리노이주 대학리그에서 뛰는 아들 경기를 보기 위해 방문을 했는데 그때 운명처럼 커비 퍼켓의 소속팀 경기를 보게 됩니다.
짐 랜츠 씨가 그때를 두고 회상하길 아들의 플레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4개의 안타를 치고 중견수 위치에서 어시스트를 하는 퍼켓을 본 거였는데 가장 좋았던 점은 파업으로 인해 스탠드에 다른 팀들의 스카우트가 없는 게 좋았다고...
퍼켓을 발굴한 짐 랜츠(James John Rantz, 1938년 2월 24일생) 이 분이 또 미네소타 성골입니다.
고향이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이고 대학 또한 미네소타 대학 출신입니다.
빅리그는 뛰지 못하고 마이너리그까지 뛴 우완투수 출신이고(5시즌 22승 16패 평자 3.64)
고향팀 미네소타와의 인연이 1965년 월드시리즈 기간의 미디어 부서에서의 인턴 인연을 시작으로 1971년부터는 마이너리그 코치, 감독등 여러 보직을 거쳤고 마이너 리그 운영 이사, 팜 시스템 총괄 디렉터, 미네소타 트윈스 수석 디렉터까지 역임하는 등, 미네소타 소속으로 총 53년 일을 하고 2012년 10월 15일 은퇴를 하셨습니다. (2007년 미네소타 트윈스 명예의 전당 헌액멤버)
1982년 퍼켓은 1월의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1라운드 3번픽을 받고, 트리튼 대학을 전국 대회 결승에 올렸고, 지역 대학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는 활약을 펼칩니다.
이후 미네소타와 계약을 맺고 루키리그에 합류하게 됩니다.
1983년 상위 싱글 A, Visalia Oaks 팀으로 승격(지금은 디백스 싱글 A, Visalia Rawhide)
1984년 트리플 A로 월반 (코치진은 이미 메이저 승격 레벨 준비가 되었다고 팀에 제안)
하지만 서비스 타임 꼼수 때문에 5월 에서야 승격을 시킵니다.
승격 통보가 왔을 때 미네소타는 캘리포니아에서 애너하임과의 원정 3연전을 진행 중이었는데, 퍼켓은 애틀랜타 공항에서 연결 지연으로 예정 시간보다 더 늦게 LA 공항에 도착을 했습니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애너하임 스타디움으로 향했지만 요금은 83달러, 돈이 부족한 퍼켓은
요금 낼 돈을 빌리러 경기장에 가서 꿔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려 뛸 수 없었다고 합니다.
팀은 불붙은 타선과 선발 마이크 스미스슨의 1실점 완투를 곁들여 11:1승
다음 날인 1984년 5월 8일 화요일 3연전 2번째 경기에서(미네소타의 298번째 빅리그 데뷔 선수)
1번(CF)으로 나와 5타수 4안타 1득점 (20세기에 4안타로 데뷔한 9번째 선수)
1984년 연착륙에 성공하며 128경기나 뛰었지만 무홈런으로 시즌 종료
AL 신인상 투표에서 3위를 했는데
AL 수상자는 시애틀의 앨빈 데이비스 (Alvin Davis)였고
NL 수상자는 메츠에서 19세 143일에 데뷔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닥터 K 드와이트 구든 이었습니다.
(다저스의 불독 형님은 3위였네요)
드와이트 구든은 게리 셰필드의 외삼촌이기도 합니다.
외삼촌 구든과 조카 셰필드의 나이차는 4살 차인데, 나이차가 삼촌이라기보다 형에 가깝죠 (친구 같은 외삼촌) 두 소년은 탬파의 벨몬트 하이츠에서 자라면서 방을 함께 쓰기도 하며 성장했다는군요
구든: 1964년 11월 16일생
셰필드:1968년 11월 18일생
셰필드의 경우는 어머니가 10대에 미혼모로 출생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은 이런 나이차가 별로 없지만 우리도 조혼 풍습이 있던 조부, 조모 시절이나, 10~20대 이신 분들은 증조부, 증조모 시절에는 흔했지요
피임도 없고,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시기라 무조건 낳던 시기이고, 첫째를 10대 중후반에 낳고 그 첫째도 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님도 늦둥이 보시고 하시면 이런 일이 많았지요.
이런 일이 흔하던 예전 시절 아래위로 나이차가 나도 친우를 맺던 시대에,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기억들 하실 벽초 홍명희가 아버지와 나이차가 17살 인가로 알고 있는데 홍명희가 성장해 사귄 친우 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의 친우였다는 지금 시대엔 웃픈 이야기도 있지요.
1985년 4월 22일 월요일 VS 시애틀
4회말 시애틀 맷영에게 데뷔 첫 홈런(3점), 하지만 2년 차이던 1985년 시즌 홈런은 4개
199안타로 2번째 시즌이 끝났는데 아깝게 커리어 첫 200안타를 놓쳤네요
마지막 162번째 경기가 10월 6일 일요일 홈경기였는데
1루 쪽으로 강한 땅볼을 날리고 출루했는데 기록원이 안타가 아닌 1루수 마이크 하그로브(시즌 6번째)의 에러로 판정 기록
이경기 클리블랜드 라인업이 1번은 추억의 브렛 버틀러(CF)였고
3번은 우리도 잘 아는 훗날 삼성에서 뛰는 훌리오 프랑코였는데 당시 포지션은 유격수였네요
당시 인디언스 1루수 마이크 하그로브 이 선수는 훗날 감독이 되십니다. (1,188승 1,173패)
클리블랜드 (1991~1999) 중부 우승 5회, 월드시리즈 준우승 2회 1995,1997
볼티모어 (2000~2003) 감독 4년간 모두 동부 4위
시애틀 (2005~2007) 192승 210패, 05~06서부 꼴찌, 07사임, 팀은 서부 2위로 시즌 종료
2007년 7월 1일 열정이 사라져 가고 있다며 갑작스러운 사퇴 발표를 했는데
당시 팀은 8연승 중이었고 최근 10경기 성적이 9승 1패의 팀이었습니다.(당시 45승 33패로 AL 서부 2위)
발표 말미에 이제 팀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해석에 따라 묘한 말도 남기며 눈물도 흘렸고요
2007년 당시 시애틀 성적이 나쁘지 않았는데 사임을 해서 말들이 많았는데 기자들이 보기에는 간판스타 이치로 스즈키 선수와의 불편함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몇 년간 계속된 팀의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 후 FA 시장에 나갈 것이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인 상황이었는데, 실제로 이치로는 팀에서 제안했던 연장 계약을 미루다 감독 사임 후에 맺었습니다.
2007년 7월 13일 5년 연장 계약에 사인을 합니다.(연봉 8,500만 달러, 보너스 500만 달러, 총 9천만 달러) 당시 기사에는 연봉을 다 수령하는 것이 아니고, 2,500만 달러는 연 5.5%의 이자율로 계산해 2032년까지 지급받는다는 기사도 있고, 빅스타들 대우가 늘 그렇듯이 매년 일본 왕복 비행기 티켓, 개인 트레이너, 통역, 벤츠 SUV 차량까지 제공받는 조건도 포함했습니다.
그리고 불화를 뒷받침하는 것이 해임이 아니고 자진 사임인데도 시애틀은 시즌 종료까지 마이크 하그로브 감독의 나머지 연봉을 모두 지급했습니다.
이후 무보수로 세미 프로팀인가 독립야구단인가에서 감독도 하셨고, 인디언스 구단의 명전헌액자 이십니다.(클리블랜드 팀 역사 탑 100 선수로 선정)
그런데 더 유명한 것은 현역 시절의 별명입니다. KBO 루틴 하면 떠오르는 박한이 선수의 박킁킁 루틴이 있었다면
MLB에는 마이크 하그로브 이분이 있지요 데뷔 팀 텍사스 시절에(1974~1978) 생긴 별명인데요.
"The Human Rain Delay"
별명이 인쇄된 카드도 있을 정도입니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과 투수가 던지기 전, 투구가 끝나면 타석에서 나와
1 헬멧을 만지고
2배팅 글러브를 만지고 (손과 특히 엄지가 꽉 조이게 만지고)
3유니폼의 각 소매를 위로 당기고
4유니폼 바지에 양손을 닦고
때때로 전체 과정을 다시 반복한 후 마침내 타석에 들어서는 루틴.
경력이 늘어날수록 루틴이 매우 잘 알려져 있어서 중계방송사들이 자주 언급하는 멘트도 있었고
한마디로 투수들을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루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3a_408HLzAI
https://www.youtube.com/watch?v=8tGm_JajqLo
이안 킨슬러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텍사스 선두타자 홈런 기록도 가지고 있었고 추신수 선수가 이 기록 근접했었는데 갈아 치웠나요? 알고 계신 분 댓글 부탁드립니다.
