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side----
R은 털썩 바닥에 엎드렸다.
“죽겠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야간 장거리 비행을 상정하여 빛을 차단하는 고글을 쓰고, 어둠 속에서 오직 고도계, 속도계, 방향계, 자세계, 지시계만으로 8시간동안 땅에 내려오지 않고 쉬지 않고 비행했던, 먹는 것도 배설도 전부 날면서 해결해야하고 타인과의 대화도 허용하지 않는 정신적으로도 힘든 실습이 끝났다. 도중에 체력이 다해서 혹은 정신적으로 버티지 못했던 동기들도 있어 끝까지 남은 사람은 소수였지만 R은 그 소수에 포함되었다.
사실 R도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렸었다. 그러나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이 그녀가 버틸 수 있게 도와줬다. 과거와 미래라고 해도 그리 먼 날의 일도 아니었다. 과거는 바로 어제. 미래는 오늘의 실습이 끝난 이후. I와의 일. I와 있을 일.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린 R은 얼굴을 붉혔다. 동시에 히죽거렸다. 부끄럽지만 기뻤다.
앞으로 있을 일을 떠올리며 R은 다리를 버둥거렸다. 동시에 키득거렸다.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R은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4:41
금요일마다 마지막 교시까지 수업이 있다고 그가 한탄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가 오려면 아직 1시간이 넘게 남았다.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언젠가 읽었던 유명 소설의 문구가 생각났다. 언제 읽었고 앞뒤의 내용도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바로 떠오를 정도로 그녀의 심정에 딱 맞았다.
1시간 뒤면 그가 온다.
오늘은 어떻게 그에게 한탄. 아니. 어리광을 부리고 무엇을 해달라고 할까? 그는 아마 입으로는 불평하면서 그녀가 해달라는 데로 다 해줄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닐 것이다. 아직 그럴 시간이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그 일지도 모른다. 운이 좋게 일찍 수업이 끝났거나 휴강을 해서 지금 들어오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R은 심호흡을 하여 들뜬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발소리에 집중했다. 가까워진다. 점점 가까워진다.
발소리가 멈췄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로 이어진다. 그다. 그가 왔다.
R은 달아오른 귀를 가리기 위해 뒤통수에 양손을 올렸다. 그가 들어온다면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할까?
문이 열린다.
“어라? R.”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고양되었던 몸과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아니다. H다. 그의 연인인.
“왜 그러고 있어?”
“스트레칭.”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스트레칭을 한다.
멍청하고 편협한 낙관주의자처럼 굴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망각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불가능한 일을 꿈꿨다. 그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다.
발소리, 냉장고가 열리는 소리,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 유리병이 부딪히는 소리, 냉장고 받침에 물건이 올라가는 소리.
H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인 것처럼. 냉장고를 채운다.
“그러고보니. 오늘 점심에 너 봤어. 앞에서 여섯 번째가 너였어?”
“글쎄. 눈을 가리고 계기만 보고 비행하는 실습이어서 잘 모르겠어.”
“점심은 어떻게 먹었어?”
“점심도 날면서 먹는 실습.”
R은 깨달았다. 기존과는 달랐다. 대답을 하는 자신의 태도가. 원래 어땠더라? 원래는 과장을 하면서 호들갑을 떨면서 징징거리면서 비하하면서 장난스럽게 경쾌하게 제삼자를 욕하면서 높은 목소리로 거리낌 없이 말을 했을 것이다.
지쳐서 그런가?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H가 반갑지 않았다. H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았다.
“많이 지쳤어?”
H도 그 낌새를 눈치 챘는지 묻는다.
“응.”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어땠어?”
꼬리 파닥이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
엎드린 몸 위에 무게가 실린다.
“I랑.”
허리에 가볍게 힘주어 누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떻게 보냈어?”
추궁이 아닌 기대에 찬 목소리. 친구의 연애담에 호기심을 가지고 묻는 것은 아니다. H가 거론한 I는 H의 연인이다.
“그냥. 밥 먹고, 마사지 받고 그걸로 땡.”
