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잔열 미약한 무리들이라 비록 보내지 않더라도 관계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일본 대내전(大內殿)은 자칭 백제(百濟)의 온조(溫祚)의 후손이라 이르고, 본국 사신이 그 나라에 가면 재봉할 줄 아는 자를 청하여 단령의(團領衣)를 만들기도 하고, 일본국에 본래 창고와 역참(驛站)이 없던 것을 대내전이 창고를 짓고 역참을 설치하였사오며,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군사를 쓰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빌리곤 하옵는데, 대내전은 천 또는 만의 병력을 징발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하는 것입니다. 구주(九州)·일기(一岐) 등 여러 섬을 영유하여 그 병력이 매우 강대하온데, 대마주도 그 장악 속에 들어 있어 만약 한번 노하여 침입하게 되면 본국이 응당 그 폐해를 받을 것이니, 어찌 잔열 미약하다 해서 이를 멸시하겠습니까."
하고...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1438년) 6월 10일 임술 1번째기사
이는 일본국(왜국)의 오우치 가문(대내전, 대내 가문, 다다량 가문)이 백제국 왕실의 후손된 가문으로써, 일본국에 본래 창고, 역참이 없던 것을 오우치 가문이 일본국에 자리잡은 뒤에 창고를 짓고 역참을 설치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앙정부인 막부라고 할지라도 오우치 가문에게 반드시 사람을 빌리고는 하는데, 오우치 가문은 1000명 또는 10000명의 병력을 징발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나라 곧 조선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하는 것이라고 언급된 기록입니다.
대내전(大內殿) : 다다량씨(多多良氏)니, 대대로 주의 대내현(大內縣) 산구(山口)왜말로는 야마구치[也望九知] 에 거주하여 주방(周防)ㆍ장문(長門)ㆍ풍전(豐前)ㆍ축전(筑前) 4주의 땅을 총관하며, 군사가 제일 강성하다. 일본사람의 말에 백제왕 온조(溫祚)의 후손이 일본에 들어와서 처음에 주방주(周防州)의 다다량포(多多良浦)에 도착하여 그 지명으로 성씨를 삼았으며, 지금까지 8백여 년에 대내 지세(大內持世)까지 23대가 되었는데, 세상에서 칭호를 대내전(大內殿)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세는 아들이 없어 조카 교홍(敎弘)을 아들로 삼았다. 교홍이 죽자, 그의 아들 정홍(政弘)이 작위를 이었다. 대내(大內)의 군사가 강성해지자, 구주(九州) 이하가 감히 그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 세계(世系)가 백제에서 나왔다 하여 우리나라와 가장 친선하였다. 산명 종전(山名宗全)이 세천 승원(細川勝元)과 서로 적이 되고부터 정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산명을 원조하여 지금까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소이(少貳)가 이 틈을 타서 다시 박다재부(博多宰府) 등 예전 영지를 탈취하였다. 상세한 것은 축전주 소이전(筑前州少貳殿)에 나타나 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기록 중.
대내전(大內殿)이 구청(求請)한 《대장경(大藏經)》에 대한 일을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우리 전하(殿下)께서 부처[佛]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이단(異端)의 책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족히 보전(寶典)이 못됩니다. 그러나 《대장경(大藏經)》은 그 수량이 많지 않으니, 권사(權辭)로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정괄(鄭佸)은 의논하기를,
"대내전(大內殿)은 다른 도이(島夷)와 비교할 수 없으며, 국가(國家)에서 후대(厚待)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그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대장경》은 이단(異端)의 책이므로, 비록 태워버린다 하더라도 가(可)합니다. 더욱이 인접(隣接)한 국가에서 구하니, 마땅히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장경》 1건(件)을 만들려면 그 경비(經費)가 매우 많이 들어서 쉽사리 판비(辦備)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는 국가에 무익(無益)하였기 때문에 왜인(倭人)들이 와서 구하면 문득 아끼지 않고 주었으니, 그 까닭은 공사(公私)간에 《대장경》을 만드는 바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 몇 건쯤 있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다면 쉽사리 그 청을 따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대내전(大內殿)이 비록 우리 나라에서 특별한 예로 후대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 있어서 해도(海島)가 요원하고 성세(聲勢)가 접해 있지 아니하여, 비록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노심(怒心)을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 