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루살렘 총대주교
펜타르키의 말석을 차지하는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예루살렘의 종교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펜타르키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사례다.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곳이자 부활, 승천을 한 곳이며 예수 승천 후, 그의 12사도가 기도하던 도중 성령의 영감을 받은 오순절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초대 교회 시절 예루살렘은 유대계열 그리스도인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의 기독교에 비해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자신들의 시초를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 소개하는데 그는 초대 교회에서 12사도와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지닌 인물로 앞서 서술한 유대계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수장이었으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막대한 종교적 위상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는 미약한 도시였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 교회의 가파른 성장, 그리고 예루살렘 자체의 몰락으로 인해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관리를 받는 안티오키아 산하 교구로 수백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예루살렘 교구는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총대주교구로 승격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수도가 되며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총대주교구로 승격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콘스탄티노플을 총대주교구로 승격시킬 겸 성지인 예루살렘 또한 총대주교구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총대주교구로 승격하자마자 로마 다음가는 서열을 보유하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에게서 트라키아, 아시아, 폰토스 지역을 자신의 관할구역으로 차지하게 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달리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5명의 총대주교 중 말석의 위치에 자리하고 담당 관할구역 또한 팔레스타인 관구 정도만 차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와 달리 제국 동방을 혼란하게 만든 양성론-단성론 논쟁에 휩쓸리지않고 상대적으로 조용히 그 혼란의 시기를 보냈고 이로 인해 앞선 2곳의 총대주교좌처럼 총대주교좌 자체가 분열되는 상황을 맞지는 않았지만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7세기 중반,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자체적으로 예루살렘에 총대주교좌를 설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1세기, 투르크의 발흥과 서방세계의 준동으로 인해 발생한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 총대주교좌를 다시금 뒤흔들었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고 로마 교황은 그 자리에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좌를 다시 설치하고 이를 자신의 산하에 두었다. 기존의 예루살렘 총대주교좌 자체는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예루살렘 대신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이 기묘한 상황은 1187년,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까지 이어졌다.
1187년, 예루살렘이 다시금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놓이게 되며 교황이 설치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는 예루살렘을 떠나 아크레에 총대주교좌를 설치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떠나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야 했던 기존의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후,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현재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라틴 총대주교는 십자군의 운명을 따라 이리저리 자신의 총대주교좌를 옮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는 1187년부터 1291년까지는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였던 아크레에 머물렀으며 아크레가 함락당한 뒤로는 키프로스로 총대주교좌를 옮겨 1374년까지 키프로스에 머물렀다가 로마로 다시 총대주교좌를 옮겼다. 로마로 총대주교좌를 옮긴 이래로 1847년까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는 유명무실한 자리에 불과했으나 1847년, 가톨릭이 다시금 예루살렘에 라틴 총대주교좌를 설치하며 예루살렘의 가톨릭 교인들을 관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3곳의 라틴 총대주교좌가 1965년에 일괄적으로 폐지된 것에 반해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좌는 폐지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 존재하여 예루살렘 내의 가톨릭 교회가 관할하는 교회와 교인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기존의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정교회 관할 하에 있는 예루살렘 내 교회와 교인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 또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관할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예루살렘 성묘교회다.
동로마파트만 놓고보면 차라리 1970년대 세계사 교과서가 지금보다 더 자세하게 동로마 제국을 다루던 ㅇㅅㅇ;;
1번은 패스 2번은 예루살렘이 로마입장에서 굳이 키워줄만한 도시도 아닌데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2번에 걸쳐서 유대인들의 반란 중심지로 기능했다가 불타버린 것도 한 몫해서 그만... 3번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르메니아인 추방이유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로마 제국 권역 외의 기독교 지역이 비칼케돈파 교회를 받아들인 계기는 아무래도 그들과 맞닿은 지역들이 대부분 합성론 계열의 로마 속주와 가까웠던 것이 한 몫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다가 네스토리우스파는 아예 실크로드와 해로를 이용해 중국과 인도까지 진출했던 것을 보면 더더욱
성묘교회는 정교회, 가톨릭,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외에도 수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나눠서 관리하다보니 더더욱 그 문제가 심각해지는 단점이…
그런데 또 성묘교회 자체가 예수의 무덤에 세워진 교회다보니 기독교 종파들에게 여기 관리를 못 하게 할 수도 없는…
하필 관리를 하고 있는 종파들이 역사적으로 꿀릴 게 없는 종파들이다보니 참… 그리고 개신교는 자신들을 대표할만한 교단이 없어서 성묘교회 관리를 못 하고 있는 상황입네다
1. 드디어 펜타르키 관련 연재글을 완료하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완결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예루살렘이 크리스트교에서 종교적인 위상이 높은 곳이긴 하지만, 경제적, 정치적 위상이 미약한 바람에 타 총대주교구에 비하면 낮은 취급을 받았군요. 종교도 인간의 것이니만큼(그리고 인간에게만 종교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도 하고요), 세속적인 측면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종교의 영향력이 확연히 감소한 현대 사회에서도 세속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인데, 전근대에선 세속과 종교가 근현대보다 더욱 막대한 영향을 끊임없이 주고받았겠죠. 3.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 크리스트교인을 추방한 건, 아르메니아인들이 믿는 크리스트교가 합성론파, 즉 비 칼케돈파인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건가요? 로마 이전에 크리스트교를 국교화한 나라(아르메니아, 조지아, 에티오피아 등)에서는 비 칼케돈파 정교회 쪽이 훨씬 우세하더라고요. 이전에 다루셨듯, 이런 상황이 초래되는 것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거고요.
