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는 없지만 뭐... 생각난 게 있어서 끄적여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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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칼의 폭정을 기억한다네."
용과 함께 나타난 에르제는, 대뜸 절대 금기시되어야 할 단어인 [바칼]부터 입에 올렸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어떤 이는, 그녀가 황녀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틀을 깨는 자는 이해받을 수 없다.
이해받지 못하는 자는 때로, 이해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녀 또한 각오한 바. 위압적인 증오라면, 이미 예상하였다.
그러나 각오를 다졌음에도, 에르제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적의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그러나 소녀가 말하고자 하는 [이상]의 내용들을 듣게 된다면 그보다 더욱 많은 증오를 받을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
소녀는 침을 삼켰다. 황녀된 자. 그 왕관의 무게에 머리가 짓눌려서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서있을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무서웠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무력한 존재인 것만 같았다. 그러하기에, 피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용족은 바칼이 될 수 없고,바칼은 모든 용족을 대표할 수 없단 것도 알고 있지."
하지만 입은 멈추질 않는다.
피하고만 싶었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다.
이곳에 섰다. 모두의 희생을 뒤로 하고.
"내가 선택한 길은 용족들과 함께 나아가는 길일세."
설령 모든 이들에게 미움 받을 지라 하더라도. 정의를 따르고 백성을 구하겠노라 천명한 이상, 양심이 알려준 방향에 눈감을 순 없을 테니.
"강력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힘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는 이곳에 섰네."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몇몇은 믿지 않았기에, 어떤 말을 할지 안다는듯 일부러 귀를 막는 시늉도 하였다.
"내게 가장 두려운 건, 내가 옳은 길을 갔음에도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린 길을 갔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세. 그렇기에 가고자 하는 길이 가시밭길과도 같이 험한 길이어도 기꺼이 걸어갈 것이며.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면,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있다고 한들 단 한 발자국도 딛질 않겠다 다짐했네."
좌중은 웅성거렸다. 몇몇은 거센 비난의 목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그 길. 가시밭길이라도 걸어가기로 다짐했으니! 그대들 또한 신념이 있다면 그곳에 남아있으시게! 자신의 목소리마저 잊은 자들이 감히 누구에게 일갈하느냐!"
크윽...
좀체 화를 내지 않던 에르제였으니 크게 화를 내니, 그 여파가 상당하게 다가왔다. 단순히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파동이, 싸움이 익숙지 않은 자들에겐 상당한 고통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에는 일절 거짓이라곤 존재하지 않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들이 그녀의 생각에는 담겨져 있었다. 진심은 통하는 법. 전투의 긍지마저 잃은 채 내전에 참가했었던 수많은 군인들이 총구를 내려놓았다.
인정할 순 없지만,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타인을 죽일 순 없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이 그들에게도 남아있었다. 그들 또한 인간이었다.
"나는 카르텔의 만행을 기억한다네!"
"그 날엔 나 홀로 거기 있었어. 무법지대의 모래 폭풍은 소스라치게 차가웠고, 홀로 지내야만 하는 밤엔 괴물이 곁에서 머무르기에, 망가진 레코드를 틀어 의미없는 레퀴엠을 몇 번이고 들어야만 했었지."
많은 하급 군인들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해 했으나, 군의 상층 기밀까지 알고 있었던 귀족의 자제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지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작은 덧없고, 끝은 시작으로 이어져...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는데, 곁을 보면 그들은 이미 떠나갔었지. 떠난 이들을 붙잡는 밤이 그 사막 한 가운데에 아직도 남아있어! 나와 같이 그곳에서 길 잃은 자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들에게 길을 찾아주는 것은 쉬울 수가 없지."
울컥.
그녀의 파동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한 때는 진정한 군인이 되고자 무법지대에서 분전하였고 또한 친구를 잃었었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파동엔 떠나보낸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사무치도록 깊게 담겨 있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고, 거짓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조차도 거기 있으니..."