섬에서 우리 나라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것이 한둘이 아니고, 저 나라 사람들은 부처를 좋아하므로, 《대장경》을 얻었다면 금(金)·옥(玉)같이 여길 뿐만 아니라, 대내전이 《대장경》을 하사받은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이를 본받아 벌떼같이 일어나서 주기를 바랄 것인데, 현재 있는 《대장경》이 부족하여 주려고 해도 주지 못한다면 저들이 누구는 후대(厚待)하고 누구는 박대(薄待)한다고 일컬으며 실망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민력(民力)을 아끼지 않고 또 인쇄하여 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그 사인(使人)에게 말하기를, ‘전일(前日)에 너희 나라에서 《대장경》을 청구한 것이 한 번이 아니었지만, 국가에서 인쇄한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 청을 따랐었는데, 지금은 모두 쓰고 남은 것이 없어서 청을 따를 수가 없다.’라고 답하여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고, 이파는 의논하기를,
"대내전은 특별한 예로 후대하는 사람이지만, 이보다 전에 비록 여러 번 《대장경》을 청하였는데도 곧 따를 수 없었던 것은 운반하는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는데, 더욱이 올해는 크게 흉년이 든 것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세(事勢)를 인편에 잘 유시(諭示)하고, 그 밖에 접대(接待)하는 절차에서 극진히 후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정난종(鄭蘭宗)은 의논하기를,
"대내전이 스스로 말하기를, 선대(先代)의 세계(世系)가 우리 나라로부터 나왔으므로, 이미 예전부터의 우호 관계가 있어, 후대하는 것이 여러 추장(酋長)과 달랐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온 사인도 다른 것은 구하는 것이 없고 단지 이 《대장경》만을 청하니, 청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단지 이 《대장경》은 비록 글자는 찼다고 하나, 쓸모 없는 질(帙)인데, 1건에 드는 경비가 실로 많으며, 지금 우연히 찾는 것으로 인연하여 특별한 공로(功勞)도 없이 갑자기 그 청을 따른다면 여러 추장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청할 것이니, 형편상 모두 들어주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1부(部) 가운데 정요(精要)한 내전(內典)으로 《능엄경(楞嚴經)》·《법화경(法華經)》·《금강경(金剛經)》·《능가경(楞伽經)》 등과 같은 것 약간의 질(帙)을 뽑아서 주고, 예조(禮曹)에서 답서하기를, ‘돌아보건대, 이 《대장경》은 전자에 귀국(貴國)의 여러 사인이 청하여 가지고 갔으므로, 거의 다하여 남은 것이 많지 않다. 지금 정요한 내전(內典) 약간의 질(帙)을 가지고 간절한 요구에 응한다.’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저들이 청하는 것을 막는 실수가 없을 것이고 저들 또한 얻는 것이 있으니, 거의 양쪽이 모두 편할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83권, 성종 16년(1485년) 9월 16일 갑자 6번째기사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오늘 대내전(大內殿) 사송(使送)을 전별하는 잔치에서 원숙(元叔) 등이 소매 속에서 서계(書契)를 내어 놓았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크게 비호(庇護)하는 은혜가 멀리 미치고 화하고 밝은 교화가 치우침이 없어서 신(臣) 등이 입조(入朝)하여 관치(館置)와 정실(庭實)이 풍영(豊盈)하지 아니함이 없고, 특히 청한 바를 모두 너그럽게 허락함을 입었습니다. 오직 주홍(朱紅)만은 호령(號令)이 이미 나온 뒤에 두세 번 변경하였으므로 불만(不滿)한 뜻이 앙앙(怏怏)합니다. 멀리서 가지고 왔다가 헛되게 가지고 돌아가게 합니까? 이른바 「시집가기를 자랑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신 등이 부끄러움이 있는데 하물며 돌아가면 국주(國主)의 명령을 어긴 것이겠습니까? 부(富)는 하늘 아래의 것을 차지하여 돈과 비단이 창고에 넘치고 금과 은이 땅에 널렸는데, 어찌하여 그 넘치고 널린 것을 베풀어서 우리의 요구하는 바를 구제하지 아니하십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의 약속을 회복하시면 만 번 다행이겠습니다. 또 정홍(政弘)의 서계(書啓) 가운데 이른바 동전(銅錢)·목면(木綿) 등의 제급(題給)을 아직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삼가 명령을 기다립니다. 대내전(大內殿)은 귀국(貴國)과 동계(同系)이고 일본의 명장(名將)입니다. 사국 태수(四國太守)가 되어 이웃 나라가 거의 지호간(指呼間)에 속하였는데, 태평 무사(太平無事)할 때이면 어찌 이런 요구가 있겠습니까? 국주(國主)가 된 자는 창생(蒼生)을 사랑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는데, 하물며 적자(嫡子)인 신개(新介)는 천리(千里)를 격하여 군루(軍壘)에 있으니, 어찌 가엾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제 의(義)를 생각하고 힘을 다하여 신개가 백전 백승(百戰百勝)하여 공훈(功勳)을 세워 세상에 뛰어났고 대내전(大內殿)은 귀국과 서로 어깨를 가지런히 하면서 영구히 대려(帶礪)의 맹약을 굳게 합니다. 