다시 퍼켓으로...
데뷔해서 2년간 289경기(1984~1985)에서 통산 홈런이 4개였던 퍼켓은 타격폼 변신을 시도하는데요
미네소타 타격 코치 토니 올리바와 함께 자신의 타격폼에 레그킥을 장착합니다.
토니 올리바 코치는 쿠바 출신으로 미네소타 원팀의(15년) 팀 선배이기도 합니다.
(1962~1976, RF, DH, 통산 타율 304 220홈런, 947타점, 1,917안타, 1963년 AL 신인상,
8번의 올스타, MVP 투표 2위 2번, 골글1회, AL 타격왕 3회, 1991년 미네소타 6번 영구결번, 2000년에는 미네소타 트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
선수 은퇴 후 1976~1978년, 1985~1991년 트윈스 코치로 재직했는데
3번의 미네소타 트윈스 월드 시리즈(1965, 1987, 1991) 진출 당시에 모두 팀에 있던 유일한 현장 멤버입니다.
1965년 선수로 준우승(우승 다저스)
1987년 코치로 우승 (준우승 카디널스)
1991년 코치로 우승 (준우승 브레이브스)
퍼켓은 올리바 코치와 시도한 변신이 똑딱이 타자에서 중장거리 타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됩니다.
1986년 4월 8일 개막전부터 7경기는 무홈런 경기였지만
이후 터지기 시작해 4월 월간 성적이 21경기
타율 396, 8홈런, 36안타, 22득점을 올리고 AL 4월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합니다.
이 시즌부터 은퇴 시즌이던 1995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이 되고, 시즌 성적이 첫 3할 타율 328, 2백 안타 고지를 넘어 223개, 홈런은 무려 31개(이전 두 시즌이 4개인 걸 기억하십니까?)
은퇴까지 200안타 이상인 시즌이 5시즌이나 됩니다.(190안타 이상도 2시즌, 31개의 홈런이 커리어 최다 시즌)
한 시즌 500타석 이상 들어선 무홈런 타자가
1984년 128경기 583타수 557타석 무홈런
한 시즌 500타석 이상 들어서서 30홈런 이상을 친 최초의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1986년 161경기 723타수 680타석 31홈런
1986년 8월 1일 금요일 홈경기 VS 오클랜드 10:1
BK보다 빠른 원조 법규(중계 카메라에 법규 날린) 버트 블라일레븐 선수의 통산 3,000K 경기가 있었는데
버트 블라일레븐 9이닝 2피안타 1실점 1볼넷 15삼진
3000K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s3OvZFhZbzw
퍼켓은 이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합니다.
며칠 전 경기에서도 홈런만 없어 무산됐던 기록인데, 선배의 3,000K 경기에서는
1회말, 우중간 3루타
3회말, 중플 아웃
5회말, 그라운드 룰 더블
6회말, 우익수 방면 싱글
8회말, 좌익수 방면 투런홈런
1987년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획득 (1924년 워싱턴 연고 이후 63만의 우승) 시리즈 전적 4승 3패 (준우승 STL)
월드 시리즈 타율 357, 10안타, 3타점, 5득점, 2볼넷, 1삼진
1988년 데뷔 5년차
20세기 메이저 리그에서 데뷔 5년에 1,000안타를 기록한 네 번째 선수(765경기 1,028안타)
이전 달성자는
조 메드윅 1932~1948, STL, LAD, SF, ATL
폴 워너 1926~1945, PIT, LAD, ATL, NYY
얼 콤스 1924~1935, NYY
빅리그에서 3,089안타를 기록한 이치로도 이 기록을 달성했는데, 이치로는 2001~2005년(21세기) 무려 1,130안타 (796경기)
또한 퍼켓은 첫 10년 동안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한 두 번째 선수였습니다.
1984~1993년(24~33세) 1,538경기, 1,996안타 (1994년 4월 8일 오클랜드전에서 2천 안타 달성)
첫 선수는 피츠버그의 폴 웨이너, 1926~1935년(23~32세) 1,490경기, 2,036안타
1952년 명전 헌액 통산 3,152안타, 피츠버그 영구결번 11, 1927년 리그 MVP
하지만 폴 웨이너의 기록을 넘어서는 선수가 등장하는데 또 이치로입니다. 2001~2010년(27~36세) 1,588경기, 2,244안타
웨이드 보그스 1,965안타
안타왕 로즈는 1,922안타
알버트 푸홀스 1,900안타
행크 애런 1,898안타
재미로 찾아보니 데뷔부터 10년간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1위 1558경기 알버트 푸홀스 408홈런
2위 1482경기 에디 매튜스 370홈런
3위 1472경기 랄프 카이너 369홈런
4위 1448경기 애덤 던 354홈런
5위 1375경기 그리피 JR 350홈런
6위 1275경기 약로드 345홈런
7위 1511경기 행크 애런 342홈런
8위 1370경기 어니 뱅크스 335홈런
9위 1502경기 프랭크 로빈슨 324홈런
10위 1421경기 테드옹 323홈런이군요
1989년
타율 339, 첫 배팅 타이틀(타격왕)을 차지하는데 팀선배 로드 크루, 토니 올리바에 이은 3번째 트윈스 멤버로 기록,
커리어 하이 타율은 1988년의 356이었지만, 타이틀은 웨이드 보그스의 타율 366이었습니다.
3년 연속 AL 최다 안타왕을 차지한 3번째 선수
1986년 돈 매팅리 238개
1987년 207개
1988년 234개
1989년 215개
이전 기록 보유 선수들은
타이 콥
1907년 212개
1908년 188개
1909년 216개
토니 올리바(레그킥 코치)
1964년 217개
1965년 185개
1966년 1 91개
1989년
3년 9백만 달러의 계약을 했는데, 이 계약이 1년 3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최초의 선수 기록
1990년
8월 16일 목요일 VS 클리블랜드
원정 경기에서 1천 경기가 넘게 뛰던 중견수에서 처음으로 우익수 출장을 했는데 경기전 톰 켈리 감독이 퍼켓에게 라인업 카드를 주의 깊게 확인하고 나가라고 말해서 알게 됐다고, 하지만 이 경기에서 팀의 대타 기용으로 인한 포지션 변경으로 경기에서 4군데 포지션을 소화하기도 했었네요(RF, SS, 3B, 2B)
1991년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획득
2003년 100회 월드 시리즈를 맞이해 ESPN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월드 시리즈로 선정된 시리즈입니다.
재미있는 기록이 이때 기록됐는데 1991년 이전 월드 시리즈에서는 전년도 시즌을 최하위로 마친 팀들이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 일이 없었는데 두 팀이 이 기록을 만들고 격돌합니다.
1990년 애틀랜타는 65승 97패로 서부지구 최하위인데, 바로 위의 승률팀은 동부지구 최하위의 카디널스가 70승 92패
미네소타는 74승 88패로 서부지구 최하위, 최하위 승률팀은 동부 최하위의 양키스 67승 95패
7차전까지 진행이 됐고 연장전이 3경기나 있던 시리즈였습니다.(총 69이닝 진행)
시리즈 전적을 2승 3패로 몰리고 시작된 6차전, 연장 11회 퍼켓의 끝내기 홈런으로 시리즈 동률로
6차전 끝내기 홈런
https://www.youtube.com/watch?v=rRD2IbYFf7o
7차전은 미네소타 에이스 잭 모리스, 애틀랜타 존 스몰츠
9회까지 0:0, 연장전 돌입
잭 모리스는 10회까지 던지고 내려오고 10회말 끝내기 승리(10이닝 완투 7피안타 2볼넷 8삼진)
잭 모리스는 시리즈 2승으로 월드시리즈 MVP 수상
7차전 풀버전
https://www.youtube.com/watch?v=3GlY7PoDs8E
1993년
올스타 게임 7월 13일 화요일 92년 개장한 볼티모어 캠든 야즈, AL9:NL3 , 6번 좌익수 출전 2안타(1홈런) 2타점
퍼켓에게 홈런을 허용한 NL 선발투수가 수염 기르기 전 테리 멀홀랜드(PHL)였네요
올스타전 MVP를 받았는데 미네소타 선수로는 처음 수상
1994년
6월 26일 일요일 KC와의 경기에서 2,086번째 안타(투런홈런)를 기록해 로드 크루가 보유하던 프랜차이즈 기록을 넘어섬
미네소타 연고 이전 워싱턴 세너테스 시절의 기록까지 합치면 1915~1933년에 뛰었던 샘 라이스의 2,889개가 1위 기록 입니다.
미네소타 프랜차이즈 안타 순위
2위 커비 퍼켓 2,304개
4위 조 마우어 2,123개
6위 로드 크루 2,085개
7위 하몬 킬러브루 2,024개
9위 토니 올리바 1,917개
17위 토리 헌터 1,343개
531위 박병호 41개
1994년 시즌이 선수노조 파업으로 8월 10일(113경기) 경기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는데 퍼켓은 112득점으로 득점 타이틀러가 되긴 했지만 아쉬운 시즌입니다.
