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선주(先主)(→유비劉備)가 위연(魏延)을 남겨 한중(漢中)을 진수하게 할 때에 (한중 주변의) 여러 위(圍)에 모두 군사를 충실히 채워 외적을 막아, 적이 쳐들어오면 (한중의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244년에] 흥세(興勢) 전투에서 왕평(王平)이 조상(曹爽)을 막을 때에도 이 제도를 모두 (그대로) 계승하였다. (강)유가 건의하였다,
“여러 위(圍)를 조수(錯守,설치하여 수비함)하는 것은 비록「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중문(重門)’의 뜻에 부합하지만 적을 막을 수 있을 뿐 큰 이로움(→대승)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위(圍)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漢), 낙(樂) 두 성(→한성漢城과 낙성樂城)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아울러 중요한 관(關)을 진수(鎭守)하며 적을 막느니만 못합니다. 사고(변고,변화)가 있을 때에 유군(游軍,기군奇軍으로 활용하는 기동부대)으로 하여금 함께(*원문은 並.자치통감에서는 傍(측면으로부터)으로 기술) 진격해 그 허점을 노리게 해야 합니다. 적은 관(關)을 공격하여 함락하지 못하고 들에는 흩어져있는 곡식이 없어 천리 떨어진 먼 곳으로 군량을 운반해와야 하니 자연 피핍(疲乏,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적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날이 되면 그 연후에 여러 성(城)에서 아울러 출격하여 유군(游軍)과 힘을 합쳐 그들을 공격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적을 전멸시키는 전술입니다.”
(중략)
(경요) 6년(=263년), (강)유가 후주(後主)에게 표(表)를 올렸다,
“듣기로 종회(鍾會)가 관중(關中)에서 치병(治兵)하여 진취(進取)할 틈을 엿본다고 하니 의당 장익(張翼)과 요화(廖化)를 아울러 보내 제군(諸軍)을 감독하며 양안관구(陽安關口=관성關城/삼국지사전)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
(황)호가 신임하던 귀무(鬼巫,신들린 무당)을 부르자 (그가) 적이 끝내 스스로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후주(後主)에게 아뢰어 그 사안을(→그 표문을 공론에 부쳐 의논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니 뭇 신하들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종회(鍾 會)가 장차 낙곡(駱谷)으로 향하고 등애(鄧艾)는 답중(沓中)으로 침입하려 하니 그 연후에야 우거기장군(右車騎) 요화(廖化)를 보내 답중(沓中)으로 가서 (강)유를 위하여 원조하게 하고, 좌거기(左車騎)(장군) 장익(張翼)과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동궐(董厥) 등은 양안관구(陽安關口)로 가서 여러 위(圍)들을 위하여 바깥에서 돕도록 하였다. 음평(陰平)에 당도할 무렵 위(魏)의 장수 제갈서(諸葛緒)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며 기다렸다. 한달 여 뒤에(※) (강)유는 등애(鄧艾)에게 패한 뒤 음평(陰平)으로 돌아와 주둔했다.-강유전
요화,장익이 늦게 오는게 계획에 크게 차질이 된다면 계획을 수정해서 원래 하던 대로 여러 위에 조수하든지 대책을 구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사서에서 딱히 보이지 않는데 원인은 모르지만
(그럴 의지가 있지만 여유 시간이 없어서 라는 가능성이나 대책을 마련 했지만 기록이 없어서 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촉멸전이 시작된 당시에도 답중에 있어서 가능성은 적다고 봄)
원인이 나라의 존망의 위기에서 조정과 기싸움하는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볼 여지는 없는거고
촉멸전이 시작된 당시에도 답중에 있어서 강유에게 우호적으로 해석될 원인은 딱히 안보임
개인적으로 요화,장익이 그렇게 늦게 온걸로 보이지 않고 강유가 건의했을 떄 왔다 하더라도
촉멸전 당시에 촉군이 졸전한거 생각하면 잘풀릴거라고 생각은 안됨
그냥 인재가 너무 없어서 문제였던거지. 강유는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생각했지만 부하들은 그거 실행할 능력이 안됨. 강유의 방어체계가 훈련이 많이 필요해보이는 방법이었기에 터질일이긴 했음.
부하들 역량 파악도 대장군의 능력이고 위군 규모가 많은 편이기도 하고 강유 작계가 이상적으로 돌아갈려면 강유 본인의 능력이 조조급은 되어야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