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관람할 땐 예고편도 안봤고, 조커 1편도 오래전에 본터라 정보가 충분히 많은 상황에서 다시 보고 싶어졌음.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2회차 이후 중립적인 감상에서 불호인 감상으로 돌아섰다는 점을 밝힘.
불호 요소 세 가지
1. 아서 플렉 (그리고 관객)을 향한 희망 고문
초회차에서 정보가 전혀 없었을 때는 영화 중후반부 어느 시점에 아서 플렉이 다시 한 번 조커가 되어 세상을 향한 불만을 쏟아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음. 이런 기대는 예고편만 보았던 사람도 동일할 것이라 생각함.
그래서 아서가 다시 억압당하는 위치로 회귀했을 때에도 즐겁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음. 간수들이 아서 플렉을 조롱하고 아무렇지 않게 손찌검을 하더라도 언젠가 되갚아줄 수 있을테니까, 아서의 치부를 공청회장에서 떠들더라도 언제까지 법과 질서가 그들을 보호해주진 않을테니까, 할리 퀸젤조차도 거짓말을 대가를 치룰 시간이 다가올테니까.
하지만 아서가 조커라는 이름을 포기해버리면서, 관객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인내의 시간을 보상받을 길이 없어진거임.
2. 전작의 클라이막스를 정면으로 부정
머레이와의 인터뷰에서 울분에 찬 아서는 토마스 웨인 같은 자들이 바라는 것은 아이들처럼 얌전히 규칙에 따르는 군중이라며 울부짖음. 이것이 설령 살인자의 자기 변호일지언정 분명 사회의 목소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었고, 영화 내부에서도 조커가 승리하는 결말이었기에 영화의 주제 의식이지 클라이막스라고 봐도 무방함.(감독은 부정했지만)
후속작에서 전작의 유산을 정면으로 반박한다는 것은 충분한 설득력이 필요한 일임. 하지만 감독은 아서 내면의 인간성과 선함만을 근거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음. 정작 법원에서 일어난 테러와 군중들에 퍼진 '폴리 아 되'를 직접 목격하는 일, 할리의 본심을 마주하는 일 등은 포기 이후의 사건이므로 아서의 포기에 결과론적인 이유는 될 수 있어도 관객들을 납득시키기에 부족함.
결국 모든 범죄를 인정하면서도 조커를 포기하는 일은 좋게 말하면 아서라는 인간의 복합적인 선악 관념이겠지만, 바꿔 말하면 갈대같은 충동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음.
3. 적절하지 못한 제목 혹은 제반 상황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이야깃거리 중 하나인 뱅크시의 작품. 길거리에선 고작 몇 달러에서도 거의 안팔리던 작품들이 뱅크시가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자마자 수억의 가치로 껑충뛰는 일이 있었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공유하는 감상이 있음. 작품의 가치는 정보와 공간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
'조커 : 폴리 아 되' 역시 제목에 조커가 없었거나, 유명한 코믹스 캐릭터를 원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혹은 최소한 전작이 공상의 산물임을 밝히면서 전작과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끊어낼 수 있었다면 이정도의 혹평은 안받았을지도 모름. 하지만 조커의 후속작이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으로 예고편을 만든 시점에서 감독의 소심함이 느껴질 수 밖에 없음.
호 요소 세 가지
1. 미디어 사회
조커가 이중인격자이냐 아니냐는 사실 관객의 입장에선 논란거리조차 아니고, 전작의 주제의식과도 동떨어져 있음. 그런데 법정과 영화 내부의 미디어에선 사건의 승패를 가를 첨예한 대립으로 다뤄지니 외부의 시선에서 헛웃음이 나옴. 정작 전작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아서의 발언에 대한 옳고그름은 무대 밖인 길거리 시위로 밀려나 대충 이런 소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로 일축됨.
간수의 호의와 폭력이 공존하는 것은 아서를 범죄자라 낙인찍은 결과물임. 아서를 타이르는 변호사도 방법이 다를 뿐 아서를 보는 시각에 큰 차이는 없음. 작중 대립이 아서의 고백으로 해결되자마자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들은 각종 사건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결과에 따라 즉석해서 판단하는 우리들의 행태와 겹쳐보임.
이렇듯 각종 집단의 심리가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미디어 사회를 잘 표현함. 판사, 검사, 변호사 뿐만 아니라 죄수를 보호해야할 간수들, 그리고 할리 퀸젤과 조커 지지자들까지도 아서를 이미지로만 소모할 뿐, 내밀한 사정을 파악하는 이가 전무함. 어느 집단에 스스로를 비춰보냐에 따라 나누어지는 입장도 현대 사회 특유의 가벼운 자기주장을 잘 표현했다 생각함.
2. 지독한 현실감
만화나 소설 속 캐릭터들이 만약 현실에 존재한다면 하는 상상은 세대 불문하고 항상 흥미로운 주제였음. 만약 히어로 사회도 아니고 슈퍼 빌런도 없는 시대에 조커가 나타난다면? 그 답이 '폴리 아 되'임.
화재를 기회삼아 탈출을 감행해도 기자의 무리와 높은 철조망에 막혀 감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간수들에게선 조커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음. 바깥에서 어떤 지지를 얻었건 무서운 눈빛으로 쳐다보건 간에 선을 넘었다 싶으면 즉각적으로 보복을 가함.
이러한 상황들은 아서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장치이자 원전의 팬으로서 가장 괴로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사실성에 가장 큰 공을 들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함. 덕분에 조커의 재판 과정 전부, 심지어 법원 테러와 그 이후의 일까지도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는 감상이 가능함. 설령 내가 바랬던 결말이 아닐지언정, 틈이 없는 개연성과 견고한 현실감은 충분히 즐길만 했음.
3. 뮤지컬의 새로운 쓰임새
보통의 뮤지컬 영화들은 노래가 소통의 장치이자 감정의 분출구지만, '폴리 아 되'에서의 노래는 그 역할을 완전히 뒤집어서 사용하기로 작정한 느낌임.
할리와의 노래는 노랫말이 주는 상징만으로 대화하다 보니 아무런 진심을 전달하지 못했고, 정신병동에서 부르는 노래는 아서가 시작이었지만 결국은 아서를 밀어내고 아서와 상관없이 날뛰게 됨. 뮤지컬 영화가 아니라는 감독의 말이 확실히 이해됐음.
명작도 아니고, 졸작도 아니고. 논쟁적인 작품인 건 맞지.
글 잘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