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H와의 캠퍼스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약속장소로 향하던 중. 하늘에서 기성이 들렸다. 고개를 드니 붉고 하얀 것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R이다.
“받아줘!”
“야 임마!”
얘는 왜 하늘에서 나만 보면 이런 식으로 떨어지냐.
바닥이 아스팔트였기에 그냥 내버려두면 크게 다칠게 분명했기에 나는 자세를 잡고 나를 향해 떨어지는 R을 받아주었다.
“꺄하하하하하하하!”
R은 내 마음도 모르고 까르륵 웃으며 내 목에 매달렸다. 나는 울컥해서 화를 냈다.
“야! 이러다가 진짜로 크게 다친다!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실수해서 못 받으면 어쩌려고!”
내가 화를 낼 줄은 몰랐는지 R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울컥해서 화를 낸 것을 자각했다. 나는 화를 한숨에 실어 내쉬었다.
“하아. 화내서 미안한데. 진짜 조심하자. 아무리 안전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얼마든지 사고는 일어난다고.”
R은 눈망울을 떼굴떼굴 굴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응. 미안해.”
그리고 하늘을 나는 동안 비행에 방해가 안 되게 앞에 매는 가방을 뒤적여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얼굴에 갖다 대었다.
“마실래?”
축축하고 시원하다. 슬쩍 보니 캔칵테일이다.
바로 근처 건물에서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하는 고등학문의 산실의 중심에서 술을 마시자고?
“당연히 마셔야지.”
그 배덕감이 좋은 거다!
내가 화를 낸 기색을 완전히 씻고 대답하자 R은 고개를 들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 H가 있는 곳까지 이대로 GO!”
R도 방금 내가 화낸 것은 완전히 잊은 모습이다. 그리고 말을 들어보니 H와 나의 데이트에 끼기로 한 것 같다. 뭐 즐거우니 상관없지만.
“이 새대가리가.”
“앗! 종족 차별 발언! 너 고소! 고소당하기 싫으면 이대로 GO!”
“그러면 나는 협박죄로 역고소 해주마!”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R은 공주님 안기로 들어 H가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걸어갔다.
“어. 어? 어? I……군?”
근처에서 당황하여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D교수님이다. 나는 즉시 R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R은 바닥에 발을 디디지 않고 내 몸을 타고 내 등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아 매달렸다.
R이 물었다.
“누구야?”
“우리과 교수님. 떨어져.”
하지만 R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리하게 R을 떨어트리는 대신 D교수님께 인사를 하는 것을 우선하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아. 예……. 안녕하십니까, I군.”
D교수님께서는 누가 보더라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뭔가 할 말은 많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강철장갑을 낀 손이 허공에서 갈피를 못 잡고 움직였다. 그리고 교수님의 눈은 나와 R의 얼굴을 왕복했다.
“어…….”
“교수님?”
“어…….”
세기적인 석학으로 손꼽히는 사람이 멍하니 서 있는 보기 드문 모습. 하지만 예쁜 분이시다 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평소의 냉철한 모습과 대조되어 보기 좋았다. 하지만 계속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왜 그러십니까?”
“어……I군은……H양과……연인이지요?”
“그렇습니다?”
“어……. 어……. 어…….”
내 대답에 교수님께선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거의 백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와 D교수님, R이 영문을 몰라 답답한 시간을 보낼 때 D 교수님의 어깨 너머에서 난입자가 나타났다.
“너희들 안 오고 뭐해?”
H다. H는 우리와 D교수님 사이에 끼어들며 D교수님께 인사를 했다.
“아. D 교수님. 안녕하세요.”
D교수님은 나와 H를 번갈아 보다가 간신히 인사를 받아주셨다.
“……네. 안녕하십니까. H양.”
그리고 교수님께선 다시 백치모드가 되어 우리들을 번갈아보셨다. 강의시간의 냉철한 모습 외의 교수님을 본적이 없는 H가 흥미가 동했는지 꼬리를 파닥이며 교수님께 물었다.
“왜 그러세요?”
H의 모습이 D교수님을 더 당황시킨 것 같다. D 교수님은 한층 더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보셨다. 그 모습에 H의 꼬리가 더 크게 파닥였다. 즐거운가 보네.
잠시 후 D교수님은 R을 가리키며 간신히 입을 여셨다.
“저 분은……누구시죠?”
R이 경례를 흉내 내며 대답했다.
“넷! 비행과의 R이라고 합니다.”
“R양. 네. 어. 그러니까…….”
교수님은 한참동안 말을 고르시다가 간신히 입을 여셨다.
“R양은……I군과……연인……사이인가요?”
때마침 적절하게 바람이 우리들 사이를 지나갔다. 나는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교수님께서 뭐라고 질문하셨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제일 먼저 알아들은 H의 웃음보가 터졌다. 말 그대로 폭소. 얼마나 웃긴지 다리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고 웃었다. H의 검은 꼬리는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정도로 파닥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도 교수님의 질문을 이해했다.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야.
“아닙니다. 교수님. 저랑 R은 친구입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선 내 대답에 납득을 하지 못하신 듯 되물으셨다.
