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반성
뱉은 말은 담을 수가 없지 영원히 찌꺼기로 남아, 혈관을
막아버리지, 뭘로 녹여야지? 소변도 앉아서 보고, 사이즈
업 기간에는 한 시간씩 줄 서서 아이스크림도 사다주는, 그
런 남자애라도 소개시켜줘야 할까
같이 점심 할래요? 메신저로 쪽지를 보냈어 바로 답장이
왔지 ‘너는 너, 나는 나’ 파티션 저쪽에서 동기 애가 걸어오
더니 날 보고 웃었어 이를 여덟 개나 드러내고, 무서워, 눈
은 하나도 안 웃고 있잖아
그래 알아, 내가 반성할게, 네 뒷담화 몇 피스 옮겼던 거,
그 정도로 이러는 거 아니야…… 어제도 대표님 집에 갔지
나 말고 네가, 딸아이 숙제까지 봐줬더라 어떻게 알긴, 네
가 사진 찍어서 오 분마다 올리잖아, 이래서 아이를 낳는 걸
까, 그런 태그도 달고
오며 가며 회사 카드 맘껏 쓰니까 행복하니? ‘집까지 넘
어가는 건 불공정한 것 아닐까’, 마침내 내가 톡을 보냈더니
새벽에야 답이 왔지
‘정당방위’
이러다 그애 등교까지 시켜주겠구나, 나 혼자 열시까지
남아서 일하면 뭐해, 그렇게 한 달을 더 싸웠지만, 답이 안
나왔지
어쩌지, 이제? 매일 드레싱 없는 생채소만 세끼 먹는다고
생각해봐, 근데 내 옆에 앉은 애는 그것보다 백배는 쓴 뿌리
약초를 씹고 있지, 가마니째 쌓아두고 당당하게
애기들이 왜 애교가 많은 줄 알아?
왜라고 물어야 네가 신나겠지?
약자니까, 어른들이 강자니까, 세상은 어른들이 움직이
거든
누구한테 설교야
못 알아들었구나? 그애가 애기라는 말, 너는 더 애기라
는 말
친구랑 톡을 나누며, 새벽 족발을 시켜 먹으며, 나, 반성
했어, 콜라겐을 잔뜩 흡입하니까 겨우 머릿속에 윤기가 도
는구나, 미백이랑 수분 공급이랑 한꺼번에 되는 팩을 붙이
고 밤을 꼬박 샜지
현금이 아까워서 카드만 쓰는 애, 다음달도 못 내다보는
백치 같은 애, 나라는 애
두 번 토하고, 아침에, 아파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점심
시간만 기다렸지, 오늘은 동기끼리 점심 먹는다고, 온 사무
실에 웃음을 팔고는 그애를 데리고 나왔어
밥을 사주면서 화분도 줬어, 풀이랑 이끼를 사다가 너를
위해 만들었어, 동기 애는 밥은 반만 먹더니 수저를 놓았지
그러고는 나도 모르는 애들 이름을 불러대며 아느냐고 물었
어 알게 뭐야? 지금 그런 애들이 왜 중요한 건데? 절대 밖
으로 말 안 하고, 으음, 그 애들이 누굴까? 한마디만 던졌지
동기 애는 호르륵호르륵, 숭늉을 마시면서 말했어
너랑 같은 학교, 같은 과, 내 친구의 친구들
산소통 뺏긴 잠수부처럼, 나는 잠깐 흔들렸지 그래, 이거
였구나? 내가 기포도 안 내뱉고, 말도 없이 그애를 지켜보
니까, 동기 애는 한마디를 더 했어
너 거기 편입한 애지? 사무실 사람들 이제 다 알아, 대표
님도
그게 뭐, 그게 왜? 해주려다가 나는 알았지 그런 거랑 상
관없다는 걸, 저는요 깊이가 없는 사람이에요 내면이 자꾸
사라지죠 내면을 가꿀 능력이 없어서요 됐나요? 엉덩이 허
벅지 배 옆구리까지, 아, 셀룰라이트가 잔뜩 달라붙어서 미
안해요, 그런 얼굴로 빌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말
없이 그애를 노려보았지
십 초,
그리고
다시 십 초
또 십 초
왜? 뭐? 화를 내는 그애한테 말했어
너도 밤에 잠 못 자니?
실핏줄이 다 터진, 흔들리는 그애 눈을 보다가 식당 밖으
로 나왔어 이런 기분, 마일리지로 쌓았으면 지구 열 바퀴는
돌았을 텐데 화분은 버리지 않았지 끝가지 들고 와서는, 내
자리에 올려놨어
반성 없는 세상을 반성하려고.
오늘 같이 있어
박상수, 문학동네시인선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