108경기를 뛰고 112득점을 했는데 시즌 페이스는 168득점 페이스였습니다.
1995년
94년 시즌의 파업이 이어져 개막이 4월 26일에야 치러졌고 162경기가 아닌 144경기 체체로 치러진 시즌입니다.
커리어 200 번째 홈런을 기록한 시즌이기도 했고 99타점을 기록 중이라 100타점을 눈앞에 뒀으나 9월 28일 목요일 홈경기 VS 클리블랜드 (팀 141번째 경기) 3번 (DH) 출전해서 1회말 첫 타석에서 마르티네스의 4구 직구에(카운트 0-2) 얼굴을 향해 바로 날아온 공에 턱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시즌 종료, 마지막이었던 정규 시즌 성적이 타율 314, 23홈런, 99타점, 169안타
턱을 부순 마르티네즈 선수는 바로 이 선수입니다.
1996년
턱 부상에서 돌아와 시범경기 타율 344를 기록할 정도로 좋은 시즌 준비를 이어가다가
개막을 일주일 앞둔 3월 27일 애틀랜타 시범경기 선발투수가
NL 사이영상을 4연패한(1992년 CHI, 1993~1996년 ATL) 그렉 매덕스였습니다.
매덕스를 94년 올스타게임에서 만나본 것이 (1994년 올스타전에서는 6번 우익수로 2회초 3루 땅볼 아웃)
다였지만 매덕스에게 안타를 쳤는데, 그날의 경기가 퍼켓의 마지막 경기가 됩니다.
은퇴도 기량이 아닌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를 했습니다.
다음날인 1996년 3월 28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흐릿한 시야가 계속됐습니다.
오른쪽 눈에 보이는 사물이 흐리게 보이고, 검은 점이 보여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렇지 못했고, 검진 결과는 녹내장 진단, 3번의 수술을 하며 전반기 내내 부상자 명단에 등재되고 호전되기를 기다렸지만 시력은 돌아오지 못했고 실명을 하게 됩니다.
7월 12일 메트로돔에서 눈물로 가득 찬 공식 은퇴발표를 합니다.
기량이 아닌 안구질환 문제로 은퇴를 한 것이 아쉬운 선수이지만 멋진 커리어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1997년 시즌에 34번이 트윈스의 영구결번 지정(12년 트윈스 경력 중 5번의 트윈스 MVP 선정)
AL MVP 투표에서 탑 5안에 3번 들어간 성적, 6번의 골드 글러브를 받은 수비력,
1984~1995(12년) 경력에 통산 2,304안타
2001년 명전투표 첫 턴에 입성 423/515(82.1%)
단 두 명이 입성한 해이고 헌액 동기는, 역시 첫 턴 입성자인 3천 안타 클럽의 데이브 윈필드 435/515(84.5%)
수년간 지속된 폭력, 폭언, 학대로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와의 진실공방, 2001년 12월 21일 아내가 지역 경찰에 전화를 걸어 남편이 자신이 바람을 피운다고 주장을 하며 살해 협박을 했다고 신고한 것, 당시 경찰 보고서에는 전기 코드줄로 그녀를 질식 시키기도 하고, 당시 2살인 딸을 안고 얼굴에 권총을 대고 협박을 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전기톱을 사용하여 절단해 버린다는 주장의 증언이 기록, 하지만 퍼켓의 주장은 반대로 아내가 자신이 외도를 한다고 죽인다는 협박 (조사에서 아내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적이 없다고 부인)
좀 깨는 사건 있는데 2002년 9월 한 여성의 신고로 세간에 알려진 일인데, 미니애폴리스 교외에 있는 식당에서 퍼켓이 자신을 강제로 남자화장실로 끌고 가 추행했다는 신고인데, 화장실 감금과 성/행위로 기소된 기록이 있고 2003년 재판이 열렸는데 김&장급 로펌을 쓴 것인지 합의를 잘 본 것인지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날 밤 식당에서 실제로 일어난 진실은 저 너머에)
2006년 3월 5일 일요일 아침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수술을 받았지만 하루 뒤 3월 6일 사망합니다.
이분도 이 좋은 세상을 짧게 사시고 돌아가신 분 입니다, 퍼켓은 헌액자중 루 게릭, 클레멘테에 이어 3번째로 짧은 생을 살다간 선수
(45세 357일, 게릭옹은 37세 348일, 클레멘테는 38세 135일)
부검 결과 공식적인 사인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기록되었는데 (300파운드 몸무게 136.078KG)
사진을 보셔도 아시겠지만 은퇴 후 모습이 신장에 비해 너무 불어난 몸무게였죠
2010년 4월 12일 타겟 필드 광장에 커비 퍼켓의 동상이 공개되었습니다.
퍼켓을 기리기 위해 배번 34번에 맞춰, 경기장에서 가장 큰 게이트 34번 쪽에 설치가 되었습니다.
행사 당시 아들이 초정 됐었더군요.
이 동상은 1991년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돌며 주먹을 쥐는 퍼켓의 모습으로 제작, 1997년 미네소타에서 데뷔한 데이비드 오티즈는 보스턴에서 배번 34번을 사용한 이유가 퍼켓에 대한 존경심에서 선택한 번호라고 합니다.
★행크 애런(Hank Aaron)
헨리 해머링 행크 루이스 애런 (Henry Hammerin Hank Louis Aaron)
MVP, 올스타 25회 출전, 골글 3회, 타격왕 2회, 절대반지 1회(1957 월시 우승), 명전 헌액
NO. 715
애런 에런 애론 에론 여러 표기법이 있네요
2021년 1월 22일에 돌아가셨는데, 진정한 홈런왕 이시죠
빅리그 23년 경력이신데, 데뷔 시즌(1954)과 은퇴 시즌(1976) 빼고는 모두 올스타 선발입니다.
21회 선발에 25회 출전(1959~1962, 2차전 진행) 최다 출전 기록
1954~1965년 밀워키 브레이브스 (ATL)
1966~1974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ATL)
1975~1976년 밀워키 브루워스 (MIL)
MLB 데뷔 전에 니그로 아메리칸리그의 Indianapolis Clowns 팀에서, 유격수로 데뷔를 했고 당시 월급이 200달러였습니다.
뛰어난 플레이로 MLB 2팀으로부터 계약 제안을 받았는데, 한 팀은 자신의 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보스턴 브레이브스(현 ATL) 또 다른 한 팀은 뉴욕 자이언츠(현 SF)였는데 당시 자이언츠에는 윌리 메이스가 있었죠 자이언츠로 갔다면 메이스와 함께 뛸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야구 역사에도 가정은 없네요
두 팀이 제안한 계약서를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애런이 자이언츠가 아닌 브레이브스를 택한 이유는 달에 50달러를 더 받는 조건이라
브레이브스를 택했다고 하네요. (그게 윌리 메이스와 팀원이 되지 못한 유일한 이유라고 술회)
보스턴 브레이브스(ATL)는 니그로 아메리칸리그의 Indianapolis Clowns 팀에 이적료 1만 달러를 지불하고 애런과 계약에 성공했는데, 당시 단장 John Quinn은 애런이 1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선수라 생각했고, 1만 달러의 이적료는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 생각할 정도의 계약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기사의 인종차별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니그로리그 소속으로(1954년 이전) 팀이 워싱턴에 있을때 우천으로 인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그리피스 스타디움 뒤편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팀원들과 식사를 마친 후 자신과 팀원들이 사용했던 접시를 바닥에 던져 깨트리는 소리를 듣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자유와 평등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미국, 그것도 워싱턴이라는 수도에서 마저 흑인들의 입에 닿은 포크와 그 포크가 닿은 접시를 깨트리는 것을 경험하는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것이 아이러니 했다고 하면서 인터뷰 말미의 한 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개들이 그 접시에 음식을 먹었다면 그들은 씻었을 겁니다.
1953년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에서 뛰었는데, 당시 감독 Mickey Owen (1967~1954년 13시즌 MLB 선수)과 타격 자세를 수정 했는데, 당겨치던 타구 방향에서 부챗살 방향으로 타격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그때 포지션도 2루수에서 외야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1954년 NL 신인상 4위였고 2위는 어니 뱅크스, 수상자는 WALLY MOON(STL)
AL MVP 요기 베라
NL MVP 윌리 메이스
1957년 NL MVP 수상자입니다.(4년 차)
2위는 스탠 뮤지얼
4위는 윌리 메이스
5위는 워렌 스판
6위는 어니 뱅크스
8위는 에디 매튜스
양 리그 통합 1명에게만 수상하던 사이영상 수상자는 팀 동료 워렌 스판
7차전 접전 끝에 양키스를 꺾고 절대반지도 획득
1968년 7월 14일 일요일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500홈런을 달성했는데(역대 8번째)
3번(RF) 2안타(1홈런) 3타점 경기
정확히 1년 전인
1967년 7월 14일에는 브레이브스 시절 월시 멤버였고 동료였던 에디 매튜스가 휴스턴으로 이적 후 500홈런(역대 7번째)을 기록한 날인데 매튜스의 500홈런 상태팀도 자이언츠였습니다.
