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대충 여기서 파딱으로 활동하는 모 황제시기 기준. 구 서로마 권역 외에 구 일리리아와 다키아, 마케도니아 관구가 로마 총대주교의 관할 권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도미나투스가 성립되고 나서 재편된 로마제국의 관구지도를 참조하면 5명의 총대주교가 관할한 지역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로마 총대주교(교황): 구 서로마 제국 권역 + 일리리아, 다키아, 마케도니아 관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트라키아, 아시아, 폰투스 관구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이집트 관구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오리엔스 관구
예루살렘 총대주교: 팔레스타인(이 당시 시나이반도는 팔레스타인으로 분류)
이 펜타르키 체제는 두 개의 사건으로 인해 크게 변화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이슬람의 침입이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고 그와 동시에 오리엔스, 이집트, 아프리카, 히스파니아가 이슬람 세력에게 점령되면서 기존의 펜타르키 체제는 사실상 로마-콘스탄티노플의 양대 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두 번째 사건은 성상파괴운동이다. 레온 3세가 726년에 반포한 성상파괴운동은 서방 기독교 세계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로마 총대주교의 경우, 성상파괴주의에 반발하여 이탈리아 반도 내의 반 동로마 세력 운동을 지원해주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탈리아 지역 내의 반 성상파괴주의 반란은 결국 진압되기는 했으나 레온 3세는 이 과정에서 로마 총대주교를 억누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반 성상파괴주의 성향의 로마 총대주교를 직접 압송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로마의 함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손실을 입으면서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이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레온 3세는 로마 총대주교를 갈아치우는 대신 기존 로마 총대주교의 관구 일부를 떼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로 삼기로 하는 결정을 내려 관할 교구를 재편한다. 이 때 로마 총대주교 관할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할로 넘어간 지역이 바로 일리리아, 다키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등이었다.
지도를 보니, 로마 총대주교(교황)가 관할하는 범위가 다른 총대주교들이 책임져야 하는 관구보다 훨씬 넓네요. 로마 총대주교 입장에선 기존 서로마 강역에 해당하는 넓은 구역을 챙기느라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같은 다른 총대주교들이 꿀 빠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리고 레온 3세가 로마 국경 인근의 군인들이 주로 공감했던 성상파괴운동을 반포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성상파괴운동 때문에 기존의 유물들이 날아갔다는 생각이 들면, 제 입장에선 꽤 아쉽거든요. 크리스트교 관련 성상들 몇 개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속이 좀 쓰리기도 하고요. 종교가 없고 무신론자에 가깝긴 하지만, 그런 성상도 문명과 문화를 상징하는 물품인데...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섣부른 추측이나 상상은 하면 안 되긴 합니다만 어쩔 수 없네요.
강역 자체만 놓고보면 로마의 관할 권역이 넓긴 하지만 인구나 경제적 중요성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로마의 영역을 줄였다가는 콘스탄티노플이나 알렉산드리아의 부담이 커졌을 확률이 높았다고 생각함.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칼케돈 공의회부터였던만큼(그 전에는 그냥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칼케돈 이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 담당하던 권역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담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뇌피셜도 드는 중
하긴 서로마 강역은 로마 제국 입장에선 그냥 황무지 수준에 지나지 않았겠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세계에서 도시화가 가장 잘 된 곳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로마라는 지역은 상징성이 높긴 한데 그렇다고 관리하기엔 껄끄러운 구역이었고요(서로마 멸망 전에도 실질적인 업무는 밀라노 등지에서 봤다고 하죠. 이는 로마가 피폐해진 건 꽤 오래되었다는 뜻이고요). 사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가 로마보다도 먼저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국교화했던 지역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안티오키아 관구도 꽤 중요한 곳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칼케돈 공의회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종교적, 세속적 영향력이 상승하면서 저평가되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콘스탄티노플의 종교적 영향력의 상승은 곧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영향력 저하로 이어졌고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 사건이 바로 에페소스와 칼케돈 공의회.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의 네스토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에게 패배하며 안티오키아의 신학적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칼케돈에서 양성론이 정통으로 공인받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에우티케스가 주장한 단성론과 이에 파생된 합성론이 이단으로 정죄받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영향력도 축소된 ㅇㅅㅇ;;; 덕분에 이슬람의 발흥이 오기 전까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는 단성론(실질적으로는 합성론)을 내세우며 내부 분열을 자주 일으키는 지역이 되곤 했다능 ㅇㅅㅇ
공의회와 관련된 역사를 보면 종교적 교리에 대한 해석 차이도 있었지만, 어째 지역 간 알력 다툼으로 보이는 사례도 종종 있더라고요. 게다가 칼케돈 공의회에서 양성론이 정통으로 공인받자 제국 내 정통파와 합성론파 사이에서의 반목이 심해지는 바람에 후임 황제들(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라클리오스 등)이 갈등을 봉합하느라 애썼는데 죄다 실패해버렸죠. 그런 점을 보면 특정 종교의 신자들이 자신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같은 종교 내에서 교리를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더 불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점은 시공간을 막론하고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합성론이 승리하고 양성론이 이단으로 정죄받은 바람에 이슬람이 발흥하던 시기에 오히려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가 이슬람에게 넘어가고 (단, 콘스탄티노플은 그 막강한 방어력으로 인해 일종의 육지의 섬이 된 상황) 시리아와 이집트를 로마가 지배하는 상황이 생겼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능 ㅇㅅㅇ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현대 동유럽 국가들은 이슬람을 믿게 되었을 테고, 그 여파로 서유럽 지역과 동유럽 지역 간의 갈등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해졌을 것 같네요;;; 히잡이나 차도르, 니캅, 혹은 부르카를 착용한 슬라브계 여성들과 반대로 자유로운 복장으로 야외를 활보하는 중동 지역 여성들이라, 상상해보니 참 색다르네요.
의외네요. 로마총대주교의 영향력이 동로마 제국지역에도 그대로 있엇다는 건... 아마 4두정치 시기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나눈 기준이 펜타르키 관할구역 정할때 그대로 적용되서 그런거 같은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두정치를 시행할 때 나눴던 지역으로 보아도 동방 부제의 권역 중 트라키아를 제외한 모든 권역이 로마 총대주교의 관할 구역이었습니다. 비슷한 예시를 찾자면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콘스탄티누스 2세를 죽이고 콘스탄티누스 2세의 담당 구역과 자신의 담당 구역을 전부 차지했던 콘스탄스 1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