엄동(嚴冬)이 가까이 닥쳐올 것이니, 방물(方物)의 값을 제급(題給)하여 빨리 귀로에 오를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번거로운 글로 존람(尊覽)을 모독하였으니, 용서해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관인(副官人) 신우위문위(新右衛門尉)가 또 서계를 내었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엎드려 청하건대 성중(城中)의 귀국 사찰인 원각사(圓覺寺)를 두루 관람하기를 요구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안동로(安東路)로 내려가기를 요청하며, 통사(通事)인 첨정(僉正) 고공(高公)을 통하여 도움을 받기로 한 목면(木綿)을 그대로 요구하니, 빨리 제급(題給)해 주시면 빨리 귀국하는 닻줄을 풀 수 있겠습니다. 차사원(差使員)인 동래 현감(東萊縣監) 한공(韓公)에게 서간(書簡)을 보내어 독촉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귀국의 흰 거위[白鵝] 암수 한 쌍을 못 위에 놓고 구경하기를 소망하니,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자질구레하게 청하는 일은 모두 들어주라."
하였다.
-성종실록 283권, 성종 24년(1493년) 10월 3일 갑자 1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원주덕(源周德)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치었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근래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상국(上國)에 조공(朝貢)하고 돌아온 자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모두 축하하며 말하기를, ‘폐하의 용봉(龍鳳)과 같은 자태는 천일(天日)의 표상이라 성스러운 덕이 계속 일고, 인자한 교화(敎化)가 바야흐로 풍성하여 역시 중흥(中興)을 선광(宣光)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누군들 서쪽을 향해 기꺼워하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항차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은 남소(南巢)의 북시(北嘶)에 있는 사사로운 자로서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적읍(敵邑)에 우환이 많아 선인(先人)들의 구호(舊好)를 닦지 못해 왔습니다. 《시경(詩經)》 상서편(相鼠篇)의 ‘예의가 없으면 빨리 죽는다.’라는 뜻에 감복되어 지금 오로지 원주덕(源周德)·심 통사(沈通事) 등을 파견하여 예를 폐지한 죄를 사례(謝禮)하고, 이어 고(告)합니다.
이 땅의 서울[洛] 동쪽에 절이 있어 청수사(淸水寺)라고 하는데, 원통 대사(圓通大士)가 화현(化現)한 곳입니다. 불각(佛閣)과 경전(經殿)은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갈 듯하며, 승방(僧房)과 빈관(賓館)은 산골 물가에 닿아 물을 퍼 마실 수 있을 듯하고, 전대(前臺)와 후대(後臺)에는 갖가지 꽃이 피어 있고 상계(上界)와 하계(下界)는 종소리가 서로 화답(和答)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에는 약간의 집들이 들어서 있어 으리으리하게 날아갈 듯하고, 비늘처럼 죽 늘어서 있어 장대(壯大)하고 아름답기가 극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병화(兵火)가 거듭되어 모두 재가 되었으나, 유독 대사(大士)의 전존상(栴尊像)은 세찬 불길 속에서도 남아 있어 경탄한 나머지 마음속으로 절을 다시 일으킬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장마와 가뭄으로 농사때를 잃어 매년 흉년이 들자 군자(軍資)도 오히려 부족한 형편이었으므로, 진작시키려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그럭저럭 지금까지 끌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고하기를, ‘너는 일찍이 법문(法門)을 위하였으니, 밖에서 보호하여 청수 정사(淸水精舍)의 터를 다시 닦도록 하라.’ 하였고, 다시 대원륜(大願輪)을 타고 나타나서, ‘장군이 몸소 옛 터에다 절을 세워보려 하니, 그대의 일찍이 세웠던 뜻에 중(重)하게 보상하겠거니와, 대사(大士)가 훤히 보고 있으니 감히 원곡(願轂)을 물릴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이에 감탄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대전(大殿) 한 채를 영조(營造)하여 대사(大士)의 유상(遺像)을 안치하려 하는데, 무릇 대전(大殿)을 안치하려 하는데, 무릇 대전(大殿)이라는 것은 사찰의 근본으로, 근본이 온전하면 지엽은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곧 양장(良匠)들을 불러 계획하였더니 4만 민전(緡錢)이 필요하였습니다. 상국(上國)을 여러 번 조알(朝謁)하니, 만기(萬機)를 처리하는 여가에 임금께서 불사(佛事)에도 마음을 기울여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대전(大殿)의 영조(營造) 자금을 하사하시어 인자함을 흠앙하게 하소서. 