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풍의 기계룡>
시현은 시큐리티 출신인 여대생에게 강제 듀얼을 걸며 도발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가 던져진걸 어떻게 하겠는가. 적어도 패배해서 정령도 되찾지 못하고 망신을 당하기 보다는 이겨서 라이고우에게 한 소리 듣더라도 되찾아 오는게 나았다. 하지만 이 듀얼에 대한 광적이라고 볼 만한 정도의 집착은 어디에서 온 건지 알 겨를이 없었다. 과연 이 듀얼은 시현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까.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코인이 회전해 시현의 눈 앞에서 멈췄다. 좋았어, 이번엔 앞면. 시현은 자신있게 선공을 골랐다.
"듀얼!!"
"메인 페이즈, 패에서 [휘광룡 세이퍼트]를 일반 소환하고, 기동 효과 발동합니다! 패의 [앱소루터 드래곤]을 묘지로 보내고, 덱에서 [녹토비전 드래곤]을 패에 넣습니다. 그리고 묘지로 보내진 앱소루터의 효과로 덱에서 [바렛 트레이서]를 패에 넣습니다!"
이번 듀얼은 시현의 간절함에 응답이라도 하듯 패가 잘 잡혔다.
"세이퍼트를 소재로 [스트라이커 드래곤]을 링크 소환하고, 덱에서 [리볼부트 섹터]를 패에 넣습니다. 그리고 패에서 [리볼부트 섹터]를 발동, 패에서 [바렛 트레이서]를 특수소환하고, 어둠 속성/드래곤족 몬스터를 특수소환한 것으로 패의 [녹토비전 드래곤]도 특수소환합니다!"
전개를 하는 도중에도 상대는 체인을 걸 생각이 없었는지 화면에 표시된 몬스터들의 효과를 읽어보며 패 셔플을 할 뿐이였다.
"스트라이커와 녹토비전을 소재로 [데린저러스 드래곤]을 링크 소환하고, 녹토비전의 유발 효과로 1장 드로우합니다.
패에서 속공 마법 [퀵 리볼브]를 발동, 그리고 체인 2로 트레이서의 효과를 발동합니다. 트레이서의 효과로 퀵 리볼브를 파괴하고 [아네스바렛 드래곤]을 특수소환, 그리고 퀵 리볼브의 효과로는 [바렛 칼리버]을 특수소환합니다."
트레이서의 효과를 쓴 후에는 엑스트라 덱에서 어둠 속성 몬스터만 꺼낼 수 있어, [천구의 성각인] 같은 유용한 몬스터를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장기 쌤과의 듀얼에서 느꼈듯이, [천구의 성각인] 하나만으로는 견제가 너무 허술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니 이번 턴은 좀 강하게 나올 생각이였다.
"[바렛 칼리버]를 릴리스하고 (1)번 효과를 발동, 패에서 [듀얼윌 드래곤]을 특수소환합니다.
그리고 트레이서, 리차저, 데린저러스를 링크 마커에 세트! 닫힌 세계를 꿰뚫는 폭풍, [바렐로드 드래곤]!!"
시현이 듀얼할 때마다 매번 느끼지만, 바렐로드의 뒷모습은 마치 믿음직한 부모님처럼 든든했다. 하지만 시현에게는 더이상 그런 부모님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부터도 그리 애정을 느꼈던 부모님은 아니였지만.
"[듀얼윌 드래곤]을 릴리스하고 (1)번 효과를 발동, 묘지의 트레이서와 아네스바렛을 수비 표시로 특수소환합니다. 그리고 묘지에서 이 카드를 제외하고 (2)번 효과로 덱에서 [라피도 트리거]를 패에 넣습니다.
....카드 2장을 세트하고 턴 엔드입니다."
{유시현 LP 8000, 패 1장 시큐리티 LP 8000, 패 6장}
"그럼 간다. 내 차례다, 드로우!
한 가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일처리가 늦게 끝나는건 질색이라서 가능하면 상대를 1턴 만에 쓰러뜨리거든. 그럼.... 각오해라!"
여대생은 후공 1턴 만에 '원 턴 킬'을 선언했다. 한 가지 확실한건, 병훈과 듀얼할 때와는 다른, 냉정한 프로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저 말은 허세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가 반동을 주어 오른쪽으로 드로우하는 저 자세부터 듀얼 중 높아지는 목소리... 여대생과 장기 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건 기분 탓인가.
"상대 필드에만 몬스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패에서 [사이버 드래곤]을 특수 소환."
'저 몬스터는...'
[사이버 드래곤]. 애니메이션 출신에, 카드 샵에 파는 스트럭쳐 덱에 종종 재록되기도 했고,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듀얼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간편하게 튀어나오는 2100의 타점을 가진 몬스터라 여러번 제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해서 시현은 이 몬스터가 낯이 익었다. 그런데 파워 인플레가 많이 진행된 이 시기에 저걸 쓴다고...?
"소환 성공 시, 발동할 효과는?"
".... 없습니다."
"융합 소재 확인, 소환 조건은 '사이버 드래곤' 몬스터+엑스트라 몬스터 존의 몬스터..."
