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시다싶이 명태조 주원장은 소작농 흑수저 출신이라
부르주아와 엘리트에대해서 불만이 가득했다는 썰이 있다.
증거중 하나로 공무원한테 월급을 짜게 줘, 일부러 월급만으로는
일반 백성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게 하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례로 이걸 FM으로 지키다가 죽을때 관짝값도 장만못한 해서가 있고,
개국 초기인 홍무년에,하민이라는 정2품 상서는 퇴근후 밤마다 밭에 모내기를 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횡령에 매우 엄하게 벌을내려, 은 60량 이상을 횡령한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안에 볏집을 넣어 허수아비를 만들어 전시를 해놨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잔혹한 형벌들도 관리들이 좀 사람새끼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막지 못했는데
관리들은 결국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들 횡령으로 부족한 재산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중 고위의 엘리트들은 고아한 방법으로 상인과 지주랑 서로 으쌰으쌰 하면서
세련된 방식으로 뇌물을 주고받았지만 9품 지방직 공무원은 그런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지방관료들이 필사적으로 통밥을 굴린 결과로 탄생한것이
바로 임첨척곡(淋尖踢斛)과 화모(火耗) 라는 방법이다.
이 두가지 방법은 다 세금을 운송할때 필연적으로 나올수 밖에 없는 소모에 근거하는데
임첨척곡이란
백성들이 관청에 곡물로 세금을 납부할시 곡斛이라는 용기에 담아 측량을 하는데
이게 다 채워져 자그만한 곡식의 동산尖이 생겼을때 발로차서踢
흘러내린것淋 들을 운송중의 소모로 간주하고 횡령하는것이다.
근데 이 곡이라는게 의외로 크고 무거워서, 관료들의 숙련도(?)에 따라서 횡령을 하는 정도가 달랐고
이것을 재대로 차기 위해서 통나무로 따로 수련(?)을 하는 관료도 생겨났다고 한다.
화모란 방법은 세금을 은으로 납부할때 쓰는 방법인데
쇄은을 은괴로 재련할때火 나오는 소모를耗 핑계로 세금을 더 걷어 횡령하는 방법이다.
물론 그 비율은 관리 마음대로, 이 방법은 아무래도 숙련도에 좌지우지 되는 방법보다는 안정적이니까,
지방관료들은 제발 올해 세금은 은으로 걷기를 바랬다고 한다.
그리고 명나라 초기에 탄생한 이 두가지 횡령법의 수명은 명나라보다 길어서
청나라 중기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조선도 공무원들 월급은 많이 안줬더라 작은 정부 존나 좋아함 세금을 적게 걷는다는게 사실 좋은 의미가 아닌데
급여를 쥐졷만큼 주면서 사명감 가지고 일하길 바라는 것은 강도의 심보이다 아 주원장은 출신이 강도구나 그럼 어쩔 수 없나
아전들이 못받음. 무상으로 일했다던데.
내시랑 시녀들 받은 거 보면 꽤 받았던디
중기 이후 특히 아전이 부패한 이유.
신나라 세운 왕망이 공무원들 월급없애서 다들 부정부패저지르지 않았나?
조선이 지방 호족들의 발호로 망가진 고려를 딛고 일어선 국가다보니까 지방 권세가들 찍어누르려고 일부러 안줬다는 카더라가 있더라
조선도 공무원들 월급은 많이 안줬더라 작은 정부 존나 좋아함 세금을 적게 걷는다는게 사실 좋은 의미가 아닌데
일론 머스크
내시랑 시녀들 받은 거 보면 꽤 받았던디
아벤디스
아전들이 못받음. 무상으로 일했다던데.
웜메 시벌
일론 머스크
중기 이후 특히 아전이 부패한 이유.
역사적으론 작게 주고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렇게 줄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지.
그쪽은 왕 주위 종들이잖아 잘챙겨줘야 뻘짓을 안 하지
세금 많이 걷는걸 학정으로 인식했으니까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 큰 정부가 나오는거도 아냐. 세금이 얼마나 정부에 꽂히냐 이게 중요한데. 근세까지 정부의 힘이 그게 가능하지않았으니. 그나마 세금적게거두는게 백성을 위한길이었어.
아벤디스
조선이 지방 호족들의 발호로 망가진 고려를 딛고 일어선 국가다보니까 지방 권세가들 찍어누르려고 일부러 안줬다는 카더라가 있더라
고려 때 지방 토착 세력 하던 짓 생각해서 아주 조져버림
그쪽은 왕의 개인재산 내탕금으로 감당한 거 아님?
유교국가에서 관료라는건 사대부가 학문 닦으면서 겸업으로 봉사하는 개념이다보니 급료 책정을 높게 안한 것. 애초에 먹고 살만한 놈들 아니면 과거시험 준비가 안되기 때문에…
게다가 세입이라곤 농작물이 대부분인 농업국가에서 관료 아전들한테 적절한 급여를 주는건 현실적으러 많은 문제가 있었음. 애초에 ‘돈벌려면 상인을 하지 왜 사대부를 하고 향리를 하냐?’가 메인 마인드였기에…
그렇다고 아예 안 준 건 아니고 지방 관아에서 자체적으로 예산 할당하거나 아전들끼리 따로 계를 꾸려서 충당했음. 본격적으로 착취가 심해진 건 지역별 조세 수취 방식이 "할당제"로 바뀐 숙종대 이후.
신나라 세운 왕망이 공무원들 월급없애서 다들 부정부패저지르지 않았나?
급여를 쥐졷만큼 주면서 사명감 가지고 일하길 바라는 것은 강도의 심보이다 아 주원장은 출신이 강도구나 그럼 어쩔 수 없나
주원장도 처음에는 생활도 못할정도로 주려던건 아니었는데 명나라가 천하를 집어먹고 개발된 강남을 바탕으로 고속성장을 해버린통에 물가가 너무 올라 공무원 월급으로 생활하면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이 강도새.끼가 월급인상을 안함
원님 밑애 이방 들은 월급이 없었다지...
저 통나무 수련도구가 횡령을 위해서 생긴거였어...?!
가로로 통나무를 대들보에 매달고 걷어찼다는거 있으니까 그림 잘못 단거긴 한데
드립으로 단거임....
한국 공무원은 뭐 다른감 ㅋㅋㅋ 셤치고 들어간 직장이 이백따리...
저당시 물가로치면 지금과 비교불가야. 조선기준 종9품이 쌀14석에 베4필인데. 1석이 5냥정도했으니 냥으로치면 78냥남짓. 책한권에 16냥, 닭5마리에 1냥인거 생각하면 지금보다빠듯했어
그래서 청나라 옹정제는 급여를 현실화 해주는 대신에 부정축재하다 걸리면 본인은 물론 일가친척이 망할 정도로 조졌음. (그걸 감시하는 비밀경찰 운영도 큰 역할을 했고) 뇌물받거나 횡령할 기회가 생겨도 고작 내가 이거 먹자고 내 목숨을 걸어? 라는 생각이 들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