오로지 동전(銅錢)을 청구합니다만, 면주(綿紬)와 면포(綿布) 등도 소용됨은 한가지이며, 아울러 비로 대장(毗盧大藏)과 법보 인시(法寶印施)도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처음으로 빙례(聘禮)를 닦음에 있어 시재(施財)를 요구하는 것은 예의상 너무나 옳지 못하나, 너그러이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의 이름을 다음에 주기(注記)하니, 대도(大刀) 2파(把), 부채[扇子] 10파, 거울[鏡奩] 10개, 나갑(螺甲) 2, 벼루[碩] 10면(面), 술병[樽] 1쌍, 치자(梔子) 1백 근, 우피(牛皮) 50매(枚), 후다(厚茶) 1백 근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33권, 성종 4년(1473년) 8월 9일 무진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전(大內殿) 별가(別駕)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의 사자(使者) 원주덕(源周德)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술을 마련해 놓고 인견(引見)하였으며, 상관인(上官人)·부관인(副官人)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였다. 신숙주(申叔舟)를 시켜서 원주덕(源周德)에게 말하기를,
하니 원주덕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연(那衍)은 특별히 성상의 은덕을 입어 무양(無恙)합니다. 본국은 전란이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상국(上國)에 오래 통신(通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될 기한이 없어서 특별히 신(臣)을 보내어 성심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물건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고, 예조(禮曹)에서 답서(答書)하게 하기를,
"요즈음 길이 막히고 음문(音問)이 두절되어 기미(氣味)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여서 궁금하던 중에 글을 받아 평안함을 갖추 알았으니 기쁘고 위로됩니다. 바친 예물은 삼가 이미 계달해 받았습니다. 요구하는 동전(銅錢)은 본국에서 쓰는 바가 아니고 대장경(大藏經)도 여러 고을에서 구해 감으로 인하여 다 없어졌으니, 부탁을 따르지 못합니다. 특별히 중화고(中畫鼓) 1면(面), 중요발(中鐃鈸) 1사(事), 중경(中磬) 1사, 백면포(白綿布) 5필, 인삼(人蔘) 10근, 채화석(彩花席) 5장, 표피(豹皮) 1장, 호피(虎皮) 1장, 유둔(油芚) 2장, 해송자(海松子) 15두(斗)를 하사하여 돌아가는 사신(使臣)편에 부치니, 영수해 받기를 바랍니다. 족하(足下)는 족계(族係)가 우리 나라에서 나가서 강호(講好)하여 대대로 내려오면서 정성을 돈독히 하였는데, 이제 듣건대 군사의 일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오직 밝고 어짐으로써 몸을 보중(保重)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34권, 성종 4년(1473년) 9월 10일 무술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상국과 대주(對州)와 아직 동맹(同盟)하기 전에 자주 전쟁하였는데, 그 때에 신(臣)의 선인(先人)이 상국을 위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사졸이 죄다 전사하고 한 사람도 귀국하지 못한 것이 이제 8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게다가 존명(尊命)을 받들어 수우(水牛) 암수를 바치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인의 상국에 대한 충성이 적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정홍은 그 후사(後嗣)로서 임진년에 처음 사자(使者)를 보내어 선인이 맺어 온 구호(舊好)를 닦았는데, 그때 구례(舊例)에 어그러지는 일을 당하여 아껴 주시는 뜻이 매우 없었습니다. 집사(執事)가 옛 맹약(盟約)을 잊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또 사자가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존명에 따라 곧 거듭 사선(使船)을 보내어 명을 받고자 합니다. 따라서 유구국(琉球國)에서 보내 온 사향(麝香) 1필(匹)을 존명을 받들어 바칩니다. 정홍이 몇 해 전부터 산명 좌금오(山名左金吾)의 군사를 돕느라고 경사(京師)에 머문 지가 몇 해 되었는데, 지난해 3월 18일에 금오가 서거(逝去)하고 그달 28일에 세천 경조(細川京兆)도 서거함에 따라 두 집안의 자제들이 점점 화목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전하(殿下)가 대명국(大明國)에 사선(使船)을 보내고자 하매, 신이 명을 받들어 배를 꾸미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그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상국의 풍부한 재물의 나머지로 은사(恩賜)를 굽어 내리시기를 바라며 앞으로 갈수록 옛 맹약에 따라 충절(忠節)을 지키고자 합니다. 대명국과 유구국에서는 신에 대하여 은문(恩問)이 더욱 후한데, 상국만이 옛 맹약을 잊으신 듯합니다. 교맹(交盟)이 보탬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보명(報命)에 따라 그 뜻을 알아서 엎드려 진정을 아뢰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토의(土宜)나마 작은 뜻을 표합니다."