“하,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연인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웃던 H가 꺽꺽거리며 대답했다.
“푸크크크큭! 그렇. 그렇지! 치. 친구. 섹프지.”
“야이 썅.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싫어하던 것인데다가 지금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섹프? 그건 뭡니까?”
그리고 교수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신다. 맙소사 대학 교수가 섹프가 뭔지 모르다니. 아. 아니구나. 이건 나의 치우친 상식이지.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이상한 모습의 우리들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쉼터의 퍼걸러(뜰이나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리어 만든 서양식 정자나 길. 장식과 차양의 역할을 한다.-표준국어대사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기에 가서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며 지금 꼬인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I군의 생각이 그렇다면 따르도록 하지요.”
나는 웃느라 진이 다 빠진 H를 일으켜 세워 퍼걸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동안 R은 여전히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R의 심장이 뛰고 뜨거운 것을 보니 R도 이 상황이 민망했나보다.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나와 R이 같은 벤치에 앉고 맞은편에는 교수님이 나와 마주보게 앉고 그 옆에 H가 앉았다.
R은 가방에서 음료를 꺼내 돌렸다.
“아, 감사……아. 아니군요. 죄송합니다.”
교수님께서는 무의식적으로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고 감사인사를 하시다가 무언가를 떠올리신 듯 손바닥을 내밀어 사양의 의사를 내비치셨다.
“직접 저에게서 수학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같은 학교의 교수와 학생의 관계. 제가 교수인 이상 의도와는 상관없이 학생에게 무상으로 물품이나 향응을 제공받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평소의 D교수님이셨다. 하지만 R은 색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면 저한테서 사시면 되겠네요?”
“……그렇군요. 현명한 해결방법입니다. 얼마를 드리면 되지요?”
“만 원요.”
“임마. 폭리 취하지마. 3000원입니다.”
“운송비! 유통비! 캐피탈리즘! 보이지 않는 손!”
“너 같은 장사치 때문에 서민들이 고통 받는 거다!”
“어……얼마를 드리면 되는 거죠?”
나와 R이 반사적으로 평소처럼 티격태격 거리자 교수님께서는 지갑을 꺼낸 채 당황하셨다. H가 교수님을 도와드렸다.
“3000원요. 저한테 주시면 되요. 제 돈으로 산 거 거든요.”
“너, 폭리인데다가 횡령까지!”
“잉여가치가 노동자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 상황을 착취라고 부른다! 나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어찌 폭리란 말인가! 그리고 횡령에 대해서는 변호사가 올 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아하하하하하.”
나와 R의 대화를 들으시던 교수님은 웃으시며 캔을 따셨다. 흠. 다행히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웃으시니 예쁘시네요, 교수님. 좀 더 자주 웃으시면 좋겠습니다.
H가 교수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수님도 웃으시네요?”
H의 말에 교수님의 웃음이 끊겼다. 교수님은 평소의 무표정으로 대답하셨다.
“저도 감정이 있으니 웃을 때는 웃습니다.”
용인들은 진짜 피곤하게 산다. 자신들이 최고의 종족이라는 선민사상과 최고여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대부분이 자신들이 선택한 분야에서 적잖은 업적을 남기지만 사회적인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
“읍!”
무심하게 대답하고 음료를 홀짝이신 교수님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으셨다. 아차. 이거 술이었지. 우리와 다르게 교수님께선 지금 근무 중이니 음주는 금물 일 텐데.
교수님께선 입에 든 것을 간신히 삼키시고 말씀하셨다.
“아. 괜찮습니다. 제가 탄산음료를 자주 안 마셔서 잠시 당황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다시 한 모금 마시셨다. 음. 술이라는 건 알려드리지 말자. 도수가 낮은 칵테일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팩소주를 들고 있던 H는 슬그머니 상표를 가렸다.
나는 술안주거리, 아니 간식거리를 탁자위에 늘어놓았다. 교수님은 여기에 대한 대가도 지불하셨다.
건배를 할 수 없는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까 전에 말했던 섹프가 뭡니까?”
‘그렇습니다. 교수님. 술자리에는 역시 음담패설이 제격이죠. 역시 배우신 분답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H가 대답했다. 꼬리를 파닥이며. 저게 진짜.
“섹스 프렌드의 줄임말요. 친구이지만 섹스도 하는 친구사이요.”
“친구이지만 섹스……”
H의 대답을 따라하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확 붉어졌다. 귀까지. 취기가 오르신 건가? 아니다. 취기가 오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성적인 단어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신 거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나는 썩었어.
교수님은 곁눈질로 H와 나와 R을 번갈아 보셨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셨다.
“그, 그걸 연인, 연인이라고 하지 않나요?”
H는 대답했다.
“연인이랑은 좀 다르죠. 연인보다는 좀 덜 친근한. 친구지만 섹스도 할 수 있는 관계.”
교수님은 다시 곁눈질로 우리들을 번갈아 보셨다. 그 눈빛에 경멸이 섞이기 전에 나는 즉시 대답했다.
“그리고 저와 R은 그냥 친구입니다. 섹프가 아니라. H가 농담한 겁니다.”
