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side----
D는 실험동에서 자신의 개인 연구실이 있는 강의동으로 이동하면서 이미 고인이 된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알겠느냐? 연구자에게 진정한 실패란 없다. 실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도 데이터가 아니겠느냐?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디서 어긋났는지 유추할 수 있고 가끔은 그 잘못된 결과가 새로운 발견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힘 내거라. 넌 실패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린 이유는 쉽게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한 실험의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차가 너무 커서 오히려 그게 흥미로웠다.
가슴이 들뜬다.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학문적 난제조차도 그녀에게는 놀이처럼 즐거웠다. 마침 오늘의 강의도 모두 끝났다. 내일 아침까지 이 문제를 즐겁게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얼른 개인 연구실로 돌아가서 문제를 가지고 놀 생각에 속도를 올렸던 D의 발이 멈췄다. 저기 먼 곳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이라면 무시하고 그냥 갈 길 가다가 학생이 인사를 하면 인사만 받아주고 가겠지만 그 학생만큼은 달랐다.
D는 들뜬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팔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학생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익은 용인으로서의 행동양식은 그런 행동은 너무 경박하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래서 팔은 중간까지만 올라갔고 목소리는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속에서만 울려 퍼졌다.
‘I.’
D는 머리와 옷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I와 만날 수 있게 걷는 방향을 수정했다. 그러나 몇 걸음을 떼지도 못하고 그녀는 다시 멈췄다.
인사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뭐라고 말하지?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몇날며칠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일상적인 이야기, 평범한 이야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막막해지는 그녀였다. 상대가 잘 받아준다면 그럭저럭 길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아니라면 그냥 인사만 주고받고 그대로 끝일 것이다.
D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길게 할 수 있을 용건을 머릿속에서 짜내려고 끙끙거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 기회를 잃고 말았다. I에게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세 명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싸움인가?’ 하고 놀랐지만 I도 웃는 것을 보면 친구끼리 장난을 치는 것이리라.
그 모습을 보니 씁쓸해졌다.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친 것 때문에, 자신은 저런 식으로 장난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 때문에.
D는 잠시 I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I일행과 경로가 겹치지 않게 걷는 방향을 바꿨다. D는 씁쓸한 감정을 품고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another side end----
주말 내내 고민했지만 아무런 답도 내지 못하고 월요일을 맞이하고 말았다. 다른 짓에 더 집중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쉽게 답을 낼 문제는 아니잖아.
R과 마주치는 것을 걱정하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하며 월요일에 하나밖에 없는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습격당했다.
“주말 동안 게임 들어오라고 그렇게 톡을 보냈는데 아예 읽지도 않고 뭐했냐?”
“메저가 잠수타면 안 되지 인마.”
“보스사냥도 제대로 못하고 허무하게 쓴 아이템 다시 채운다고 어제 종일 채집만 했잖냐. 변명 해봐.”
오랜만에 다시 말하지만 나도 그럭저럭 남자인 친구들이 있다. 이 녀석들은 과는 다르지만 게임으로 알게 된 녀석들.
나는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말했다.
“께임!하느라 바빴다고.”
“웃기시네. 네 접속 이력 보니까 이틀 동안 들어오지도 않았더만.”
“그 게임 말고, 께임!”
대답을 잘못한 것 같다. 공격이 매서워졌다. 녀석들의 공격에 마음이 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틀 동안 세계를 구하기 위해 굴렀는데, 너는 침대에서 굴렀다고?”
“우정보다 애정을 선택한 자에게 죽음을.”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진짜로 아프라고 때린다. 이러다가 진짜로 사냥 당할 것 같았기에 가방으로 녀석들의 공격을 막으며 변명했다.
“새끼들아. 농담을 다큐로 받아들이냐? 심란한 일 있어서 그거 처리하느라 접속 못했다!”
다행히 먹혔다. 공격이 약해졌다.
“뭐 때문에?”
이 녀석들에게 내 고민에 대해서 말하고 조언을 구해볼까?
……음. 역시 안 되겠다. 녀석들의 질투는 둘째 치고 진지하게 고민해줄 지도 미지수. 제대로 답을 내줄지도 미지수 그리고 내 고민에 대해서도 함구할지도 미지수다.
다른 친구들 중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털어놓을 만한 친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R은 당사자인데다가 H의 이상성욕에 대해서도 털어놓지 못했잖아.
어라? 나 생각보다 인망 없는 건가? 아냐, 아냐. 그냥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특이해서 그런 걸 거야. 다른 문제라면 내 고민을 털어놓을만한 친구가 많다. ……많다고 생각한다.