-성종실록 45권, 성종 5년(1474년) 7월 27일 경진 3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 좌경조윤 중대부 겸 방장풍축주 태수(大內左京兆尹中大夫兼防長豊筑州太守)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중[僧] 청감(淸鑑) 등을 보내어 와서 토산물[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대인(禮曹大人) 족하(足下)께 올립니다. 무술년 가을에 하사하신 《대장경(大藏經)》은 이듬해 기해년 10월에 사승(使僧)이 싣고 돌아왔고, 겸하여 아름다운 물품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기쁜 뜻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통신사(通信使)로 정림사 주지(定林寺住持) 청감(淸鑑) 등을 보내어 삼가 아룁니다만, 복(僕)의 치내(治內) 축주(筑州)의 승천사(承天寺)는 창건한 지가 오래 되어 날로 허물어집니다. 비록 보수할 뜻은 있어도 힘이 넉넉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도움을 귀국에게 요구하니, 이를 도와서 공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인하여 성수(聖壽)의 만세(萬世)를 빌며, 다음으로 사직(社稷)의 천추(千秋)를 빕니다. 우러러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삼가 후하지 못한 방물(傍物)을 바치니, 별폭(別幅)에 갖추어 기재하였습니다. 애오라지 박한 정성을 표하는 마음 뿐입니다. 이제 통신사 청감(淸鑑) 등에게 명하여 대신 아뢰니, 굽어 살피소서."
하였고, 별폭에는, 개(鎧) 1령(領), 제연구(諸緣具) 대도(大刀) 2진(振), 주칠견(朱漆鑓) 10병(柄), 주칠완(朱漆椀) 10구(具), 접첩선(摺疊扇) 50병(柄), 백련초(白練綃) 10필(匹), 병풍(屛風) 1쌍(雙), 봉아목(蓬莪木) 50근(斤), 자석문연(紫石紋硯) 10매(枚)이었다.
-성종실록 158권, 성종 14년(1483년) 9월 13일 계묘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 좌경조윤(大內左京兆尹) 중대부(中大夫) 겸 방(防) 장(長) 풍(豐) 축(筑) 4주 태수(四州太守)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원숙(元肅)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는데,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지난 해 사자[信使]가 돌아올 때 서신(書信) 1통과 겸하여 아름다운 선물 약간을 내려 주셨는데, 후의(厚意)를 알고 감대(感戴)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또 사자 원숙(元肅)·주촌(朱村) 등을 보내어 삼가 아뢰건대, 제가 다스리고 있는 지역 안의 선산(善山)의 보문선사(普門禪寺)는 우리 상국(相國)의 분사(墳寺)인데, 비로 법보(毘盧法寶)를 갖추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결전(缺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장경(大藏經)》 전문(全文) 1부(部)를 얻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날마다 전법륜(轉法輪)하도록 한다면 나라가 편안하고 병란(兵亂)이 종식되어서 편호(編戶)가 영구히 풍성해질 것이니, 이는 귀국(貴國)의 교화(敎化)가 멀리 하국(下國)의 일단(一端)에 미치는 것입니다. 1권(卷)과 1축(軸)이라도 가리지 않고 내려 주신다면 저에게 다행이겠습니다. 하찮은 방물(方物)은 별도로 건목(件目)을 갖추었는데, 마음을 곡진히 하여 삼가 사자 원숙·주촌 등에게 명하여 어리석은 뜻을 대신 전하도록 합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조리(操履)가 강녕(康寧)하시고, 정신(廷臣)들도 각각 보애(保愛)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별폭(別幅)에는 장도(長刀) 1대(對), 개(鎧) 1령(領), 제연구 주칠 견자(諸緣具朱漆鑓子) 1대, 병풍(屛風) 1쌍(雙), 접첩 화선(摺疊畫扇) 20파(把), 대완분(大碗盆) 2개(箇), 연병(鋋甁) 2대, 자석 문연(紫石紋硏) 10매(枚), 유황(硫黃) 1천 근(斤), 계심(桂心) 1천 근이었다.
