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고려의 대몽항쟁은 절대로 자랑스러워 할게 아니다
아니 애초에 항쟁이라고 하는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
몽고가 50년동안 고려를 휘젓고 다닐동안
고려는 저항다운 저항을 안했다. 고려의 지배자 최우는 강화도의 쳐박혀서 나올생각도 안했고
고려의 정규균이 파견되어서 몽고와 제대로된 전투를 벌인 것 또한 없었다.
즉 항쟁이란말 자체가 성립되지않았지. 그냥 방치일뿐었지.
그 방치한 50년의 세월동안 고려는 몽고군이 고려 전국토를 짓밟으면서 살인 방화 ㅁㅁ 파괴 등을 하도록 방치한것 말곤 한게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당시 동양 최대 높이의 황룡사 9층 탑도 몽고군이 불태워 없애버리고
하여간 목재로 만들어진 건물은 죄다 태워버림.
덕분에 현재 몽고침입 이전의 한반도에 있던 목조건물은 전무함.
거기다 더 중요한건
몽고는 고려에 전력을 집중시키지조차 않았다
당시 몽고의 주력군(몽고 본토출신 기마병) 대부분은 유럽, 금나라, 송나라, 서하 공략에 투입되었고
고려에 파견된 부대는 한족 출신의 보병이 대부분이었음.
몽고 입장에선 그냥 별동대 수준의 잡병들일뿐이었지
그런 수준의 부대에 뿌리부터 잎까지 나라 전체가 털털 털린게 고려다.
애초에 바투나 수부타이같은 장수들이 유럽 공격에 동원했던 부대를 이끌고 고려로 왔으면
고려 바로 망했음.
몽고 입장에서는 한반도는 애초에 안중에도 없는 땅이었음.
근데 차라리 애초에 저항다운 저항을 안한게 다행이었을지도...
당시 고려 왕과 귀족들이 군대 만들어 몽골에 전력으로 결사항전했다면, 몽고에서 지들 스타일대로 고려의 왕 포함 백성들까지 모조리 죽여서 나라의 맥 자체가 사라져버렸을수도.. 강화도에 쳐박혀서 은둔형외톨이짓을 했기때문에 그나마 나라 형태라도 유지하며 지금까지 이른게 아닐지...
하여간 한국의 국사 교육도 포장이 많지... ㅋㅋ 몽고 상대로 이 정도 버틴게 고려정도 밖에 없다고해서 나도 그게 진짠줄 알았음
그리고 1차 침입때는 몽골군을 평북 귀주 일대의 초적, 관악산의 초적과 광주일대의 민병이 공격해 격퇴에 일조하고 충주성에서는 지광수가. 귀주성에서는 박서가 조정이 항복한 이후에도 투쟁하죠. 이걸 두고 당시 몽골의 장수들이 저렇게까지 독하게 결사항전하는 장수는 처음본다고 감탄합니다. 근데 정작 당시 무인정권에서는 이들을 위험하게보고 귀양을 보내는게 개그.
아뇨. 몽골이 금을 토벌한건 1234년 처음 살리타가 고려에 온 것은 1231년입니다. 3년 빨라요 그리고 당시 살리타군을 박서가 관광태우고 최우에 의해 유배당하죠
2차 침입은 역시 금 멸망 직전인 1232년. 이때 살리타가 사살되고, 3차 침입은 1235년으로 금나라병력이 동원 가능해진 시점은 대략 이때죠.
요약하면 억압받던 계층의 자발적 항쟁과 쿠빌라이 칸에 의한 고려의 인정. 전례없는 세조구제의 부여 이게 고려의 몽골 항쟁이 대단하게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세조구제는 이후에 입성책동 운동이나 심양왕의 고려 간섭문제도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되죠.
고려에 투입된 건 한족출신 잡병이 아니라 역시 몽골족이고, 한족이 본격적으로 몽골에 의해 동원된건 남송멸망 직후에 일본 정벌 당시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한국사 교육에서 대몽항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건 다원철소 같은 일반민중 관점에서의 항쟁을 의미하는거지 지배층에 의한 항쟁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사건 서술과 교과서의 특성상 지배층 중심적으로 교과서에 나오긴 하는데, 교사 지도서에 보면 지배층보다, 무신정권과 무능력한 지배층과 달리 평소에 억압당하고 핍박받던 천민 혹은 신량역천 신분들이 왜 항쟁했는지. 무엇을 위해 스스로 싸웠는지 생각하도록 가르쳐라고 나오죠. 몽골한테 항쟁한게 대단한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핍박받던 계층이 왜 항쟁을 했는지, 그게 중요한거. 항쟁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 강조해선 문제가 있죠.
