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14일 밤, 칠대한을 선언하고 명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누르하치의 통솔하 후금군이 무순으로 출격한 지 이틀째, 여전히 기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회군에 대한 의논을 자신과 함께 하고 있던 버일러, 암반들과 나누었다.
이 때 누르하치의 차남, 구영 바투르 다이샨이 당당하게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다이샨의 의견은 타당성이 있었고, 그에 따라 누르하치는 다이샨의 의견을 수용하여 작전을 속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장 군대에 진격명령을 내렸고, 그로서 후금군은 무순을 향해 야간행군을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후금군이 행군을 시작하자 비가 그쳤다는 사실은 곧 그의 군대의 사기와 체력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
4월 15일 새벽에서 아침 사이, 누르하치가 이끄는 군대는 무순 지척에 이르러 정지한 뒤 상인으로 위장한 선봉대를 무순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 누르하치가 무순에 미리 마시에 관련한 허위정보를 퍼트린 것과 연계된 것이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통금이 진행되고 있었을 무순에서 성문을 열고 마시상인(실제로는 후금군)을 맞이하게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후금의 기록에서는 보이진 않으나 명과 조선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는 진강유격/참장 구탄의 표문에는 그 정상이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명의 신종실록에는 꽤 구체적으로 정황이 살펴진다.1
『명신종실록』이나 『광해군일기』에 실린 기록의 경우 생존자의 보고나 정탐 정보등으로 파악된 정보들의 추합이니만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기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후금의 기록 역시 병력 규모등이 부풀려진 만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정황을 추합해 생각해 보건대 누르하치가 무순에 대해 위장부대를 투입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이에 따라 두 측면의 기록을 모두 사용하여 사건을 해석하자면, 후금의 기록에 서술된대로 무순이 후금의 대군에게 포위되기까지 당일 새벽~아침의 대략적인 상황이 유추가 가능하다.
15일 새벽에서 아침 사이 상인으로 위장한 후금군 선봉대가 무순에 마시를 요청한 뒤, 무순에서는 해당 위장부대를 상인으로 판별하고 성문을 연 것 같다. 이후 멀리서 매복해 있으면서 상황을 지켜보던 누르하치와 후금군 본대는 마시를 세우기 위해 명측 상인들과 병사들이 나오고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 마시를 빠르게 철수할 수 없을 만큼 시장이 갖추어진 시점에 무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고 생각된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이 경우 누르하치는 마시에 나온 상인들과 병사들을 제압하는데에 성공했으나, 그 뒤 당시 무순의 지휘관이었던 이영방이 황급히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 태세를 갖추는 것은 막지 못한 듯 하다. 그러자 그 시기서부터 본격적인 전투 태세에 들어가, 무순을 포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가정의 경우 누르하치의 계획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볼 수 있다. 아마도 누르하치로서는 포위나 공성 같은 것을 고려치 않고 해당 작전 한 번으로 성을 탈취할 것을 예상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영방이 본인의 생각보다 기민하게 대처한 덕택에 결국 포위전에 들어간 것 같다. 물론 이는 명과 후금의 기록 사이의 간극을 메꾸기 위한 추론의 도출 결과이므로, 무조건적인 맹신은 금물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후금의 기록을 살펴보자. 누르하치는 무순을 포위한 이후 진용을 넓게 펼쳐, 급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대해 성문을 걸어잠그고 방어태세를 굳힌 유격 이영방을 압박했다. 후금의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이 때에 누르하치의 대군이 무려 100여리에 걸쳐 포진했다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덧붙여 서술하나2, 당시 누르하치가 통솔하고 있던 무순포위군의 수효는 약 1만을 기천명 정도 상회하는 정도로 추정된다. 즉 기록상의 이러한 서술은 누르하치의 대명전쟁에서의 첫 번째 출정을 '신화적으로' 꾸며주는 과장적 용법으로 판단된다.
여기까지 읽어 본다면 누르하치가 이끄는 1만여명의 군대의 규모가 작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삼국지 연의가 아니기에, 현실적으로 당시 무순 앞에 포진한 1만 기천명의 군대 역시도 '대군(大軍)'으로 호칭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 누르하치가 대동한 군대는 어중이떠중이 잡졸들이 질서도 없이 집결한 것도 아니고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야전사령관의 통솔 하에 엄격하고 다듬어진 지휘체계를 갖춘 채 포진한 정예부대였다.
1618년 당시 무순을 지키고 있던 명군의 정확한 수효는 필자의 부족한 능력으로서는 면밀히 파악할 수 없으나 대략 1천명을 전후하여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3 기타 변수를 제외한 단순 계산으로도 후금군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만큼, 해당 병력의 지휘관이었던 이영방으로서는 본인이 수하로 데리고 있는 병력의 10배에 이르는 후금군의 진용에 큰 압박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심지어는 이에 앞서서 기습 공격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그의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포진을 갖춘 누르하치는 먼저 포로로 잡은 명나라 사람에게 이영방과 무순의 투항을 요구하는 서신을 쥐어주고서는 그를 무순으로 보냈다.4 후금의 기록상에서는 해당 한인은 무순으로 진군하던 도중 경계에서 붙잡은 한인이지만, 사실 실상으로는 마시를 습격하는 과정중에 붙잡은 포로였을 개연성 역시 존재한다.
사실, 여진과 후금의 경계에 가까운 지역에서 기상도 그리 좋지 않던 와중에 야간에 야외를 돌아다닐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로 보건대 해당 포로는 후금의 기록에서 생략된 마시 습격에서 생포되었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한다.
해당 서신의 내용은 명군이 명의 경계에서 나와 여허를 도우므로 본인이 명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대의명분의 선전, 이영방의 군사로는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압박, 자신에게 항복한다면 기존의 이영방 산하 군사와 백성들을 그대로 유지시켜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명에서의 관직보다 더 높은 관직을 줄 것이라는 회유, 싸움이 일어나면 화살이 이영방을 구분하여 날아가겠느냐는 은근한 협박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마무리에는 항복할 지 안할지를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한 순간의 분노로 본인의 말을 믿지 않고 일을 망치지 말라는 말까지 존재했다.5
그러한 서신을 보내온 누르하치의 모습은, 이영방의 눈에 비치기에 1613년 말, 당시 지금보다 낮은 관직이었던 비어였던 자신을 상대로 스스로와 동등한 대접을 해가며 자신에게 명나라를 향한 해명서신을 전달해야했던 누르하치의 모습과 비교해보자면 천지차이의 모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이영방과 강홍립
---
1.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년 윤 4월 16일,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음력 4월 15일.
2. 『만문노당』, 『만주실록』 무오년(천명 3년) 음력 4월 15일
3. 일부 서적에서 당시 무순의 주둔병력은 1천2백정도로 특정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포괄적인 기준을 적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宿巍, 『当大明遇上大清』, 现代出版社, 2018.
4.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5일
5.『만문노당』, 『만주실록』무오년(천명 3년) 음력 4월 15일 서신 내용 교차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