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곧 특이점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는 시대입니다. 특이점은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가 영화나 매체에서 보던 일이 현실화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마저 생소하지 않죠. 이미 단순 노동을 넘어 인간의 창의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도 AI를 활용하려는 시도가 계속 되고 있고요. 기술의 발전은 이미 우리가 제어하지 못하는 속도로 빨라지고 있지만, 이게 과연 인간에게 유익한 것인지, 정말 우리 삶이 나아질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터넷, 스마트폰, SNS, 유튜브 등등이 차례로 지난 25년 내외에 개발되어 오며 우리의 삶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었지만, 행복감과 만족감이 커지진 않은 것처럼요. 물론 이런 생각마저도 굉장히 오래 전부터 등장했던 진부한 것이고, 그것이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창작물들이 소위 '아포칼립스'나 '디스토피아'물로 정의되는 것들입니다.
이 호라이즌 시리즈는 그런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출발했습니다. 과연 기술 발전이 인류에게 장기적으로 득이 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 중 하나가 이 시리즈의 시작인 것이죠.
포비든 웨스트의 메인 빌런인 파 제니스는 바로 그 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존재입니다.
이들은 믿을 수 없게도 1000년 전에 지구에서 도망쳐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인간들입니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 당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권력이 막강했던 이들로만 구성된 조직이죠. 거대 기업의 총수,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연예인, 세계 탑급 엔지니어 및 학자 등등...
그런 그들이 지구 멸망의 위기에서 어떻게든 생명의 멸종은 막고, 후세를 위한 희망을 남기려는 엘리자베스와는 정반대로,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에서 탈출해 다른 행성에서의 생존을 꿈꿉니다. 계획이 결국 실패했다던 전작의 데이터 포인트의 서술과 달리, 그 프로젝트는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원래도 고도로 발전되어있던 있던 기술을, 지구를 탈출한 이후 더욱 더 발전시켜 아예 영생의 꿈을 실현하고, 자기들 입맛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신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시리우스 행성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가 될 뻔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거기서 그 엄청난 기술로(테드 파로와 흡사하게) 또 사고를 쳐서 행성급 재난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멸망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결국 그들은 대부분 죽고, 남은 생존자들은 어디론가 도망치던 도중, 식민지 재건에 필요한 자원과 가이아 회수를 위해 지구에 '잠시' 들르게 됩니다.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파 제니스 멤버 태반의 구체적인 면모는 게임에서 표현되지 않습니다만, 일부 데이터 포인트의 내용으로 그들의 성격이나 삶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틸다 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은 원래 초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가지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건 쉽게 손에 넣는 삶을 살아온 이들이죠.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면 모두 최고 엘리트입니다.
호라이즌 시리즈는 단순한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아예 그 이후에 재구성된 원시적인 새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작 제로던은 개연성 측면에서 썩 좋지는 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이 아주 매력적이고, 세계관 자체가 신선했기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해서 잘 즐겼습니다. 단순화해서 보자면 세계의 파멸을 기도하는 AI를 주인공이 막아낸다는 전형적 영웅물과 디스토피아물의 혼합 형태입니다만, 세계관 자체가 꽤 잘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펼쳐나갈 수 있는 스토리는 무궁무진해보였습니다.
포비든 웨스트에서는 이제 AI가 아니라 진짜 사람인 파 제니스로 적이 바뀝니다. 그런데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 AI보다 무섭고 카리스마 있어야 할 인간 적들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이건 작가나 제작진의 능력 부족이나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된 것입니다.
호라이즌 스토리 진행 측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플레이어가 인물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전작에서의 사일렌스가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진짜 의도나 정체를 주인공에게 숨기면서 자기의 목적만 달성하려는 속이 시꺼먼 악당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묘한 음모의 여운을 남기면서 끝냈다가 포비든 웨스트의 초반까지도 악당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냥 공감 능력과 인간성 떨어지는 머리 좋은 협력자 정도의 역할이 된 것처럼요.
그리고 이런 방식은 빌런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파 제니스의 첫 등장은 꽤나 강렬합니다. 반년을 찾아 헤메던 가이아 복제를 겨우 찾아낸 희망의 순간 등장한 파 제니스 멤버들과 베타는 에일로이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죠. 자기와 똑같은 복제 인간의 존재, 그를 이용해 가이아를 찾아내려는 정체를 알 수 없고, 물리적인 해를 가할 수도 없는 강력한 적의 등장으로 지금껏 산전수전 다 겪은 에일로이도 반쯤은 운으로 겨우 목숨만 건져 탈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절대 이길 수 없는 적처럼 보이고요.
