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고대 로마 제국의 3대 도시이자 동방 최대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이 지역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사람은 바오로와 베드로의 동료였던 성 마르코스로 후일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의 복음서를 서술한 인물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58~62년 사이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취임했으며 68년에 그곳에서 이교도에 의해 순교했다고 한다.
앞서 서술한 대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의 3대 도시이자 동방 최대의 도시였던만큼 기독교 세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위상은 로마 다음가는 도시였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또한 로마 총대주교(교황) 다음가는 위상과 명예를 보유하고 있었다.
3세기 중반, 13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였던 헤라클라스(232~248 재위)는 스스로를 파파스라 일컬었으며 이는 오늘날 콥트 교회의 수장을 교황이라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대도서관이 있던 도시답게 수많은 신학자들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26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이자 후대에 교회학자로 선포된 '성모 마리아의 신학박사', '강생의 박사' 키릴로스 1세(412~444 재위)였다. 그는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논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성모 마리아의 위상을 다시금 재정의한 위대한 학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로마 다음가는 권위의 보유자이자 동방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입지를 보유했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입지는 콘스탄티노플의 등장으로 인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이 공식적으로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 산하에 불과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황제를 등에 업고 급속하게 세력을 늘린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이러한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그리고 로마 총대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견제했으나 결국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구가 총대주교구로 승격되고 로마 총대주교 다음가는 명예를 누리기로 결의하는 것을 막지 못하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다음 서열로 밀리고 말았다.
칼케돈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게 여러모로 크나큰 내상을 입히고 말았는데 앞서 이야기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결국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밀렸음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 첫 번째고 당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발흥했으나 결국 이단으로 정죄된 단성론, 그리고 합성론과 정통으로 공인받은 양성론의 갈등이 해당 공의회를 기점으로 격화되었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키릴로스 1세 사후, 후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던 디오스코루스 1세(444~451, 혹은 444~454 재위)는 합성론자였고 그로 인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이 이단으로 정죄받자 자연스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서 면직되어야 했다. 그러나 합성론자들은 그만이 정통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여겼으며 디오스코루스 1세 또한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454년 사망할 때까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재임했다. 칼케돈 공의회 이후 30여년 동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은 양성론자와 합성론자의 갈등으로 인해 두 집단이 번갈아가면서 상대 집단에 소속된 총대주교를 끌어내리고 자신의 집단에 소속된 인물을 총대주교로 옹립하기를 반복했으며 결국 482년, 양성론자였던 요안네스 1세(481~482 재위)가 합성론자들에 의해 축출되어 로마로 망명하고 합성론자였던 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페트로스 3세(477, 482~490 재위)를 복위시키면서 두 집단의 갈등은 일단락되는듯했다.
페트로스 3세 이후로 50여년 동안 합성론자들이 장악하여 잠잠했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은 유스티니아누스가 개입하면서 다시금 내홍에 시달리게 된다. 536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였던 테오도시오스 1세가 합성론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에서 해임시키고 양성론자였던 가이아누스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임명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합성론자들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이러한 처사에 반발했고 테오도시오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의 해임에 불복종하며 합성론자들의 총대주교로 남았다. 그리고 이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둘로 갈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양성론과 합성론으로 양분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는 결국 하나로 봉합되지 못한 채, 642년에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에게 점령되며 영원히 나뉘고 말았다. 양성론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이로 인해 큰 타격을 받고 유명무실해졌으나 합성론파의 경우, 이집트 내의 합성론파(이하 콥트교인)의 세력이 건재했기에 이집트 내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슬람 점령 후, 콥트교인들이 양성론자를 멜키트라 부르며 탄압한 것도 있다.
1054년, 교회가 동서대분열을 겪고 기존의 펜타르키 중 로마 교황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총대주교가 서방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하자 교황 또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시기에 자체적으로 4곳의 총대주교구에 라틴 총대주교를 임명해 알렉산드리아에 3번째 총대주교좌인 가톨릭 소속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가 창설되었다. 이 후, 17세기 기존 콥트교인 중 일부가 로마와 연락이 닿고 로마와 교류하게 되면서 서방의 전례를 따르는 콥트 가톨릭교가 새로이 탄생했는데 이들 또한 1824년에 자체적으로 콥트 가톨릭산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를 설립하고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선출하면서 알렉산드리아에는 총 4명의 총대주교가 공존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러나 1964년, 로마 가톨릭에서 자체적으로 파견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를 폐지하여 오늘날에는 총 3명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정교회, 콥트교, 콥트 가톨릭)가 존재하는 중이다.