7월 14일 금요일 SF 원정 경기, 5번(1B) 2안타(1홈런) 3타점 경기
30+ 홈런 시즌이 15번,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은 47개(1971) 최저는 은퇴 시즌이던 1976년 10개
150+ 안타 시즌이 17시즌입니다.(200+시즌은 3시즌) 통산 타율 305, 3,771안타 (피트 로즈 타율 303, 4,256안타)
700+홈런과 3,500+안타를 기록의 유일한 선수
약본즈 762홈런 2,935안타
루스 714홈런 2,873안타
약로드 696홈런 3,115안타
메이스 660홈런 3,283안타
진행 중인 푸홀스는(4월 26일 어제까지) 666홈런 3,249안타
현역인 푸홀스는 10년 계약의 마지막 시즌입니다.(연봉 3천만 달러) 얼마 전에 은퇴 뉴스가 나오기도 했는데 어찌 되려나요
통산 타수
1위 피트 로즈 14,053
2위 애런 12,364
3위 야스트렘스키 11,988
4위 칼 립켄 주니어 11,551
5위 타이 콥 11,440
통산 득점
1위 리키 핸더슨 2295
2위 타이 콥 2,245
3위 본즈 2,227
4위 애런, 루스 2,174
통산 안타
1위 피트 로즈 4,256
2위 타이 콥 4,189
3위 애런 3,771
4위 스탠 뮤지얼 3,630
통산 타점
1위 애런 2,297
2위 루스 2,214
3위 푸홀스 2,110(4월 26일까지)
4위 A-로드 2,086
보통 기록들이 5걸 10걸 못해도 20위 내에는 랭크가 되어 있는데, 볼넷, 삼진은 20위권 밖이더군요
볼넷
27위 1,402
삼진
23위 알폰소 소리아노 1,803
48위 SSG CHOO 1,579
112위 행크 애런 1,383
124위 조이 보토 1,356
통산 WAR(포지션 플레이어)
1위 본즈 162.7
2위 루스 162.1
3위 메이스 156.1
4위 타이 콥 150.9
5위 애런 143.1
사이즈모어 10년 WAR 27.8
SSG CHOO 16년 34.5
추신수 라인에
숀 그린 34.7, 제프 시릴로, 알렉스 고든, 켄 그리피 시니어, 데릭 리 34.5
브라이스 하퍼 10년 34.3
행크 하면 이 선수 빼놓을 수 없죠
본명은 Hyun Choi Conger이고, 행크는(Hank) 별칭, 할아버지가 행크 애런 같은 타자가 되라고 지은 별명인데, 선수 등록명으로 사용했다고.
KBO가 출범했던 1982년 8월과 10월 2차례 방문하고 10월엔 이벤트 경기를 했던 기록이 있는데
사연은 당시 프로야구 붐업 차원에서 6월부터 애틀랜타와 접촉을 시도했고 8월 방문은 애틀랜타 마이너리그 선수 관리 담당 부사장 직책의 행크 애런이 내한해서 협의를 했고
10월 방문은 삼성그룹 초청으로 성사가 돼서 제일제당 백설햄 유니폼을 입었었네요
8월 방문 때는 지금은 다 없어진 동대문 구장(삼성-롯데)과, 도원 구장을(삼성-삼미) 방문해
타격 기술을 알려 주기도 하고, 8월 30∼31일 삼성 선수들을 2시간씩 지도해 주기도 했다는군요
8월 29일 신세계 백화점 사인회에는 경찰 추산 2만 명이 운집했다는 기사도 눈에 띄는군요
10월 방문 때 마이너리거, 은퇴선수들과 함께, 방문 단장으로 입국해
8번의 경기를 서울과 대구에서 했습니다 (잠실 6경기, 대구 2경기, 3승 1무 4패)
10월 16일 VS OB 베어스 잠실 3:3 무
10월 17일 VS MBC 청룡 잠실 5:3 MBC승 김재박 2타점 적시타
10월 20일 VS 삼성 대구 13:5 ATL승 은퇴한 52세의 "어니 뱅크스" 만루홈런 기록
10월 21일 VS 삼성 대구 9:0 ATL승 이선희 선수 완투패
10월 23일 VS 올스타 잠실 1:0 한국승 김재박, 이광은의 연속 안타로 득점
10월 24일 VS 올스타 잠실 10:0 ATL승
10월 26일 VS 올스타 잠실 4:3 한국승 김일권 내야안타 출루 후 도루, 윤동균의 끝내기 안타
10월 27일 VS 삼성 잠실 4:2 삼성승 배대웅, 함학수, 오대석의 활약
점수 확인차 기사 검색하다 보니 해외여행 갈 수도 없는 1982년에도 월드시리즈 정보쯤이야 가뿐했네요.
애초의 약속은 6차전이었던가 봅니다
기사에 따르면 행크 애런 단장의 제의로 26일 18:00시에 또 한 번 경기를 하기로 했고, 80년대에 학교 다닌 분들은 정부 지침에 의해 소풍, 견학, 수학여행 코스로 학생시절 방문한 기억이 있는 독립 기념관이 있었지요 그 독립 기념관 건립자금으로 3차전 개런티를 내놨다네요
1999년부터 MLB에 각 리그 순수 공격 지표만으로 선정하는 행크 애런 상이 도입됐죠
1999년 첫 수상 선수들은
AL CLE 매니 라미레즈 44홈런 165타점
NL CHI 새미 소사 63홈런 141타점
지난해에는 화이트삭스의 호세 어브레이유, 애틀랜타의 프레디 프리먼이었지요
가장 많이 수상한 선수는 A-로드, 보스턴 선수들은 5회 수상 기록으로 가장 많이 수상한 팀 기록 보유
3회 배리 본즈
2회 트라웃, 옐리치, 스탠튼, 오티즈, 미기, 호세 바티스타, 푸홀스, 지터, 매니 라미레즈
1973년
39세의 베테랑 애런은 9월 29일 경기에서(161번째) 4번(LF)으로 3안타(1홈런) 경기를 치르고(통산 713호)
시즌 1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루스의 714호 기록을 눈앞에 뒀습니다.
시즌 최종전이 열린 9월 30일 일요일 (392타석에서 40홈런을 기록중)
휴스턴과의 경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루스의 기록과 동률인 714호를 기대했지만 , 3안타 경기였지만 홈런은 기록하지 못하고 시즌 종료
상대팀 휴스턴의 감독이 리오 더로셔였습니다. (1905년 7월 27일~1991년 10월 7일)
선수 경력 플레잉 코치, 감독 (1925~1945년, NYY, CIN, STL, LAD)
감독 경력 (1939~1976년, LAD, SF, CHI, HOU, NPB 세이부 1년 1976)
MLB 감독 성적 2,008승 1,709패, 선수 경력에서 보듯 당대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팀 메이트이기도 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애런은 1974년 시즌이 시작될 때 자신이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는 협박의 고충을 뼈 있는 인터뷰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1973~1974년
루스의 기록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 서던 시기라 응원의 편지도 있었지만 협박 편지가 극에 달한 시기.
1973년 봄 자신에게 협박 편지가 온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후, 애런의 홈런이 야구 팬뿐이 아닌 국가적인 관심으로 번져 나가자 애런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편지 쓰기 캠페인이 대규모로 진행됐습니다. (1972년까지 홈런 개수는 673개, 루스의 기록은 714개)
1968년 애틀랜타에서 데뷔해서 1976년 다저스로 떠나기 전까지 애런의 동료였던, 휴스턴의 빵 감독님(Dusty Baker)이 애런이 협박편지를 받았을 때 목격한 일을 USA투데이에서 인터뷰 한 내용이 있는데 처음엔 팀원들은 물론이고 구단이나 어떤 곳에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애런이 놀라 편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고, 사람이 없는 트레이닝 룸으로 가서 읽는 것을 봤고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애런은 결코 두려워하지는 않았다고 인터뷰한 내용이 있네요
이 시기에 애런은 협박편지와 응원 편지를 무려 93만 통을 받게 됩니다.
