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키 히로히코
1960년 미야기현 출생. 80년에 '무장 포커'가 데즈카상에 준입선하여 데뷔.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30년 이상 연재중. 환갑이 가깝지만 피부가 매끄러워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도.
젊음의 비결은 '모르겠다'고 하나, 되도록 밤중에는 식사를 하지 않고 체육관에서 주 3회 3킬로 런닝을 빼먹지 않음.
유일무이한 화풍과 서스펜스적 스토리.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으로 알려진 아라키 히로히코 씨는 히트에 안주하지 않고 탐욕적으로 배움의 자세를 관철해 왔다.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호기심도 규칙적인 생활도 모든 것은 만화를 위해서다.
분명 모두 헛수고가 아니다
자동차, 곤충, 식물, 비행기, 지도─. 작업실 책장에는 가지각색의 자료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책상 위에는 말 피규어도 있다. 이전 말을 그리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사진집에는 아래에서 본 말은 실려 있지가 않아요. 손에 들고 여러 각도에서 봐 보면 만화에 리얼리티가 스밉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것은 작화를 위한 받침대와 잉크, 펜 뿐. 전 세계 누계 발행 부수 1억부를 넘었다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간소한 공간에서 만들어져 왔다.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가 시작된 것은 1987년 1·2 합병호. "주간 연재로 힘들어도 한번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네요. 왜 그럴까요." 역대 주인공이 싸움 가운데 삶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모험담. "무다무다무다(헛수고)……" 등 등장인물의 기합도 인상적이나 아라키 씨는 모든 것을 헛수고로 끝내지 않고 만화로 살려 왔다.
초등학생 무렵부터 만화와 가까이 있었다. '점프' '선데이' '매거진'을 친구와 돌려 읽고, 이윽고 등사기를 사용해 친구와 함께 자작 만화를 찍어내게 되었다. "편집자 같은 친구도 있어서, 미즈키 시게루와 우메즈 가즈오 작품의 무서움이 어떻게 다른지를 얘기해 주기도 했어요. 그들에게 칭찬을 들으면 신이 나서 만화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스스로의 작품을 출판사에 보내게 되었다.
동세대의 유데타마고 씨가 '근육맨'으로 데뷔를 장식한 것은 바로 그무렵이었다. "나는 늦었구나, 하고 통감했어요. 만화가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되겠다'고 결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센다이 시에서 열차를 타고 도쿄까지 투고를 시작한 청년 아라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편집자의 냉혹한 세례였다. 평가 이전에 만화를 읽어 주지 않았다. "봉투에서 아주 살짝, 만화 원고를 꺼냈다가는 그대로 돌려놓는 거예요. 편집자 입장에서 보면 매일매일 투고하러 오는 사람이 있는 셈이니 진저리가 나겠죠. '아, 이런이런 만화로군. 안 읽어도 알겠어' 싶은. 이게 도쿄인가, 냉혹한 어른의 사회인가 싶었지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만화를 그리고 있던 청년은 계속해서 읽고싶어지는 만화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우선 첫 1페이지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데뷔한 만화가와 저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필사적으로 분석했어요." 그러나 모방으로 빠지지 않은 것은 '복선이 있고, 결말로 향하는 미스터리 요소를 포함한 만화를 그린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서였다.
지지대가 된 것이 지금도 다시 읽곤 한다는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과 인터뷰한 '영화술'이라는 책이다. 복선을 까는 방법, 심리 묘사 테크닉 등을 스스로의 작품에 응용해 나갔다. 노력은 데뷔작 '무장 포커'에서 결실을 맺는다.
데뷔 이후에는 '마소년 비티' '바오 내방자' 등 연재도 따냈으나 히트작은 되지 못했다. 의기소침해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는 도리어 스스로의 신념을 보다 심화시켰다.
소년 만화에서는 감정이입하기 쉬운 주인공과 설정을 채용하는 것이 히트의 조건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죠죠' 제 1부의 설정은 무대가 1880년의 영국, 주인공도 영국의 귀족이라는 이색 그 자체였다. 당연히 편집자로부터의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제가 그려 왔던 미스터리 요소뿐만 아니라 당시 달아올라 있던 호러 영화의 세계관도 더하고 싶었어요. 그러기에는 일본이라는 설정으로는 약했었죠."
신도 마법도 쓰지 않는다
의지하는 것은 지혜, 궁리, 신념
연재 개시 당시 '점프'에는 '드래곤 볼' '세인트 세이야' 등의 배틀 만화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틀도 차용하지 않았다. '적을 쓰러뜨리면 또다시 강한 적이 나오고.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한계에 다다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사라지질 않았어요." 당시는 버블 경제 시기. 그 사회 풍조를 반영하는 듯한 만화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죠죠'에서는 강함만으로는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적도 아군도 지혜와 궁리를 짜내며 신념을 가슴에 품고 상대와 대립한다. "신이 구해준다든가 마법의 검이 떨어진다든가, 그런 편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곤란을 열어나가는 것은 인간의 힘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훌륭해요."
