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이란 연극과도 같지. 얼마나 흥미진진하기에 더 보고 싶어서든, 얼마나 비극이었기에 주인공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든, 한번 막을 한번 내리면 그 뒷 이야기는 알 수 없지. 그러니 진혁 군. 자네의 유한한 시간을 걱정과 근심으로 채우지 말아주게. 어리석은.... 나란 악마가 부탁하겠네."
나는 단탈리온의 속삭임을 듣고 악몽에서 깨어났다.
“단탈...리온?”
악몽의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나는 중얼거리듯 단탈리온의 이름을 불렀다.
하늘색 머리의 댕기머리를 한 이 잘생긴 미소년인 녀석은 나와 중학생때부터 친구이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녀석이 오랜 세월동안 이런저런 나쁜 일들을 겪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을 너무나도 비꼬는 나머지 욱해서 내가 뺨을 후려갈겼었을 정도로
관계가 험악했지만 지금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오랜 세월이라니 무슨 이야기냐고?
이녀석은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마계의 정부 기관인 만마전의 서기들의 총 책임자를 맡았던 높은 위치에 있었던 악마니까.
왜 그런 대악마가 인간계의 학교에 다니는가 하니, 나이를 너무 먹어버리면 기초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오히려 심해진대나.
지금은 21세기. 공상 소설에서나 이야기가 오고 가던 천사와 악마.. 그리고 타천사 그리고 또 요괴나 각종 신수, 이종족들의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난지 오래인 세상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지 한 세기가 지나자 여러모로 우리들은 적응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런저런 잡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 밝혀졌을 때에 비하면 자연스럽게 다들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과 다른 신수들이 함께 어우러져 다니는 이상 국제 종합학교의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아무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 녀석, 요새 뭔가 이상하다. 작년 말부터 나와 이야기하다 갑자기 낯을 가리곤 한다. 얼굴을 붉히면서 “아, 아무것도 아닐세!” 같은 말을 하곤 하는데...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러는건지.
우리가 만난지 거진 5,6년은 됐고 다른 나의 어린시절의 소꿉 친구들보다는 아니지만 앵간치만큼 가까운 사이가 됐는데도 말이다.
“미안하네...혹여라도 내가 잘 자고 있던 잠을 깨운건 아닌가?”
“아냐, 또 악몽을 꾸고 있었거든.”
“자네가 말하던 그 악몽인가? 공허한 공간에서 부모님을 애타게 찾는?”
“응...”
내가 방금 말했듯,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 꿈을 자주 꿨다. 왜냐하면 내 부모님은 어린 시절에 교통사고로 두분 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갈 곳 없던 나를, 구미호인 달래 할머니가 거두어서 기르셨다.
할머니는 따스한 분이기에 할머니와의 관계는 당연히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혈연으로 이루어진 내.. 이런저런 혼란을 직접적으로 받아줄 부모님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내게 크나큰 씁쓸함을 두루 안겨주었다.
다행히도, 달래 할머니 말고도 우리 집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타마모 할머니와 마후유 이모, 그리고 카오리 누나와 둘째인 유키 누나, 마지막으로 나와 동갑인 하루로 이루어진 여우 요괴 가족이 함께 살고 있어 어느정도 위안이 되고 있다. 정말.. 이분들마저 없었더라면 난 크게 방황하거나 나쁜 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 자네가 앓는 소리를 내길래 쓸데없는 소리를 말해본 거다만.. 방해하지 않아서 다행일세.”
“그러고 보니, 지금 몇시지? 점심시간에 오래간만에 벨에게 가기로 해서 말이야.”
나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벨은... 그러니까 벨제붑은 내가... 사랑하는 아이이다.
가끔 생각해보면 실감이 나지 않을때가 있다. 내가 마계의 총 책임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니.
우리 둘의 만남은 단탈리온의 장난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느날 단탈리온이 학교 옥상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달라고 사정을 해서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나는 마계의.. 뭐랄까. 최고 정부 기관인 만마전의 벨의 집무실에 곧바로 떨어졌다.
단탈리온의 의도는 그게 절대로 아니었던 것 같지만 방비가 제일 삼엄한 한 나라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내가 떨어지자
벨은 굉장히 매서운 태도로 나를 침입자라 생각했고 나를 마력으로 잡아당겨 거진 죽일 태도로 대했지만 다행히도 단탈리온이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곧바로 내쪽으로 와줘서 목숨만은 살았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벨의 눈에서 뭔가 느낀 것이 있었다. 왜인지 수천번은 봤을 것 같은 그런 눈빛을 담은 장면이였다.