정치인을 제외하고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우편물을 수령했다고 해서 우체국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974년 개막일 이전까지 끊임없는 협박 편지, 살해 위협 속에서 지내게 되는데, 1969년 애틀랜타에 입사해서 구단 직원으로 근무하던 칼라 코플린 콘 이란 분을 개인 비서로 고용하게 됩니다(MLB 최초 개인 비서 고용)
업무 처리를 똑 부러지게 잘 처리하던 분이셨는지 구단의 소개로 애런과 비서 계약을 맺었는데 이분이 일반 업무를 진행하시던 분인 줄 알았는데 조지아 출신으로 당시 뉴욕에서 비서 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여성이시더군요
이분의 업무 중 하나가 애런의 서신관리를 담당하며 구단 양식 편지를, 애런 팬들에게 답장하고 협박 편지는 FBI에 넘기는 일을 했는데 살해 협박, 인종차별은 물론 KKK 두건이 함께 오기도 하고, 애런의 개인 비서가 유대인 여성이라는 뉴스를 통해 알려지자 백인 유대인이 흑인을 위해 일을 한다며 자신에게도 협박 편지가 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비서분은 애런이 밀워키로 이적했을 때도, 밀워키로 이주해 애런을 돕고 사망 전까지도 가까운 관계로 지내게 됩니다.
결혼식에도 참석했고, 비서분 딸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기도 하며 몇 년 전까지도 크리스마스엔 플로리다에서 가족들이 만나 휴가를 보낼 정도로 친밀한 관계로 지냈는데 애런은 자신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하네요
비서분이 회상하는 애런은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고 종교도 중요하지 않았고, 50년 동안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맞이한 개방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고, 그녀에게 애런은 그런 존재였다고 합니다.
애런은 1월에도 전화를 걸어 첫 번째 백신 접종을 받았다고 말하고 오랜 친구인 그녀에게 곧 만나자는 이야기도 했었다고 하네요
비서분의 딸이 초등학교 시절 헬렌 켈러의 전기를 쓰는 숙제가 있었는데 표지에 홈런왕 애런의 사진이 있는 책을 발견한 딸은 혼자만 애런의 전기로 숙제를 하고 싶다고 선생님에게 대답한 일이 있었다고 하네요 놀란 선생님이 이유를 묻자, 애런은 내 삼촌이에요라고 대답을 해 걱정이 된 담임 선생님과 지도 카운슬러는 학부모 상담을 위해 비서분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피부색도 한몫을 했다고)
그래서 두 가족의 관계에 대해 선생님에게 설명해 주고 실제로 애런을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해 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서분이 애런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니 행크 애런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으며 좋아했다고, 생전 애런은 그 이야기를 종종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때 협박 편지가 수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려주는 언론계의 일화도 있는데요
당시 애틀랜타 저널의 스포츠 편집장으로 일하던 루이스 그리자드는 애런이 루스 기록을 추격하는 경기를 취재하는 언론인들을 흑인 애호가라고 부르는 수많은 협박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루이스 그리자드는 홈런 기록을 취재하는 동안 애런이 살해될까 봐 사망 기사를 작성해 놓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1974년 4월 4일 목요일, 개막전 원정 경기, VS 신시내티, 리버 프런트 스타디움
4번(LF) 1회초 주자 1, 2루 상황, 잭 빌링햄에게 좌익수 방면 3점 홈런으로 루스의 기록과 동률
714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Cxe_NeNZFI
영상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홈 베이스에 도착할 때 동료 선수들 사이에 파묻히는 애런에게, 신시내티 포수 조니 벤치는 축하의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고 하는데 영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네요
1974년 4월 8일 월요일, 홈경기 VS 다저스
개막 후 시즌 4번째 경기에서 4번(LF)으로 출전 4회말 주자 1루 상황에서 ,알 다우닝의 2구를(1볼 상황) 투런홈런으로 연결 대기록을 작성
715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jqYThEVoSQ
715홈런을 기록했을 때 다저스측 중계는 역시 빈 스컬리의 음성입니다.
당시 홈구장 애틀랜타 풀턴 카운티 스타디움은 브레이브스와 NFL 애틀랜타 팰컨스의 홈구장으로 32년간 사용되다가 1997년 8월 2일에 725KG의 폭발물로 30초 만에 철거했네요.
그후 터너 필드의 주차장이 되는데 역사 짧은 미국은 우리처럼 무조건 막 없애지는 않고 이벤트를 잘하죠 당시 공이 넘어간 펜스 쪽을 이렇게 남겨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풀턴 카운티 스타디움의 개장 첫 홈런 기록은 조토레가 가지고 있네요
플턴 카운티 스타디움보다 더 짧은 기간 사용했던 홈구장 터너필드를 떠나, 새 홈구장 SunTrust Park를 2017년부터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죠 옆에 건설 한 줄 알았는데 제법 떨어진 위치였네요
중계방송에서 터너필드는 지역 대학팀이 쓴다고 들은 게 기억나 찾아보니 야구장이 아닌
조지아 주립 대학교 풋볼팀을(Panthers) 위해 개조해서 사용 중이네요(Center Parc Stadium)
이곳 주소를 애런의 홈런 개수와 이름을 넣어 사용 중입니다. 755 Hank Aaron Dr SE, Atlanta, GA 30315
루스의 기록을 넘어선 1974년 시즌을 마치고 밀워키 브레이브스 시절의 연고지 팀인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을 합니다.
당시 밀워키 구단주는 훗날 MLB 커미셔너가 되는 버드 셀릭이고 1998년까지 밀워키의 구단주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고 계시는 일이죠 밀워키 출신의 버드 셀릭이 창단 1년 만에(1969년) 자금난이 생긴 시애틀 파일럿을 인수하고 고향 밀워키로 연고 이전을 합니다(1970~1998년 구단주)
애틀랜타로 연고 이전한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애런 팬이었던 셀릭은 1975~1976년
지명타자를 할 수 있는 아메리칸리그에 속한 자신의 팀으로 1974년 11월 2일 트레이드 영입을 합니다. (연봉 24만 달러 2년 계약, 총액 48)
애런은 2년을 뛰었을 뿐이지만 밀워키 브루어스에서도 영구결번 지정이 됩니다.
로빈 욘트가 많은 프랜차이즈 기록을 가지고 있고, 팀 레전드이지만 애런도 영구결번을 가지고 있고, 야구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보시면 기억하시는 밀워키 전담 중계의 밥 유커님도 명전 헌액자 (밀워키 명전, 쿠퍼스 타운 모두)
밥 유커 이분은 야구뿐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만능 엔터테이너이시죠 밀워키가 고향이고 학교도 밀워키에서 졸업, 마이너 팀부터 밀워키에서 시작, 영화 메이저리그에서 인디언스의 성적이 바닥이라 초반엔 술 마시며 중계하기도 하고, 실제 빅리거 생활도 하셨고 (데뷔팀은 밀워키 브레이브스) 통산 타율 2할에 홈런 14개이고 은퇴 후엔 여러 일을 하시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건 밀워키 경기 중계입니다.
밀러파크 홈플레이트 상단 관중석 쪽엔 조형물도 있고(우리로 치면 전에 잠실 네이비석 상단에 있던 흡연부스 위치쯤 되는 것 같습니다.
1975~1976년 밀워키 브루워스
1975년
5월 1일 목요일 홈경기 카운티 스타디움 VS 디트로이트
5번(DH)출전, 세 번째 타석에서 역사적인 타점을 기록 합니다.
2회말 싱글
3회말 싱글, 타점, 타이기록
5회말 더블, 타점, 2루 주자 로빈 욘트의 득점으로 대기록 작성
7회말 싱글
애런은 루스의 역대 1위 기록, 2,214타점 기록을 넘어섭니다.
이경기에서 2년차 로빈 욘트는(19세) 3안타 경기(홈런, 2 루타, 4 타점)를 했는데, 인터뷰 말미에 욘트에 대해 진짜배기 선수가 나왔다고, 엄청난 재능이 있는 선수라 같이 뛰는 것이 즐겁다고 평가를 했는데 역시 욘트또한 대선수가 되지요
욘트가 태어났을 때 애런은 이미 40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시기, 욘트 1955년 9월 16일생(1974년 18세 201일 데뷔), 애런은 54년 데뷔
당시 타점 기록을 세운공을 잠깐 받아본 후 당시 단장에게 넘겼고 단장은 바로 쿠퍼스타운으로 보내서 지금도 쿠퍼스타운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2017년 선 트러스트 파크 개장을 하며 새로운 동상이 들어섰고
터너 필드에 있던 기존 동상은 카운티와 구단 간의 문제인지 옮겨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1982년 명전 헌액 406/415 (97.8%)
당시 97.8% 득표는 98.2%를 득표했던 타이 콥 다음으로 높은 득표였습니다.
단 2명이 입성한 해인데 써니 김선우 님이 싫어하는 프랭크 로빈슨도 첫 턴 헌액 370/415 (89.2%)
끝으로 1월 22일에 돌아가신 후 지역 스포츠 팀들이 애런을 기리기 위해 연합 계획들을 발표했습니다.