갑자기 처음 듣는 말을 읊던 여대생은 엑스트라 덱에서 카드 1장을 꺼내들었다.
"[사이버 드래곤]과 [바렐로드 드래곤]을 묘지로 보내고, [키메라테크 메가프리트 드래곤]을 특수 소환!!"
시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듀얼 필드 중앙에 생긴 소용돌이가 두 몬스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바렐로드는 자리에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였는지 머리, 몸통, 팔다리, 날개를 이루는 부품이 모조리 뜯겨나가며 분해된 상태로 소용돌이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렇게 소용돌이에서 탄생한건 보라색의 몸체를 가진 사이버 드래곤과 흡사한 기계룡이였는데, 몸 군데군데에 박힌 붉은 색의 고철들과 희미하게 깜빡이기를 반복하는 청록색의 라이트가 보였다. 바렐로드의 몸통과 눈동자였던 것이다. 즉, 생물로 따지면 토막난 시체를 자기 몸에 붙이고 다니는 격이라 온몸에 드는 소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카드는 융합 소재를 서로의 필드에서 묘지로 보내는 것으로 룰 특수소환할 수 있어. 발동 선언도 안 하고 몬스터를 치우는건 처음 보지? 메가프리트의 공격력은 융합 소재로 사용한 몬스터 1장당 1200 오른다. 따라서 공격력은 2400."
"........."
시현은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아 있는 세트 카드를 확인하며 상대의 수를 기다리기로 했다.
"패에서 [사이버 드래곤 코어]를 일반소환하고 유발 효과 발동. 덱에서 [사이버 다크 월드]를 패에 넣고 발동하지.
[사이버다크 월드]를 발동 시, 효과 처리로서 덱에서 [사이버다크 키메라]를 패에 넣고 (2)번 효과로 방금 패에 넣은 키메라를 일반 소환. 그리고 기동 효과를 발동해 패의 [사이버네틱 오버플로]를 버리고 덱에서 [파워 본드]를 패에 넣지."
[파워 본드].... 처음 들어보는 카드이지만 강력한 융합 몬스터를 불러낼 것은 확실해보였다.
"키메라를 소재로 [샐러맨그레이트 알미라지]를 링크 소환하고, 코어와 메가프리트를 소재로 [사이버 드래곤 지거]를 링크 소환!"
"그럼 저는 상대가 링크 몬스터를 특수소환했으니 패에서 [환창룡 판타즈메이]를 특수소환합니다! 그 후, 3장을 드로우한 후 패 2장을 덱으로 되돌립니다."
"너만 드로우 하게 둘 수는 없지, 패에서 [증식의 G]를 발동! 효과는 이미 알고 있겠지?"
여대생은 증식의 G의 효과로 드로우한 후 초록색 바탕의 카드를 높이 치켜들며 보라는듯 큰 소리로 선언했다.
"너가 초래한 결과니 다치더라도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패에서 [파워 본드]를 발동! 패/필드에서 융합 소재를 묘지로 보내고 기계족 몬스터를 융합 소환한다. 하지만 이 턴, [사이버 다크 키메라]의 효과에 의해 묘지의 몬스터를 융합 소재로서 제외할 수 있지. 난 묘지의 [사이버 드래곤]과 [사이버 드래곤 코어]를 제외!"
사이버 드래곤과 코어가 용광로에 녹여지듯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간 후 본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혼돈 아래 뒤섞인 광란의 용이여! 그 난폭한 힘으로, 적의 품에 안긴 승리를 내게 바쳐라! [키메라테크 램페이지 드래곤]!!
[파워 본드]의 효과로 융합 소환한 몬스터의 공격력은 원래 수치만큼 올리고, 융합 소환에 성공한 램페이지 드래곤의 효과로, 융합 소재로 사용한 카드의 수만큼, 상대 필드의 마/함을 파괴한다!"
"묘지의 [녹토비전 드래곤]의 (3)번 효과로, 그 효과를 무효로 하고 이 턴, 그 세트 카드는 상대 효과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장기 쌤과의 듀얼에서도 이 효과를 쓸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저번처럼 후열이 날아갈 것을 대비해서 미리 이 카드를 묻어두길 잘했다. 물론 저번처럼 공격에 반응하는 '방어막' 같은 카드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렇단 말이지... 그럼 패에서 [삼전의 호]를 발동. 이 턴 상대가 몬스터 효과를 발동하고 있으니 덱에서 일반 마/함을 패에 넣지. 가져올 건 [해피의 깃털]."
시현은 '상대 필드의 마법/함정 카드를 전부 파괴한다.'라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가진 저 카드를 그냥 가져오는 모습을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세트 된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
"속공 마법, [라피도 트리거]를 발동하고, 체인 2로 트레이서의 효과를 발동합니다! [라피도 트리거]를 파괴 후 덱에서 [실버바렛 드래곤]을 특수소환하고, 트레이서와 실버 바렛을 파괴! [바렐로드 F 드래곤]을 융합 소환합니다!
소환에 성공한 F 드래곤의 효과로, F 드래곤 자신과 램페이지 드래곤을 파괴합니다!"
