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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우연히 보게 된 한 권의 책.
너무나도 오래되어서 속의 종이는 전부 끝이 갈라지고, 색이 변한 그런 책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처음으로 용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떠한 외압에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강건한 존재.
다른 존재를 위해 스스로 희생할 줄 아는 고귀한 존재.
악을 응징하고 선(善)을 구현해내는 올바른 존재.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비록 인간이기는 하지만 용사란 신이었던 자의 후손이라는 우리들에게도 존경받을 그럴 존재가 아니던가.
유감이다. 어렸던 나. 너의 어리석음에 연민의 감정이 샘솟는다.
“은퇴하겠습니다.”
실제의 용사는 이렇다.
사전에 얘기도,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다짜고짜 이런 말을 하는 이게 용사다. 아니, 이유는 말한 건가? 지겨우니까? 지겨우니까 용사를 그만두겠습니다? 책임감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게 어딜 봐서 용사가 할 말인가. 참 대단한 용사님이시다.
이래서 인간……흠흠.
일단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전에 내 소개를 하겠다.
내 이름은 보닌 헤이스.
시간도 없고 기분도 안 좋으니 이런저런 건 차후로 미루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말하겠다.
이 용사라는 작자와 7년 동안 생사를 같이한 동료되시겠다.
“…….”
소란의 원인께서는 참으로 태평하게도 쿨쿨 잠이나 처주무시고 계셨다.
“깨울까?”
일단은 유스빈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유스빈과 칼리만 사이에 끼어들기 전에는 자신의 허락을 맡으라고 했으니까. 명령조인게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일단은 유스빈이니까 참아준다. 다른 인간 놈이 했더라면 반쯤 죽여놓지.
유스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깨우지.”
아쉽다. 깨우라고 했으면 지금 당장 칼리만의 태평스러운 낯짝에다가 주먹을 먹였을 텐데.
유스빈은 손을 뻗어 칼리만을 흔들었다.
“칼리만, 일어나라.”
흔들흔들 목이 크게 휘청인다. 그게 대여섯 번 반복되고 나서야 칼리만은 크게 하품을 하고는 눈을 떴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밥?”
사고하는 수준이 완전히 짐승이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교양이라는 것이 있는 지나 의심이 된다.
“유감스럽겠지만 식사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지금은 먼저 끝내야 할 게 있으니까.”
칼리만은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또 뭔가를 퇴치하러 가는거야? 그러면 밥부터 먹고 싶은데. 배고프면 힘이 잘 안 나서.”
바로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먼저 이 말을 한다. 생각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살면서 생각한다. 그게 바로 칼리만의 행동양식이다. 칼리만을 한 명의 인간으로 본다면 나도 비극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칼리만은 용사다. 용사라는 이름의 무거움을 생각하면 칼리만의 행동양식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반복적으로 보다보면 안타까움보다는 짜증과 분노가 먼저 치솟는다.
유스빈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아니다.”
“그러면?”
내가 유스빈을 인정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그 동안 칼리만 놈의 바보짓을 바로 옆에서 보고 그 바보짓 때문에 여러 수난을 겪었으면서도 끝까지 칼리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보통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용사라도 진작에 떨어져 나가고 말지.
“칼리만. 너 은퇴한다고 했나?”
“응.”
“지루해서?”
“응.”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해왔던 말들의 반복. 이제부터가 본편이다.
“언제부터 지루하다고 생각했지?”
칼리만의 눈이 위로 향했다. 생각을 할 때의 버릇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월례행사 즈음으로 취급하는 녀석이니 무척이나 희귀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속으로 열을 셌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칼리만의 눈동자가 다시 앞을 향했다.
“전에 뿔나고 날아다니는 괴물을 죽였잖아.”
“아쉬톤 산의 괴물을 말하는 건가? 6일 전에 돌 밖에 없던 산에서 퇴치한 괴물 말이다.”
칼리만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그러면 콜레드 섬의 괴물을 말하는 건가? 23일 전에 대포의 지원을 받으면서 싸웠던 괴물 말이다.”
“아니.”
생각보다 오래됐다. 평소의 행실을 봐서는 오늘이나 이틀 전부터라고 생각했는데.
유스빈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건 유스빈이 생각할 때의 버릇이다. 이건 꽤나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유스빈은 그 모습 그대로 말했다.
“특징을 더 말해봐라.”
칼리만의 눈이 다시 위를 향했다.