NFL 애틀랜타 팰컨스
MLS 애틀랜타 유나이티드 FC
조지아 공대 풋볼팀
트리플 A팀 귀넷 스트라이퍼스(애틀랜타 트리플 A, 조지아주 연고) 4팀은 21시즌 44번을 비우기로 했고
ECHL 리그의(아이스하키 마이너리그) 애틀랜타 글래디 에이 터즈는 22시즌까지 애런의 44번을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NBA 애틀랜타 호크스의 경우 44번은 이미 2017년 영구결번, 피트 마라비치(Pete Maravich)
★페르난도 발렌수엘라(Fernando Valenzuela)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앙구아메아(Fernando Valenzuela Anguamea)
올스타 6회, 골글1회, 실버슬러거 2회, 신인상, 사이영 동시 수상(1981), 월드시리즈 우승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이야기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1975년 다저스 스카우트팀에 합류한 마이크 브리토, 쿠바 출신으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 출신입니다.
마이크 브리토 스카우트는 1979년 발렌수엘라를 발굴한 스카우트입니다.
발렌수엘라는 1977년 멕시코리그 마요스 데 나베호아 (Mayos de Navojoa) 팀과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는데
2년 뒤인 1979년 주시하던 유격수가 있어 방문한 경기에서 브리토 스카우트는 발렌수엘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봤을 때 발렌수엘라가 볼 3개를 연거푸 던져 볼 쓰리 카운트에서, 3개의 스트라이크를 연속으로 던져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는데, 그 시점부터는 체크하러 갔던 유격수는 잊고 발렌수엘라만 봤다고 합니다.
브리토씨의 스카우트 능력 덕에 다저스는 1979년 7월 6일 소속팀에 거액 12만 달러 이적료를 지불 후 계약을 하고 발렌수엘라는 1979년 계약 직후 배정된 싱글 A 팀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리지만 (3경기 선발, 1승 2패, 평자 1.12, 13볼넷, 18삼진)
다저스 단장은 직구와 커브 조합의 단조로운 투구 패턴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구종이 필요하다 판단하고 다저스팀(메이저, 마이너)에서 유일하게 스크루볼을 던지는 바비 카스티요에게 스크루볼을 배우게 합니다.(결국 이 판단은 신의 한 수가 됩니다)
스크루볼을 배우기 위해 애리조나 교육리그에 가게 되는데, 류현진의 체인지업 체득과 같은 천재적인 감각이 있었는지 30분 만에 스크루볼을 그립/투구를 배우게 됩니다.
지금은 은퇴한 마이크 브리토씨가 다저스에 선물한 마지막 선물은 이 선수입니다.
1980년 더블 A팀 샌안토니오에 배정되어 현역 시절 좌완이었던 다저스 선배 론 페라노스키 투수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기량을 늘리고, 9월 로스터 확장 때(80년 9월 15일) 승격 데뷔합니다. 더블 A 성적, 13승 9패, 평자 3.62, 174이닝, 156피안타(4피홈런), 70볼넷, 162삼진
1980년 9월 15일 애틀랜타 원정 경기에서 6회에 올라와 2이닝을 던졌고, 불펜으로만 10경기에 등판 17.2이닝을 던지고 2승 무패로 시즌을 마감합니다.
1981년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에 6경기(3선발), 2승 1패, 평자 3.33을 기록하고 개막 로테이션 합류 통보를 받게 되고, 그때까지도 발렌수엘라는 자신을 스카우트한 브리토씨의 집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3~4 선발이었던 발렌수엘라는 개막 하루 전, 4월 8일 다저 스타디움에서 라이브 피칭을 하다, 그만 던지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내일 휴스턴과(4월 9일 목요일) 개막 선발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개막 선발 예정 제리 러스가 부상을 당하고, 버트 후튼 마저 휴식 일이 부족해 시즌을 개막 1선발로 시작하게 됩니다.
1981년 시즌은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6월 12일부터 8월 9일까지 경기가 열리지 못했던 시즌입니다.
그래서 정규 시즌 경기 수는 110경기의 단축시즌으로 진행.
발렌수엘라는 13승 7패, 평자 2.48, 11완투, 8완봉, 192.1이닝, 180삼진, 140피안타, 61볼넷으로
전무후무한 기록인 신인상과 사이영상을 동시 수상합니다. (삼진왕을 차지한 NL 최초의 신인 기록은 덤)
1981년 NL 사이영상 순위(투표)
2 톰 시버 (CIN)
3 스티브 칼튼(PHL)
4 놀란 라이언(HOU)
5 브루스 수터(STL)
NL MVP는 5위를 했는데 수상자는 마이크 슈미트(PHL, 3B) 였네요
절대반지 획득(1981) VS 양키스,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다저스 우승) 발렌수엘라는 3차전 완투승을 했습니다.
1981년 다저스 멤버들이 좋았네요, 토미 라소다 감독을 필두로
훗날 LAA 감독되는 마이크 소시아(C)
훗날 MIL 감독되는 데이비 로페스(2B)
훗날 LAD 감독되는 빌 러셀(SS)
훗날 SF 감독되고 현재 현역 감독 더스티 베이커(LF)
난봉꾼 스티브 가비(1B), 가을 월드 시리즈 MVP가 되는 론 세이(3B)
선발 로테이션 (4선발 체제)
개막전 선발 발렌수엘라
훗날 200승을 넘게 찍는 제리 러스,
훗날 박찬호님의 존경을 듬뿍 받는 버트 후튼,
훗날 선수로서(1990년) 1개 코치로서(2001년) 1개의 월시 반지를 더 획득하는 밥 웰치, 밥 웰치는 1990년 AL 사이영상을 수상합니다(2위는 약켓맨) 2001년은 디백스 투수코치로 또 하나의 반지를 획득합니다.
신인상과 사이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선수라서 1981년 시즌 개막전부터의 성적이 대단합니다.
1981년
4월 9일 목요일 HOU 9이닝 5피안타 2볼넷 5삼진 완봉 2:0승 (개막전)
4월 14일 목요일 SF 9이닝 4피안타 2볼넷 10삼진 1실점 완투 7:1승
4월 18일 토요일 SD 9이닝 5피안타 무볼넷 10삼진 완봉 2:0승
4월 22일 수요일 HOU 9이닝 7피안타 3볼넷 11삼진 완봉 1:0
4월 27일 월요일 SF 9이닝 7피안타 4볼넷 7삼진 완봉 5:0
5월 3일 일요일 MON 9이닝 5피안타 무볼넷 7삼진 1실점 승 6:1
(몬트리올 원정 경기였는데 9회까지 1실점 후 내려갔고 10회초 다저스 공격에서 5득점)
5월 8일 금요일 NYM 9이닝 7피안타 5볼넷 11삼진 완봉 1:0
5월 14일 목요일 MON 9이닝 3피안타(2홈런) 1볼넷 7삼진 2실점 완투 3:2
첫 패를 당하기 전까지 8경기 성적이
8승 무패 평자 0.50, 72 이닝, 43 피안타(3홈런), 17볼넷, 68삼진 (7완투 5완봉)
5월 18일 월요일 PHL 7이닝 3피안타(1홈런) 2볼넷 6삼진 4실점 첫 패 0:4
개막 첫 경기부터 내리 8연승과 9이닝을 모두 던졌는데 앞으로도 이런 기록은 안 나올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중 후반 다저스 우완 에이스이며, 1988년 사이영상과 월시 반지를 겟 하는
불독 형님의 크레이지 6게임 또한 안 깨질 것 같습니다.(5완봉, 1완투 59이닝 무실점)
1988년 시즌 불독 형님 기록도 잠깐 짚어 보자면
8월 30일 화요일 MON 9이닝 6피안타 2볼넷 9삼진 2실점 4:2 완투
몬트리올 원정 경기인 이 경기부터 대기록이 시작됐습니다.
5회말 싱글1, 더블2, 에러가 겹쳐 2실점을 하고 6회부터 무실점이 시작됩니다.
9월 5일 월요일 ATL 9이닝 4피안타 1볼넷 8삼진 3:0 완봉
9월 10일 토요일 CIN 9이닝 7피안타 3볼넷 8삼진 5:0 완봉
9월 14일 수요일 ATL 9이닝 6피안타 2볼넷 8삼진 1:0 완봉
9월 19일 월요일 HOU 9이닝 4피안타 무볼넷 5삼진 1:0 완봉
9월 23일 금요일 SF 9이닝 5피안타 2볼넷 2삼진 3:0 완봉
9월 28일 수요일 SD 10이닝 4피안타 1볼넷 3삼진 1:2 다저스 패
(10이닝을 던지고 0:0 상황에서 내려갔고 연장 16회 끝에 다저스의 패)
9월 28일 경기가 팀의 159번째 경기였고 신시내티를 7게임 차로 앞선 서부 1위 다저스는 동부 1위 메츠와의 NLCS를 위해, 허샤이저의 정규 시즌은 막을 내립니다. (이렇게 59이닝 무실점 경기를 달성합니다)
1989년 허샤이저의 정규 시즌 무실점 기록은 시즌 시작과 함께 바로 깨집니다.
