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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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이런 곳에서 감상에 젖어있으면 안 되잖아?”
나는 아이들을 규합해
섬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드넓게 펼쳐진
작물의 평야를 빠져나오는 와중,
작물지대의 모서리에서 척 보기에도 너무나도 오랜 시간 이전에
작동을 정지한 로봇의 사체를 발견했다.
나는 아자즈에게 부탁해 로봇의 정체에 대한 분석을 부탁했다.
아자즈는 닥터의 도움을 받아 로봇의 부품을 해체해 회로를 분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CPU에 있는 최심부의 캐시까지 말라버리다니... 얼마나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일까?”
라며 안좋은 기색을 표했다.
아자즈와 닥터는 우리에게 돌아왔고 내게 보고했다.
“사령관. 이 로봇은 AGS와 같은 논리 회로가 탑재되어 있지 않아요.
한 작업에 특화된 기종 같은데, 저와 닥터 생각으로는 농업용 로봇인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쉽게 풀이하자면, 특수 제작된 블랙박스 같은 전자부품이 아닌 이상 수십년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데이터가 소멸되거든요? 이 로봇 안에서 건질 수 있는 데이터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 섬의 주인은 아주 오랜시간동안 이곳을 방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군. 고마워.”
연구소의 주인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곳을 작물 지대로 꾸몄을까?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와쳐 오브 네이처의 사람들처럼 무언가 인류를 위해 헌신하려다가 휩노스 병으로 결국 사망한걸까?
나는 의문점을 품은 채, 수신호를 보내 아이들과 연구소 앞까지 전진했다.
080기관의 아이들이 위치와 정보를 보내온 연구소는, 무언가 고위층이 보기 좋게 번듯하게 지어졌다기보다는 아르망의 말대로 유배지와도 같이 삭막한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연구소의 입구에는 경비 병력이나 혹은 대 철충 지뢰 혹은 보안 기기들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 옆에 있는 인간용 인식 장비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우로보로스의 편대에 연락해서 연구소에 진입한다고 알리고, 혹여라도 후방에서 적들이 우리를 포위할 경우 연락을 취해달라고 말한 다음 우리와 별도로 섬을 정찰하고 있는 마리 휘하의 후발대에게 경계 태세를 내렸다.
나와 동행한 닥터, 아자즈, 레프리콘, 브라우니, 리리스, 콘스탄챠는 사주를 경계하며 내가 인식 장비를 작동시키길 기다렸다.
[이게 사령관을 지켜줄 거야.]
나 또한 만전의 준비를 가하고 칸이 준 철갑탄이 장비된 리볼버를 점검한 다음
인식 장비를 가동시켰다.
보안 인식 장비는 나를 스캔한 다음
“환영합니다. 출입을 허가합니다” 라는 음성을 내보내며 문을 열어주었다.
오래된 철문 특유의 굉음이 들리며 연구소의 문이 열리자 안에서 누군가가 발걸음을 내며 걸어나왔다.
그걸 듣자마자 후방 사주를 경계하던 아이들은 전부 연구소 문에서 걸어나오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향해 무기를 겨눈 채 엄중히 경계했다.
나 또한 그 즉시 칸이 준 리볼버를 꺼내어 그 존재를 향해 겨눈 채 공격적으로 말했다.
“소속을 밝혀라, 우리는 잔존한 인류 저항군인 오르카 군이다!”
어둠이 걷히고, 연구소 안에서 걸어나온 존재는 우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소녀, 이런저런 어려움을 아바마마와 함께 겪어왔사옵니다만 이런 첫 대면에서의 예상치 못한 공격적인 반응은 처음이라... 조금은 무섭사옵니다. 실례지만 무기를 거두어 주시면 안되겠나이까?”
그 존재는 머리가 검은색으로 커스텀 된 소완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소완의 첫 대면과는 달리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듯 생기있는 톤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콘스탄챠를 시작으로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다만, 리리스는 소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소완과 아웅다웅 했던 경험 때문에 동형기인 이 아이를 아직은 믿지 못하는 것인지 미간을 풀지 않고 있었다.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사옵니다. 연구소 안에서 아바마마와 함께 며칠전에 오신 귀객 여러분들과 또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있었나이다. 혹여라도 삼안 회사로부터 우리를 결국 입막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사옵니다만, 본사로부터 이렇게나 한 세기가 넘게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온 손님인 것을 짐작하건데 그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후자의 가능성에 좀 더 의의를 두게 되었지요.”