-성종실록 182권, 성종 16년(1485년) 8월 30일 무신 1번째기사
대내전(大內殿) 사송(使送) 원숙(元肅) 등이 하직하였다. 도승지(者承旨) 권건(權健)이 명을 받고 후추[胡椒] 종자를 찾아서 보낼 일을 말하니, 원숙(元肅)이 대답하기를,
"우리 주인은 바로 백제(百濟)의 계통을 받은 까닭으로 마음을 다하여 대국을 사모[向仰]합니다. 후추의 종자가 비록 저희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제가 마음을 다하여 구하면 얻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이니 얻으면 보내겠습니다. 제가 만약 거짓말을 하면 제 몸을 어느 땅에 두겠습니까?"
하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순(柳洵)이 대내전(大內殿)에게 치서(致書)하기를,
"멀리서 동정(動靜)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 위안이 됩니다. 특히 전하께서 신에게 명하시어 족하(足下)에게 글을 보냅니다. 후추의 씨라고 하면 서독(暑毒)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일반적인 약재가 없지 않으나 반드시 여러 종류를 모아서 조제(調劑)한 연후라야 쓸 수 있으니, 궁벽한 시골과 가난한 백성이 갑자기 병이 나면 얻기가 어려우므로 좋은 종자를 얻어 널리 민간에 심게 해서 위급한 때에 자뢰하기를 생각한 것입니다. 귀전(貴殿)이 우리 나라에 파견한 모든 정성스러운 마음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한층 더 돈독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자뢰하여 지내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좋은 종자의 심을 만한 것을 보내 준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겠습니다. 그것이 귀하의 토지에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장삿배가 왕래하는 곳에 널리 구하여 보내는 것도 또한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84권, 성종 16년(1485년) 10월 8일 을유 2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좌경조윤(左京兆尹) 중대부(中大夫) 겸 방(防) 장(長) 풍(豊) 축(筑) 사주 태수(四州太守)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철우(鐵牛)를 보내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사자(使者)가 돌아와서 글월을 받아 보고 강승(康勝)하심을 알았으니, 기쁘고 위로됩니다. 갑진년에 내려 주신 대장금문(大藏今文)과 겸하여 주신 물건을 삼가 받아서 거두었는 바, 거룩하신 뜻이 거듭 중하시니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묘광장로(妙光長老) 철우 화상(鐵牛和尙)을 차임(差任)하여 통신사(通信使)로 삼았습니다. 우리 기내(畿內) 화천(和川) 장곡(長谷)은 바로 관음대사(觀音大師)가 승화(乘化)한 영지(靈地)로서, 전탑(殿塔)이 높고 아름다우며 누각(樓閣)이 층층이 솟아 산곡(山谷)을 비치는데, 원근에서 첨례(瞻禮)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합니다만, 비로법보(毗盧法寶)를 안치하지 아니한 것이 결전(缺典)이 됩니다. 대장경(大藏經) 1부(部)를 내려 주어서 우리 나라 처음의 영장(靈場)으로 하여금 법륜(法輪)이 항상 돌게 하면 해내(海內)가 편안하고 전쟁이 그칠 것이니, 귀국에서 은혜를 멀리 펴는 하나입니다. 하찮은 토산물을 바쳐서 멀리 정성를 표합니다. 물건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으니 살피시기를 바라며, 겨울 추위가 비교적 심한데 절서(節序)에 순응하여 몸을 보호하고 아끼소서."