"넌 내 카드의 효과를 읽지 않는구나? 알미라지의 효과 발동! 이 카드를 릴리스하고, 이 턴 램페이지는 상대 효과로는 파괴되지 않아!"
"그럼 체인 3으로 [택티컬 익스체인버]를 발동합니다! F 드래곤을 파괴하고 덱의 [바렛 리차저]를 특수소환합니다!"
F 드래곤이 스스로를 탄환 삼아 행한 맹렬한 돌격은 알미라지가 만든 보호막에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폭발한 자리에는 문클립 1개가 떨어져 회전하기 시작했다.
"엑스트라 덱에서 특수소환된 F 드래곤이 파괴되었으니, 필드의 [바렛 리차저]를 묘지로 보내고 묘지의 [바렐로드 드래곤]을 소생시킵니다!
특수소환 성공 후, 바렐로드의 (2)번 효과로 아네스바렛을 대상으로 지정하고, 체인 2로 아네스바렛의 효과를 발동합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램페이지 드래곤의 효과를 무효로 하고 그 몬스터는 공격할 수 없습니다!"
"......!"
바렐로드에 장전된 마취탄이 램페이지 드래곤에 명중하자 램페이지 드래곤은 옆으로 쓰러진 후 물에서 빠져나온 뱀장어 마냥 꿈틀거리다 이내 맥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걸로 메인 어택커를 마비시켰으니 손쉽게 턴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니, 있어야 했다....
"좋아... 끝까지 버텨보겠단 말이지. 패의 [갤럭시 솔저]의 효과를 발동. 또다른 [갤럭시 솔저]를 패에서 버리고 자신을 특수소환. 그리고, 레벨 5인 솔저와 램페이지로 오버레이!"
방금은 융합, 이번엔 엑시즈....? 시현은 사이버 드래곤이 융합 테마라는 것 정도는 들어봤지만 전용 엑시즈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였다.
"엑시즈 소환, [사이버 드래곤 노바]!
그리고 난 노바 위에 겹쳐 오버레이 네트워크를 재구축! 새로운 힘을 리스펙트한 붉은 갑주를 두르고, 지금 이곳에 강림하라! [사이버 드래곤 인피니티]!!"
저 몬스터는 뭐지...? 라고 생각하는 사이 저 붉은 빛을 내는 기계룡은 시현의 필드에 있는 판타즈메이를 노렸다.
"인피니티의 기동 효과 발동. 필드의 공격 표시 몬스터 1장을 이 카드의 엑시즈 소재로 한다! 대상은 판타즈메이!"
"판타즈메이의 효과로, 패 1장을 버리고 그 발동을 무효로 해 파괴합니다!"
"그리 둘까 보냐! 인피니티의 효과 발동! 상대가 카드 효과를 발동했을 때, 이 카드의 엑시즈 소재를 1개 사용하고 그 발동을 무효로 해 파괴한다!"
인피니티가 쏜 빔이 판타즈메이의 갑주를 관통하자 판타즈메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입자로 분해되어 버렸다.
"자, 그럼 가볼까? 배틀 페이즈, 지거의 효과 발동. 인피니티의 공격력을 턴 종료시까지 2100 올린다! 대신 이 턴 지거가 상대에게 주는 전투 데미지는 0이 되지. 그럼 인피니티로 바렐로드를 공격!"
공격력 보정에 의해 바렐로드 쪽이 애완견, 아니 애완룡으로 보일 정도로 커진 인피니티가 앞머리로 레이저를 발사하자 바렐로드 역시 장렬한 폭발음과 함께 흉부에 달려 있던 실린더와 붉은 색 고철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
{유시현 LP 8000-> 6400}
"끄윽...."
"내 공격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패에서 [사이버로드 퓨전]을 발동! 필드의 지거와 제외 상태의 [사이버 드래곤]을 덱으로 되돌리고, 그 몬스터들을 소재로 [사이버 트윈 드래곤]을 융합 소환!"
이걸로 한숨 돌리나 싶었으나 갑자기 튀어나온 두 머리의 기계룡이 시현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엔 시현 차례인 것이다.
"[사이버 트윈 드래곤]은 1턴에 2번 공격할 수 있지. 플레이어에게 다이렉트 어택!!"
시현은 뒤로 최대한 물러나려 했으나 등 뒤에는 막다른 길이였고, 뒤로 돌린 고개를 다시 돌리기도 전에 용이 포효하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크고 단단한 무언가가 시현의 명치를 연속으로 2번 들이받았다.
"흐아아아아아악!!"
{유시현 LP 6400-> 3600-> 800}
뒤로 날아가면서 등으로 벽을 들이받은 시현은 등 뒤에서 뚝 - 하는 소리와 함께 감전된 듯한 충격을 느끼고는 앞으로 쓰러졌다. 하필이면 부딪힌 부분이 정령 납치범과 듀얼할 때 다친 그곳이였던 것이다. 두 손을 땅에 짚고 다시 일어나려 해도 뻣뻣해진 등은 시현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다시 엎어지며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묻을 수 밖에 없었다.