“그, 그렇죠? 섹프라는 게 농담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요.”
“어……아뇨. 섹프라는 관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관계인데요.”
교수님께선 상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이해합니다, 교수님. 좀 다른 경우지만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어머니 외의 이성의 속옷을 처음 봤을 때 왜 가운데가 갈라지지 않았는지 이해할……음마의 자식은 국가가 나서서 따로 성교육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의 입장으로서 진심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 상식의 지평이 넓어진 충격을 버티신 교수님은 술, 아니 발효탄산음료를 마시시고 이어 물으셨다.
“그런데 I군과 R양은 연인이 아니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I군이……R양을 안고 있는 모습, R양이 I군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그걸로? 그러면 세상에는 솔로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수님. 하긴 섹프라는 관계에 충격을 먹을 정도로 순진한 분이시니.
“이성친구이지만 그냥 그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입니다, 교수님. 교수님 친구 분들 중에도 동성끼리 허물없이 스킨십을 하는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보니 있군요.’라고 교수님께서 대답하시면 ‘그걸 그냥 이성 친구로 바꾼 겁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교수님께선 침묵하셨다. 말없이 음료를 홀짝이셨다. 이상하게도 한참을.
어…….
설마…….
제가 예상하는 그런 게 아니지요, 교수님?
한참 후에 교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전 친구 없습니다.”
무거운 바람이 불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죄책감에 눌려 죽을 만큼 죄송합니다 교수님.
H와 R조차도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지 말 없이 술을 홀짝였다.
시시각각 분위기가 경직되어갔다. 이대로라면 절대로 이 분위기를 타개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하하하하하. 그리고 저랑 R의 스킨십은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 이상의 단계라고 말하려면 키스 정도는 해야지요. 저랑 R은 키스도 안 해봤습니다. 그렇지, R?”
나는 R에게 물었다. 하지만 R은 굳은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야. 좀 도와주라. 아무리 이 분위기에 개입하기 싫어도 그렇지. 친구의 요청을 거부하냐.
음료를 다 비우신 듯. 교수님은 캔을 구기시며 말씀하셨다.
“친구가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동정을 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당사자인 저는 20년을 그렇게 살고도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니 동정하거나 이상하게 생각은 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합니다. 교수님.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요.”
나는 즉시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 뒈져버려라 라고 말씀하셔도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었다. 방금 전의 분위기만 타개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음. 그런데. 나. 방금. 엄청난 소리 들은 거 같은데. 무심코 동의해서 그걸 놓친 거 같다. 뭐라고 하셨더라?
다행히 H가 들은 것 같다. H는 눈을 크게 뜨고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20년요?”
“아.”
교수님께선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입을 가리셨다.
“잘못 들으신, 아니. 말이 잘못 나온, 아니.”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교수님께서는 입을 여셨지만 입을 여실수록 우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해져갔다.
스무 살? 스무 살이셨다고? 이미 그 나이에 교수가 되신 거라고?
교수님은 자신의 말을 수습하는 것을 포기하셨는지 한숨을 내쉬고 말하셨다.
“다른 분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수가 자신들보다 연하라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제 지적능력 외의 이유로 권위에도 악영향이 생기니까요.”
교수님은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저는 명백하게 합법적으로 교육과정을 수료하였고, 제 실적과 박사 학위들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진짜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용인 특유의 위압감을 흘리셨다.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H조차 온 몸의 털을 빳빳하게 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함부로 제 일에 대해서 소문을 퍼트리시면 제가 가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보복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위압감이 사라졌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교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오늘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는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실감하였으니 앞으로 더욱 겸손하고 정진하여 살아야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셨다……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시 우리를 돌아보셨다. 교수님은 붉어진 얼굴로 따지듯이 혹은 변명하듯이 말씀하셨다.
“주, 주위에 또래가 없었던 걸 어떡하란 말입니까. 전부 저보다 열 살, 스무 살 많은 사람밖에 없었는데. 친구 없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교수님은 떠나셨다.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남겨진 우리들은 침묵했다.
스무 살이라. 아니 확실히 젊어 보이시긴 하셨는데 그게 용인이 수명이 길고 노화가 늦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진짜로 젊으신, 아니. 어리신 것이셨어? 평소 용인특유의 냉혹, 냉철, 무표정의 가면을 쓰고 다니시는 것도 그걸 들키지 않으려는 용도도 있었고?
“개쩐다, 너희 교수님.”
R이 침묵을 깼다. H가 R의 말을 받아주었다.
“너 우리들 수업 들으면 그 말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걸?”
나는 H의 말에 동조해줬다.
“아니 학부생 과정도 골 아파 뒤지겠는 걸 스무 살 전에 다 이해하고 박사학위까지 땄다고?”
잠시 우리 전공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나는 한탄과 감탄을 한 후에.
“교수님 취하신 거 같지?”
“응. 그래서 실수하신 듯.”
R이 우리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저러셔?”
나는 즉답했다.
“전혀.”
H가 이어 말했다.
“나는 무표정 말고 다른 표정은 오늘 처음 봐.”
나는 다른 때에 다른 표정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나와 교수님사이의 비밀로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