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본 여행은 반쯤 일하러 온 거였습니다.
나고야에서 발표할 일이 하나 있었거든요.
사실 도카이 촌도 겸사겸사 출장비도 달달하게 들어왔겠다 각오하고 간 곳이었습니다.
배낭여행 하시는 분들은 출혈이 심하니 꼭 많이 대비해서 가시길.
이번에 간 곳은 우로코의 집으로, 페스나의 배경이기도 했습니다.
건물 외부는 마토 가 저택으로 쓰이고, 내부는 토오사카 저택의 내부로 쓰였다고 하죠.
그래서인지, 저택 입구에 존재하는 무인 카페의 경우 이렇게 '사쿠라와 함께 고베 여행하자'는 컨셉을 가진 홍보 일러스트를 비치하고 있습니다.
고베는 관서 지방에서는 첫번째로 개항된 곳입니다.
원래는 옆의 효고 쪽을 개항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막부 말 제국 초의 동란 때문에 이런저런 어수선한 일들이 많아서, 대신 고베가 개항되었다고 합니다.
개항을 처음 한 것 치고는 개발이 좀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죠.
하지만 그 동란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지금도 고베는 일본 전통 문화와 외국인들이 들여온 신식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키타노 이인관의 언덕 쪽인데, 키타노 이인관은 신고베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입니다.
원래는 봄에 다녀오려 했는데 폐관이 4시 반이라서 이루지 못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아침 일찍 다녀왔습니다.
참고로 입장료는 우로코의 집 하나만 볼 경우 1050엔 (약 9300원), 3000엔을 내면 이인관 내부에 있는 다른 박물관들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지붕에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장식을 만들어놓는다고 합니다. 2020년에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이라, 마스크를 쓴 사람과 2020년 당시 총리였던 스가가 보이는군요.
2019년은 레이와 원년이었기에 저렇게 레이와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프롤로그 시점에서 린이 알트리아를 소환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아처를 소환하던 거실이 생각나는 방입니다.
저 벽난로에 장작 들어가는 것이 처음 볼 때 인상에 깊이 남았는데 말이죠.
갓 소환된 아처의 난입으로 거실이 엉망이 되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방에는 원 주인들이 사용하던 가구라든가 식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 그릇의 제작자 가문이 기억은 안 나는데, 18세기에는 유럽의 여러 왕실에까지 수제 식기를 진상하던 명문이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토오사카 가문이 부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2층에는 동서양의 귀족들이 입었던 갑옷들이나 여러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진은 (아마도) 원 주인 일가 중 가장이 사무를 보던 책상이었던 것 같은데, 저는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흉계를 꾸미는 키레이 생각이 나더군요.
페이트 기행은 이것으로 마치고, 동방 기행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전 봄에 검은 벚꽃의 전승이 내려오는 교토 후시미 묵염사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3월 말이라, 사이교 법사가 죽음을 맞이한 히로카와 사의 박물관은 열리지 않을 때였죠.
(4-5월, 10-11월 개관)
그래서 이번에 큰맘먹고 다녀왔습니다.
우선 신오사카에서 미도스지선을 타고 텐노지역까지 간 다음, 텐노지역에서 킨테츠 남오사카선을 타야 합니다.
그렇게 돈다바야시 역까지 간 다음, 버스를 타거나 걸어가야 히로카와 사가 나옵니다.
버스가 있기는 한데, 히로카와 사 앞까지 가는 버스는 상당히 드물게 옵니다. 그렇다고 걷자니 돈다바야시 역에서 히로카와 사까지의 거리가...
대략 7km 정도입니다. 저도 갈 때는 생으로 걸었다가 올 때는 힘이 부쳐서 중간에서 쉬다가 오는 버스를 잡아 탔습니다.
여러분은 부디 저 같이 무모하게 걷지 마세요. 죽습니다.
팻말의 뜻은 '사이교 법사 종언지 히로카와 사' 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개관 시간 오전 10시, 폐관 시간 오후 5시이며 요금은 성인 500엔 (약 4300원) 입니다.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유유코를 비롯한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하던 사이교 법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유유코도 나이가 들어 출가한 후 아버지와 재회했다는데 어땠을까....
사이교 법사가 가성으로까지 불리고, 그의 유물은 일본의 귀중한 문화재이기 때문인지 박물관 내부의 유물들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습니다.
대신 글로 말씀드리자면, 사이교 법사 입적 후 제자들이 만들었다는 사이교 법사 동상이나 사이교 법사 출가 당시를 그린 족자, 그리고 다른 선사들의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이교 법사의 묘를 참배했습니다.
9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사이교 법사의 이름만은 남아 이렇게 다른 나라에서 온 후대인의 방문을 받고 있습니다.
제 삶도 덧없어서 언젠간 흩어지겠지만, 그래도 이런 자그마한 인연이 저에게도 찾아올 것이기에 조금은 열심히 살다 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