"메인 페이즈 2, [해피의 깃털]을 발동. 리볼부트 섹터를 파괴한다. 그리고 엔드 페이즈, [파워 본드]를 발동한 대가로 자신은 올린 공격력만큼 데미지를 받지..."
{시큐리티 LP 8000-> 5900}
"저는 엔드 페이즈.... 파괴된 아네스바렛과 실버바렛의 효과로... 덱에서... 바렛 싱크론과 트레이서를 특수소환... 합... 니다... 그리고 묘지의 데린저러스 드래곤도 자신의 (2)번 효과로... 소환..."
이로서 상대가 증식의 G 효과로 드로우한 카드는 8장, 남은 패는 6장. 아무리 필드를 다시 세워도 저 정도 패라면 금방 짓밟아 버리고 남은 랴이프도 불태워버릴 것이다.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턴, 그 안에 게임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몇 안 되는 대형 몬스터인 바렐로드와 F 드래곤이 전부 묘지로 가버렸고, 패도 더 이상 없었다.
이런 몸 상태로 듀얼을 걸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저 오른쪽 구석에 입에서 피를 흘리며 벽에 기댄 납치범이 엉덩이를 몇 번 들썩이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의 포박된 두 손에 '유리 파편'이 쥐어져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유시현 LP 800, 패 0장 시큐리티 LP 5900, 패 6장}
"드로우 페이즈.... 드로우!!"
불운하게도 드로우한 카드는 [성스러운 방어막 거울의 힘]. 장기 쌤과의 듀얼에선 전세를 역전시킨 1등 공신이였으나 지금은 그저 보라색 벽돌에 불과했다.
"묘지의 F 드래곤을 제외하고 (2)번 효과 발동합니다... 대상은 [바렐로드 드래곤]..."
묘지에서 바렐로드가 필드로 비상하려고 날개를 펴는 순간... 그의 몸을 붉은 전기가 감싸더니 이내 바렐로드를 마비시켜 묘지로 도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체인, 인피니티의 효과로 엑시즈 소재를 1개 사용해 무효로 하겠어."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도중에 이 몬스터들로 링크 소환 할 수 있는 몬스터.... [토폴로직 폭탄 드래곤]이 있는걸 떠올랐다.
어떻게든 그 몬스터를 꺼낸 후 링크 앞에 몬스터를 특수소환하면 필드의 몬스터를 전부 치워버릴 수 있긴 하지만... 그럼 자신의 몬스터도 전부 파괴되는데다가 그 몬스터의 공격력은 3000.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만약 라이프를 다 깎지 못한 채로 턴을 넘기면 두번째 턴처럼 메가프리트 드래곤 같은걸 꺼내서 시현에게 직접 공격을 날릴 것이다.
시현은 망연자실한 채로 엑스트라 덱의 카드를 뒤졌다. 이렇게 된 이상 그 몬스터라도 뽑고 기도나 해야지...
그런데 한 카드가 손에 잡히자 시현의 뒤통수 쪽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렐로드가 소환되었을 때에 부는 바람보다는 좀 더 날카롭고, 뜨거운 바람이였던 것이다. 시현은 그 카드를 집어 확인하였다. 이름이 '바렐' 로 시작하지만 뭔가 다르게 생긴 몬스터가 출격을 기다리는듯이 푸른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카드가 덱에 있었나...?'
만약 이 카드를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이길 수 있다면...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진실에 다가갈 기회인 라이고우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시현은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시현이 새로운 몬스터를 불러내기로 결심하고 링크 소재로 쓸 몬스터가 전부 모이자 시현의 뒤에서 불던 바람은 그의 마음을 읽은건지 더욱 거세져, 하나의 '폭풍'을 만들어내었다. 시현은 폭풍에 휘날리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내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영창을 시작하였다.
"나와라, 내 길을 비출 미래 회로....!
소혼 조건은 효과 몬스터 3장 이상. 바렛 싱크론과 트레이서, 그리고 링크 2인 데린저러스를 링크 마커에 세트. 서킷 콤바인.... 나와라, 닫힌 세계를 베어가르는 열풍! 링크 4, [바렐스워드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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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쓰는 카드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걸까. 듀얼디스크에 새로운 카드가 등록되었다며 로딩 화면이 뜨고 다운로드가 완료되자 바렐로드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머리에 길고 날카로운 2개의 칼날이 달린 기계룡이 불꽃을 휘날리며 필드에 내려앉았다.
"묘지의 [바렐로드 R 드래곤]의 (2)번 효과로 패 1장을 파괴하고 묘지의 [바렛 싱크론]을 패에 넣고, 일반 소환합니다. 그리고 유발 효과를 발동, 묘지의 [앱소루터 드래곤]을 특수 소환. 이어서, 레벨 1인 싱크론에 레벨 7인 앱소루터를 튜닝! 싱크로 소환, [레드데몬즈 드래곤 스카라이트]!"
R 드래곤은 판티즈메이의 효과를 쓸 때 코스트로 묘지에 보내두었다. 이게 역전의 발판이 될 줄이야....
