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궁극적으로 재미만 있다면 상관없다.
만화를 볼 때 뭔가 가져가도 좋고 가져가지 않아도 좋다.
만화를 보며 재미가 있었다면, 무엇이 나를 즐겁게 했는지 어떤게 나를 감동시켰는지, 내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정의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저 만화니까.
믿을 뿐이다. 이 만화가 내 삶에 긍정적인 것들을 남겨 주었구나 라는 감상이 내 몸 구석구석 돌았다는 사실을. 그게 없었다면 누구라도 페이지를 닫았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 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가 이 작품을 볼지 말지 결정했다고 여기지만 그게 정말 본인의 순수한 결정이었을까.
분명 만화에서 뭔가 얻었기에 시간을 내어 만화를 보았고 신간을 사서 읽었을 것이고 비용을 들여 상품을 구매하게 했을 것이다.
전부 아니라고 한다면 혹여 이 작품이 나에게 그런것들을 주지 않을 까 하는 기대라도 품게 만들었을 것이다.
만화가 나를 그러도록 만든 것이다.
이 이후의 과정에선 굳이 내가 즐겨본 만화에 대한 작용을 굳이 정의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할 때이다.
다른이들에게 왜 이만화를 보며 감동했는지
왜 이 만화가 재미있는지에 얘기할땐 최소한 왜 재미있었는가 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역부터는 좋으나 싫으나 남을 설득 시키는 단계로 넘어간다.
혼자 한 작품을 보고 감상을 남기는 것 보다 몇배는 더 어려운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이 단계부턴 작품에 대한 이해도 필요 할 뿐더러
작가의 성향과 그걸 본 나의 성향도 대조 해야 하고
메세지와 의도도 파악해야 한다.
개연성의 여부를 따져야 하고 디자인과 배경의 설명까지 어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불특정 다수의 의견과 견해가 한 작품의 세계관에서 만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일부분 공감을 나누고 일부분의 견해가 충돌한다.
객관적인 평가가, 주관적인 의견이 오고가는 지적허영의 소용돌이.
만화는 아이들의 전유물 처럼 여겨졌지만
적어도 24년도엔 그렇지 않다.
만화 황금기에 만화를 접한 어린이들은
이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만화에서 위로와 감동을 찾는다.
어른이 되어 견해가 생기니
당시에 보았던 만화들도 다르게 보인다.
어릴때 이해하지 못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그것들이
고스란히 담겨진 장면들은
이해가 되고서 부터는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선보여준다.
어린 아이들을 감동 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분석해
최고의 장면들만 골라 엄선한 원고들.
작가의 역량과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원고에 올라온 장면들은
좋으나 싫으나 그 작가들이 올려 놓을 수 있는
최고의 페이지 라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사족이 길었지만 결국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이 이것이다.
출판을 거쳐 나온 모든 작품들은 작가 개인의 역량중
최고의 것이 올라왔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은 펜이 원고에 닿았을 때 부터 결정 된 사실이다.
그들이 하루종일 머리를 쥐어짜내 사흘 밤낮으로 연습한 결과를 원고에 옮긴 것이다.
그 안에는 단순 해 보이지만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올라간다.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다져진 공상의 무대에 말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세가지 중 하나의 행동을 선택해 취하면 된다.
그 무대를 즐길것인지.
그 무대를 ㅂㅈ 않을 것인지.
그 무대를 하나하나 뜯어 내 볼 것인지.
내가 가장 추천 하는것은 세번째다.
무대를 하나하나 뜯어 내고 관찰하고 생각해 보는 것.
나름의 정답과 정의를 내리는 것도 좋겠다.
(다만 정의를 내릴 땐 객관적이고 감독주의의 사고로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한가지 도구가 있다면 도움이 될거같다.
“왜 굳이?” 라는 물음을 말이다.
그 작가의 그림에 “왜 굳이?”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면. 그 작가가 영향을 받은 선배 작가가 있을 것이다.
스토리에 “왜 굳이?”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면. 실제로 있었던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캐릭터의 대사에 “왜 굳이?” 라는 물음을 던져본다면. 그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의구심이 드는 모든 부분에 “왜 굳이?” 저런 장면을 만들었을까? “왜 굳이?” 저런 대사를 차용했을까 에 대한 방법을 적용 해 보는편을 추천한다.
아마 대부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계 에는 대체 불가능한 애니메이션의 거장 감독이 존재한다.
수많은 논란을 가진 인물이지만 결과적으로 예술계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준 감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은 배경에 개인적인 견해를 과할정도로 많이 투영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장면은 그가 실제 겪었던 일들을 투영 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방식으로 러닝타임 내내 아주 잘 감춰두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감독이자 저명한 환경 운동가로, 실제 강의 쓰레기를 청소할때 자전거를 건져 올렸던 경험을 투영한 장면으로 유명하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들은 그 장면이 그런 의미를 담았는지 에 대해 쉽게 생각 할 수 없지만
(필자는 여기서 감상이 멈춘다 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알고보니 그런 장면” 이었던 거구나 하는 장면들 투성이이다.
40년 이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편집자로 함께 합을 맞춰왔던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그리는 컷과 페이지 하나하나 모든 장면에 개인적 견해와 의미를 부여하지만 굳이 그 의미를 설명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스즈키 토시오는 매번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해설을 요구하지만 “그런걸 계속 물어보니 애니메이션이 재미가 없어지는 거다.” 라며 투정한다.
그렇지만 스즈키 토시오에게 대부분 알려준다고 하며 미야자키의 개인적인 에고는 보는 이들이 알아서 해석하길 바라는 편이라고 덧붙혔다.
그리고 그런 독자들의 반응에 굳이 맞고 틀리고를 논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의 작품은 그저 보는가 보지않는가 에 대한 선택만 있다고 한다면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런 견해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진한 지적허영을 느낄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적허영에 대해 그 누구도 알 필요는 없지만 작품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그것을 “굳이” 음미하는 것 또한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알 수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소설 등등의 소위 말하는 “작품” 들은 지적허영의 결정물이다.
작품을 읽는다 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지도. 그게 나에게 오늘 하루 밥을 먹여주지도 않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문학과 예술이 없으면 살아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또한 그렇다.
특히 삶에 영감을 주고 허영심을 체워주는 만화는 더더욱 그렇다.
내가 겪은 세계의 역사가 만화 속에서 새롭게 재 탄생 하는것을 지켜보는게 즐겁다.
작가의 견해가 페이지 속에서 새롭게 정의되고 피어나는것을 감상하는 것이 즐겁다.
재능을 꽃피워 피나는 노력으로 출판사를 찾고 생명을 불살라 연재했던 작가들의 인생사를 상상해 보는 것이 즐겁다.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 하였는가에 대해 고민 해 보는것이 즐겁다.
그걸 다른 이들과 이야기 해 보는 것이 즐겁다.
만화란, 문학이란 그런것같다.
순수 재미를, 욕망을, 사심을 채우는
사람들의 지적허영을 채우는 공상의 소용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