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고 붙이러 갔다가 구급차 탄 이야기

지난 27일 오전 11시 47분. 일본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하네다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오후 12시 44분. 비상구를 통해 다시 비행기 밖으로 빠져나오게 됩니다.
뒷모습이지만 사진만 보면 승객들의 모습은 매우 침착했습니다. 여유롭기까지 하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도 뭔가 작은 문제가 생긴 줄 알고 사진까지 찍어댔습니다.

어떤 승객들은 아예 커다란 캐리어까지 2개 모두 챙겨서 내릴 정도로 평온한 느낌입니다.
사실 저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엔진에서 나는 연기도 못 본 상태였습니다.
기내에도 호흡기가 내려오거나 연기가 나거나 냄새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비상구에서 내려서 미끄럼틀을 탈 일이 생길 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어쨌든 위험하니 저도 폰은 다시 집어넣고 침착하게 탈출합니다.
여전히 승객들은 소리 지르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질서있게 이동 중입니다.
만약 승객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 으아아아랑루ㅏㅍ 했으면 많이들 다쳤을 겁니다.

모든 승객이 무사히 내린 후 여유롭게 기념 사진 촬영 중입니다. 의문의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습니다.
저기 뒤에는 소방차가 와서 엔진에 난 불을 끄고 있습니다.

맨 끝쪽 비상 탈출 미끄럼틀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으요...

구급대원이 안전한 곳까지 멀리 떨어지라고 해서 뒤로 이동했습니다.

엔진에 난 불은 모두 껐고 이제는 안전하니 안심하라고 구급대원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큰 캐리어로 미끄럼틀을 타면 위험했을 텐데 무사히 탈출한 모양입니다.

승무원들이 승객이 모두 탈출했는지 크로스 체크하고 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 중인데 은근히 분위기 있어 보입니다.
사실은 바람도 많이 불고 비도 내려서 좀 추웠습니다.
그냥 모포 안 덮었는데 지나가는 구급대원마다 모포? 모포? 모포? 모포? 해서 결국 모포 한 장 둘렀습니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기념 사진. 뭔 기념인진 모르겠지만.
저녁에 공항 인터넷으로 겨우 접속해서 뉴스 보기 전까지는 별 사고가 아닌줄 알았습니다.

만일을 대비해서인지 소방차가 많이도 옵니다.

다친 사람들을 위해 임시로 소방대원들이 바닥에 자리를 마련합니다.

저도 미끄럼틀을 타다가 팔꿈치가 좀 쓸려서 반창고 달라고 갔다가 강제로 부상자 리스트에 올라갑니다.
소방대원이란 소방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제 인적사항을 묻고 갑니다.
이날 통 틀어 소방대원과 경찰들에게 제 이름과 생년월일은 20번은 말한 듯합니다.

가까이 마련된 대형 구급차에 몸을 싣습니다.
302명의 승객 중 부상자는 9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부분 가벼운 부상이었지만 한 분은 꽤 심하게 다친 듯했습니다.

한참 대기하다가 병원 이송용 구급차가 와서 환자를 각각 이송합니다.
구급차는 총 3대가 왔습니다.

이 와중에도 정신 못차리고 사진이나 찍고 있습니다. 가까이에 사고 비행기가 보입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구급차에 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타는 구급차입니다.
팔꿈치랑 무릎 좀 다쳤는데 구급차씩이나 타다니, 똘똘한 말투의 여성 구급대원에게 부끄럽다고 하니까
일단 사고는 사고니까 무조건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가야죠.

구급차 창 너머로 아직도 떠나지 못한 사고 비행기가 멀리 보입니다.
구급차 안에서 혈압도 재고 간단한 몇 가지 체크를 하면서 구급대원이 어디가 가장 괴롭냐고 묻길래
몇 시간 동안 화장실을 못가서 방광이 터질 것 같아서 괴롭다고 대답했습니다.

뒤에서는 경찰이 호위를 하면서 구급차가 지나가니 양보해달라고 왜용왜용 방송을 합니다. 부끄러움은 더욱 커집니다.
도대체 저의 하루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반창고 달라고 갔다가 구급차를 타고 병원까지 갑니다.

공항 측에서 연락을 받고 응급실에서 미리 대기 중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저를 맞이합니다.
반창고나 좀 붙여주세요 하니까 처음에는 상처를 좀 보자고 하더니 진짜 소독약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끝입니다.
이 정도 소란을 피울일이 절대 아닌데 제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괜히 미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와 같이 이동한 분들도 다행스럽게 가벼운 상처로 끝났습니다.
조카네 결혼을 위해 한국으로 가던 한국인 부인-일본인 남편 일행이셨는데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으면서 많이 친해져서 남편분과는 대한항공 욕을 참 많이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자니 경찰이 병원에 도착합니다. 사진도 찍고 뭔가 사고 관련으로 적기도 많이 적었습니다.
솔직히 적어야할 게 너무 많아서 오우 와따시 일본어 못 써요우 했더니 한국어로 적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사고 당시 별일 아닌 줄 알았던 저는 여유롭게 영상도 찍어놨기에 경찰 측에 해당 동영상 파일도 공유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한항공 측에서 사람이 와서 택시를 타고 다시 공항으로 이동합니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 시간이 오전 11시 47분이었는데 돌아오니 오후 6시 11분입니다.
저의 하루 일정이 완전히 빵꾸가 나버렸으요. 더 암담한 건 이후로 2시간 더 기다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속이 터지는 일이 많이 발생했지만 땅콩 누나가 무서워서 적진 않겠습니다.

대한항공에서 마련해준 식사입니다. 사실 우메 삼각 김밥은 절대 안 사먹지만 배고파 죽을 거 같아서 먹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삼각 김밥은 한국 삼각 김밥이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대한항공과 공항 측끼리 병원 간 사람들 리스트 공유가 되지 않아서
입국 심사를 할 때도, 게이트 이동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도 매번 다 걸려서
10분~20분씩 마냥 대기해야 했습니다. 입에서 욕이 자진모리 장단으로 흘러나옵니다.

공항에서 사고가 터졌다고 출발 게이트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입니다. 사진 엄청 찍어대던데 블러질 안 하고 그냥 올려봅니다.

드디어 저녁 10시 53분 한국에 도착합니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우루루 나와서 제성합니다를 열창합니다.

공항 쪽에서도 대한항공 직원들이 마중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공항을 빠져나와 집에 도착하니 하루가 지나 28일 새벽 1시입니다.
저의 쓸모 없는 인생에서 하루가 증발해서 기분이 참 좋았으요.

사고가 난 비행기의 티켓(좌)과 새로 발급받은 티켓(우)입니다.
이상, 반창고 받으러 갔다가 구급차 탄 사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