"배틀 페이즈, 바렐스워드로 사이버 트윈 드래곤을 공격합니다. 이 순간, 바렐스워드의 (3)번 효과를 발동해 자신의 공격력을 상대 몬스터의 수치의 절반만큼 올리고, 상대 몬스터의 공격력은 절반이 됩니다."
{바렐스워드 ATK: 3000-> 4400, 사이버 트윈 드래곤 ATK: 2800-> 1400}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날이 하나로 겹쳐지면서, 바렐스워드는 트윈 드래곤에게 맹렬히 돌격하였다. 트윈 드래곤은 전 턴에 시현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에 사무친건지 온몸을 떨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바렐스워드의 돌격은 멈추기는 커녕 등 뒤의 부스터가 잠화되면서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고....
-쌔앵!-
두 몬스터가 충돌하면서 불꽃이 튀더니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찔러 터뜨릴 것 같이 울려퍼졌다. 상대는 움츠려든 눈을 억지로 떠보니, 트윈 드래곤이 두 머리를 기점으로 정확히 이등분된 고철 덩어리가 되어 그대로 폭발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입을 두 손으로 감싸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큐리티 LP: 5900-> 2900}
"그리고 스카라이트로 인피니티를 공격합니다. 작열의 크림즌 헬 버닝!!"
인피니티는 스카라이트가 뿜은 지옥과도 같은 열기에 녹아버려 액체 상태의 금속이 되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시큐리티 LP 2900-> 2200}
"하지만... 내겐 아직 라이프와 패가 남아있어! 다음 턴이 오면 그때는..."
"바렐스워드의 (2)번 효과를 발동합니다. 필드의 공격표시 몬스터, 스카라이트를 수비 표시로 바꾸고, 이 턴 바렐스워드는 2번 공격할 수 있습니다."
바렐스워드가 포효와 함께 칼날을 바닥에 쓸면서 돌진해오자, 상대의 남은 희망마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공격력 증가에 2회 공격이라니... '바렐' 링크 몬스터 중 저런 효과를 가진 몬스터는 없을 텐데-"
"[바렐스워드 드래곤]으로 직접 공격! 전광의 바렐소드 슬래시!!!"
저런 몬스터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현은 눈 앞의 승리에만 집중할 뿐이였다. 한 치의 자비도 없이. 날을 곤두세운 바렐스워드는 상대를 향해 참격을 날렸고, 상대는 비명소리조차 몰아치는 화염에 집어 삼켜진채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시큐리티 LP 2200-> 0 듀얼 종료}
듀얼이 끝난 동시에 시현과 상대 사이에 차인 수갑 역시 듀얼이 끝나면서 그대로 풀려 날아가자, 시현은 듀얼디스크에 표시된 'victory'라는 문구를 멍한히 쳐다보다가 상대가 쓰러진걸 보고 나서야 듀얼이 끝났음을 느꼈다.
'이...겼다....'
듀얼이 종료되어 솔리드 비전이 점점 사라지는 와중에도 폭발 후 남은 불꽃이 시현의 주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일단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대생에게 다가가 정령들을 해방시키려 했는데, 시현보다 누군가가 앞서 가서 바닥에 쓰러진 여대생의 옆구리에 달린 덱 케이스를 빼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된 이상... 본전이라도 건지는 수밖에...."
그 자는 다름 아닌 정령 납치범. 분명 포박된 상태였는데, 라며 그 자가 원래 있던 자리를 보니 끊어진 줄만이 널부러져 있는 것이였다. 그리고 더 소름끼치는 장면은....
"당장 돌려주지 못 해...!"
"넌 꺼져 있어!!"
"꺄아악!!"
저 납치범이 줄을 푸는데에 사용했을 유리 파편을 흉기 삼아 자신을 붙잡으려는 여대생의 복부를 옆으로 크게 베어버린 것이였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벽에 새빨간 혈흔이 흩뿌려지며, 여대생은 비명과 함께 피로 흥건해진 푸른 제복을 움켜잡았다.
"거기 서요!"
납치범이 이만하면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도주를 시도하자 시현은 그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등에 느껴지는 통증이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할 때마다 꾸준히 전기충격을 준 덕에 두 다리로 서지 못하고 네 발로 기어가야 했다. 손으로 바닥을 짚을 때마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들이 그의 피부를 찔렀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대로 저 자를 놓치면 다시는 라이고우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납치범의 몸 상태 역시 좋지 않아 얼마 가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시현은 납치범의 손에 들린 덱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어서... 돌려줘요...."
"이 끈질긴 녀석 같으니...."
납치범이 젖 먹던 힘이라도 쥐어짜낸건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구둣발로 시현의 턱을 걷어차버렸다.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버린 시현은 순간적으로 머리에 느껴진 강한 충격에 더 이상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억... 끄윽...."
머리부터 바닥에 부딪히는 바람에 뇌진탕이라도 걸린건지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으며, 마치 임종 직전의 환자를 기리듯 귓 속은 삐- 소리로 가득차버렸다.
'싫어... 부모님도 날 떠나버렸는데... 라이고우 너까지...'