그렇게 강렬했던 첫 인상과는 달리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 모든 진실을 플레이어가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처음의 그 무섭던 악당이 아니라 한심의 극치를 달리는 루저들이 됩니다.
흔히들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려면 주인공 뿐만 아니라, 주인공과 대립하는 적, 라이벌, 악당도 카리스마 넘치고, 능력 있고, 뛰어난 인물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영웅물이 그렇지요. 주인공이 강할수록 그 적도 강해야 이야기가 재미있으니까요. 처음에는 파 제니스 역시 그런 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행보는 물리적인 힘을 제외하면 오히려 동네 산적보다도 못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들은 그냥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게임 내내 최악의 판단과 바보같은 행동만 합니다.
처음 에일로이와 파 제니스가 만났을 때, 당연하게도 그들은 에일로이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외모를 보고 엘리자베스 소벡의 복제인간인 걸 눈치챘지만, 어떻게 엘리자베스 소벡의 복제 인간이 여기 존재하는지, 왜 자기들과 같은 곳에 있는지, 뭘 하고 있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리더라는 제라드가 고민도 안 하고 그 자리에서 내린 판단은 '뭔진 모르겠지만, 귀찮으니 죽인다'였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당장 자기들에게 직접적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최소한의 정보(목적, 배후나 협력자, 소속 단체 등등등)라도 캐내든지, 교섭이 가능하다면 교섭하고, 회유해서 자기 편을 만들든지, 최대한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게 일반적이죠.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에일로이)이 자기들만 아는, 더구나 엘리자베스 소벡의 유전자로만 열 수 있는 방에 떡하니 들어와서 자기들과 같은 것을 찾으려 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배경이나 정보를 알아보지 않는 건 너무나 어이가 없는 판단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보통 사람도 아니고, 원래 지구에서 엘리트 집단이었던 사람들인데 말이죠. 하지만 상식적 대응 대신, 이들(틸다 제외)은 그냥 생각을 하지 않고, 날파리 잡듯 에일로이를 제거하려 합니다. 그리고 실패하죠. 그후의 행보는 점점 가관이 됩니다.
사일렌스는 미지의 방법으로 그들의 보호막을 무력화하는 무기를 개발했고 실제로 파 제니스의 일원을 (간접적으로) 죽입니다. 대사로는 나오지 않지만, 데이터 포인트를 자세히 보시는 분이라면 최초로 죽는 파 제니스 일원이 버베나라는 여자이며 지구에서는 재벌가에서 태어나 평생 공주님처럼 살던 돈만 많은 무능력자라는 걸 알 수 있죠.
버베나는 다른 파 제니스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한심하게 죽습니다. 방어막만 믿고 적들 한가운데서 무방비하게 싸우다가 방어막이 깨졌는데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멍 때리다가 창에 찔려 죽죠. 이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 방어막만 믿고 안일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건 에릭 비서가 에일로이와 싸우다 죽을 때도 동일한 패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방어막이 사라졌는데도 전혀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에릭 비서의 모습은 최소한의 생존 본능마저도 사라져 버린 모습이었죠.
아무튼 버베나의 죽음은 파 제니스에게는 사실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지구에서 신과 같은 존재이며, 무적 불사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벌레같이 여겼던 지구인에게 자기들을 죽일 능력이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 말이죠. 이쯤되면 당연히 방심은 말도 안 되고, 철저히 경계하며 에일로이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정상입니다.
허나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계는 커녕, 여전히 방심하면서요. 결국 그들은 내부(틸다)의 배신과 상대의 능력에 대한 정보 부족, 오만으로 인해 전멸하게 됩니다.
파 제니스는 객관적으로 에일로이와의 싸움에서 질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에일로이에게 가망이 없는 싸움이었죠. 애초에 가진 자원이나 기술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심했을 뿐더러, 에일로이가 가진 무기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해를 입힐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진 이유는 파 제니스가 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정상인이라면 당연히 할만한 기본적인 사고조차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그들이 멍청해서일까요?
지구에서부터 그들의 본성이 거만하고, 스스로 뭔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원래 상류층이고 엘리트였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 기준에서의 학식과 지능이 높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시간을 살아왔죠. 1000년이 넘게요. 우리가 만약 수명의 한계를 넘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갖추거나, 현재의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능력을 가질 수 있겠네? 어쩌면 무협지에 나오는 십 갑자 내공을 가지게 될지도?'
아, 물론 내공 이야기는 제가 원하는 겁니다......
무한의 시간 동안 계속 공부하고, 수련하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픽션으로 접하던 천재나 초능력자의 이야기가 꿈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애초에 무한의 시간 따위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될 확률은 높지 않죠.