아씨. 진짜 지금 내 문제에 대해서 조언을 구할 만한 믿음직한 사람 어디 없나?
한탄과 고민을 동시에 하고 있는 찰나 내 시야에 적당한 인물이 포착되었다.
나는 날 공격하는 3인조에게 급히 말했다.
“야. 나 우리과 교수님이랑 만나야하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됐고. 오늘 게임 들어오기나 해.”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D교수님을 향해 달려갔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D교수님께서 돌아보신다. D교수님은 미소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I군.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미소가 아름다우시군요. 어라? 그런데 원래 이렇게 쉽게 웃던 분이셨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교수님께선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 되물으셨다.
“예? 음. 이번에 한 실험의 결과가 흥미로웠다? 이 정도? 그건 왜 물으십니까?”
“기분이 좋아보이셔서 여쭤봤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교수님께서는 자신이 미소 지었다는 자각이 없으신가보다.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교수님. 혹시 지금 상담이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문제이지요?”
“여기서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제 연구실로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D교수님의 개인 연구실. 나와 D교수님은 지난번처럼 마주 앉았다.
“오늘 일정은 전부 마쳤으니 시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러니까……”
제 연인인 H가 제가 다른 여자와 성교를 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외도하는 것에 엄청나게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에 대해서 H에게 경고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제 친구인 R이 저에게 연심을 품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저도 R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저는 외도를 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에 R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R과 사이가 멀어지는 것도 싫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R이 저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것을 H가 알게 되면 H가 R에게 저를 유혹하라고 부추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이걸 어떻게 말하지? 완전 막장드라마잖아. 내 이야기만 아니라면 3D안경 쓰고 팝콘 씹고 콜라 빨며 남자주인공 욕하면서 낄낄거릴 텐데, 내 이야기잖아.
“음…….”
“I군?”
내가 한참을 침묵하자 교수님께서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셨다.
“예, 교수님.”
“한참을 말 못하시던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입니까?”
“아, 아닙니……맞습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내가 말을 꺼내지 못해서 또 끙끙 거리자 교수님께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잠시 후 교수님께선 내 앞에 컵 하나를 내려놓으시곤 자신의 자리에 앉으시며 말씀하셨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의 오늘 일정은 전부 끝났습니다. 그러니 조바심 내시지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컵에 든 액체를 홀짝였다. 코코아였다. 나는 슬쩍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날개와 머리 양쪽에 달린 두 쌍의 뿔, 비늘로 덮인 굵고 긴 꼬리, 거대한 손톱과 발톱에서 다른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장착한 금속 장갑과 장화. 그리고 그런 흉흉한 부위와는 대조되지만 어울리는 긴 은발, 가녀린 몸과 단아한 얼굴. 교수이지만 스무 살. 자신의 전공분야에서는 대외적으로 인정받았지만 섹스 프렌드라는 관계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순진하신 분.
아. 나 상담을 받을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교수님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교수님이시라면 내 고민을 들으시고 충격을 받으시더라도 진지하게 내 고민에 함께 궁리를 해주실 분이시다. 그러실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밀도 지켜주시겠지. 그러나 나처럼 순진과는 수 백 광년 떨어진 놈도 고민할 문제를 교수님께서 이해하시고 도움이 될 조언을 해주실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나와 H, R의 관계를 알게 되시면 우리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실 지도 모른다.
어쩌지. 이제는 어떻게 내 고민을 털어놓아야할지 궁리를 해야 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파할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진짜 어쩌지.
----another side----
D는 I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자신이 I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I와 단 둘이서 한 공간에 있는 것도 기뻤다. 말없이 I가 말을 꺼내기 위해 궁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기뻤다.
그러나 I가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자 D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꺼내지 못할 고민이구나. 나는 그 정도로 신뢰받지 못하는구나.
D는 I의 고민이 어떠하든 편견 없이, 그에 대한 나쁜 감정을 품지 않고 진지하게 듣고 함께 고민해 줄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I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자 들 뜬 마음이 가라앉았다.
D는 I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은 I보다 연하다. 그리고 전공분야를 제외하면 인생경험도 부족하다. 오히려 자신이 I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D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 거라는 것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I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D는 말했다.
“교수는 교육자이지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어떻게 말을 할까 끙끙 거리던 I가 D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교육자는 여러 가지 일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노동자로서 소속된 집단에 급료를 받으며 주어진 일을 처리하고, 지식전달자로서 자신이 가진 지식을 학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교육자는 선생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를 풀어쓰면 먼저 선(先) 자에 날 생(生) 자.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 이는 단순히 먼저 태어나 나이가 많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도와 훈육을 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D는 쓰게 웃었다.
