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시간 때 흔히 위와 같이 배웠을 거임.
지배층=고구려유민 / 피지배층=말갈인
여기서 피지배층인 말갈이 다수였으며, 고구려인은 소수인 것처럼 표현을 해놨음.
만약 정말로 이민족인 말갈이 발해의 다수였으면
발해는 말갈인의 나라라고 정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근데 과연 말갈인이 다수였을까
아니 애초에 말갈인은 대체 어떤 종족을 지칭하는 걸까
기본적으로 말갈의 역사를 다루면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으로 발전했다고 말함
이에 따르면 말갈은 통구스 계통이고, 일원적으로 계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음.
이게 중국의 학계의 기본적인 인식임.
근데 이런 계보가, 그 시대에 말갈이 곧 통구스 계 하나만을 지칭한다고 말하긴 힘듬
이게 무슨 소리냐
한나라~당나라 때까지 사용되었던 숙신, 물길(말갈)은 중원에서 변방 민족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고
읍루는 부여가 변방 민족을 부르는 말이었음
그냥 변방의 어중이 떠중이들을 싸잡아서 숙신, 물길(말갈)로 부른 거임
말갈의 하위 분파인 흑수말갈, 백산말갈, 속말말갈 같은 건
타칭 '말갈' 중에서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룬 집단을
그 지명을 붙여서 말갈이라고 부른 거지
"이런 맥락에서 말갈의 경우 숙신, 읍루, 물길 등에 비해 분포범위도 광범위 하고 생활 풍습도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 없으며, 활동지역과 양상에도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일원적 계통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24 이 경우 숙신-읍루물길-말갈을 계승관계로 ㅂㅈ 않을 뿐 아니라 말갈 7부 자체도 모두 하나의 정 치집단이나, 같은 종족계통으로 ㅂㅈ 않는다."-김현숙 (2018).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연구의 현황과 과제. 동북아역사논총(61), 80-131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신라 북방에서 산택에 거주하고 단일된 세력체를 형성하지 않았던 세력을들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 용어를 차용하여 지칭하였을 것으로 본다."-
(2003). 이동휘, 삼'국사기' 말갈의 활동범위와 성격. 역사와 세계, 27, 1-25
즉 왕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집단을 말갈이라고 칭했고
당대에 이런 집단은 주변의 왕권국가에 피지배계급으로 흡수되었을테니
말갈=피지배계급을 싸잡아 부르는 멸칭, 비칭으로 볼 수도 있음 = 즉(적어도 삼국이 성립된 삼국시대 후기에는) 종족명이 아니라 계급명일 수도 있다는 것.
물론 이런 말갈이란 단어의 인식이 동북아 공통의 학설이라곤 할 수 없고
일단 위에 소개한 숙신~말갈~여진 = 하나의 계통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주장과
방금 설명한 것처럼 변방 어중이 떠중이들을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싸잡아 부른 것이라는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고 보면 됨
아무튼 '말갈'이란 명칭이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발해에 살았다는 말갈은 누구일까
일단 먼저 발해에 말갈인이 다수였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먼저 살펴보면
일본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유취국사의 구절
(이 기록 자체도, 발해에는 가보지 못한 일본인이 당나라 기록을 토대로 쓴 거라서 신뢰성에 대한 회의적 의견이 있음)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土人)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이 구절에서 토인(土人)을 기본적으로 토착민(=고구려인)으로 해석을 하고 (고구려 땅에 세워진 게 발해였으니 토착민=고구려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임)
말갈인이 많고 토착민이 적다고 했으니
발해는 말갈 다수의 국가였다고 말하는 거임
근데 의아한게 있음
고구려 역사 700년 동안 고구려인이 그 땅에 존속했음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고
698년에 발해가 들어섰음
단 30년 만에 700년을 그 땅에서 살아온 고구려인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갈인들이 순식간에 들어와 땅을 차지했다는 걸까?
구당서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인구가 69만호, 대략 3~400만명이라고 봤음
단 30년만에 거의 400만의 인구가 사라질 수 있을까
땅에 정착하고 사는 게 최우선인 농본위 사회에서?
(고구려는 반농반목 중에서 농업에 더 치우쳐 있었음)
물론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귀족들은 당나라로 끌려 갔겠지만
평민들까지 수백만명을 끌고 가버렸을까?
여기서 참고할 수 있는 게 발해사 권위자 한규철 교수의 주장임
한규철 교수는 다른 판본에서 선비 사(士)를 사용한 것을 들어
실제로는 토착민을 뜻하는 토인(土人)이 아니라
선비 계급=지배 관료 계급을 뜻하는 사인(士人)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고 보며
토인이 아니라 사인으로 보고
"말갈인이 많고, 사인은 적었다"이란 구절을 해석하자면
피지배계급이 많고, 지배계급은 적었다라는 말이고
말갈은 특정 종족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발해 중앙 정부에서 봤을 때 지방의 촌놈들을 그냥 오래전부터 관습적으로 부르던 '말갈'이라는 비칭으로 불렀다는 거지
물론 한규철 교수의 사인(士人) 설도
본인 스스로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확실히 설득력 있는 학설은 아니지만
한규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그 당대에는 '말갈'이라는 말 자체가 피지배계급을 싸잡아 부르던 비칭이었을 뿐이니
"말갈인이 많고, 토인은 적었다"라고 보더라도
그저 피지배계급이 많고, 지배계급이 적었다로 해석하는 게 옳다고 주장함
(한규철 (2015). 삼국과 발해사에서의 말갈. 한국사학보(58), 7-32)
물론 이런 한규철 교수의 주장이
발해의 구성원 '말갈'이 그냥 700년 내내 그 땅에 살아온 고구려인이었다라고 볼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음 (적어도 내가 찾은 것 중에는)
하지만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저 피지배계급을 싸잡아서 말하는 단어라면
굳이 고구려인이 소수라고 볼 이유도 없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