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호호리의 죽음을 전해 들은 누르하치.
이전에 호호리(hohori)라는 인물에 대해 다루었을 때 언급하였듯이, 호호리는 건주여진 동고부의 수장이었다가 1588년 닝구타 버일러 연맹의 수장 누르하치에게 공식적으로 귀부하고 그의 휘하 암반이자 사위가 된 인물이었다.
호호리는 누르하치의 좌장이 된 이후로 누르하치의 패권 경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후금의 건국에 큰 이바지를 한 인물이었다. 흔히 다섯 공신으로 정리되는 누르하치의 최대 공신중 일획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후금 건국 이후로도 사르후 대전등 굵직한 전투에 참전하며 공을 세웠다.
1624년 음력 8월 10일 숨을 거두어 다섯 대신(어이두, 안피양구, 후르한, 피옹돈, 호호리 본인)중 가장 마지막으로 죽었으며,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호호리의 죽음에 특히 비통해 했다.
후금이 성립되기도 전부터 누르하치를 따르며 그의 여진세계 패권경쟁 승리에 큰 공을 세우고, 나아가 초기 후금의 정립과 후금의 명에 대한 전쟁에서도 여러 전공을 세운 인물 답게, 청사고에도 역시 호호리의 열전이 실렸다.
그런데 해당 열전에서 주목할 부분이 한 문장 존재하는데, 그것은 무신년(1608년)의 열전 기사이다.
호호리 열전에서 해당 기사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歲戊申,從太祖徵烏喇,率本旗兵破敵有功/ 무신년, 태조의 울라 정벌에 종군하였으며 본기(旗)의 병사들을 데리고 울라군을 깨뜨리는데에 공이 있었다.
청사고 권 225, 열전 12 호호리 열전
해당 기술에서 지칭되는 무신년의 울라 정벌은 1608년 음력 3월에 있었던 추영과 아민의 이한산성 공격을 지칭한다. 1608년 음력 3월에 있었던 건주의 울라에 대한 공격은 해당 사례밖에 없었으므로, 쉽게 유추가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염두에 둘 부분은 '태조의 울라 정벌'이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집중해서 살펴보자면 해당 문구가 마치 누르하치(태조)가 울라 정벌을 직접 이끌었고 호호리는 그 친정에 종군했다는 것처럼 읽혀진다.
그렇다면 정말로 누르하치가 호호리 열전에서 서술되는 바대로 이한산성 전투에 참여했는가? 사실 누르하치가 이한산성 전투에 직접 종군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사료는 살펴진 바로 호호리 열전 정도만이 존재한다. 여타 사료들을 살펴보자면, 다른 사료들에는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은 추영과 아민이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이한산성을 공격했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누르하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는 기술은 살펴지지 않는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청태조무황제실록에서부터 고황제실록, 만주실록등 삼실록이 모두 누르하치의 직접적 참전을 거론치 않으며 구만주당과 만문노당 역시도 누르하치의 참전을 거론치 않는다. 황청개국방략 등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타국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도 역시 누르하치가 직접 나서진 않았다는 점이 언급된다.1 다만 이들 사료들 모두 '누르하치에 의해 지시를 받은 추영과 아민이 군대를 이끌고 이한산성을 공격하고 함락했다'는 사실만이 전해질 뿐이다.
호호리 열전의 가장 주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흠정 팔기통지 대신전에 기술된 호호리에 대한 기술에도 역시 '누르하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빠져 있다. 다만 무신년에 울라를 정벌하는데에 호호리가 참전하였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청사고의 다른 열전이나 본기를 살펴보아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를 보건대 오직 청사고 호호리 열전에서만 누르하치가 1608년 이한산성 공격을 친정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기반으로 생각해 보자면 확실히 '누르하치의 이한산성 친정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사실, 호호리 열전에 기술된 태조의 울라 정벌이라는 서술은 누르하치가 직접 친정을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누르하치가 내린 명령으로 이루어진 울라 정벌'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역시도 결국 '누르하치에 의한 정벌'이기 때문이다.
정벌을 시행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은 추영과 아민이나,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 '정벌을 지시'한 것은 바로 누르하치이다. 그렇기에 청사고 호호리 열전의 작업중 '태조'라는 단어가 임의로 들어갔고 그로 인해 '이한산성에 누르하치가 직접 참전했다'는 해석의 방향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한다.
1.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년 음력 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