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601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9월 24일 무오 18/23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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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기율(紀律)이 무너져 버린 데 대한 일입니다. 무릇 용병(用兵)은 전적으로 기율을 위주로 하니, 만약 군대에 기율이 없다면 군졸이 복습(服習)을 하지 않아, 말채찍을 던져 물줄기를 끊을 정도로 많은 군사가 있더라도 쓸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변장이 거느리고 있는 토졸(土卒)이 220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얼마 안 되는 병사로 저런 바다를 가로질러 오는 적군을 방어하는 것은 소국인 추(鄒)가 대국인 초(楚)를 대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윗사람을 가까이하고 섬기려는 마음이 있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전투를 복습한다면 한 명이 천 명을 당해 내는 일을 바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 년 가까이 나라가 태평하다 보니 사람들이 안일에 젖어, 장수는 가냘프고 약하여 고식(姑息)만을 추구하고 군졸은 해이해져 명령이 관철되지 않습니다. 상하가 제각기 분수가 있다는 것을 모르니, 어찌 지체(肢體)가 서로 구제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군병이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기율에 가장 크게 관계되는 일이지만, 평시에는 대번에 죽이기 어려우므로 국가에서 법을 만들어서 반드시 세 차례 도망하고 나서야 주벌하게 하였으니, 너무도 관대하게 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마저도 폐해져 시행되지 않아 서너 번 도망하더라도 죽을죄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완악하고 사나운 병사는 도망을 예사로 여깁니다. 한두 사람에서 시작하여 전부 배반하여 흩어지기라도 한다면 장차 어떻게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봄과 가을의 조련은 군사로 하여금 전투를 복습하게 하는 일인데도 거만한 군졸은 매번 삯꾼[雇人]을 대신 보내면서 조련하고 열병(閱兵)하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야간에 조련할 때에도 어둠을 틈타 빠져나가 배에 오르지 않는 자가 많이 있는데 병방(兵房)과 도훈도(都訓導) 등은 덮어 두고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그 죄를 피합니다. 평상시에 이러한 버릇이 오래되다 보면 비상시에 어찌 다시 대오를 잃고 차례를 어기는 일을 두렵게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손무(孫武)가 궁중의 임금 앞에서 궁빈(宮嬪)의 목을 베었는데 지방의 군병들이 사지로 달려 나가기를 말 달리듯이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기율을 평소에 지키지 않고 무예를 평소 복습하지 않았는데 죽음이 임박한 곳에서 그런 군병을 쓸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청컨대 지금부터 영진(營鎭)의 도망한 군사에 대해 특별히 수사(收司)의 법을 만들어 엄히 수색하여 체포하되 세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군율을 시행하고, 군사를 점고(點考)하는 법은 십분 엄하게 신칙해서 그 용모 파기(容貌疤記)를 반드시 하나하나 분명히 확인하게 하소서. 그리고 야간 조련의 항오(行伍)에 대해서도 일일이 점검하여 범한 자는 경중을 구분해서 군율을 시행하되, 병방과 도훈도 등이 먼저 고발한 경우는 그 죄를 용서해 주고, 수군을 나중에 점고하였는데 병방과 도훈도가 숨기고서 고발하지 않았을 경우는 모두 그에 대한 군율을 시행한다면 무너져 버린 기율을 거의 수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기계(器械)가 쓸모 없게 된 데 대한 일입니다.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검이 일본만 못하고 활이 중국만 못한 것은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풍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장(工匠)의 기술이 서툴러서 철의 품질을 가려내지 못하고 제련을 정교하게 하지 못하는 데다, 제조를 감독하는 자는 적은 물력으로 많이 제조하는 것을 능사로 여깁니다.이에 근년 들어 만들어 들인 새 검을 한 번 나누어 준 뒤로는 예전 검 가운데 좋은 것들마저 모두 없애 버려 현재 도성의 친위(親衛) 병력이 차고 있는 칼들은 모두 칼날이 무뎌 쓸 수가 없는 연도(鉛刀)에 해당합니다. 변진의 검에 있어서는 더욱 형편없으니, 단지 두부(豆腐)를 자르는 데라면 모를까 어찌 적병을 베는 용도로 쓸 수 있겠습니까.
무릇 활을 만드는 법은 반드시 각심(角心)의 큰 조각을 절취해서 펼쳐놓는데 뿔의 결이 곧고 순한 뒤에야 풍우(風雨)와 서습(暑濕)에도 부서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궁장(弓匠)은 전적으로 뿔을 남기는 것만을 이롭게 여겨서 잘게 재단해서 자잘하게 이어 붙입니다. 그 결과 나뭇결과 뿔의 성질이 서로 잘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습기의 피해를 입으면 뿔이 들려 활이 비뚤어집니다. 서울에서 만든 활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지만 변진에 보관한 것은 크게 놀랄 정도로 형편없습니다.변장은 방포(防布)를 급대(給代)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재원으로 삼을 만한 물품이 없는데, 군대의 병기를 수리하지 못하면 잘못한 책임이 곧바로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외양만 그럴 듯하게 꾸며서 법조문을 피하고 견책을 막는 계책으로 삼습니다. 이른바 새로 만들었다는 것은 겨우 모양만 갖춘 것이고, 이른바 보수했다는 것은 창고 안에서 100년 혹은 7, 8십 년이나 오래 묵은 활의 겉을 자작나무 껍질로 싸맨 다음 불을 붙여 뜨겁게 해서 바로잡아서 점고를 받을 적에 늘어놓을 뿐입니다. 만약 윗줄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면 모두 손이 가는 대로 파열됩니다. 직임을 다하지 못하는 변장이 이런 식으로 기망(欺罔)하니, 참으로 죄를 물을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형세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활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물역(物役)에 대해 영문(營門)은 이미 백급(白給)해 줄 물품이 없는 데다 달리 해결해 줄 대책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대 조선인들은 일본도가 기술, 소재 전부 좋다고 칭찬을 했는데 모순 아님?
사철과 접쇠 방식 어쩌고하는데
조선이나 다른 나라도 사철이 많이 나고 그걸 이용한 접쇠방법은 유럽까지도 다 쓰던 방식임
어디서 줏어라도 들었으니 내구도가 구리다고 주장하는걸텐데 그 주장들 출처는 본적이없어서 이럼 ㅋㅋㅋㅋㅋㅋ
안 강했으면 그거로 대가리 썰려나간 삼국시대~조선 사람들은 병.신이라는 말이 됨
그거 제조 시대에따라 틀리다는게 와전된걸로암
2차대전 이후에 강철로 만든 공장제 일본도 보다 못하다는 말 때문에 시대배경 무시하고 까는걸로 알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