남의 연인과 껄끄러운 일을 했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H는 R에게 자신의 연인인 I를 유혹하고 최종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라고 종용하고 도와주는 이상성욕자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자세히. I는 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무거워.”
“아. 미안해.”
H는 무게를 분산하기 위해 R의 허벅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R의 등에 엎드려 R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말해줘.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정욕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귀를 통해 흘러들어온다. 귀에 독을 붓는 것 같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다. R이 I에게 연심이 있다는 것을 H에게 들킨 그 날. H가 R에게 I를 유혹하라고 종용하고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그 날부터.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어제 내가 먼저 와서 누워있고 죽는 소리를 내니까.”
말해야한다.
“응.”
“원래는 시켜먹으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밥을 차려줬어.”
그와 더욱 가까워 질 수 있게 도움을 받으려면.
“어떤 거?”
“한입크기 주먹밥이랑 국.”
이건 친구이상 연인미만의 남녀가 서로 부끄러워하면서 서서히 다음단계로 나아가는 풋풋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널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준거네?”
“응.”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과 성교하기를 원하는 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협력하는 또 다른 여자의 이상성욕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앉는 것도 힘들어하니까 이불을 꺼내서 편하게 앉을 수 있게 해주고 밥 먹는 것도 힘들어하니까……먹여줬어.”
“어떻게?”
“손으로.”
“입으로 먹여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치?”
“…….”
이건 R이 바라는 상황이라기 보단 H가 바라는 상황일 것이다.
“후후. 미안해. 계속 말해.”
“차린 걸 다 먹어도 내가 부족해보이니까 더 만들어줬어.”
“메뉴는 똑같았어?”
“응. 그리고 후식으로 사과도 깎아주고 쿠키도 줬어.”
“그것까지 전부 먹여줬어?”
“응.”
“좋았겠네. 아직 나도 그런 적 없는데. 부러워라. 질투나.”
그러나 목소리에선 숨기지 못한. 아니 숨기지 않은 흥분이 묻어있다.
“밥을 다 먹고 이야기를 했어.”
“어떤 이야기?”
“내가 실습하고 있던 것을 봤다고. 그리고 나도 실습할 때 I를 봤다고.”
“낭만적이네.”
낭만적이었으나. 이제는 낭만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이야기였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나.” “이야기 하는 내용보다는 이야기하고 있다는 자체가 즐거우니까. I도 즐거워했지?”
“……모르겠어.”
“즐거웠을 거야. 그 다음에는?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마사지지?”
“응.”
“처음에는 안 해주려고 했지? 그 때 나한테 맡기는 게 좋겠다고 했지?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응. 그래서 너한테 전화했어.”
훨씬 가까운 사이이기에, 연인이기에 정확하게 그의 행동을 예측해낸다.
“그 날 내가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후후후후.”
등이 뜨겁다. H의 몸이 달아올랐다.
“전화를 받은 내가 못 간다고 했고, 따로 마사지를 맡길 사람은 없을 테니 곧장 마사지를 했겠네? 마사지는 옷을 입고했어?”
“입고.”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
거짓말이 들켰다. 어떻게?
H는 R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응. 응. 응. 응. 거짓말이라고 말하니 맥동이 심해지고 땀 냄새가 강해지네. 응. 응. 응. 응. 거짓말 맞네. 후후후. 미안해. 책망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약속했잖아. 자세히. 그리고 사실 그대로 이야기해주기로. 입고? 벗고?”
함정에 빠진 것 같다.
“……벗고.”
“완전히?”
“……아니. 속옷은 입고.”
“응. 이건 믿을게. 아무리 I라도 완전히 알몸이 된 너를 마사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연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고 딱 그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인 I는 H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의심이나 하고 있을까?
H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물었다.
“너는 속옷차림이 되었고……그때 너는 엎드렸어? 누웠어?”
“엎드렸어.”
“I는 어떤 자세?”
“내 허벅지를 사이에 두고 무릎을 꿇었어.”
“이렇게?”
H는 R의 말대로 I의 자세를 흉내 냈다.
“아마도.”