고려에 투입된 건 한족출신 잡병이 아니라 역시 몽골족이고, 한족이 본격적으로 몽골에 의해 동원된건 남송멸망 직후에 일본 정벌 당시에 투입됩니다. 그리고 한국사 교육에서 대몽항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건 다원철소 같은 일반민중 관점에서의 항쟁을 의미하는거지 지배층에 의한 항쟁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사건 서술과 교과서의 특성상 지배층 중심적으로 교과서에 나오긴 하는데, 교사 지도서에 보면 지배층보다, 무신정권과 무능력한 지배층과 달리 평소에 억압당하고 핍박받던 천민 혹은 신량역천 신분들이 왜 항쟁했는지. 무엇을 위해 스스로 싸웠는지 생각하도록 가르쳐라고 나오죠. 몽골한테 항쟁한게 대단한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핍박받던 계층이 왜 항쟁을 했는지, 그게 중요한거. 항쟁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 강조해선 문제가 있죠.
그리고 몽골입장에서 특히 쿠빌라이 칸대에 가서 몽골의 전략적 기지로써 고려의 가치는 매우 증가합니다. 안 중에 없진 않았죠. 오히려 안중에도 없었던건 중국 땅 전체. 칭기스칸은 야율초재를 만나기 전에는 그냥 모조리 쓸어버리고 목초지화 하려고 했었죠. 그러다가 야율초재의 건의로 중국적 체제를 수립하게 되면서 제국의 확장이라는 개념이 명료해집니다. 고려의 경우에는 처음 거란족 격퇴시 접촉과 이후로는 크게 가치가 없었지만, 남송 정벌에서 배후의 위협세력 제거,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 수립 등으로 전략적 가치가 증가하고, 고려의 항쟁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도 이 과정에서 쿠빌라이 칸이 원종에게 몽골의 토풍을 강요하지 않고 불개토풍을 지킬수 있게 세조구제를 내려 독립을 유지 시켜줍니다. 그래서 전례가 없는 경우였기 때문에 대몽항쟁이 높게 평가되는거죠
요약하면 억압받던 계층의 자발적 항쟁과 쿠빌라이 칸에 의한 고려의 인정. 전례없는 세조구제의 부여 이게 고려의 몽골 항쟁이 대단하게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세조구제는 이후에 입성책동 운동이나 심양왕의 고려 간섭문제도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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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몽골이 금을 토벌한건 1234년 처음 살리타가 고려에 온 것은 1231년입니다. 3년 빨라요
몽고가 고려로 보낸 병력은 아마 금나라 출신 한인 보병들일겁니다. 암튼 몽고 본토출신 정예 기마병력이 아닌건 확실함.
아뇨. 몽골이 금을 토벌한건 1234년 처음 살리타가 고려에 온 것은 1231년입니다. 3년 빨라요 그리고 당시 살리타군을 박서가 관광태우고 최우에 의해 유배당하죠
2차 침입은 역시 금 멸망 직전인 1232년. 이때 살리타가 사살되고, 3차 침입은 1235년으로 금나라병력이 동원 가능해진 시점은 대략 이때죠.
그리고 1차 침입때는 몽골군을 평북 귀주 일대의 초적, 관악산의 초적과 광주일대의 민병이 공격해 격퇴에 일조하고 충주성에서는 지광수가. 귀주성에서는 박서가 조정이 항복한 이후에도 투쟁하죠. 이걸 두고 당시 몽골의 장수들이 저렇게까지 독하게 결사항전하는 장수는 처음본다고 감탄합니다. 근데 정작 당시 무인정권에서는 이들을 위험하게보고 귀양을 보내는게 개그.
그리고 6차 침입때는 차라대가 들어와 6년동안 전투를 벌입니다. 단순 공격 기간만 놓고 보면 고려의 항쟁기간이 길죠. 남송의 경우에는 동양사 개론에서 나오듯이 서방원정. 칸 계승 문제로 여러번 중단되어 기간이 연결이 되지 않지만 고려는 기간이 계속 연결되거든요
뭐 잡병이라는 대에서 ...들으수가없군요 아니그럼 잡병을 보내서 점령못한나라에서 쿠빌라이칸을 지지할때 쿠빌라이칸의 반응은 거짓인건가요? 1군 정예병은아니더라도 1.5군정ㄷ되는 병력은 계속 동원했습니다 . 남송이 완전히 망한것도아니고 몽고입장에선 후방을 견고하게 다져야하기때문에 고려정벌은 필요한 상황인지라 @@ 그리고 몽고군도 피해가 엄청났다는걸 아셔야져 .. 무신정권넘들이 빡혀있을때 백성들은 도리어 항쟁을 하져 이것땜에 항쟁이라고하는겁니다 .. 알고 글을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