그렇게 남은 의식마저 서서히 꺼져가 기절할 때 쯤.... 갑자기 날카로운 물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납치범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든 시현이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보니, 납치범의 손등에 어떤 날카로운 물체가 박혀있었다.
"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악...."
그리고 누군가의 습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곧이어 슉- 하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리더니 납치범의 비명소리가 잦아들더니 이내 양팔을 벌린 채로 뒤로 쓰러져버렸다.
'아니... 이게 뭐야?!'
저 납치범의 양 손등, 이마, 그리고 가슴에... 카드가 꽃혀있던 것이였다. 시현은 순간적으로 몸에 박힌 카드를 꺼내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카드에 손을 댄 순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 자의 몸이 꿈틀거리는걸 보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 카드들은 실제로 듀얼에서 쓰이는 카드들이였는데 그 카드들의 이름은...
[시공의 함정 속으로].
[현세와 명계의 역전].
[하나된 소망].
[이 세상 너머].
전부 일반 함정이라는 것 빼고는 공통점이 없었다. 그냥 필요 없는 카드들을 냅다 던진건가, 아니면 시현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라도 있는 걸까. 그리고 누가 도대체 왜 이런 소행을 저지른걸까... 깊은 상념에 잠긴 사이 뒤에서 여대생이 피로 얼룩진 옆구리를 움켜쥐며 천천히 걸어왔다.
"이것도 너가 한거냐? 너... 보통 미친 인간이 아닌가본데, 아무리 상대가 범죄자여도... 윽...! 이 정도까지 제압하진 않아..."
"이것만큼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전 쫓아가려다가 쓰러졌는데, 어딘가에서 카드가... 날아와서.... 그것만큼은 맹세할게요! 제가 한 건 아니에요..."
"하, 그렇단 말이지...."
여대생의 표정엔 믿음이라고는 1도 없었지만, 딱히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죄송해요, 듀얼을 건 일은 정령을 빼앗으려 한다고 제가 오해를 해서... 정말 죄송해ㅇ..."
점점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 시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어려진 것처럼 여대생 앞에서 싹싹 빌기 시작했으나, 여대생은 냉담한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야... 죄송이고 나발이고... 이걸로 연락이라도 좀 해봐. 나 지금.... 졸라 아프거든... 내가 이 꼬라지가 된 것도... 그 녀석을 제대로 관리 안 한 탓이지, 쳇...."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무전기를 건넨 여대생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지자, 시현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둘이서 듀얼에 정신 팔린 나머지 납치범이 포박을 풀 시간을 줘버렸고, 결국 여대생은 죽음의 문턱을 넘길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였다.
자신 앞에서 죽어가는 2명의 사람,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무전기를 보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10초 정도 멍한 상태에 빠진 시현은 뭐라도 해야겠다며 일단 정령들이 갇힌 덱 케이스부터 열기로 했다. 그러자 그물에 잡힌 물고기마냥 정령 3명이 원래 크기로 돌아오면서 튀어나왔다.
"뭐야... 이 인간은 왜 여기 쓰러져 있는거냐? 그리고 저건 방금 만난 시큐리티잖아...."
"말하자면 얘기가 길어. 어서 119부터 불러야 해...!"
"아니, 그럼 시큐리티랑 듀얼을 했다는 거냐? 그리고 저렇게 다친 것도 솔리드 비전 때문에 그런건 아니지...?"
"........."
라이고우의 쏟아지는 질문들을 무시한 채로 시현은 처음 보는 형태의 무전기를 만지작거리다,
"잠깐, 그거 이리 줘봐."
옆에서 보다 못한 가이드 씨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동료 시큐리티와의 통신에 성공했다.
"아아, 여기는..."
"지금 당장 119 불러주세요!"
"네? 아니, 목소리가 알던 것과 다른데 당신은 또 누구...."
"무전기 주인, 지금 피 흘리며 쓰러져 있다고요! 지금 위치는 모린팬 동 38번가 골목이니까, 당장 불러요 당장!!"
가이드 씨의 고함은 효과 만점이였다. 대화 상대는 더 이상 반문을 하지 않고 당장 119를 호출하겠다고 알렸다.
....................................
구급차가 도착하자 시현은 이제 자리에서 물러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본인도 시큐리티 만큼은 아니여도 다친 몸이였고 이 사건의 관계자이기도 하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저 여대생은 다행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여 빠른 시일 내에 상처를 꿰메는 시술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현도 같이 간 김에 진찰을 좀 받았는데 다행이 골절 같은 큰 부상은 없다고 하여 등에는 파스를 붙이고, 찰과상을 입은 오른 팔은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물론 등의 경우 덜 아프기만 할 뿐 통증이 느껴지는건 여전하지만.
그리고 그 납치범은... 일단 몸에 박힌 카드부터 좀 빼내고 의식이 돌아오면 시큐리티로 이송할 계획이라고 한다. 병원 관계자들은 3명 중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상태인 시현에게 어떤 상황이였는지 여러 질문들을 던졌으나, 시현은 납치범이랑 강제 듀얼한 일이랑 자신과 시큐리티 2명이서 부상을 입은 일만 사실대로 고하였다. 시큐리티랑 듀얼한 일은... 일단 병상에 누워있는 저 여대생쪽에서 먼저 꺼내지 않는 한 얌전히 넣어두려고 한다.
