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부터 9교시까지. 점심시간인 5교시를 제외하고 강의로 가득 찬 미친 하루. 이딴 시간표를 짠 놈 내 손에 걸리면 죽여 버릴 거야.
후. 생각해보니 나구나. 오늘은 봐준다, 멍청한 놈.
“잠시만. 바람 좀 쐬고 올게. 너무 오래 화면 보고 있으니 딴 생각한다.”
6,7교시 ‘정적마력학’의 실험 중 조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험실을 나섰다. 그런데 보니까 나 말고도 딴 짓 하는 사람이 태반이구나. 조교도 대놓고 자고 있고. 어차피 데이터기록을 보고 해석하는 거니 느긋하게 시간 보내고 들어갈까.
실험실이 있는 건물 1층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은 후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이미 나보다 빨리 실험실을 탈출한 동기들이 몇몇 보였다. 흠. 안심되는군. 조져도 나만 조지는 게 아니겠어.
크게 기지개를 키고 목을 돌려 근육을 풀어준다. 그러다가 무언가 실험실이 있는 건물 옥상에서 은색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인 거 같다.
내 주위에 은발인 사람이 한 명 있긴 있는데…….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올라가볼까?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최고층인 4층에서 계단을 통해 한 층 더 올라갔다. 잡동사니를 피해서 옥상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쪽으로 돌아가니.
“교수님.”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대충 또아리로 말아 볼펜으로 고정시키고 한 손에 딸기우유를 들고 있는 D교수님이 계셨다.
“I군.”
반갑게 맞아주시던 교수님은 갑자기 뭔가를 깨달으신 듯 자신의 머리를 고정시킨 볼펜을 뽑아 호주머니에 넣으셨다. 머리카락이 풀려 내려갔다. 용인은 진짜 피곤하게 산다니까.
교수님은 자신의 머리를 정돈하시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으셨다.
“실험 수업이 있었습니까?”
“실험 수업 중입니다. 어차피 데이터 해석이 주인 실험인지라 잠시 바람 좀 쐬려고 나왔습니다.”
음. 그런데 D교수님도 교수님이신데 땡땡이치고 있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저랑 똑같군요. 저도 실험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다행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고 넘어가셨다.
“그래도 제가 하는 기초실험과는 다르게 심오한 실험을 하고 계시겠지요.”
나의 말에 D교수님은 엄격한 표정을 지으셨다.
“기초가 중요합니다. 기초를 익히지 않고서 어떻게 심화된 실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 귀여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지만 역시나 교수님은 교수님이시구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옥상에서 만나다니 우연이군요.”
“우연은 아닙니다. 밑에서 쉬고 있다가 교수님께서 계신 것을 보고 올라온 거니까요.”
“그렇……습니까.”
교수님께선 고개를 돌리셨다. 나도 따라서 교수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의 시선을 따라가니 저기 멀리서 무언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비행과다.
“비행과가 실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까?”
“예.”
“저 중에 R도 있겠군요.”
“예. 저기 맨 앞에서 크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이 R양입니다.”
“……그게 보이십니까?”
손가락 한 마디만한 것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이지만 색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멀었다.
교수님께선 잠시 나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시더니 자신의 날개를 펼치셨다.
광택이 있는 피막으로 덮인 날개. 부드러울 것 같기도 하고 금속처럼 딱딱할 것 같기도 한, 각 한쪽이 내 키만 한 길이의 날개를 펼치시니 그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버렸다.
그러자 교수님께선 당황하시고 즉시 날개를 접으셨다.
“아아. 죄송합니다. 일부러 놀라게 해드리려고 날개를 펼친 건 아닙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저 제 신체적 특징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날개를 펼친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쿠!”
당황하여 사과와 해명을 동시에 하시던 교수님은 들고 계시던 딸기 우유를 떨어트리셨다. 그리고 귀여운 소리를 내셨다.
“…….”
“…….”
꼴꼴꼴꼴 종이팩에 있는 분홍색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D교수님께서 한 순간에 보여주신 위압감과 귀여움. 그 갭에 웃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습다기보다는 뭐라고 해야하나. 좀 더 간질간질한. ……사랑스럽다? ……이건 부적절한 말이군. 호감이 갔다.