사람의 능력은 저절로 계속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연습, 수련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을 하는데는 동기와 의욕이라는 것이 필요하고요. 그런 동기와 의욕을 가지고 사람이 삶을 열심히 살려는 이유는 그 삶이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무한하다면, 우리에게서 절실함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돈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겠지요. 만약 우리가 누워서 숨만 쉬어도 통장에 매일 엄청난 돈이 들어오고 그 돈을 아무리 써도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면, 과연 노동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물론 경제학적 관점에서 이건 말이 안 되겠지만...) 우리가 1000년을 넘게 살았다 해도 그 시간 동안 유튜브만 보면서 살았다면 과연 1000년전의 나보다 뭔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파 제니스가 지구를 탈출한 이후의 삶은 게임 내에 거의 묘사가 되어있지 않습니다만, 에릭 비서의 대사 몇 줄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합니다.
"VR에서 사람 목을 아무리 꺾어 봐도, 실제 생명이 눈에서 사그라지는 그 느낌은 재현을 못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한의 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 택했습니다. 더 높은 차원의 정신을 추구하거나, 보람있는 일을 하는 대신, 그저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기술로 쾌락과 즐거움만을 추구했죠. 그렇게 그들은 유튜브만 1000년을 보고 자기들을 '신'이라고 착각하는 상태의 멍청이가 되어 돌아온 겁니다.
게다가 파 제니스는 지구에 살 때부터 이기적이고 자신 밖에 모르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건 각종 데이터 포인트를 안 보더라도, 범지구적인 멸망 상황에서 자기들만 도망치려고 우주선을 몰래 만들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리고 1000년을 시리우스에서 살면서 그런 성향은 훨씬 더 심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파 제니스끼리의 최소한의 소속감이나 동료애도 없거든요. 상식적으로 1000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것도 같은 단체의 일원이 죽은 걸 농담거리 삼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불가능한 수준이죠. 그리고 그건 그들의 멸망을 부른 결정적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고요. 바로 틸다의 배신요.
틸다는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실제로 게임 내에 틸다의 비중이 상당히 크고, 인상도 깊었습니다. 파 제니스의 속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죠. 게임을 끝까지 하기 전에는 알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지만, 처음 틸다가 위기의 순간에 에일로이를 구하면서 파 제니스를 배신한 직후, 자기가 소장한 미술품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 깊으면서도 틸다의 캐릭터를 자세히 설명해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장면에 나온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틸다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왼쪽은 베르메르의 '편지 읽는 여자'라는 그림이고 오른쪽은 그 위작이죠. 틸다는 일부러 이렇게 위작과 진품을 함께 걸어두었습니다. 이 위작은 전문가들도 속을 정도로 정교한데, 본인은 그런 속임수가 재미있었고, 결국 엄청난 정확도의 위작 감별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고 자랑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안목에 확신이 있다는 것이죠.
틸다는 이 장면에서 베타와 에일로이를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확하고 높은 안목으로 봤을 때, 베타는 짝퉁, 에일로이는 진품이라는 것이죠. 물론 이건 틸타 혼자만의 착각이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나중에 증명됩니다. 틸다가 세계 최고 실력의 프로그래머였고, 다른 파 제니스 멤버들보다 똑똑하긴 했지만, 그 끝을 모르는 오만함은 다른 멤버들과 다를 게 없었지요.