일단 여대생에 비하면 부상의 정도가 심하지는 않아서 먼저 빠르게 병원을 나오게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못 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
-"..... 시큐리티에게 듀얼을 걸었어, 내가 이기면 정령들을 돌려 받겠다고. 너가 잡혀가는걸 보고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겠다 싶어서."
-"근데, 그쪽에서 듀얼을 순순히 수락했으려나? 엄연한 공무 집행 방해인데 말이지. 떠돌이 시절의 나도 시큐리티라는 말만 들으면 꽁무니를 빼야만 했어. 필요하면 수십 명의 듀얼리스트까지 동원하는 그들에게 덤비는건 너무나 무모한 짓이라고."
이 말을 기점으로 시현은 얼굴에 달린 입과 마음 속의 입을 둘 다 꾹 다물고 말았다. 시큐리티에게 강제 듀얼용 수갑을 던진 사실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여대생이 자신을 지목해 이 사실을 알리면 후폭풍이 찾아올 것도 확실하고... 지금 자백하든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든 결국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현은 고개를 떨군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강제 듀얼을 시켰어."
-"뭐....?"
"너랑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될 까봐 두려웠어, 만약 수용소에 넣지 못하면 '추방'이라도 시킨다는 말에...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저씨가 쓰던 수갑을 시큐리티에게 확 던져서 듀얼하자고 시비를 걸었어!
난 비록 그 듀얼에서 이겼지만 결과는 더 안 좋아졌어... 그 시큐리티 여대생은 아저씨의 공격때문에 배에 유리 파편이 박혀서 죽을 뻔했고, 난 연속된 듀얼로 무리가 온 몸을 억지로 이끌다가 포박을 풀고 도망치는 아저씨를 놓쳐버리고 누군가가 아저씨를 습격하기 전까지는 그저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어! 난... 난 그저 널 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시현은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으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필이면 길거리 한복판에서 울먹거리며 큰 소리로 하소연한 탓에, 주변 사람들이 한 번씩 흘깃 쳐다보며 지나갔다.
창피했다.
이것만큼이나 시현의 기분을 잘 나타내는 단어가 없었다. 좋은 일 하겠답시고 판을 이렇게 벌려놓다니, 자신이 이토록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였다. 그러나 라이고우는 시현의 말을 듣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하, 날 구한다고? 쓸데없이 걱정은 많기는... 내가 떠돌아 다닐 적에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추방 당할 정도로 중대한건 아니야. 기껏해야 강제 듀얼 걸고 전용 듀얼디스크 만들기 위해 마당 밖에 놓인 물건을 좀 훔친 정도? 물론 그게 좋은 일은 아니다만, 인간을 떠났거나 그들에게 버림받은 정령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이 정도는 하는 편이고, 뉴스에 나오는 놈들에 비하면 내가 저지른건 애교 수준이지.
좀 극단적인 예시로는 몇 년 전에 등록 안 된 정령이 인간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고... 밑바닥에도 밑바닥이 있단 말이지..."
-"그럼... 너도 전에 잡혀간 적 있어?"
-"음... 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나, 직접 잡혀간 적은 없지. 그리고 이제는 너와 함께니까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테고.
아무튼 넌 아직 어리고 모르는게 많으니깐, 이제부터 잘못된걸 바로잡으면 된다. 내가 과거에 몇 번씩 시큐리티에게 잡힐 뻔한걸 겪어봐서 아는데, 안 좋은 일은 시작했을 때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샌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골치 아파진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행동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봤음 해. 용기있는거랑 무모한건 다른거야."
-"그래... 고마워."
시현은 순간 '라이고우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이야...'라며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과는 다르게 시현에게 조언까지 해주다니...
-"근데 그러면... 내가 개인 듀얼디스크를 받았을 때 미리 듀얼디스크에 널 등록시켜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그렇지 않아? 등록이 되면 더 이상 시큐리티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지금이라도 할까?"
그러나 이 말에 라이고우는 순간적으로 멈칫하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 등록은 아직 안 돼."
-"왜?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
-"계약 내용에 따라서 위험한 상황일때 널 지켜주기로 했는데 등록이 되면 듀얼 외의 상황에서 실체화가 제한되잖아."
-"뭐,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였지 평소에 위협받을 상황은 많이 없잖아? 사실 너가 좀 더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한 말이였는데..."
-"...... 사실 다른 이유도 있긴 한데, 그게 좀 복잡해. .....아니다, 이 얘기는 이제 여기까지만 하자고."
이제 시현과 슬슬 가까워져가고 시큐리티에게 잡힐 뻔하기도 했는데, 왜 아직도 라이고우는 시현과 같이 다니고 싶어 하면서도 등록을 거부하는 걸까? 뭐, 아직 인간에 대한 불안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어서 그런 건가 싶어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보육원에서 점심을 먹고 다친 몸을 달래며 휴식을 취하던 시현은 4시에 가까워지자 평소처럼 학원을 찾았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불은 꺼져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있는 것이였다. 그리고 처음 갔을 때와는 다르게 학원 옆의 매장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있는게 아닌가.