2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자면 유스티니아누스가 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합성론파만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에 올랐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함. 왜냐하면 칼케돈 공의회 이후로 시리아-이집트는 합성론을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도 지지했기 때문에 ㅇㅅㅇ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수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방 최대 도시이자 로마 다음가는 위상을 지녔던 자신들을 제끼고 로마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 고까웠으며 안티오키아의 입장에서도 수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마 다음으로 기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녔던 자신들을 제낀데다가 자신들의 담당 권역을 뜯어간 콘스탄티노플이 상당히 고까웠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데다가 에페소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에서 각각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을 이단으로 낙인찍어버린 상황이니 더더욱 양성론을 혐오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1. 알렉산드리아에만 3명의 총대주교가 존재하는 상황은 역으로 알렉산드리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네요. 확실히 헬레니즘 시기부터 알렉산드리아가 대도시이자 학문의 중심 중 하나로 기능했으니, 말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닙니다. 현재는 콥트교 총대주교 이외의 총대주교는 유명무실한 상황일 테지만요. 이집트 내 크리스트교 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는 콥트교인들도 군부의 비호가 없으면 대중에 의해 심하게 탄압받을 정도로 콥트교가 이집트 내에서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니, 다른 종파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2. 합성론파 vs. 양성론파 간의 갈등은 유스티니아누스나 이라클리오스도 수습을 못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본문을 읽다 보니 유스티니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에 간섭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잠깐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합성론파와 양성론파의 대립이 워낙 심해서 유스티니아누스의 개입이 없었어도 갈등이 더더욱 심해졌을 것 같긴 합니다. 합성론 자체는 제국 내에서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그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심지어 테오도라 황후도 합성론파였죠) 양성론 vs. 합성론 간의 갈등은 그 누구라도 봉합하지 못했을 듯합니다. 기실 제국의 분열은 필연적이었다고 해야겠죠.
2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자면 유스티니아누스가 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합성론파만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에 올랐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함. 왜냐하면 칼케돈 공의회 이후로 시리아-이집트는 합성론을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도 지지했기 때문에 ㅇㅅㅇ
양성론 vs. 합성론 갈등은 세속적인 요소도 작용했다고 듣긴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관할하던 지역과 안티오키아-이집트 간 지역 갈등이 굉장히 심했다고 들었거든요. 문득 떠오른 건데, 니카의 반란으로 유명한 녹색당과 청색당 중 녹색당은 시리아-이집트 지역의 상공업자, 관료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합성론을 신봉했는데, 그런 녹색당과 반대되는 청색당은 역으로 수도의 귀족 세력 중심으로 양성론을 신봉하는 세력이었죠.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합성론파이기도 해서 녹색당을 지지했다가 청색당 세력으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던 사례도 있었고요. 어떤 종파를 믿느냐에 따라 정치적 견해도 확 갈릴 정도니, 양성론 vs. 합성론 갈등은 종교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갈등을 해결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만 굳어지네요.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수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방 최대 도시이자 로마 다음가는 위상을 지녔던 자신들을 제끼고 로마 다음가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 고까웠으며 안티오키아의 입장에서도 수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마 다음으로 기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녔던 자신들을 제낀데다가 자신들의 담당 권역을 뜯어간 콘스탄티노플이 상당히 고까웠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데다가 에페소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에서 각각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을 이단으로 낙인찍어버린 상황이니 더더욱 양성론을 혐오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던...
그런 점이 이슬람의 발흥 때 안티오키아와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에 넘어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도 같습니다. 양성론 세력이 심히 혐오스러우니, 차라리 타 종교의 권역으로 넘어가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을 수 있었겠죠. 물론 이슬람 세력이 해당 지역에서 확실하게 권력을 잡은 이후로는 이슬람을 우대하는 경향이 굉장히 심해져서, 안티오키아와 이집트에 잔존한 크리스트교 신자들이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크리스트교 세력에 협조하긴 했지만 말이죠.
펜타르키가 무엇인가 하고 1장 맨 앞으로 가서 총대주교라는 의미를 알아내긴 했습니다만, 그 수가 하나의 고유명사격 단어로 굳은 걸 보면 얼마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를 넘어서 그 권위가 상상이 갈 정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