1번은 패스 2번은 예루살렘이 로마입장에서 굳이 키워줄만한 도시도 아닌데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2번에 걸쳐서 유대인들의 반란 중심지로 기능했다가 불타버린 것도 한 몫해서 그만... 3번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르메니아인 추방이유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로마 제국 권역 외의 기독교 지역이 비칼케돈파 교회를 받아들인 계기는 아무래도 그들과 맞닿은 지역들이 대부분 합성론 계열의 로마 속주와 가까웠던 것이 한 몫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기에다가 네스토리우스파는 아예 실크로드와 해로를 이용해 중국과 인도까지 진출했던 것을 보면 더더욱
1. 하긴 예루살렘은 강경파 유대인들의 중심지였으니, 크리스트교 공인 이전의 로마 입장에선 탄압했으면 탄압했지 성장시킬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죠. 크리스트교 공인 및 국교화 이후로도 종교적인 상징 그 이상 그 이하의 기능은 수행하지 않았을 테고요. 2.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왜 아르메니아인을 추방했는지 언급한 기록이 나오거나 하지 않는 이상, 현대인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중을 알 수는 없겠군요. 추후에 관련 기록이 발굴되거나 누군가가 논문 등을 통해 연구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나저나 지리적으로 서로 맞닿아 있는 지역은 확실히 문화 교류가 활발하고, 비슷한 면을 공유하는 편이죠. 성상 파괴 운동이 처음 발생했던 지역도 이슬람 문화권과 맞닿아 있는 군인들이 주둔한 곳이었으니까요. 네스토리우스파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사나 세계사 과목에서는 '경교'라고 언급됩니다만, 이 점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 교사들도 간혹 있더라고요(귀찮거나 시간 문제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경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다룬다면 역사 과목을 지루해하는 대다수 학생들의 흥미를 조금이나마 돋워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경교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부분을 수능에서 문제로 잘 내지 않기 때문이라 ㅇㅅㅇ;;;
그렇죠, 결국은 수능에서 문제로 출제하지 않으니 사소해보이는 내용은 전혀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질 않는 건데... 수능 기출 문제 위주로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학생들이 역사라는 학문 자체에 흥미가 안 생길 겁니다. 윤리와 사상 같은 철학 관련 과목도 수능 위주로 공부하다 보면 흥미가 감소하는데(철학 교양 서적을 몇 권 읽어본 상태에서 고3 때 윤리와 사상을 수능 탐구 과목으로 선택했는데, 윤리와 사상으로만 철학을 접하다 보면 인문학이 재미없을 만하겠다 싶었습니다), 이건 한국 중등교육 자체의 문제라 씁쓸합니다.
동로마파트만 놓고보면 차라리 1970년대 세계사 교과서가 지금보다 더 자세하게 동로마 제국을 다루던 ㅇㅅㅇ;;
그래서 두명의 임명 주체가 다른 예루살렘 대주교가 관리를 맡는 성모교회 관련해서 종파 간의 갈등이 있다죠...
성묘교회는 정교회, 가톨릭,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외에도 수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나눠서 관리하다보니 더더욱 그 문제가 심각해지는 단점이…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심지어 개신교도 낀걸로 아는데...
그런데 또 성묘교회 자체가 예수의 무덤에 세워진 교회다보니 기독교 종파들에게 여기 관리를 못 하게 할 수도 없는…
최대한 빨리 대합의를 해내야죠...
하필 관리를 하고 있는 종파들이 역사적으로 꿀릴 게 없는 종파들이다보니 참… 그리고 개신교는 자신들을 대표할만한 교단이 없어서 성묘교회 관리를 못 하고 있는 상황입네다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