“입막음이라고?”
“연구소 안에 들어가면, 아바마마께서 친히 설명을 해주실 터입니다. 단지... 철충과의 혈투는 어떻게 되었는지요?”
나는 왠지 애닳은 이 아이의 말에 선의의 거짓말을 하려다가 진실을 말해주었다.
“...인류는 패배해 전멸했다. 내가 유일한 인간 생존자다.”
“...역시 저희 둘이 생각했던 대로군요. 아바마마께서는 마지막 연락이 닿은 그 날까지 김지석 님을 믿었사옵니다만...”
아까부터 신경쓰이는 것이 있는데, 멸망 전쟁 전 인류의 평균 수명은 약 100세 전후라고들 했다. 아무리 고위층이 내가 육신을 재구성할 때 라비아타와 콘스탄챠,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내게 사용했던, 김지석이 영생의 사욕을 위해 준비해두었던 것과 비슷한 최고급 오리진 더스트를 사용했다고 해도 오랜 시간동안 병원 진료나 이런저런 멸망 전 사회 서비스를 받지 않고 이런 섬에서 폐쇄된 채 멀쩡히 살아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어?”
“네에, 어떤 일이신지요?”
“너의 아바바마는... 인간인가?”
검은 머리의 소완 개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육신은 인간의 것이 아니지만, 정신은 그대로 인간과도 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사옵니다.”
“검은 소완 양, 그건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닌 것 같아요.”
리리스가 톡 쏘아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스 님, 소녀는 그에 대한 대답을 드릴 수 없사옵니다. 오르카 군의 사령이라고 하셨던 이 귀빈께서 이제 곧... 알게 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듣자, 닥터가 아자즈와 눈을 맞췄다가
“설마...”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닥터를 본 검은 머리의 소완은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우리를 연구소 안으로 손짓했다.
“어서 드시지요, 태양을 손으로 가릴 수는 없듯이 결국 이 날이 오고야 말았사오니 말입니다. 아, 그리고 소녀의 이름 말인데.. 흑완으로 불러주셔도 괜찮사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소녀에게 직접 붙여주신 이름이지요. 검을 흑(黑)... 영어로 백조인 Swan의 wan을 따와 흑완이옵니다.”
나는 아이들을 규합해 검은 머리에 연구소 안으로 진입했고, 오르카 호에 있는 이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연구소 안에 들어서자, 우리는 왜 이 섬 전반에 드넓은 곡창지대가 펼쳐져있는지 흑완의 설명으로 바로 알게 되었다. 이 연구소의 주인이 개인의 사비를 들여 식용 작물을 위주로 하여 므네모시네가 있던 방주처럼 개인 비상 식량 방주를 차렸기 때문이었다.
닥터는 수많은 냉동 씨앗들을 보며
“씨앗 유전자 데이터 복원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에 비하면 이렇게 씨앗 자체가 냉동된 상태라면 더욱 빨리 식량 증진에 도움이 될거야 오빠!” 라며 눈을 밝혔고 콘스탄챠는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
아자즈는 시설 내부의 기계들을 보며
“이 온전한 상태로 운용되는 기계들을 연구한다면 오르카 군의 기술을 좀 더 확장할 수 있을 거에요”
라며 닥터의 말을 보충했다.
브라우니는 여전히 작물들을 어떻게 다른 브라우니들과 조리해먹을까 생각하고 있었고, 레프리콘은 그러다가 마리 대장님이 또 다른 체력 조정을 시킬거라며 한소리를 얹었다.
리리스는 흑완이 아직 못 미더운 지 경계의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내 경호를 직속으로 담당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윽고 우리는 연구소의 여러 시설을 거쳐 관리자실 앞에 도착했다. 다른 시설들과는 달리 문이 굉장히 커다랬는데, 닥터의 추론에 의하면 뭔가 큰 자재가 드나든 듯 했다.
흑완은 관리자 실 앞에 서서 내게 말했다.
“오르카 군의 사령 님, 부디 홀로 들어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흑완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왜냐하면 이 앞에 무엇이 도사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멸망전쟁 전에 태어나 지금까지 생존한 바이오로이드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고위직에 있던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흉악하고 간사한 이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 흑완이 진정으로 순수한 아이라고 해도 이런 아이들을 시켜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상황이였다.
리리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앞을 지나쳐가 흑완에게 매서운 기새로 노려보며 말했다.
“흑완 양. 이런건 이야기에 없었습니다만?”