[개인 사정으로 인해 내일까지 휴점합니다.]
"시현아."
엘레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린 후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그건 8시 수업이지만 평소보다 일찍 온 병훈이었다. 하지만 가방을 메고 있지 않고 대신 근처 분식점에서 산 떡볶이가 손에 들려있는걸 보면 학원때문에 온 건 아닌 듯 했다.
"아, 안녕."
"너 학원 들어가려고 여기 있는 거야? 쌤이 내일까지 병원에 있을 거라 당분간 자리를 비운다는데."
"병원?"
"그 장기 쌤 딸이 시큐리티인데, 오늘 오전에 괴한이 휘두른 흉기 때문에 크게 다쳤데. 오늘 밤에 치료 후 상처를 꿰메는 수술을 할 거라는데...."
"맙소사."
시현의 입에선 이 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긴 하지. 난 여기 같은 층에 있는 문방구 들르러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여기 있었구나?"
"그래.... 어... 그럼 이만."
시현은 한시라도 여기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아 당장 자리를 떴다. 하필이면 그 여대생이 장기 쌤 딸이라니! 학원 건물을 빠져나와, 신호등이 점멸하다 빨간색이 된 것도 무시하고 무작정 달리고는 숨을 헐떡거리면서까지 보육원으로 달렸다.
-"라이고우... 오늘은 내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좀 일찍 자야겠다."
시현은 다른 아이들이 안에서 수다를 떠는 사이에 홀로 침구를 펼치더니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드러누웠다.
-"아니, 지금 6시도 안 됐는데... 저녁은 안 먹을 거야? 너 몸도 다쳤다며, 뭐라도 챙겨 먹어야 빨리 낫지. 그래야 너가 몸이 회복된 후 듀얼에 복귀하면서 나도 먹고 살 수 있고..."
-"이미 듀얼 2번이나 해서 배불러... 라고 해야할까나."
듀얼을 하면서 '배부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강제 듀얼, 절정으로 흉기 난동까지... 오늘 일어난 일들은 하나 같이 혼란스럽고 부끄러운 것들 뿐이라 머리 속에서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쩌면 정령이랑 엮인 것 자체가 시현의 앞날을 어지럽게 만드는건 아닐까, 잃어버린 기억은 이것보다는 몇 배나 더 감당하기 어려울까... 온갖 불안과 망상들이 시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렇게 라이고우의 텔레파시를 몇 번 무시하고는 무작정 잠자리에 들었지만 밤 12시가 되도록 잠은 오지 않았다....
일자: 2024/9/24 작성자: KONMAI 기업 총장
새로 등록된 정령: [바렐스워드 드래곤]
오늘 오전 9시 경에 여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정령이 등록되었습니다. 이름은 [바렐스워드 드래곤]. 이름으로 보나 형태로 보나 [바렐로드 드래곤]의 파생형이며, 공수 양면으로 균형잡힌 로드와는 다르게 전투에 집중된 형태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이 정령이 정령계를 통해 유입된게 아니라 바렐로드의 사용자가 '진화'시킨 것이라는 겁니다. 어떤 불법 프로그램이나 오리카 사용도 발견 되지 않고 말이죠.
지금껏 저희 KONMAI 연구소에서는 정령의 학습 및 진화 현상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여러 실험들이 이루어졌지만, 막대한 양의 듀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인과관계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걸 민간인이 해냈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원리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비록 이 현상이 단순히 우연인지 아니면 사용자에게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우리 KONMAI의 목적은 듀얼을 통해 사람들에게 유희를 주고 정령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이 카드의 사용자의 데이터를 계속 분석하고 지켜보며 정령의 비밀에 대해 계속 파헤쳐 볼 예정입니다.
[*경고: 이하의 내용은 KONMAI 회사의 기밀과 관련되어있습니다.
내용이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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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 필요하면 저 '유시현'이라는 사용자를 직접 만나러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안이 결정되면 따로 회의를 열 계획입니다.
그럼 다들 좋은 주말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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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듀얼은 '택티컬 트라이 덱'을 기반으로 한 (물론 구성이 완전히 같지는 않은) 사이버 드래곤 덱을 상대했는데, 확실히 실전 구축이 완료된 만큼 이전 듀얼에 비해 시현이 상당히 고전했네요. 아무래도 시현의 바렛 덱은 순수 축에 가까워서 초반 전개력이 부족하고 패트랩도 거의 없다 보니 후공 견제력도 사실상 제로입니다. 이제 슬슬 기존 덱의 전략에 '한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과연 시현의 덱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나오는 KONMAI라는 회사는 (이미 다 알고 있듯이) 코나미의 패러디입니다. 비록 보는 사람도 별로 없고 퀄리티도 별로인 팬픽이라지만 실존하는 회사명을 그대로 쓸 순 없으니까요.
로그 오류나 오타 지적 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