교수님께선 땅에 떨어진 우유팩을 주우시고 비행과 실습현장으로 시선을 돌리시며 말씀하셨다.
“저처럼 날개가 있는 종족들은 대부분 눈이 좋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공비행이 가능한 종족들은 눈이 좋습니다. 이는 자연선택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공비행을 하는 종족이 눈이 나쁠 경우 포식자의 공격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고, 또한 식량을 구하는 능력, 동족을 발견하는 능력 등이 떨어지니 자연적으로 도태되겠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옆얼굴은 붉었다. 만지고 싶은 욕망이 생길 정도로. 하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니 참았다.
“그렇군요.”
나는 교수님께서 체면을 차리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한참 비행과가 실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워낙에 멀다보니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점점 지루해져서 나는 교수님께 여쭤보았다.
“교수님께서 보시기에 R은 어떻습니까?”
“R양 말입니까?”
교수님께선 살짝 고개를 숙이시고 강철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셨다. 그리고 잠시 후 말씀하셨다.
“제대로 만난 건 두 번밖에 안됩니다만 좋은……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대해주고, 가끔은 정도를 넘어서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그것을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정도로 호감이 갑니다. 지금까지 제 주위에 이런 사람이 없었기에 아직까지 어떻게 대해야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교류는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렇군요. R이 들으면 좋아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 아뇨. R의 비행에 대해서 여쭤본 건데요.”
제가 여쭤본 건 그게 아닌뎁쇼.
“최고속도! 최저속도! 평형비행! 상승과 하강! 방향전환! 위치 및 균형에 대한 감각! 지구력! 시력! 가속도에 대한 내성! 모든 것이 뛰어나더군요! R양은 아마 장학생이지요?”
“어. 그럴 겁니다.”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런! 시간을 보니 실험 결과가 나올 때가 되었군요!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휙 하고 몸을 돌리신 교수님께선 철컹철컹! 평소와 달리 강철 장화에서 소리가 날정도로 큰 걸음으로 옥상을 벗어나셨다. 뭐. 그리고. 말 안 해도 알겠지만 교수님의 얼굴은 귀 끝까지 붉었다.
나는 교수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좀 더 옥상에서 머물다가 내려가기로 했다. 그래도 낄낄 교수님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그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려가신 줄 알았던 교수님께서 돌아오셨다. 교수님께선 옥상 문이 있는 벽 뒤에서 고개만 내미시고 말씀하셨다.
“오늘 있었던 대화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인의 위압감을 여기서 또 발휘하셨다.
“당연하지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다시 사라지셨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내려가셨겠지. 그래도 좀 더 머무르다가 내려가자.
그러고보니 캔커피를 사두고 아직 안 마시고 있었구나. 나는 캔커피를 따고 비행과가 실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나는 교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부끄러워하실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another side----
R은 속으로 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R의 비행 헬멧에 달린 무전기로 무전이 들어왔다.
-치익! 11번! 그 따위로밖에 못하나!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더더더더더더더더더! 캬아! 안 되겠네. 자네 능력은 그것밖에 안되나 보군. 장학생? 얼씨구.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데 장학생? 이게 장학생 수준이면 다른 놈들은 볼 것도 없지. 비행과도 폐지해야겠구만. 항공기보다도 못한 인물들만 모였는데 존속할 이유가 어딨나! 안 그런가? 자퇴서 내버리고 항공기나 몰지 그래! 그게 더 전망이 있으니 어이쿠! 아니지! 항공면허 따는 데에도 자질이 필요하지! 항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실례되는 말을 해버렸군. 비행서커스는 어떤가? 자네라면 사장 된 비행서커스를 부흥 시킬 수 있을 것 같군. 몸에 쫙 달라붙는 야한 옷 입고 남자들 위에서 날아다니면 전부 꿈뻑 죽어서 돈 뿌려주겠지! 저것 봐! 날아다니는 슴가다!-
R의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고강도의 비행훈련과 분노 때문이었다.