4월 5일 수요일에 신시내티와의 오프닝 시리즈, 개막 2번째 경기에 나와 ,1회말 베리 라킨에게 중견수 방면 안타를 맞은 후 투아웃까지 잡았지만, 레즈의 5번 토드 벤징거(1B)에게 우익수 쪽 안타를 맞고 실점합니다.
1986년 시즌 발렌수엘라는 21승 11패, 평자 3.14, 20완투, 3완봉, 269.1이닝, 226 피안타로 사이영 2위
커리어 최다승 시즌에도 수상을 못해 더 뛰어난 성적으로 상을 받은 선수가 누군가 보니 휴스턴의 마이크 스콧이었는데 성적이 18승 10패, 평자 2.22, 7완투, 5완봉, 275.1이닝, 피안타 182개였네요(랭겜에선 잘 얻어 맞는데)
노히트노런 경기도 1경기 있습니다. 1990년 6월 29일 홈에서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6-0 노히트 경기, 이후 1990년까지 다저스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하게 되지만 다음 해 봄 토사구팽 신세가 됩니다.
평균자책을 비롯해 모든 스탯이 떨어진 시즌을 마치고 맞이한 1991년, 스프링캠프 기간 다저스는 발렌수엘라를 방출합니다.
방출이란 것이 프로선수의 숙명이기는 하지만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발렌수엘라를 예우도 없이 캠프 기간 막바지에 (1991년 3월 28일) 방출해 버립니다.
물론 언론을 향한 오말리 구단주, 라소다 감독 등 다저스 수뇌부의 팀에 대한 헌신 같은 립 서비스도 있었지만 멕시코 사내의 마음에 상처를 준 샘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막 직전 방출되어 새로운 팀과 계약을 맺는데 어려움을 겪고 5월 20일이 되어서야 애너하임(LAA)과 마이너 계약을 맺게 되고, 승격 후 2게임을 던지고 모두 패전(2패) 그리고 다시 방출
6월 7일 DET 5이닝 9피안타 5실점 패전 0:5
6월 12일 MIL 1.2이닝 5피안타 5실점 패전 0:8
1992년 시즌은 메이저리그가 아닌 멕시코리그에서 뛰기도 하고, 이후 흔히 말하는 저니맨이 됩니다.
이후 메이저리그는 BAL, PHL, SD, STL에서 1997년 (36세)까지 뛰고 은퇴했는데 96년 SD 시절 13승 8패, 평자 3.62 기록했을 뿐, 예전 전성기 시절과는 동떨어진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발렌수엘라는 17년 경력, 173승 153패, 2,074 삼진의 통산 성적
다저스에서의 11년 성적이 141승 116패일 정도로 다저스 소속일 때 전성기였습니다.
올스타 6회(1981~1986)
골드 글러브 (1986)
실버슬러거 2회(1981,1983)
통산 타율 200, 187안타, 10홈런, 84 타점입니다. (더블 26, 트리플 1) (볼넷 8, 145삼진)
라소다 감독은 발렌수엘라를 대타 기용을 자주 했었네요 19타수 7안타(타율 368)
1991년 방출 상황의 앙금으로 발렌수엘라는 다저스와 척을 지는 기간이 꽤 길었습니다.
구단의 공식행사 초청, 캠프 기간 초정도 응하지 않고 거절하며 지내다 다저스 구단과 화해, 재결합은 2003년 다저스 스페인어 라디오 해설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집니다.
스페인어 중계 부스에서 하이메 자린씨와 합류를 하는데 이분이 1959년부터 다저스 히스패닉 중계를 하신 분으로 스컬리옹 처럼 다저스의 산증인이시죠 4천 경기 연속 중계를 이어가시다 기록이 중단된 것은 1984년 LA 올림픽 스페인어 중계를 위해 부스를 비울 때뿐이었습니다.(1980~1981년은 발렌수엘라 통역을 하기도 했고요)
발렌수엘라는 이후엔 다저스 공식 행사에 자주 나오기도 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WBC 대회 때면 멕시코 대표팀 투수코치로 나오기도 했었죠 (06, 09, 13, 17)
2015년에 귀화해서 미국 시민이 되었고, 여담으로는 생년월일이 1960년 11월 1일로 기재되어 있지만, 푸홀스처럼 나이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1981년 신인 시즌 동안 여러 해설자들이 나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스물이 아닌 몇 살 더 많다는 의혹, 추측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너무 잘해서 나온 타팀 중계진의 시샘 인지도)
2017년에 멕시코 리그의 Tigres de Quintana Roo 팀을 인수했는데 단독인지 근래 유행하는 투자자 그룹의 일원인지는 모르겠네요
찾아보니 신생팀도 아니고 멕시코 칸쿤이 연고지역이고 1955년에 창단된 팀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선수가 몇 있더군요
가르시아도 뛰었고
칸투는 2014년 두산 베어스에서 뛰었는데, 그 앞뒤 2013년 2015년을 뛰었고
자기관리가 뛰어나지만 삼계탕을 너무 좋아해 메츠 시절 찬호 형에게
삼계탕 먹자고 했던 훌리오 프랑코도 뛰었던 팀이고 (롯데 코치 계약 만료로 한국 떠난다는 기사도 본 것 같네요)
다저스에서 데뷔해서 공식적인 MLB 경력이 2005년 플로리다가 마지막이었던 이스마엘 발데스 선수는, 은퇴 후 뜬금없이 2013년에 뛰기도 했었네요
바이다 블루 선수카드와 비슷한 능력치의 최종 버전이 나올지 더 높게 나올지가 사용빈도를 정해주겠네요
이닝수와 삼진수를 보면 (2,930이닝 2,074삼진) 샌디에서 최종카드에 어떤 능력치 줄런지요.
다저스에서 34번이 영구결번 지정은 안 되어 있지만 발렌수엘라가 떠난 90년 이후 늘 비어 있는 번호입니다.
멕시코 리그에서는 2019년 7월 6일 멕시코 야구 영웅 발렌수엘라 헌정기념으로 모든 선수들이 34번을 달고 경기를 하는 이벤트도 있었네요
발렌수엘라 기록을 찾다 멕시코리그를 살펴보니 황금장갑 수집가 오마 비즈켈이 멕시코리그 Toros de Tijuana 팀의 감독을 하고 있었네요
20에서는 최종 버전 업데이트가 없었는데 21에서는 어찌 되려나요
2012년 토론토를 마지막 팀으로 은퇴했는데(45세) 현역 시절에 비해, 체중이 1KG이 늘어났을 뿐이라네요 ㄷㄷ(저는 부끄럽네요)
2017년 10월 25일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는
1950~2016년까지 다저스 경기 중계를 하고 은퇴하신 빈 스컬리옹 께서 소개 멘트를 하고(찡합니다)
포수였던 스티브 예거(1972~1985 LAD, 1986 SEA)가 시포자로, 발렌수엘라는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시구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GznFEP2_nc
시포자인 스티브 예거는 요즘으로 치면 수비형 포수라고 불리는 유형입니다.(영화 메이저리그 1편에서 인디언스 타격코치 역할이 스티브 예거입니다) 루 브록은 예거를 게임에서 가장 많은 견제구를 던지는 포수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수비는 물론 경기 운영을 잘했고 견제 송구 속도가 98마일을 기록하기도 했고 젊은 투수를 리드하는 능력으로 높이 평가되는 선수였습니다.
팀 동료인 너클볼러 찰리 허프가 던지는 날에는 포구를 쉽게 하기 위해 제작한 확대된 포수 미트를 사용하고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포구하는 스타일을 유지하는 등 아이디어도 좋았는데, 스티브 예거로 인해 현대 야구에서 포수 마스크 목 보호대가 생기게 됩니다.
1976년 팀 동료 빌 러셀이 연습에서 땅볼을 치고 방망이가 산산조각 났는데, 방망이 헤드 부분의 부서진 조각이 스티브 예거의 목에 부상을 입힙니다.(목 부상뿐이 아니라 식도를 뚫어 수술을 할 정도의 부상이었습니다)
96~98년 다저스 감독이던 빌 러셀 기억들 하시죠?
부상 이후 스티브 예거가 다저스 트레이너 Bill Buhler에게 부상 방지를 위한 의견을 나누고 (대응책) 얼굴만 커버하는 마스크에서 턱밑 목부분까지 내려오는 보호대가 있는 마스크를 발명하고 특허를 받습니다.