“이제 마사지 시작? 어디부터?”
“등 중간부터 아래쪽으로”
“이렇게?”
I의 손길이 닿았던 곳에 H의 손길이 덧씌워진다. I의 손길에 대한 기억이 H의 손길로 덮여버렸다. I와의 기억이 더럽혀진다.
“그 때 I는 어떤 표정이었어?”
“못 봤어. 엎드려있었으니까.”
아니. 더럽히는 자는 R 자신이다. I와 H라는 연인 사이에 끼어드는 외부인은 R이다. 비록 H의 종용과 도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손은? 손은 점점 더 뜨거워졌지?”
“아마도.”
“후후. I도 흥분했겠지. 응. 당연히 흥분하지. 너처럼 야한 몸을 가진 여자가 속옷차림으로 누워서 마사지를 받는데 흥분하지 않는 남자가 어딨어?”
H의 말에 R도 흥분한다. 분노와 정욕이 섞인 흥분이다.
“마사지 받을 때 I랑 어떤 대화를 했어?”
“그냥. 내가 비행과에서 받은 실습이랑 배웠던 것들.”
“하하하하하. 쑥스러우니까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했겠지.”
H의 손이 R의 꽁지깃이 난 곳에 도달한다.
“아마 여기서 다시 올라갔겠지? 엉덩이 만지게 되니까.”
“응.”
H의 손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네. 중간부터 시작했다고? 원래라면 맨 위에서 시작하는 게 정상 아닐까? 그리고 속옷차림? 그냥 지금처럼 맨 옷 위에서 해도 될 텐데? R. 나한테 이야기한 것 중에 빠트린 거 있지?”
H의 발달한 직관은 그냥 넘겨도 될 작은 위화감도 놓치지 않았다.
“……내가 근육통에 좋은 연고도 발라달라고 했어.”
이런 상대에게 즉석으로 지어낸 거짓말이 통할 리 없다.
“아하하하하. 그러니까 I는 손에 연고를 묻히고 그것 내 몸에 바르면서 마사지를 했다는 거네? 브래지어에 묻으니까 등 중간부터 시작했고? 응. 앞뒤가 맞네.”
H는 이번에도 중요한 것을 빠트린 R을 책망하지 않았다.
“상상해보니 진짜 야하다. 진짜. 응. 고작 친구 사이에 이럴 수 있을까? 이성인데? 고작 친구인데도 반쯤 알몸이 된 친구에게 끈적끈적한 것을 바르며 마사지한다고?”
H는 R의 등 위에 엎드리고 R의 귀에 속삭였다.
“I 진짜로 흥분했겠네. 진짜로 좋았겠다, I. 마사지 받을 때 I다리 사이는 봤어? 발기했었어?”
“……몰라. 못 봤어.”
H는 뜨거운 숨결을 내쉬며 속삭였다.
“했을 거야. 분명히.”
땀이 나기 시작한다. H의 체온 때문이기도 하지만 R 자신의 체온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 그 순간이 생생히 떠오르며 그 때 그 감정 그 느낌이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H가 거기에 당시에는 없었던 성적 흥분을 더한다.
H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자 아까 전 꽁지깃에서 다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이제 브래지어를 만났네. 여기서는 어떻게 했어?”
“내……내가. 브래지어를 풀었어.”
“와! 대담하다. 완전히 풀었어? 벗었어?”
“여, 옆에 있는 벨크로만 풀었어.”
“그 때 입었던 브래지어는 어떤 거였어?”
“……스포츠.”
“지금도 똑같은 거 입고 있어?”
“……응.”
“보여줄 수 있어?”
“……싫어.”
“후후후.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해서. 알잖아. 내 성격. 흥분하면 앞뒤 안 가리는 거. 귀여워 R. 귀여워.”
H가 R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래라면 좋았을 그 손길이 지금은 싫었다. R은 고개를 저었다. H는 그 거부감을 알아차리고 R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하자. 너는 브래지어 옆면 벨크로를 풀었고. I의 손이 더 위로 올라가는 거네?”