“말할 줄 알고, 이상한 것들을 마구 소환했어.”
내 머릿속의 괴물 사전에서 그 특징에 부합하는 괴물이 뭔지 찾아냈다.
스라파크의 대악마.
인구가 1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 스라파크에서 악마추종자들이 스라파크의 시민 전체를 재물로 바쳐서 소환한 대악마. 900년 전에 마지막으로 소환되었던 대악마가 대륙의 절반을 초토화 시켰던 적이 있었기에, 권력다툼으로 척을 지던 6개 신전이 손을 잡고 2000명에 달하는 기사단을 구성하게 만들었었다.
그런 악마도 칼리만에게는 단지 뿔나고 날아다니는 괴물일 뿐인가.
하긴 대치하고 30분도 안돼서 그 악마를 퇴치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30분도 악마가 날아다니느라고 길어진 거였고, 일단 잡고 나서는 순식간이었지.
유스빈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정보는 나보다 상세했다.
“스라파크의 대악마? 72일 전에 연합기사단과 함께 엔고이 평원에서 퇴치한 괴물? 네가 심장을 뽑아낸?”
“그래. 그거.”
칼리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때부터 지루하다고 생각 한 건가?”
“아니.”
앞에 말과 모순이 되는 말이었다. 장난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유스빈과 한 약속이 있기에 이번에도 참았다. 다행히 그리 오래지 않아 칼리만은 거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때 악마의 심장을 뽑아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놀랐다.
바로 직전까지 이 녀석은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을 거라 생각했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말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밖에 행동하지 않았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 누가 칼리만이 저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했을까.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조차도 칼리만이 아무런 생각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날 밤에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칼리만은 언제나처럼의 얼빠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나는 간다. 무기를 휘두른다. 끝나면 다시 누가 도움을 청한다. 나는 다시 간다. 무기를 휘두른다. 이것밖에 없었어. 옛날부터 지금까지 쭈욱.”
말하는 와중에 칼리만은 자신의 어깨를 긁었다. 얼마 전에 상처를 입은 곳이었다. 저 옷 아래에는 상처와 흉터로 가득 차있다. 칼리만은 용사다. 용사니까 언제나 최고의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그 치료도 영혼까지 손상을 입히는 독이나, 괴물의 원한이 실린 저주로 입은 상처는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다. 칼리만의 몸에 남은 상처와 흉터는 전부 그런 것들이 남긴 거다.
칼리만은 용사다. 내가 알기로는 16년 전부터.
16년 동안 용사였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최소한 16년 동안 괴물들과 싸워왔다는 거다.
“나 싸우는 것 외에는 전혀 몰라. 다른 건 전혀 몰라. 나 아직도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이해 못할 때가 많아. 어쩌다가 우연히 쉬게 되어도 뭘 해야 할지 몰라. 뭘 잘못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라.”
맨 처음 꿈에도 그리던 용사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실망했다.
칼리만은 책에서 보던 용사와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멍청하고, 고귀함이라고는 한 치도 느껴지지 않는 지저분한 인간 남자.
그러나 나는 믿었다. 내 힘으로 이 용사를 내가 생각했던 용사로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시간이 나는 대로 가르치고, 대화하고, 같이 여러 곳을 둘러보러 가능 등.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여보았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대한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지식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험이 결부된 죽은 지식이었다. 칼리만에게 어떤 것을 설명할 때 나는 사전에나 나오는 그런 설명밖에 하지 못했다. 당연히 칼리만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처음으로 칼리만에게 손찌검을 하게 된 이후 나는 나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게 더 효과가 있었다. 이해시키지 못 한다면 이해시키지 않으면 된다. 방향만을 지시하고 그것을 따라가게 하면 된다. 간혹 이해시켜야할 게 있다면 유스빈에게 시키면 된다.
지금까지 내가 칼리만을 대한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나의 이상적인 용사상을 칼리만에게 투영하고 억지로 칼리만을 거기에 맞추려고 들었다. 칼리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고.
칼리만이 어리석다고? 칼리만이 어리석다면 나는 의지박약에, 배려심도 이해심도 부족한 새끼다. 동료라고? 개소리지. 내가 칼리만의 동료면 강간도 사랑이다.
칼리만을 볼 수가 없다. 이런 내가 어떻게 칼리만을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칼리만의 말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 이상하잖아.”
“…….”
“…….”
어떤 묵직한 것이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뭐라고 말할 자격 조차도 없다.
우리가 대답이 없자 칼리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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