'셀레네와 엔디미온'이라는 그림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셀레네와 엔디미온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죠. 틸다는 둘은 만날 수 없기에, 셀레네는 그리움을 달래려고 엔디미온이 잘 때만 몰래 찾아와 보고 간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는 자신을 셀레네에, 엘리자베스 소벡(=에일로이)을 엔디미온에 대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고상하게 자신의 집착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현실의 사랑은 힘들고, 때로는 지치고, 아름답지 않을 때도 많지만, 이런 그림 속의 사랑은 늘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틸다는 진정한 엘리자베스 소벡을 사랑했다기보다, 자기 스스로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환상 속의 엘리자베스에게 무려 1000년 간 집착해 온 것이죠. 그 와중에 에일로이를 발견했으니, 틸다가 느낀 기쁨은 아마 컸겠지만 틸다의 감정은 완전히 일방적인 것이었고, 둘 사이에 틸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생길 리는 절대 없었죠.틸다와 파 제니스는 너무나 오랫동안 인간성과 멀어진 생활을 해와서, 한때 자기들도 지구에 살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겁니다. 틸다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이런 미술품으로 밖에 하지 못하게 된 것이고요.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나름 그림에 대해 거짓말은 하지 않았는데, 이 그림에서 틸다는 아예 날조(또는 착각)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을 구하진 못하니, 예술품이라도 구해서 나온 것이라고요. 그러면서 자기가 지구에서 예술품만 챙겨 도망칠 때도 예레미야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떤 고상한 이유가 아닌, 그저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예레미야와 같이 후세를 위해, 또는 더 고차원적인 목적을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죠.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예술품만 챙겨서 탈출했다는 건 사실 무근입니다. 이 그림이 그런 걸 표현할 의도로 그려진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틸다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애초에 지구의 생명을 구하거나 존속시키려는 노력을 단 한 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틸다는 생명보다 물건의 아름다움에 더 가치를 둔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일 뿐이었던 겁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아들 타이터스의 초상화입니다. 틸다는 이 그림의 포인트는 그림 자체가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하면서, 아래로 깔린 눈, 밝은 얼굴과 대조되는 빛을 삼키는 듯한 어두운 배경을 언급하며 상실감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은 틸다 본인이 상실감을 느낀다는 말이며, 그건 세계 멸망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엘리자베스를 잃어서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죠. 앞서 언급했지만, 틸다는 진짜 엘리자베스를 사랑한다기보단 자기 머릿속의 왜곡된 엘리자베스에 지금껏 집착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음 그림 역시 렘브란트의 작품인 '야간 순찰'입니다. 그의 최고 대표작이기도 하죠. 이 그림은 민병대 본인들이 렘브란트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해서 그린 그림인데, 당시에는 의뢰인들이 자기들 뜻대로 멋있게 그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싫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그림 한 장 가지고 하루종일 이야기해도 모자랄만큼 학자와 전문가의 글, 논문도 많은 작품인데, 오히려 다른 그림과 달리, 틸다는 이 그림에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영향력 있는 시민'(=파 제니스)을 그렸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틸다는 예술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꿰뚫어 보기보다는 그저 자기의 왜곡된 시선으로만 예술 작품을 이해하고, 표면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렘 반 데 벨데 2세의 '격풍'입니다. 특이하게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바다 그림을 전문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은 2세 즉, 아들의 그림이죠. 험난한 바다를 군함이 위태롭게 항해하는 모습입니다. 당연하게 이 작품에도 틸다는 자신을 대입합니다. 자신이 험난한 세상의 역경을 뚫고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것이죠.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사실과 근접해 있기는 합니다. 두 번의 행성 멸망급 재앙에서 살아남았으니까요. 게다가 어릴 때 죽을뻔한 큰 사고에서도 틸다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틸다가 특출나서라기보다, 파로 역병 사태 때는 비겁해서, 나머지는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죠.
이건 그림이 아닌, 반 비아넨의 뚜껑 달린 은제 물병입니다. 틸다는 반 비아넨이 자기 동생이 죽은 후 그를 기리려고 만든 작품이라며,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도 물론 자신이 엘리자베스를 잃어 슬프다는 걸 암시하는 것입니다만, 틸다는 그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긴 커녕, 오히려 도망쳐 살던 시리우스에서도 또 재앙을 만들어 내어 지구까지도 멸망하게 만들 참이었죠.
이런 예술품들의 소개가 끝나고 틸다는 아주 고상한 분위기의 식사를 대접하며 에일로이와 대화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틸다는 에일로이에게 어색할 정도로 친절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계속 해줍니다. 똑똑하다는 둥, 예리하다는 둥, 특별하다는 둥, 칭찬을 아끼지 않고, 파 제니스를 배신한 것도 에일로이 때문이었다고 하죠. 허나 이런 대화를 계속 보고 있으면 플레이어는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 대화가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에일로이는 바로 직전에 친구이자 동료인 바를이 살해 당하고, 지켜주기로 맹세했던 베타가 납치된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슬픔과 부담으로 힘들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발코니에서 멋들어진 식탁에 앉아 플러팅에 가까운 칭찬이나 늘어놓으며, 마치 에일로이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다른 이야기만 하는 틸다의 태도는 이질감이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틸다는 대화를 하는 내내 굉장히 평온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어조를 유지하며 이야기합니다. 이 지점에서 틸다(+파 제니스)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 하며, 에일로이를 진짜 사람으로 사랑해서가 아닌, 그저 자신이 소유하려는 목적으로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틸다가 에일로이에 대해 말하는 방식입니다. 이 때의 대사를 들어보면 틸다는 에일로이를 마치 예술품처럼 표현합니다. '빈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같다는 식으로요. 사실상 에일로이와 대화하는 것이 처음인 자리에서(더구나 방금 자기의 예술에 대한 왜곡된 집착을 실컷 보고 왔는데) 예술에 빗대며 과한 칭찬을 한다는 것은 에일로이를 자기의 또 다른 수집품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며, 이건 역시 끝에 사실로 밝혀지죠.