하였다. 물품은 첩금병풍(帖今屛風) 한 쌍, 학과 소나무를 그린 흑칠 초병 대도(黑漆鞘柄大刀) 10자루, 나첩병 견자(螺帖柄鑓子) 10자루, 홍백 연견(紅白練絹) 10단(端), 금문 침자(金紋枕子) 50수(首), 주칠 완자(朱漆椀子) 10구(具), 소원(小員) 7백 매(枚), 흑백병 섭선(黑白炳摺扇) 1백 자루, 은주(銀朱) 50포(包), 흑석연(黑石硯) 11매(枚)와 아울러 금문함(今紋函)·수적(水滴)·소도(小刀)·추자(錐子)·묵병(墨炳) 전부와 침향(沈香) 10근이었다.
-성종실록 204권, 성종 18년(1487년) 6월 16일 갑신 1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중 대부(大中大夫) 좌경조윤(左京兆尹) 겸 방장풍축 4주 태수(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글을 받들어 조선국(朝鮮國) 예조 참판(禮曹參判) 족하(足下)에게 올립니다. 아득히 생각하건대, 연달은 복록이 편안하고 넉넉하시니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희 나라[下國]는 귀국과 먼 옛날부터 과갈지계(瓜葛之系)에 있고 의(義)는 한집안과 같아서 대대로 정성을 보냈습니다마는, 바다가 막히어 능히 때때로 빙문(聘問)하지 못하였음은 게으름이 아니오니, 족하(足下)는 지극한 정성을 살펴주소서. 우리 나라의 기주(紀州) 안락선사(安樂禪寺)는 바로 남방(南方)에 복(福)을 심는 곳입니다. 당우(堂宇)는 이미 낙성되었으나 대장경(大藏經)이 없으므로 결전(缺典)이 되기에 이제 통신사(通信使) 경팽(慶彭) 수좌(首座)를 보내어, 가서 그 뜻을 고하고 간곡하게 원하고 바람을 진달하니, 맑게 들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삼가 변변치 못한 토의(土宜)를 가지고서 전날의 친분을 닦고, 별폭(別幅)에 구비(具備)하여 애오라지 작은 정성을 표할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그 별폭(別幅)에는, 개(鎧) 1령(領), 제연구 박색 담묵 병풍(諸緣具薄色淡墨屛風) 2장(張), 백련견(白練絹) 10필(匹), 소홍릉(小紅綾) 5필(匹), 장도(長刀) 2파(把), 탑선(榻扇) 1백 병(柄), 자석 문연(紫石文硯) 10매(枚), 주칠견(朱漆鑓) 10본(本), 주칠 소분(朱漆小盆) 50지(枝), 흑칠 초병 대도(黑漆鞘柄大刀) 10진(振)이었다.
-성종실록 244권, 성종 21년(1490년) 9월 18일 정묘 1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 대중 대부(大內大中大夫) 좌경조윤 겸 방장풍축 사주 태수(左京兆尹兼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원숙 서당(元叔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이 먼저 경술년 겨울에 내려 주신 서계와 아울러 좋은 물품과 요청한 《비로법보전장(毗盧法寶全藏)》을 사승(使僧)이 싸서 싣고 돌아왔으니, 족히 복(僕)의 영광이 됩니다. 이후로 바다가 멀리 막혀서 하례하는 정성을 펼 겨를이 없어서 머뭇거리다가 이에 이른 것이며 거만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신사(信使) 원숙 서당(元叔西堂)을 보내어 삼가 정성을 바치고 서로 우호(友好)하는 예를 닦게 합니다. 복의 적(嫡) 신개(新介)가 균지(鈞旨)를 받들고, 근자에 간웅(奸雄)이 왕기(王畿)를 침범한 것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려(軍旅)를 거느리고 낙(洛)에 올라가는데 양식을 운반하는 길이 멀어서 운조(運漕)의 비용이 많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귀국의 구원을 엎드려 청합니다. 병자(兵資)를 얻기 어려우니, 동전(銅錢) 5천 관(貫)과 목면(木棉) 5천 단(端)을 혜사(惠賜)하여 사졸의 기한(飢寒)을 구휼해 주시면, 중상(重賞)을 주는 밑에 용부(勇夫)가 있어서 반드시 백전 백승(百戰百勝)할 것입니다. 그러면 궁시(弓矢)의 가성(家聲)이 더욱 떨치고 동맹의 우호를 길이 닦을 것이니, 저희 나라의 승평(昇平)을 즐거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귀국의 성수(聖壽)를 빌고 해마다 사직(社稷)의 천추(千秋)를 기원하겠습니다. 인하여 전개(專价)를 명해 보내어 조금이나마 원정(遠情)을 표하고 많지 아니한 토산품을 별도 건목(件目)을 갖추어 감히 전달되기를 빌며 복(僕)의 정성을 펴게 하니, 굽어살피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그 별폭(別幅)에는 개(鎧) 1령(領), 흑피 제연구 병풍(黑皮諸緣具屛風) 1쌍(雙), 수묵회(水墨繪), 주병견(朱柄鑓) 10정(挺), 흑초 대도(黑鞘大刀) 10정(挺), 주병 장도(朱柄長刀) 2정(挺), 주칠 과자분(朱漆菓子盆) 1백 매(枚), 절부반(折敷盤) 대소(大小) 40편(片), 섭첩 금니 선자(攝疊金泥扇子) 1백 파(把), 백련초(白練綃) 5단(端), 백릉문초(白綾紋綃) 5단(端)이었다.
