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 역사상의 위연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봉요원 상에 등장하는 위연에 대해 서술하고 있음에 유의바랍니다.
위연은 분노한다
한실 회복의 논리는 뒷전이고 4군을 호시탐탐 노릴 유비의 야욕에
그런 야욕으로 4군의 백성들을 무수히 죽였음에도, 정작 그 4군의 백성들이 유비를 깎듯이 주인으로 추대하는 현실에
장사군 군인들을 모조리 죽여 그 시체로 강을 메운 관우. 그저 푸줏간 고기 썰듯이 사람을 제꺽제꺽 죽여대기만 할 뿐인 그를, 후세 중원(中原)사람들이 신으로 봉하고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릴 거란 사실에.
마지막으로, 아무런 의의도 없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싸움에.
그는 이 모든 것에 분노한다.
그래서 그는, 유비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 그 손길(魔爪)을 쳐낸다.
조적(曹賊)을 친다는 명분을 뒷전이고 호시탐탐 땅뙈기를 넓힐 욕심인 유비가 일방의 군주로 오른다는, 이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 분노하여
기골(骨氣)를 펼쳐보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유비의 ‘손길’이다. 유비의 쓰다듬는 행위는 종종 마수(魔爪)로 표현되곤 하는데, 그 중 조(爪)를 떼어놓고 보면 의미심장하다.
중국의 황제들은 용 문양을 독점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성과 권위를 극대화시켰는데, 용 자체도 이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용신(龍身)의 세부적인 곳까지 의미를 부여받게 되거나 이전과는 달리 형상에 따라 존귀한 용, 또는 그보다 품계가 낮은 용으로 차등 지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용 문양 중에서 역대 제왕들이 가장 중시했던 것은 바로 용의 발톱 문양. 황제가 전용하고 있는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용은 황제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신성의 표징이다. 중국 황실은 신분에 따라서 용조(龍爪)의 사용을 제약하였다.
그러므로 유비가 쓰다듬는 손길, 마수(魔爪)란 일견 악마의 손짓처럼 보이다가도, 훗날 촉의 황제가 될 용의 손톱, 용조(龍爪)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연은 황제의 손톱, 황제의 신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위인 용조(龍爪)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484화의 후어에서 나오듯, 필자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은 위연의 속뜻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유비의 손짓을 쳐낸 위연의 행동이 100%(十分) 기골(骨氣)에서 나왔다고 착각하며 그의 동기를 해석하려 한다.
누구는 의연히 용조(龍爪)를 거부한 정의로운 지사라 해석하겠고, 다른 누구는 그가 용조(龍爪)를 거부함에 ‘반골의 상’이라 해석할지도 모른다.
허나 후어서도 묘사했다시피 위연은 기골(骨氣)은 삼푼(三分)뿐, 나머지 칠푼(七分)은 타협하기로 한 사람이다.
왜? 어째서 위연은 3:7의 법칙을 유지한단 말인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기골(骨氣)을 십분(十分) 발휘해 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므로.
위연 옆에는 기골(骨氣)을 십분(十分) 발휘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황충이란 사람이.
그가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란 기골(骨氣)을 노인장이 되면서까지 지켰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50보 안에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어줍잖은 재주 하나,
그리고 장사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머무를 뿐인 변변찮은 장수란 대접.
그리고 그가 열심히 싸웠을 때, 자신의 기골(骨氣)를 끝까지 지켰을 때 나온 결과는 또 어떠했던가.
주군 ‘한현’이 그의 목에 건 현상금이었다.
만약 황충이 자신에게 현상금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체면을 고수해 주군에게 복귀했다면, 현상금이 걸린 채로 처벌당했으면 그의 이름은 천고에 걸쳐 칭송받았을까? (실제로도 작중에서 황충은 그리하려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 뜻을 세상에 100%(十分) 관철하면 언젠가 세상도 자신을 봐줄 거란 믿음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름을 떨치기 위해선,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살인귀 관우가 이름을 떨친다면, 나도 타협해서 두 손을 핏물로 적실 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욕심쟁이 유비가 땅뙈기를 손에 넣고자 한다면, 나도 그 패주(覇主) 뒤를 따라 어울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타협을 하면서 세상을 고쳐나가야지, 황충처럼 순진하게 기골(骨氣)를 십분(十分) 발휘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위연은 분노로 유비의 손길을 쳐냈지만 그 자리를 뜨지는 않은 것이다.
칠푼(七分)의 타협을 발휘해서.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비는, 그의 기골(骨氣)을 어느 정도 포기한 용기를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고.
결국 위연은 유비 뒤를 따르기로 했다.
유비 뒤에 이어질 이상적인 국가를 위해서. 자신이 바꿀, 바꿔야 할 국가를 위해서.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유비가 이끄는 길은 처절한 실패로 이어질 것이고
길은, 그 길 위를 걷는 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했듯이 위연의 운명도 패주(覇主)의 길을 따라 처참하고도 서글픈 실패로 이어지리라.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의 응어리진 분노를, 그가 분노하면서도 어떤 마음으로 타협했는지를 모른채
적어도 30%(三分)은 이 세상에 저항해보려 애썼단 사실을 모른 채
그가 자오곡에서 실패한 ‘반골의 상’으로만 인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