그랬었다.
전쟁을 일으켰었던 자들은 전쟁을 잊을 수 있기에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전쟁에 참여했었던 자들은 전쟁을 잊을 수 없기에 다시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그 전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었다. 전쟁의 향수를 느끼지만, 그 날로는 모두,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만 다른 곳에 있을 뿐이었다. 모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 지 알지 못했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쉬웠지만,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나는 카르텔에게 이기고 싶어서, 무법지대의 남겨진 아이들에게 총 대신 빵을 주기로 하였고, 폭탄을 빼앗아 인형을 주기로 하였네."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아는 건, 그 아이들은 카르텔이 될 수 없고, 카르텔은 무법지대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 이것 하나 뿐."
"성인은, 지울 수 없는 미움과 잊을 수 없는 원망을 모두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단 하루마저 그리 살 용기가 없네."
"분명 증오에 대한 망각과 무시는, 살을 에우는 추위 속에서 무작정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처럼 괴롭고 고단할 테지... 그러나 그 길, 모두 걸어간다면... 삶의 마지맊까지 그 길을 걸어갈 수만 있다면, 아침 햇살 따사로이 내려오는 곳에서 다리를 쉬이 하고 싶네."
"눈을 감으며, '힘든 길이었다고.' 오랜 침묵을 깨고 한 마디를 남기고 싶어..."
그녀는 분명, 용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황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계의 사람이었고,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 평범한 아이였었다.
황녀가 새하얀 소매로 촉촉해진 눈매를 닦자, 전쟁에 참여했었던 수많은 사람들도 울음을 삼켰다.
"지금. 내 목숨, 내 자리를 탐내는 귀족들이 여기 있었네."
사람들은 갑자기 변하는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졌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너무나도 여린,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착하기만 한 소녀가 저기 있었는데, 너무나도 갑자기 그녀에 대한 감정이 변하여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끝을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르제의 뇌파는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 목숨과 자리를 내던지면서까지 나를 지키려고 했었던 자들도 여기 있었지."
황녀를 지지하고자 마음 먹은 몇 몇 사람들은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죄를 용서하란 말은 할 수가 없네."
"모든 선은 보상받지 못할 테지."
"모든 악이 처벌되어야만 하는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장 추억한 진실과 마주해야만 한단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싶었네..."
그녀를 적대하면서 내전을 일으켰었던 자들이 쇠붙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승산은 없겠으나, 싸움이 끝난다면 어떻게 될 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미 총을 들었다면 다시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온 까닭은, 죄 있는 자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 없는 자를 벌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서라네."
하나 둘.
그녀의 마지막 말에 따라 사람들은 창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일정한 교양을 갖춘 자들은 모두,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출혈은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하겠지. 목을 내놓아야만 하는 자들이 죄를 지은 자들뿐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오늘 죽는다해도 가문은 내일을 이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여한은 없다. 이 얼마나 자애로운 군주란 말이던가.
하하하하하.
..아니.
나라를 이끄는 자들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했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자들은 조용히 신음하였다.
...철인이시여!
내가 가지 못했었던 길을 가주시오.
귀족이란 악인이 아니었음을.
그들 또한 수라귀로 태어나서 수라귀로 죽는 삶은 아니었음을, 다만 부끄러움에 절망할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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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의 황혼을 바라보던 어떤 아이가 있었네.
이러저러한 걱정 때문에 깊게 잠을 잘 수 없었던 아이는,
'이제 천계의 아침은 오지 않는 것일까.'
라며
남들보다 조금 더 강하게, 아침을 기대하면서 언덕 위에 서 있었지.
자.
아침이 밝아오는데 다들 잠에서 깨질 않고들 무얼 하고 있는가.
미련은 악몽에서 춤추지만, 떠나간 이들도 바라지 않는 것을 소망해선 안 된다네.
악몽도... 끝을 맞이할 때가 온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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