‘저 시발 놈의 교관새끼! 내려가면 찢어 죽여 버릴 거야! 야이, 시발놈아! 네가 30분 동안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봐! 처음 그 속도가 나오나!’
-하강점 도달! 하강!-
하지만 R의 생각과는 다르게 R의 몸은 충실하게 교관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R은 상승을 위한 날갯짓을 멈추고 온몸의 근육을 이용하여 머리와 다리의 방향을 바꿨다. 머리가 지면을 향하고 다리가 하늘을 향하게.
관성으로 상승을 하던 R의 몸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정지. 그리고 하강으로 전환된다.
하강이라고 중력에 몸을 맡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건 따로 낙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강은 중력 외에도 자신의 힘으로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것을 말했다.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여 날개를 내리고 공기의 저항보다 더 큰 힘으로 공기를 뒤로 민다.
중력을 거스르는 상승보다 덜 힘들기는 하지만 이게 더 위험했다. 자칫하면 공기저항으로 인해서 탈골 혹을 골절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속도가 너무 빠르면 속도를 줄이지 못해 그대로 추락하여 사망할 수도 있었다.
R은 고글에서 눈으로 투영되는 고도계와 속도계, 자세계를 보았다. 아직 최저점까지 도달하려면 멀었다. 조금 속도를 줄여…….
-치익! 11번! 벌써 뺑끼부리나! 속도 더 안 내나! 하기 싫으면 때려 쳐! 그냥 10만 원짜리 드론을 사는 게 훨씬 낫지! 뭘 이딴 것에 1년에 수천 만 원 세금 들여서 양성해!-
‘이 시발 놈! 내려가면 진짜로 찢어 죽여 버릴 거야! 더러워서 한다! 시발!’
-치익! 11번! 3100방향에 낙하물!-
R은 방향계를 보고 시야를 3100방향으로 맞췄다. R의 시야 끝에 검은 사각형 전광판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붉은색으로 6자리 숫자가 삐딱하게 적혀있었다. R은 숫자를 읽었다.
“3! 8! 6! 8! 5! 1!”
-치익! 11번! 눈깔하나는 좋구만! 비행실력은 별로지만! 더더더더더더더더! 속도 내!-
전광판이 사라졌다. 학교의 정경이 펼쳐졌다. 지긋지긋하던 이론 수업을 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아.”
그리고 그가 보였다. 저 멀리. 언제나 R이 찾던 그가 있었다. 그가 R을 보고 있었다. R도 그를 보았다.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러나 이제는 사랑할 수 있게 된. I가 있었다.
I가 R을를 보며 웃었다. R 또한 I를 보며 웃었다.
오늘 실습이 끝나면 I의 집에 가서…….
-11번!-
교관의 고함소리와 함께 몸의 방향이 바뀐다. 땅을 향했던 머리가 서서히 땅과 수평을 이룬다. 실습복에 있는 글라이더 형 안전장치가 작동하여 수평비행으로 바뀐 것이다.
-11번. R학생.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방금 전까지 욕지거리, 성희롱, 윽박지르던 교관이 덤덤한 말투로 묻는다.
망했다. 딴 생각하다가 실수했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딴 생각했습니다!”
-실습 속행 가능하겠습니까?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증가 했습니다.-
“그…….”
I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갑자기 빡쳐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 교신이 안 되었습니다.-
I의 집에서 할 일을 생각하느라……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교, 교관님을 어떻게 찢어 죽일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절반 정도는, 아니 절반 이상은 진실이지만.
-……그렇군요. 저는 솔직한 학생을 좋아합니다.-
‘미안 I.’
-그리고 저는 좋아하는 학생을 괴롭히는 성격이라서. 11번! 날 어떻게 찢어죽일 지 생각할 정도로 여유가 있구만! 타임로스가 발생한 시간의 3배만큼 훈련 시간을 늘린다! 상승점은 한참 지났다! 상승! 상승! 상승! 더! 더! 더! 더!-
‘나 오늘 못 갈지도.’
----another sid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