단순한 그... 무슨 현상이더라? 그런 낯익은 것을 착각하는 현상이 아니었다. 분명 나를 잡아끌었을 때, 벨의 슬픈 눈을 본 순간 나는... 왜인지 모를... 지켜줘야겠다는 감정을 느꼈다. 단순히 남들이 말하는 콩깍지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단탈리온에게 화를 내며 기억을 지우고 인간계로 돌려보내라는 벨의 말을 들은 순간 내가 소리쳤다.
“잘은 모르겠지만, 날 붙잡았을 때.. 너의 눈에서 마르지 않는 슬픔을 느낄 수 있었어. 내가 이제부터 너의 그 눈물을 닦아줄게!”
내가 대체 왜 그런말을 했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런 운명...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그 말을 하자 벨은 정말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자네가? 한낱 인간인 네가 내 슬픔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지?”라고 날 비웃으며 흘겨봤지만 이윽고 재미있다며 교류를 이어가자고 했다.
처음엔 벨이 단탈리온처럼 심술도 많고 새침데기여서 내가 말을 걸려고 해도 새침하게 쪼아대어 나도 심적으로 걸리는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글쎄.. 마치 운명이 우리 둘의 사이를 어떻게든 이어주려는것처럼 단 1년만에 너무나도 가까워졌다.
“마침 11시 30분일세. 이제 곧 누님의 수업이 끝날 것이고 점심 시간이 되겠지.”
이상 국제 학교의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신수들로 어우러져 이루어져있는데, 단탈리온의 누나인 릴리스 선생님은 그 중 우리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상 국제학교를 다녔고 많은 다양한 선생님들과 학생 친구들을 만나봤지만 릴리스 선생님에게는 중학생 시절 사춘기때 부모님에 대한 갈망이나 여러모로 정체성 문제로 방황할 때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기지개를 켰고, 12시가 되어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단탈리온~? 학교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니?”
릴리스 선생님이 수업이 끝난 후 나와 단탈리온쪽으로 다가와 단탈리온에게 물었다.
“네에- 그렇수다. 뭐어, 누님이랑 반나절을 같이 보내야 한다는게 참으로 안타깝지만 말이오.”
단탈리온이 늘상 그랬듯 능글맞게 틱틱대자 릴리스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단탈리온~? 누나의 죽도로 죽도록 맞고 싶니~?”
단탈리온은 태연한 듯 말씀하시는 릴리스 선생님의 낯빛에 기가 죽어서는
“방금 그건 농이오, 누님..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으시잖소..” 하고 꼬리를 내렸다.
그토록 막강한 악마의 집안인데 왜 릴리스 선생님이 죽도를 가지고 다니시느냐고 하면
이상 국제 종합학교의 각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문에서 다들 리미터라고 하는 장치를 켜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당장 만화나 영화만 봐도 천사나 악마, 그리고 여러 신수들의 위력은 사람과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실제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마력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종족간의 차이가 생겨 안좋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리미터라는 장치가 인간과 여러 이종족들의 위인들의 노력으로 개발됐고 이는 점차 시범적으로 보급되던 찰나였다.
물론 모든 힘의 폭주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지만, 지난 한 세기동안 발생하던 사람 이외의 이종족의 힘의 폭주로 인한 여러 건물 붕괴 사고나 이러저러한 사건사고들은 리미터의 개발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
단탈리온도 리미터를 켜고 있을텐데 어떻게 학교 옥상에 만마전으로 가는 입구를 뚫는 장난을 했느냐면... 잘 모르겠다. 단탈리온 말로는 “한정된 자원으로써 마력을 사용하는 최적화를 꾀하면 된다” 어쩌구 하는데, 난 이해하지 못하겠다. 단지.. 단탈리온이 말해주었듯 지금은 지구를 떠난 우리가 아는 천계의 신과 별개로 지구를 떠난 마계를 다스리는 신이었던 사탄이 직접 낳은 일원중 한명으로써 대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기도 하고 또 만마전에서도 서기를 담당하는 부서의 총 책임자로 일했었다고 하는 만큼 마력을 잘 다룬다는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크흠. 아무쪼록, 둘 다 점심 잘 먹으렴!”