“안타깝게도 I군도 아시다시피 저는 I군보다 연하입니다. 그리고 학문 외의 분야에서는 경험도 별로 없지요. 지난번에 보신 것처럼 패스트푸드점에 간 것도 지난주가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I군의 고민을 들어도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교수라는 신분에 자만하여 주제 넘는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I는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말을 끝내자마자 자신이 반사적으로 부정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D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주제넘은 짓이 맞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학교에는 몇 가지 좋은 제도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학생상담제도입니다. 학생 개인이 신청하거나, 저처럼 학생의 상담을 받을 능력이 부족한 교수가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 전문 상담사가 상담을 해주는 제도지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빨리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청 해드릴까요?”
“그러면……부탁드리겠습니다.”
I는 왠지 자신이 D에게 간접적으로 당신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 한 느낌이었다. 악의적으로 생각하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D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자신의 능력 부족에 한탄하긴 했지만.
“알겠습니다. 이제 곧 상담센터가 문을 닫을 시간이니 지금 가서 신청해드리겠습니다. 혹시 다른 용건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같이 나가도록 하지요. 아, 컵은 그냥 그 자리에 두십시오.”
I와 D는 함께 연구실을 나서고 강의동 건물에서 나왔다. 서로 갈 길이 달라지는 곳에 도달하자 I는 꾸벅 D에게 인사를 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안 계셨다면 상담센터에 상담을 받을 생각을 한참 뒤에나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만큼 상담도 늦게 받았을 것이고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그러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예.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I군.”
그렇게 헤어지는 듯 싶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가 D는 한 가지를 떠올리고 I를 불렀다.
“I군.”
“예?”
“내일 함께 할 식사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I는 함께 식사를 하자고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내일 점심에 보도록 하지요.”
“예. 교수님.”
이번에야말로 진짜 작별. I는 고민을 해소할 방법을 찾은 것이 기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D는 자신이 직접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에 서글픔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끼며 상담센터로 향했다.
2학생회관 5층 상담센터에 도달한 D는 조심스럽게 상담센터 안을 살폈다. 상담센터의 존재여부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라? D 교수님 아니신가?”
그런 D에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D가 뒤를 돌아보자 교내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구미호가 있었다. 하지만 본 적이 있다곤 하나 그냥 구미호라서 인상에 남았을 뿐 직접 이야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상담센터 소장 N일세. 보아하니 상담센터에 용무가 있는 것 같은데. 어인 일로 행차하셨는가?”
특이한 말투라고 생각하며 D는 솔직하게 답했다.
“제 지도 학생의 상담을 요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엥? 그걸 왜 예까지 와서 신청하는감?”
“예?”
“이번에 시스템 개편되면서 인터넷으로 신청할 수 있게 됐는데 몰랐나?”
“……몰랐습니다. 제가 교육받을 때는 직접 방문해서 신청을 하는 것이라고 해서.”
“어허이. 이래서 공무원들이 철밥통 소리를 듣는게지. 시스템을 개선하면 무얼 하나 사용자들에게 전달이 안 되는 걸.”
D는 당신 소관이 아니냐고, 당신도 공무원 아니냐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그냥 참았다.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여 시간을 소모하는 건 그녀의 행동양식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신청을 할 수는 없는 겁니까?”
“종이로 된 신청서는 옛날에 이면지로 다 써버려서 없네만……”
N은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예까지 온 귀하신 분을 헛걸음하게 할 수는 없지. 따라오시게. 신청서야 새로 뽑으면 그만이지.”
D는 직감적으로 N이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괜찮습니다. 귀찮게 해드릴 수야 없지요. 제 연구실로 돌아가서 인터넷으로 신청하겠습니다.”
“하하하하. 너무 빼지 마시게. 내가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 말일세.”
그래서 거절하려고 한 건데……. D는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도망가면 내 권한을 이용하여 자네가 요청한 상담의 순서를 제일 뒤로 미뤄버릴 걸세.”
“직권……남용 아닙니까?”
“맞네. 하지만 상담 순서가 뒤로 밀린 것은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라고 말하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들킨다고 하더라도 고작 이걸 가지고 한 센터의 장을 징계하려하는 건 귀찮은 일이지. 안 그런가?”
D는 고민했다. 그러나 오래는 아니었다. I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귀찮음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