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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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있는 곳은 1년에 한 번을 와도 많이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급레스토랑 앞입니다. 실제로 2인 코스가 제 월급의 4분의 1에 달할 만큼 비싼 곳입니다.
하지만 연인이랑 오는 곳인걸요. 비싸더라도 연인이 기뻐한다면 충분한 값어치는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연인이라면 저와 함께라면 김밥 한 줄, 라면 한 그릇으로 저녁을 먹어도 기뻐하겠지만 가끔은 이런 곳도 좋잖아요. 원래 연인에겐 마구 베풀고 싶어지는 거잖아요.
“달링, 왜? 몸이 안 좋아?”
“몸보다는 기분이 안 좋은데요.”
연인을 위해서 무리했는데 그걸 다른 사람이 득을 보니 기분이 안 좋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니.
“아잉, 달리잉.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날보고 기분 풀어.”
폰로네 양은 콧소리를 내면서 제 팔에 가슴을 문지릅니다. 그 흉포함과는 별개로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극상입니다만……으으 그래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요.
“흠.”
제가 여전히 기분이 나빠보이자 폰로네 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저를 바라봅니다. 그러더니 제 귀에 속삭입니다. 사랑의 속삭임은 아닙니다.
“계속 그 따위로 굴어서 나도 기분 나빠지게 만들면 주위에 있는 놈들 죽여버린다.”
도시 한복판. 지금 제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만 하더라도 수십 명이나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협박을 합니다.
진짜 싫어요. 단순 공갈이 아니라서 더 싫어요.
“알아들었으면 대답.”
“…….”
저는 생긋 웃으면서 폰로네 양의 어깨에 팔을 두릅니다. 폰로네 양은 제 대답에 만족한 듯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반할만한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기댑니다.
정말 싫다, 이 사람.
어쨌든 저와 폰로네 양은 레스토랑에 들어갑니다. 자동문이 보편화된 세상인데도 직원이 직접 문을 열어주네요. 그런데 직원의 얼굴은 창백하네요. 프로로군요. 몸이 아픈데도 본분을 다하는 것을 보니.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도 노력해야겠네요. 저 하나만 참으면 되잖아요.
접수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갑니다.
“수고하십니다. 오늘 예약이 되어있는데요.”
접수를 담당하는 직원이 웃습니다. 하지만 표정이 굳어있네요. 직원은 늦게 입을 엽니다.
“자, 자,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 직원은 초보인가보네요. 제가 정말로 예약했는지 아닌지, 예약했다면 이름도 안 물어보고 다짜고짜 자리를 안내해주겠다니요. 가게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접수를 초보자를 내다니. 사람이 부족하면 더 뽑으면 될 텐데. 하지만 전 이런 걸 가지고 클레임을 넣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직원의 실수를 모른 척 해주며 제 이름을 말합니다.
“예, 예, 예약하셨습니까?”
“예약했다니까요?”
엉망진창이……아. 이제 왜 이런지 알겠네요. 직원은 힐끔 폰로네 양을 바라보더니 부들부들 떱니다. 이 사람 여기가 처음이 아닌가보네요. 그리고 옛날에 여기서 난동도 피웠나봅니다. 그러니 저 직원이 벌벌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저는 폰로네 양의 어깨를 더 강하게 끌어안아 혹시나 일어날 일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자리로 안내해주시겠어요?”
제가 예약한 자리는 독실이 아닌데도 독실로 안내받았습니다. 폰로네 양 때문이겠죠.
“요……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매니저는 공손하지만 마음속의 공포는 완전히 누르지 못했는지 저희와 눈을 마주치지 못합니다. 저는 독실을 빠져나가려는 매니저에게 말합니다.
“제가 예약했던 코스로 주세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폰로네 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혹은 그 이상 급의 코스가 나올 거 같네요. 미약하게나마 레스토랑에 가는 피해를 줄여봅니다.
매니저가 나갑니다. 독실에 저와 폰로네 양 둘만 남겨집니다. 폰로네 양은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얹으며 저를 보고 웃습니다.
“후훗.”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내키지는 않지만 폰로네 양과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나마 맞거나, 강간당하거나, 죽는 것보다는 대화가 훨씬 나으니까요.
“응. 너 보니까 좋다.”
“고마워요. 저도 폰로네 양을 보니까 좋네요.”
오늘도 세상에 거짓말이 하나 늘어납니다.
“거짓말. 아까는 날 보고 기분 나빠하더니.”
“거짓말인 걸 알아도 지적해주지는 말아주세요. 저도 지금 기분 좋아지려고 노력중이니까요.”
“우리 아가는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좋아질까?”
1. 놓아주세요.
2. 제 눈앞에서 사라져주세요.
3. 제가 사랑하는 사람 불러와주세요.
4. 얌전히 있어주세요. 스스로 노력해볼게요.
선택지는 여럿이지만 고를 수 있는 건 하나뿐이네요.
“얌전히 있어주세요. 스스로 노력해볼게요.”
폰로네 양은 제 대답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선택을 잘못했네요.
폰로네 양은 저에게 다가오더니 제 허벅지 위에 앉고 제 목에 팔을 두릅니다.
“얌전히 있기 싫은데?”
그렇게 말하며 제 귀를 가볍게 깨뭅니다. 쩝쩝 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찌르는 듯이 간지럽힙니다. 축축한 혀가 귓바퀴를 적십니다. 허벅지 위에는 적당한 무게감과 온기, 어깨에는 부드러운 가슴이. 그리고 뚜렷하게 정의하기는 힘든 살 냄새가 느껴집니다.
