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
종이배를 만들어요
고공 크레인도 도크도 노동자도 필요 없어요
가장 신비한 이야기가 적힌 일기장을 찢어 접고
크레파스로 치장을 해요
좋아하는 색을 말해봐요
그 색을 칠해드릴게요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봐요
그 노래의 음정들을 실어드릴게요
당신이 사랑하는 자줏빛 추억들도
여기 실을 수 있어요
아세요?
은하수에 파도가 없다는 것을
그러니 아무 걱정할 일이 없어요
내 종이배에 함께 태우고 싶은 이가 있어요
노란 민들레꽃과 수수꽃다리
쇼팽의 피아노곡들과
귀를 자른 뒤의 고흐를 태우고 싶어요
어머니와 큰누나를 태울 자리가 남았어요
아세요?
큰누나가 세 살 적 나를 업고
찔레꽃 가득 핀 강나루를 찾아갔다는 것을
은하수 환한 밤이었고
폐병쟁이 뱃사공의 호롱불 아래
무엇인가 적어 누가에게 주었지요
누나는 열일곱 살
나는 세 살
시가 태어나기 전의
시를 그때 처음 알았지요
종이배를 만들어요
큰누나 만나러 가는 배예요
신이여 미안하지만 당신을 태울
빈자리는 없어요
흑사병이나 장티푸스, AIDS로 죽은 이보다
당신이 버린 자비로 죽은 이들이 더 많아요
누나는 열일곱 살
나는 세 살
그때 처음 시를 알았고
신은 아픈 사람을 외면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요
내 눈앞에서 웃고 있는 누나
누나를 만나러 갈 때 종이배를 타요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곽재구, 문학동네시인선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