지고 고뇌하며 길을 열어나간다
인간의 힘은 훌륭하다
도쿄 국립신미술관에서 개최된 '아라키 히로히코 원화전 JOJO 모험의 파문'=다메히로 쓰요시 촬영
이러한 인간관의 배경에는 연재를 시작했을 무렵 타계한 조부의 존재도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만화를 사 주고 화로의 재로 글자나 지도를 그리며 놀아 주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이어진 끝에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 실감하는 체험이었지요. 영원, 무적의 주인공도 좋지만 패배해도 스러져도 다음 세대로 의지를 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죠죠' 의 이야기도 제 1부, 제 2부로 장을 바꾸며 여러 세대로 이어진다.
지금에는 교양 있는 어른들로부터의 평가도 높은 만화가다. 미술이며 사상 전문지에서도 특집이 편성된다. 미술가로서도 주목을 모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외에 8월 하순~10월 초순에는 국립 신미술관(도쿄·롯폰기)에서 원화전 'JOJO 모험의 파문'이 개최되었다. 국립신미술관에서의 만화가의 개인전은 데즈카 오사무 씨 이래 28년만이다. 이 전람회는 25일부터 오사카문화관(오사카시)에도 순회를 나간다.
컴플렉스였던 그림 실력
유럽 회화가 돌파구로
실은 그림 실력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전철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유명 만화가의 작품은 멀리서도 바로 알 수 있어요. 저는 그렇지가 못했죠." 전환점이 된 것은 첫 유럽행으로, 이탈리아의 프레스코화, 종교화와의 만남이었다. "참신함에 압도되었어요. 미술은 의학, 자연, 과학과도 이어져 있지요. 여기서부터 배우면 저의 길이 열리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유럽 미술은 '죠죠'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포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 극화의 전통을 이으면서 유럽 세계와도 이어지는 듯한, 세심하고 세련된 그림은 이렇게 태어났다.
"취미는? 하고 물으면 달리 없어요. 가능하면 만화만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만화에 살릴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인터뷰 중에도 옆에 있던 과자 상자를 보고 "왜 이런 로고일까요. 분명 뭔가 의미가 있을 거예요" 하고 중얼거릴 정도다. 모든 것은 만화를 위해. "만화는 제 인생 그 자체. 계속해서 죠죠를 그려나갈 거예요."
아카쓰카 요시히코
이노우에 아키요시 촬영
My Charge
일하는 중에는 언제나 음악
책상 옆에는 스테레오 세트와 산처럼 쌓인 CD(사진 위). '일하는 중에는 언제나 뭔가 음악을 틀어놓고 있어요". 재즈에 록, 팝─. 뭐든지 좋지만 듣는 것은 한결 같이 서양 음악이다. "일본어면 가사가 귀에 들어와 버리니까 신경이 쓰이거든요."
음악은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죠죠'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특수능력 '스탠드'에는 밴드나 악곡 등의 이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듣고 있던 곡에서 '이거다' 하고 영감을 받아 채용하는 일도 있네요. 어떤 여성 가수가 나왔을 때는 '엄청 이모셔널하네' 하고 같은 이름의 캐릭터를 만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자주 트는 것은 이글스나 레드 재플린 등 자신이 청년 시대를 보냈던 1970년대의 곡이다. "이 곡 스키장에서 틀어놓고 있었지, 그때 재밌었는데, 그런 걸 떠올리게 해 줘요. 시간 여행을 시켜 주는 힘이 음악에는 있지요." 한편 유행하는 곡 체크도 빼먹지 않는다.
발상의 원천 캐릭터의 이름으로도
"왜 히트한 걸까 알 수 없는 게 싫어요. 음악은 시대를 반영합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무엇에든 흥미를 가지고 생각을 계속하는 자세가 혹독한 경쟁에서 이겨온 비결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불규칙한 생활에 빠지기 쉬운 만화가 가운데서도 오랜 세월 주 2일 휴식을 지키고 있다. "생활이 엉망진창이면 호기심이 사라지고 말아요. 규칙적인 생활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계속해 올 수 있었다 싶습니다." 라 회상한다. 휴일의 휴식은 20대 시절부터 습관이 된 요리다(사진 아래). "성게 파스타를 만들자고 정하면 재료가 3,000엔이라도 사 버려요. 이른바 남자의 요리입니다." 하고 웃지만, 실제로는 섬세하다.
레시피 노트에는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함께 재료나 조리 순서가 빽빽이 쓰여 있다. "아주 약간만 바꿔도 맛이 전혀 달라져요. 예를 들어 명란젓 파스타는 명란 소스를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혀 두느냐, 고기 요리라면 저온에서 굽느냐 고온에서 한번에 굽느냐 하는. 여러 가지를 시험하는 게 재미있어요."
만화와도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컬러 원화는 색을 계산해 두고 있지만, 의외의 조합으로 좋은 작품이 태어나는 일도 있어요. 요리에도 그런 화학변화가 있지요."
(니혼게이자이신분 2018년 11월 18일)
40대라 해도 믿겄다.
진짜 볼 때마다 기묘한 얼굴
60년생이라니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