셋째, 말은 굉장히 친절하고 그럴듯 하지만, 틸다가 파 제니스를 배신한 이유로 제시한 것들은 신빙성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엘리자베스를 닮은 에일로이의 영웅적 행위에 감명 받아서 1000년도 넘게 함께 했던 파 제니스를 배신한다? 과연 이걸 그냥 에일로이나 플레이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저 에일로이를 소유하고 싶은 본인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게 결국 밝혀지죠.
틸다는 처음 에일로이를 구해줄 때부터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밝은 빛에 휩싸여 구하는 장면부터 일부러 그런 연출을 의도한 것이죠. 진짜 에일로이의 편처럼 가장하여 에일로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파 제니스는 너무나도 어이없게 에일로이 일당(과 기계들)에게 전멸 당하고 에일로이는 진실을 알게 됩니다.
파 제니스는 그저 네메시스라는 존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며, 틸다는 에일로이를 도와주려 한 것이 아니라, 왜곡된 엘리자베스의 이미지를 투영해서 소유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걸요. 틸다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굳이 에일로이에게 집착하지 않았으면 파 제니스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고, 배신했더라도 마지막에 에일로이를 포기했다면 에일로이의 손에 죽지도 않았겠지요. 허나 틸다를 비롯한 모든 파 제니스는 오랜 시간, 자기가 원하는 건 뭐든지 쉽게 가지던 인간들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는 족속들이었습니다. 틸다에게 그냥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다른 파 제니스 멤버들보다 틸다는 더 똑똑한 인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멤버와 달리 틸다는 본인의 능력으로 파 제니스의 일원으로 오디세이에 타서 시리우스로 갔죠. 어쩌면 파 제니스에서 가장 머리 좋고 똑똑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조차 최악의 판단과 선택으로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그 운이 무색하게 죽어버리게 됩니다.
파 제니스는 요즘 정형화 되어있는 '카리스마 있고 능력있는 악당'의 정확히 반대 버전입니다. 가진 자원과 능력은 강력한데, 너무나 한심해서 질 수 없는 싸움도 져버리니까요. 그런데 이런 극단적 한심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을 맹신하고 거기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는 게임 내에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애초에 모든 사태의 원흉 파로부터가 그 시작이니까요. 쿨루트 퀘스트에서 하늘 일족의 수장인 테코테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방벽을 믿고, 헤카테에게 불복하여 쿨루트에 전사도 보내지 않고 숨어 있으려고만 하자, 에일로이는 그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방벽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이는 파 제니스의 개인 방어막을 연상시킵니다. 방어막 뒤에 숨어 자신은 무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파 제니스와 완전히 같은 모습이죠. 창과 방패의 싸움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창이 이기기 마련이고, 세상에는 '절대'란 없으며, 기술 역시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만든 것인 이상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인데도요.
기술이 발전하는만큼, 그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사실 처음에 인류가 로봇을 개발하고, 인공 지능을 개발하기 시작한 이유가 인간의 단순 육체 노동을 줄이고자 하는 목적이었는데, 요즘의 개발 상황은 그런 쪽보다 인간의 창의력을 요구하는 분야의 인공 지능 개발 진척이 훨씬 빠르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언젠가 AI가 정말 인간을 뛰어넘어, 인간이 고민하고, 고뇌하고, 애써서 만드는 모든 창작물이 의미가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과연 인류에게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 될까요?
파 제니스는 인류의 최상류층 엘리트들이고 엄청난 기술과 가능성을 가지고도, 그 긴 시간 동안 인류의 발전을 위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상현실에서 골프나 치고, 자기들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생활을 했죠. 그들에게는 노력하고, 고민하고, 악착같이 살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과연 이건 낙원인지, 지옥인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분명한 건 그들은 그 와중에 자신들의 정신을 복제하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든 확인하고 싶은 욕구였겠죠. 물론, 그 시도가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졌지만요. 그들의 그 왜곡되고 뒤틀린 정신의 집합체인 네메시스가 어떤 모습일지... 심히 궁금해집니다.
정말 많이 공감가는 글입니다. 정성어린 글 감사합니다.
드뎌 엔딩을 보고 이 글을 읽게 되네요.. 왠 생뚱맞은 미술품인가 했는데 다 의미가 있었네요. 통찰력 있는 글 추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