-성종실록 281권, 성종 24년(1493년) 8월 11일 계유 1번째기사
일본국(日本國) 대내(大內) 대중 대부(大中大夫) 좌경조윤(左京兆尹) 방장풍축 4주 태수(防長豐筑四州太守)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예조 참판 족하(禮曹參判足下)께 복계(覆啓)를 드립니다. 삼가 살피건대 〈건강이〉 청승(淸勝)하시다니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희 〈집안은〉 계통(系統)이 귀국(貴國)에서 나왔고, 대대로 구호(舊好)를 돈독히 한 지가 오래 되어 더욱 도타왔습니다. 이 때문에 빙사(聘使)가 끊임없이 왕래(往來)하여 덕으로 다스리는 정화(政化)가 하국(下國)에까지 미쳐 남달리 융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제장(諸將)이 도적[賊]을 토벌한 이래 옹희(雍熙)의 교화(敎化)에 회복됨을 얻지 못하였고, 편맹(編氓) 또한 농상(農桑)을 업(業)으로 삼음이 없으니, 절박하게 근심할 만한 바입니다. 전년[前歲]에는 공손히 양사(兩使)를 보내어 진제(賑濟)를 구(求)하였는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은택(恩澤)이 얕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사자[伻]가 돌아오매, 배사(拜賜)하였습니다. 다만 부족되는 것은 동철(銅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광원(寶光院) 요신(堯信)을 전개(專价)로 삼고 대조원(大照院) 종모(宗模)를 부사(副使)로 삼아, 삼가 원지(爰旨)의 흉도(凶徒)의 여얼(餘孽)을 아룁니다. 명(命)이 급히 내리니, 내년 맹동(孟冬)에는 장차 토벌할 것인데, 전포(戰袍)·기치(旗幟)의 비용(費用)인 동철(銅鐵)·면주(綿紬)·목면(木綿)을 인서(仁恕)하여 거만(鉅萬)을 상사(賞賜)하시면 진실로 다행하겠습니다.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전개(專价) 요신(堯信) 등에게 명하여 발돋움하고 우러러보는 사사로움을 빨리 아뢰게 하면서, 변변치 못한 토의(土宜)를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애오라지 양박(涼薄)의 정성을 나타내어 조빙(朝聘)하오니, 빌건대 갈마들여 통하게 해 주소서. 오직 황제 만세(皇帝萬歲)와 재신 천추(宰臣千秋)를 바랍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296권, 성종 25년(1494년) 11월 4일 기축 1번째기사
글 퍼오는것도 주장과 근거도 구성도 다 구리네
귀찬으니 요약
게시글을 읽으시면 아시겠지만, 어떤 사안이든, 객관적인 근거들을 기반으로 한 뒤에 중립, 양비론 등의 태도라도 취할 수 있는 것이지, 막연하게 기계적 중립, 양비론을 취하는 행동은 그릇된 행동이라는 의미입니다. ㅎ
땡큐
감사합니다. ㅎ
ㅆㅂ 뭔소리야 이게
위의 제 답글을 참조해주셔요. ㅎ
글 퍼오는것도 주장과 근거도 구성도 다 구리네
저것보다 더 객관성, 신뢰성이 담보된 기록들이 있을까요? 있다면 인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약 : 유게이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감사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