이후 메이저리그뿐이 아니라 전체 야구리그의 포수 및 심판 장비의 필수 보호 장비 역할을 하고 있지요
과거의 포수들 마스크
Bill Buhler 이분이 1951~1995년까지 다저스에 운동 트레이너로 입사해서, 수석 트레이너로 은퇴하기까지 44년간 다저스와 함께 하신 트레이너이시고 은퇴 후 1996년 미국 선수 트레이너 협회 명예의 전당에도 공로를 인정받아 헌액 되셨습니다.
프랭크 조브 박사도 돌아가시긴 했지만 후학들이 조브 클리닉을 지금도 운영 중이고요
스톡킹 봉중근편 보니 봉해설도 엘지 시절 조브 클리닉에서 수술했더군요
NATA(National Athletic Trainers Association) "미국 선수 트레이너 협회" 회원으로 있다가
PBATS(Professional Baseball Athletic Trainers) "프로 야구 트레이너 협회"를 만드는 창립자입니다.
현재 MLB 30팀과 마이너 164팀을 위한 트레이너 교육을 위한 협회, 선수가 고용한 개인 트레이너가 아닌 중계방송 중 보이는 팀 트레이너들은 PBATS 회원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스티브 예거는 2012~2018년 다저스에서 코치를 하기도 했고, jersey Mike's Subs 프랜차이즈 공동 대표이기도 합니다 (샌드위치 체인) 그리고 2002년 드래프트에서 내야수로 지명받고 마이너에서 3루 수비를 보던 러셀 마틴을 포수 포지션으로 포지션 전환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준 인물인데요 이후 마틴은 공수를 겸비한 최강의 포수로 클 재목이란 평가를 받으며 2006년 데뷔합니다.
★프린스 필더(Prince Fielder)
프린스 시미언 필더(Prince Semien Fielder)
너란 남자 갖고 싶다
지난 시즌이 단축 시즌 이어서 연봉이 줄어든 현역 선수들 대신 최고 연봉자였죠 2,400만 달러
잔여 계약이 2020년을 끝으로 끝났고 (2012년 1월 26일 디트로이트와 9년 2억 1,400만 달러) 21에서 바로 나오네요
부상으로 4년이나 남은 계약을 남겨두고 은퇴해서 굵직한 기록들은 없지만 단기 임팩트는 강렬했던 선수였는데, 개인적으로 밀워키 시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오른손 잡이였지만 야구를 시작하게 되면서 왼손의 이점을 알고 있는 아버지 세실 필더의 영향으로 왼손 잡이로 야구를 하게 됩니다.
우타 아버지
2002년 6월 4일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1라운드 픽을 받고 계약을 합니다(전체 7번)
이때 계약을 하며 받은 (계약 보너스 20만 달러) 돈으로 인해 훗날 아버지와 의절? 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게 되죠
(도박 중독에 빠져 있던 세실 필더가 아들의 계약금마저 도박에 사용)
카드 게임이야 라커에서 하는 장면도 방송에 많이 나오고 비행기에서 한다는 사실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황재균 선수 스톡킹편 보니 자이언츠 선수들 카드 치는 이야기에서 금액 이야기 나오는데 웃기더군요(달러 뭉치, 너 메이저리거인데 왜 돈 없냐고 어서 끼라고)
뉴스 검색을 해보니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관계 회복을 원한다는 기사들이 나오기도 했던데 디트로이트와 대박 계약을 맺은 후로는 인터뷰도 하고, 뉴스 기사가 가장 많더라고요 (2012년부터 2013년)
올스타 6회, 실버슬러거 3회, 올스타전 MVP(2011년)
2011년 올스타전 MVP 수상을 했는데요 4번(1B) 출전
4회말 공격에서 C.J 윌슨에게 결승타가 되는 3점 홈런을 기록하고 수상합니다(NL 5:1승)
2011년 MVP 수상자가 후에 약물 복용자로 밝혀 저 충격을 줬던 라이언 약브론 NL MVP 시즌에 맷 캠프에 이어 3위 표를 받았던 것이 가장 높은 순위였습니다.
올스타전 홈런더비도 2번 우승자인데, 양리그 소속으로 수상한 최초의 선수 기록과 밀워키 선수 최초 기록
2009년 우승(소속팀 MIL) 503FT(153M) 홈런도 있었습니다.( 결승 상대, 넬슨 크루즈)
2012년 우승(소속팀 DET) (결승 상대, 호세 바티스타) (요에니스 세스페데스와 같은 2차례 홈런 더비 우승)
2013년 2월 12일 Topps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야구 카드를 공개했습니다.(가로 18미터, 세로 27미터)
프린스 필더가 모델이었는데 회사 홍보 차원에서 진행한 이벤트였다고 하네요
2013년 11월 20일 이안 키슬러, 연봉 보조받는걸(3천만 달러) 묶어 텍사스로 트레이드됐죠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재미있는 기록도 달성합니다.
6회말 LAA 헥터 산티아고에게 우익수 방면 싱글을 치고 텍사스에서 양키스로 떠난 죽빵선생의 득점으로 통산 1천 타점을 기록했는데 아버지와 아들 1천 타점 기록을 두 번째로 작성합니다.
본즈 부자
바비 1,024
배리 1,996
필더 부자
세실 1,008
왕자 1,028
그리피 부자
시니어 859
주니어 1,836
2016년 7월 20일 목 디스크 수술을 받죠 C4-C5
C4-C5, 부위가 이렇습니다 .
2016년 8월 10일 기자 회견을 열어 야구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발표, 은퇴합니다.
162경기 전경기를 뛴 시즌이 4시즌(09, 11, 12, 13)이나 되고
루키 시즌 빼고는 모두 157경기 이상 뛰던 선수라 텍사스 오자마자(2014년 42경기 출전) 바로 드러눕고 2016년 은퇴까지 하게 돼서 놀랍기도 했습니다.
수비도 그렇고 좌타에 오티즈 버전의 카드 느낌이 납니다. (오티즈 보다는 개인적으로 선호합니다)
아버지 세실 필더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이색 기록이 통산 홈런 개수가 319홈런으로 똑같습니다.
그리고 시즌 50개의 홈런을 기록한 유일한 부자 듀오
세실 1990년 DET 51개 (본인 단일 시즌 최다 기록)
왕자 2007년 MIL 50개 (본인 단일 시즌 최다 기록)
2007년 50개의 홈런은 가장 어린 나이에 50홈런을 친 NL 기록입니다(23세)
아버지의 직장에 자주 놀러 오던 필더는 빅리거 선수 아들 혜택을 받는 모습도 있는데요
아빠와 아들
아빠가 디트로이트 소속이던 1996년(7월 31일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긴 합니다만)
필더는 홈경기가 있는 날은 종종 타격 연습을 위해 타이거 스타디움을 찾았는데요
은퇴 후 디트로이트 3루 코치로 합류해 코치 경력을 시작한 테리 프랑코나(당시 37세) 감독이 던져주는 배팅볼로 타격 연습을 하는 12세의 프린스 필더가 나오는 영상이 있습니다.(체구는 김동주나 이대호 느낌)
필더가 메이저리그를 향한 운명이란 걸 보여주는 듯한 영상입니다(단 12세라는 걸 기억해 주세요)
배팅볼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NWa2h0o2Ho
프랑코나 감독이 폭스 스포츠와 필더에 대해 회상하는 인터뷰가 있는데
12살 아이가 그 나이에 그런 파워를 가지는 건 불공평하다 양쪽 타석에서 모두 타격하면서 배팅볼 던져주는 내내 계속해서 안타성 타구를 친다는 걸 상상할 수 있느냐는 회상 (타이거 스타디움의 상단 지붕 쪽으로 홈런을 치기도 했다고)
타이거 스타디움은 이랬죠
건강하시길 왕자님!
★페드로 마르티네스(Pedro Martínez)
페드로 하이메 마르티네스(Pedro Jaime Martínez)
나왔네요 외계인...(본국과 교신중인 행동)
와 이렇게 정성스레 ㄷㄷ 잘봤어용!
네 감사합니다.
대박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추천!!!
닉네임 재미있는 거 만드셨네요 포니테일 강추!!!
추천하고 낼 회사에서 보겟습니다ㅋㅋ
직장인은 그런 재미가 있어야죠ㅋ
저도 선추천 ㅎㅎ 술마셔서 내일 볼게요^^
맛있는 거 드셨네요 어서 코로나 종식돼서 전처럼 편하게 술도 마시고 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네요^^
완전 정성글이네요. 진정한 mlb팬.
다들 야구 좋아해서 하시는 게임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잘 봤습니다. 근데 페드로는 설명이 필요없어서 작성 안 하신건가요? ㅎ
네 그런 것도 있고, 작년에 다른 카드 업데이트 때 페드로 관련해서 쓴 게 있었는데 쓰다 보니 중복된 내용도 있고 해서요 즐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