“누님도. 그리고 혹여라도 다른 선생들과 학교가 끝난 후 식사 약속이 있걸랑 과음하지 마시오.”
“얘도 참~ 많이 안 마실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니나 다를까 릴리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신 후, 단탈리온은
“보나마나 또 고주망태가 되어서 들어오시겠지.. 누이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내 몫일테고.”
라고 궁시렁거렸다.
릴리스 선생님이나 단탈리온처럼 사탄이 직접 빛은 대악마들은 많이 있지만 다른 형제 자매들과는 이런저런 일이 있어 지금은 단탈리온과 네 자매가 분가해서 살고 있다고 단탈리온이 전에 말해주었다.
릴리스 선생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단탈리온의 동생으로써 악마로서는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한다.
물론 젊은 축이라는것도 우리 인간으로 따지자면 증조 할머니, 고조 할머니 정도의 나이지만.
어쨌든, 나머지 세명의 이름은 그레모리, 파이몬, 모데우스인데
그레모리와 파이몬은 쌍둥이로써 우리 고등학교 1학년에, 모데우스는 중학교 3학년에 속해있지만 세명의 성격은 천차만별로 다르다. 그레모리는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파이몬은 뭐랄까.. 성별이 여자이긴 하지만 남자다운 그런 성격이라고 해야할까?
마침 단탈리온이나 나를 포함해서 형, 누나로 부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모데우스는 대악마의 제일 어린 늦둥이로써 사람으로 따지자면 어린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그런 아이이다.
점심을 먹은 후, 나는 옥상에 있는 만마전으로 가는 문으로 향하기 위해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러자 단탈리온이 내게 말했다.
“진혁 군, 혹여라도 자네가 갈 때를 대비해서 통로는 점검해 두었네.”
“고마워, 단탈리온.”
“혹여라도, 자네 이외의 사람들이 잘못 들어갈 때를 대비해서 자네 이외의 이들이 만마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시한번 점검했네.”
“고마워.”
“혹여라도 말이지, 설령 벨리알 같은 자가 자네에게 해꼬지를 가하려 한다면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내게 말해줘야 하네. 만약 그렇다면.. 그때는 내, 자네를 구해보이겠네.”
뭐랄까, 단탈리온은 걱정이 많은 할아버지 같은 성격이라서 항상 내게 이렇게 꼬치꼬치 말하고는 한다. 물론 단탈리온의 걱정.. 특히나 만마전의 사람들이나 이종족 신수들에 대한 걱정은 옳은 걱정이긴 하다. 왜냐하면 벨이나 단탈리온, 릴리스 선생님... 그리고 만마전의 많은 악마나 타천사 분들은 옛날에 천계와 마계 사이에 일어났다던 천마대전은 잊고 나나 인간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지만
벨리알 씨 같은 분들은 아직 그 악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경계하거나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벨리알 씨는 전에 이야기할 때 내가 “혹여라도 인간인 제가 싫으시진 않으신가요?” 라고 물어보자 “내 대답은 이거야, 소년. 자네가 벨제붑에게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면 나도 아무런 계략을 꾸미진 않아.” 하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셨지만..
“고마워, 단탈리온. 그치만 난 정말 괜찮아.”
나는 단탈리온에게 웃음을 지으며 이따가 보자는 말을 하고 옥상의 문 앞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설때마다 내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는게 느껴졌고 이윽고 나는 문 앞에 섰다.
이미 점심시간에 가겠다고 연락을 보내놨으니 벨이 행여나 점심시간에도 정신없이 일하는 와중에 내가 문으로 들어서도 놀라지 않으리라.
‘가자.’
나는 문을 열고 만마전을 향해 나아갔다.
옥상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만마전 안 벨의 집무실에 있는 벽을 통과해 나는 걸음을 벨의 집무실에 내딛었다.
벨의 집무실은 판타지 영화나 만화에 나올 법한 화려한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탈리온이나 릴리스 선생님이나 다른 만마전의 분들에게 듣자하니, 마계의 신인 사탄이 떠난 이후 총책임을 떠맡았던 선대 마왕들은 이런 화려하고 아방가르드한 장식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사치를 부렸다고 한다.