싫은 사람이기는 해도 여자는 여자네요. 감정과는 별개로 육체가 반응하려고 합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속으로 되뇝니다.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속으로 되뇌며 버텨냅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람 피울 생각은 없어요? 세계멸망과는 별개로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주기 싫어요.
귀에서 오묘한 감촉이 사라집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얼굴이 화끈화끈합니다. 폰로네 양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고혹적인 눈웃음을 짓습니다.
미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하는데도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는 것은 역시나 상대가 폰로네 양이기 때문이겠죠.
“어때?”
“벼, 벼, 별로네요.”
말을 더듬고 말았습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돌리며 말을 더듬으니 퍽이나 진실로 보이겠습니다.
“귀여워어.”
폰로네 양은 제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아지를 끌어안는 소녀처럼 제 머리를 끌어안습니다. 평균은 가볍게 넘어서는 부드러운 두 개의 지방 덩어리가 제 얼굴을 압박합니다. 쿵쾅쿵쾅 기분 좋게 울리는 폰로네 양의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
안 좋아. 안 좋아요. 안 좋단 말입니다. 저 이 사람 싫어합니다. 싫어함을 넘어서 혐오할 정도에요.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 책임감이 없는 모습이라던가, 자신 외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이기심,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막무가내, 윤리 도덕 규칙 법도 이해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인간. 지금 이 상황도 이 사람이 협박으로 인해서 오게 된 거잖아요. 과거에도 이 여자가 절 죽이거나 강간을 시도한 적이 많잖아요. 구타나 폭언 같은 건 기본이었고요. 싫어하고 혐오하고 진저리를 칠만한 여자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제 몸은 반응하고 마는 걸까요.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서 폰로네 양을 느끼고 맙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 계속 맡고 싶어지는 살내음, 콧소리 섞인 웃음소리, 기쁨으로 두근거리는 심장.
지금 당장이라도 폰로네 양의 허리를 끌어안고 싶습니다. 마음은 별개로 몸만으로 폰로네 양과 교류를 하고 싶습니다. 폰로네 양이라면 싫은 기색 없이, 아니 오히려 저를 반겨주겠죠. 아아아아아아아아. 안 됩니다. 지금 큰일 났습니다. 하반신에 피가 모이려고 합니다.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바람피우면 세계멸망.
진짜 큰일 났습니다. 효과가 없어요.
이번엔 연인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연인이 저를 보며 울상을 짓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싫어요. 그런 얼굴 보기 싫어요. 연인에게 불가항력이라고 변명을 하면 연인은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저를 끌어안고 위로해주겠죠. 하지만 싫어요. 그거 억지웃음이잖아요.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는 왜 남자인 겁니까!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저의 하반신은 저를 배신하고 맙니다. 아무리 남자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따로 논다고 합니다만 이건 너무하잖아요!
“어라?”
폰로네 양이 기묘한 감촉 때문에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 잠시 제 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와 눈을 마주칩니다.
“…….”
죄책감, 부끄러움, 자기혐오로 죽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아가도 싫지만은 않은가봐?”
“당신……진짜……싫어요.”
“입은 싫다고 하지만 우리 아가의 아가는 정직하네.”
폰로네 양은 쪽하고 제 이마에 입을 맞춥니다.
이제 어쩌죠? 도움을 청해야하나요? 아 그랬다간 기분이 나빠진 폰로네 양이 이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거나 절 죽이려고 할 텐데요. 옛날에는 제 연인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절 구해줬지만 지금 제 연인은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잖아요. 지금 당장 저를 구할 여유는 없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간 제 연인에게 죄를 짓고 마는 거잖아요. 불가항력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안 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 죄책감은 별개로 기분이 좋아질게 뻔하잖아요. 그거 부인할 수 없잖아요.
밀쳐낼까요? 그랬다간 죽을 텐데요?
방법은 하나 밖에 없겠네요. 설득. 확률은 낮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포, 포, 폰로네 양?”
“내려와 달라는 거지?”
“그래 주실 수 있나요?”
폰로네 양은 대답하지 않고 한 쪽 눈을 감은 채 미소 짓습니다. 아, 역시 무리네요. 맹수에게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말이 통하면 뭘 하나요.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좋아.”
폰로네 양은 시원스럽게 제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고 자신의 자리에 앉습니다. 어라? 이 사람 지금 무슨 꿍꿍이인가요? 제가 부탁한다고 들어줄 사람이 아닌데? 속셈을 모르겠네요.
“여기서 계속 이어나가면 아가가 싫어할 거잖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언제 그런 걸 신경 쓰기나 했나요? 수상하네요.
폰로네 양은 손을 내저으며 말합니다.
“아이참. 그렇게 의심에 차서 노려보지마. 오늘은 아가가 싫어할 만한 일을 피해 볼려고 하니까.”
내가 아는 폰로네 양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함정을 준비한 걸까요?
폰로네 양은 저와 눈을 마주치다가 갑자기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버립니다.
“그 따위로 노려보니까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네. 내가 아까 전에 나 기분 나빠지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주위에 있는 사람 다 죽여 버린다고 했었죠?
폰로네 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대답.”
“폰로네 양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넋이 빠져서 바라보고 말았네요.”
폰로네 양은 저의 급격한 태세변환에 대답에 어이가 없는지 쓰게 웃습니다. 저도 동의의 의미로 웃고 말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저라는 놈은 참 어이가 없네요.
“폰로네 님? 요리가 준비되었습니다.”
적절한 순간에 요리가 도착했습니다.
폰로네 양의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처를 할 시간은 있겠네요. 일단은 식사를 하면서 폰로네 양의 비위를 맞추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