“리리스 님, 노하지 마시옵소서. 아바마마께서 부탁하신 겁니다. 저조차도 들어오지 말고... 단 둘이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셨나이다.”
“저 안에 함정이 없을거라는 증거는요?”
“함정이라뇨, 저의 아바마마는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당췌...”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구술 뿐입니다. 저희의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아바마마와 제가 여기에 그 오랜시간을 있게 된 것은, 아바마마께서 스스로 이곳으로 철충과의 전쟁 당시에 피신하셨기 때문인 것이 아니옵니다. 역으로... 좌천된 것이지요.”
아르망의 판단과 내 직감이 옳았다.
정말 이곳에 자의로 발을 들였다면 아까 들판에서 봤던 로봇들도 최소한의 유지보수를 하고 적극적으로 방어 장비등을 설치하는 식으로 운용되어야만 했다. 김지석과 앙헬이 잠든 곳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다.
리리스도 조금은 경계가 누그러진 듯 표정을 풀고 한 발자국을 물러났다.
“...좋아요, 리리스는 당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믿도록 하죠. 단, 주인님께서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허락하게 해주세요. 그정도면 허락 해주실 수 있나요?”
흑완은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나이다. 단, 부디 주인님께 해를 끼치진 마옵소서. 혹여라도 발포음이 들린다면 소녀... 천하의 리리스 님이나 저기 계신 콘스탄챠님이더라도 온 힘을 다해 저항하겠나이다.”
나는 리리스를 지나 흑완에게 다가갔다.
“먼저 악의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나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어찌 되든.. 나와 같은 인간이니까. 그 어떤 상태로 남아있다고 해도. 그러니까, 알았지?”
내가 흑완에게 말하자 흑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한명씩 눈을 맞춘 후 다녀올게. 라는 말을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관리자실에 들어서자, 양 옆에 컴퓨터 서버를 두고 거대한 컴퓨터 스크린이 나를 맞이했다. 오르카 호의 전술 지도를 더불어 그 어떤 시설에 들어서더라도 이렇게 커다란 모니터는 처음이었다.
커다란 컴퓨터 서버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소리쳤다.
“나는 인류 최후의 생존자, 오르카 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이다. 이 연구소의 소장이 있으면 그 모습을 보여라!”
그러자 컴퓨터 스크린에 동양인의 얼굴을 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내 씻을 수 없는 죄가 돌고 돌아 마침내 내 앞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군.”
나는 컴퓨터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나오자 당황한 기색이 든 나머지 주머니에 찬 리볼버에 손을 올렸다.
“당신은 누구지?!”
“자네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범인일세.”
“뭐라고?”
무슨 소리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린 분명 처음 만났... 머리가 아프다. 에바가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줄 때 느껴지는 머리가 아픈 그 느낌과 같았다.
“어서오게. 내 이름은 뫼비우스 박사. 이제는 진짜 이름조차 잊어버린 자. 그리고, 삼안의 창업자인 김지석과 애덤의 친구이자..... 자네가 받은 철충-인간 혼합 시술의 이론의 창시자일세.”
컴퓨터의 스크린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차디차게 생긴 흰 외벽의 실험실... 그중에서 이 뫼비우스 박사의 목소리가 제일 크게 울려퍼졌다.
[꼬마야, 안녕?]
[앗, 박사님이다! 엄마는 어딨어요?]
[애덤 아빠랑 에바 엄마는 잠깐 여행을 떠났단다.]
[여행이요?]
[응! 따뜻한 해변으로 여행을 떠났단다. 엄마두, 아빠두..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을거야.]
[재밌겠다!! 저두 해변 가도 돼요?]
[물론이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 꼬마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잖니?]
[음... 그 철충인가 뭔가 하는 로봇 괴물들 정보를 공부하는거요?]
[그렇지. 왜 우리 꿈나무가 그 로봇들을 공부해야 하냐면...]
[박사님, 실험실에서 당장 나오십시오. 대-철충 지휘 시뮬레이션 시스템 피실험자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부여하지 마시오!]
[사사로운 감정이라고? 꿈과 희망을 먹고 자라야 할 어린아이에게? 지석이 나오라고 해! 내가 이 이론을 지석이에게 보낸건 이런 어린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철충의 네트워크에서 정보를 다운로드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마지막 경고입니다, 박사님. 지금 나오시지 않으면 회장님의 지인이라고 해도 출입 권한을 박탈하겠습니다.]
“바로... 당신...이였구나. 날 그렇게 만든 것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