H의 손이 R의 등 전체를 마사지했다. I보다 더 능숙했다. 하지만 I보다 더 좋지는 않았다.
목덜미에 손이 닿았을 때 I때는 짜릿하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았지만 지금은 거부감만 들었다.
“자. 이제 등 전체는 다 했다. 다음은?”
“팔.”
“어떤 식으로.”
“양손으로 한쪽씩.”
거짓말했다.
“이런 식으로? 왼쪽부터?”
“응.”
H는 R의 왼쪽어깨에서부터 양손으로 팔을 주무르며 내려갔다. 이번에는 H는 R의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했다. 둘 다 흥분했기 때문에. 흥분했기에 H의 직관은 둔해졌고, 흥분했기에 R의 거짓말로 인한 반응이 숨겨졌다.
R은 안도했다. 제일 좋았던. 포옹 같았던 팔 늘리기는 들키지 않았다.
양쪽 팔의 안마를 마친 H는 다시 물었다.
“자 다음은?”
팔 안마를 받는 동안 R은 고민했다. 더 거짓말을 할까? 아니다. 기껏 지킨 제일 소중한 기억은 지켰다. 괜히 거짓말을 해서 그것을 잃기는 싫다.
“꽁지깃 주위.”
“하하하하하하하하. 거의 엉덩인데.”
H는 양손으로 R의 둥근 엉덩이를 부여잡았다.
“그렇게 말고. 손끝으로 꽁지깃 주위만.”
“아. 아쉽네.”
하지만 충실하게 따른다.
“다음은 허벅지지?”
“응.”
“양손으로?”
“응.”
“포동포동하니 기분 좋다. I도 만지면서 기분 좋았을 거야.”
“…….”
다리 끝까지 안마를 마친 H가 물었다.
“자 뒤는 다했고. 이제 앞은?”
“끝이야.”
“진짜로?”
“진짜. 내가 해달라고 하니까 내 배를 찰싹 때렸어. 내 손 닿는 곳은 내가 하라고.”
“하긴. 그렇겠지. 하지만 아쉽네. 가슴도 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
H는 R의 옆 가슴을 손으로 주무르며 말했다.
“하지 마.”
“미안.”
H가 R의 위에서 비켜 옆에 누웠다.
“하아.”
H는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 큰일 났다. 일부러 골라서 입고 온 속옷을 갈아입어야겠네.”
‘이상하다.’ R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이상한 성욕에 자신도 협조하고 있지 않던가. 제삼자가 본다면 자신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마사지 다 끝낸 다음에 I는 어땠어?”
“평소랑 똑같았어.”
“정말로?”
“정말.”
“전혀 쑥스러워하지 않았어?”
“응.”
“신기하네. 마사지를 할 때는 쑥스러워했을 게 분명한데 금세 괜찮아지고.”
‘그러는 넌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걸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건데?’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I를 보고 R도 실망했었으니까.
“그런데 R. 나 오늘 여기서 I랑 밥 먹고 술 마시고 섹스할 건데. 넌 어쩔래?”
이젠 더 이상 숨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쫓아내려고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건 제안이었다.
R은 지난번에 있었던 I와의 첫 입맞춤을 떠올렸다. 도둑질 같았지만 좋았던.
“남을래.”
“후후후후후후. 그래. 그래야지.”
H는 R의 등을 토닥였다.
R은 이 손길이 싫었다. 하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R은 깨달았다. 더 이상 자신이 H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연적이기에? 아니. 자신은 연적도 되지 못한다. H는 이미 I의 연인이다. I를 H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을까? R은 그 질문에 스스로도 회의적이었다. 최근에 보여준 H의 일면을 고려해보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I의 첫 번째가 되지 못할 것이다.
H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I에게 알려주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H의 협력자다. I가 믿어줄지, I가 어떤 식으로 R을 대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H가 배신자에게 어떤 식으로 굴지도.
H는 어떨까? H는 여전히 R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열흘 만에 친했던 세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이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역시도 알 수 없었다.
R은 죽을 만큼 서글퍼졌다.
----another side end----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