사실 벨을 보다보면 그 말이 실감이 나는 것이 선대 마왕들은 귀빈이 올때에도 내시를 몇십명이나 대동하고 다녔다고 하는데 벨의 경우에는 시중을 드시는 분이 몇분 계시지 않고 또 내가 간다고 이야기 하는 날이면 그분들에게 최대한 휴게 시간을 드리거나 아니면 가벼운 업무 쪽으로 잠시 발령을 보내드리는 것을 보면, 그리고 식사를 할 때에도 가상의 이런 웅장한 배경을 가진 작품에서 나올 정도의 어마어마한 진수성찬을 차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그 말이 사실임을 다시한번 곱씹게 된다. 물론 식사의 경우에는 내가 아닌 다른 귀빈들에게는 진수성찬을 대접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만마전에 있는 벨의 집무실에 들어가 두리번 거리던 그 때였다, 누군가가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기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익숙하디 익숙한 벨의 심술궂은 웃음소리가 집무실에 울려퍼졌다.
“하하하, 자네도 참! 내 귓바람이 그렇게나 놀랄 일이였나?”
“깜짝 놀랐잖아! 그렇게 갑자기 후- 하고 불면 어떻게 해!”
“흥! 자네도 항상 나보고 귀엽다느니 뭐니 하면서 심술부리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겠나?”
푸근하디 넓은 웨이브 머리가 인상적인 이 아이... 물론, 실제 나이는 나보다 몇천배는 더 많으니까 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아무쪼록. 이 애는 내가 아까 말했던 마계의 총 책임자인 벨제붑이다.
나를 놀리는 것으로 심술끼가 가득 차서 해맑게 웃고 있는 벨을 나는 위아래로 살펴봤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낯빛을 바라며 두 손을 허리춤에 찬 채 의기양양한 벨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가올 시험이나 여러 가지 걱정이 단숨에 사라지는 듯 했다.
“진혁 군, 그나저나 말이지~”
“응?”
“나, 어딘가 달라진 부분이 있는데 자네는 눈치챌 수 있겠나? 아아~물론 자네는 어리석으니까 해답을 찾지 못하겠지만!”
나는 벨의 의기양양한 심술을 보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심술보가 다른 날보다 더더욱 큰 걸 보니, 힘든 일이 있었나보네?”
“흥, 그럴리가! 잔말 말고 찾아보기나 하게!”
나는 벨의 말을 듣고 팔짱을 낀 채 웃고있는 벨의 모습을 살폈다.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몇분간 대체 어디가 달라진걸까 싶었지만 치마쪽을 살피다 우연히 하의 종아리 부분에 꽃 무늬가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알았다!”
벨은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신의 마음에 내가 부응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윗눈꼬리를 올렸다.
“스타킹 말인데, 꽃무늬가 그려진 걸로 신었구나?”
벨은 부끄러워진건지 아까보다 더더욱 붉어진 볼매음새를 띄우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내게 말했다.
“그렇다네. 자네같은 변태라면 이런 곳을 구석지게 살펴보니 종국엔 발견할 줄 알았다만!”
“누가 변태라는거야! 아무리 나이차이가 그렇게 난다고 한들, 우린 사랑하는 사이잖아...! 내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널 그런 눈으로 보진 않아!”
“흥! 말은 잘 해도 인간은 언제나 똑같지. 안그런가?”
“그치만 벨의 다리는 다른 만마전의 분들이 부러워하실 정도로 각선미가 가득한걸!”
“뭐... 뭣?”
“그리고 그 꽃 무늬말인데, 직접 그린 거 아니야?
난 그런 수고를 들이는 벨의 마음씨가 좋다고!”
벨은 얼굴이 빨개져선 나를 흘겨보다 헛기침을 하고 소파에 부드러히 앉아 중얼거렸다.
“흥, 말은 잘하기는... 그런 달콤한 말로 날 유혹할 셈인가? 정말이지, 이런 일을 위해 태어난 인간도 아니고.”
나는 얼그레이 차를 따르는 벨의 반대편에 앉았다.
“자넨 어린애 입맛이니 주스면 되겠지?”
벨이 틱틱대는 말투로 말을 함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겨 우리 둘 앞에 주스를 뿅 하고 나타나게 한 다음 내 잔에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천계와 마계의 시간은 인간계의 시간보다 느리게 가기 때문에 나는 벨과 더불어 우리 학교의 점심시간이 끝날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지만 그래도 벨에게 조금이라도 웃음을 머금게 할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쁘다. 앞으로 우리들의 앞길에는 어떤 게 펼쳐지게 될까? 언제나 행복하고 이런 시간만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