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에 흔히 하는 말이 서울 무 개성 배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무 농사가 잘 되고 개성에서 재배한 배추가 품질이 좋다는 말이죠. 원래 우리나라의 배추는 반결구 배추였습니다. 봄동 같은 얼갈이 배추죠. 이걸로 김치를 담그기에는 김장 김치로는 별로 좋지 못했었습니다. 구한말에 중국산 배추 즉 호배추가 들어왔는데 이게 결구배추(일정한 형태로 얼개가 있는 배추)라서 김장 김치를 담그기 좋았습니다. 다만 이 호배추는 따뜻한 곳에서는 재배가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너무 추운곳은 안되고 적당히 서늘한 곳 즉 개성이나 평양 같은 곳에서 주로 재배했고 서울 즉 한강 이남에서는 무로 담근 무김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 우장춘 박사님이 양배추(비교적 따듯한 곳에서 재배가 가능함 양배추도 결구형태임)와 호배추를 교잡한 한국형 결구배추를 육종하게 됩니다. 이게 현대의 국산 배추가 되죠. 비교적 따듯한 곳에서도 재배가 가능해서 남한 여러곳에서 재배하게됩니다. 물론 원래의 호배추 처럼 비교적 서늘한곳이 재배에 더 수월해서 고랭지나 해풍이 부는곳(예를 들면 해남)이 더 재배에 유리한 면은 있습니다. 우장춘 박사님은 참 안타까운 삶을 사신것이. 아버지가 우범선이라고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군에 협력한 군인이었습니다. 우범선이 일본으로 도망가서 일본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죠. 박사님은 한국에 대한 죄과 같은걸 가지고 계셨나 봅니다. 일본에서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도 아닌 차별을 받으면서 공부하면서 본인의 연구성과를 지도교수에게 빼앗기면서까지 공부해서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식량 증산에 도움을 주려고하셨습니다. 해방이후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하면서 여러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내시죠. 제주도의 유채꽃 재배, 제주도에 맞는 감귤 재배, 결구배추, 감자 개량 전부 우장춘 박사님의 노고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과 일본의 외교가 단절되어있던 상황이라 박사님의 일본인 아내와 자식을 일본에 두고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