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훈련
yonozun 22/6/28 (목) 21:35:18 #28964327
중학교 정기시험은 대체로 오전 중에 끝나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지 학생들도 힘든 시험을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으니까. 학급위원회 활동 때문에 학교에 잔류하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유유히 귀가해서, 해방감에 휩싸이며 게임이나 만화에 몰두한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시험날도 그와 같은 일정이었고, 나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게임을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피난훈련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속 깊이 낙담을 했다.
시험 뒤 피난훈련. 훈련 자체는 금방 끝나지만, 훈련 전에 지진이나 화재로부터 피난하는 방법에 대한 비디오를 보여주거나, 선생이 하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듣다 보면, 결국 수업 한 교시 분량의 시간이 낭비되어 버리고 만다.
이딴 거 할 시간이 있으면 빨리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생의 강의를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다 비상벨이 울리고, 학생들은 와글와글 떠들며 운동장에 모여 줄을 섰다.
한겨울 치고 하늘이 맑았다. 평소 같으면 여기서 교장이 나와서 전원 집합할 때까지 몇 분이 걸렸네 따위 이야기를 하거나, 다른 선생들이 연락을 해서 끝나는 그런 흐름이다.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yonozun 22/6/28 (목) 21:38:42 #28964327
「에ー, 오늘은 서에서 나오신 분들이 오셨습니다」
빨간 차체가 교문 쪽에서 다가와서, 우리가 오와 열을 맞춘 앞에 와 섰다. 소방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중학교 바로 근처의 소방서 대원들로, 하교할 때마다 훈련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을까 기대했는데, 소방에 관한 해설 같은 지루한 이야기 뿐이라 바로 싫증이 나 버렸다.
그런데, 그들은 이야기 마지막에 이런 말을 꺼냈다.「그러면 실제로 여러분 중에 누가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다리 타 보고 싶은 사람 있나요?」
당연히 손을 들었다. 흔하지 않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서, 엄청난 열량으로 어필했다. 수많은 손들이 거수하는 가운데, 그들은 차례차례 멤버를 선발해나갔다. 외부에서 온 게스트가 무슨 체험 때문에 학생을 몇 명 골라간다고 하면, 대체로 앞줄에 있는 놈들 중에서 적당히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장 먼 끄트머리에서도 자원자를 골라갔다. 공평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에는 애초부터 누구를 태울지 정해놓았던 것 같다.
그 때, 소방대원 중 한 사람이 내 바로 옆에 있던 놈을 골랐다. 그 녀석은 손을 들지 않았는데.
그 녀석은 좀 당황스러워 보였는데, 반쯤 억지로 끌고 가는 소방대원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것을 지적하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 대원은 내 쪽을 지긋이 보면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몇 초간 침묵이 있고, 대원은 나도 와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기뻐서 방금 전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잊어버렸다.
가장 처음으로 한 명이 소방대원의 도움을 받아 곤돌라에 올랐다.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여자애였다.사다리가 천천히 뻗어나가기 시작하고, 카강, 카강, 하는 강철 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모두들 드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사다리는 점점 뻗어나갔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사다리가 교사 건물의 3배 높이까지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소방차 사다리는 가장 긴 것이 40 미터 정도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런 촌구석 소방서에 그런 고성능의 물건이 있을 리는 없었다.yonozun 22/6/28 (목) 21:48:51 #28964327
느긋한 스피드를 유지하면서, 사다리는 계속 뻗어나간다. 사다리가 저런 데까지 뻗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켜보는 학생이나 선생이나 누구 하나 이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두들 무표정하게, 오로지 위쪽을 응시만 하고 있다.
소방대원들에게 선발되어 소방차 옆에 선 녀석들은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낯빛에 긴장이 감돌고, 손을 떠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나도 그랬다. 눈 앞의 비정상적 광경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대원들은 계속해서 끝없이 사다리를 뻗었다.
그렇게 맑았던 하늘은 이제 두꺼운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사다리가 계속 상승하는 가운데, 나는 위에 있을 여자애에 관해서 생각했다. 공기마저 얼어붙을 상공에서, 멈추지 않는 사다리에 절망하면서,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난간에 매달려 있을 그 모습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사다리가 멎어 있었다. 올려다 보니, 사다리의 상부는 완전히 구름에 삼켜져 있었다. 회색 구름은 거대한 생물처럼 천공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잠시 후, 사다리가 하강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올라갈 때보다 훨씬 빠르게, 그래도 여전히 느리게 내려온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곤돌라가 몇 미터 위로 돌아와 있었다.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yonozun 22/6/28 (목) 21:53:41 #28964327
한 명, 또 한 명씩 곤돌라에 실려 하늘 위로 올라갔다. 아는 애도 있었다. 소방대원들은 담담하게 작업을 진행했고, 도망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무슨 지장보살상처럼 소방차 옆에 깔끔하게 나란히 굳어 있었다. 머리로는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나하고 손을 안 들었는데 끌려나온 녀석 둘만 남았다. 그 녀석은 완전히 경직되어서, 소방대원들에게 옮겨질 때도 꼼짝도 못 했다. 그저 두 눈만이, 애원하듯이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yonozun 22/6/28 (목) 21:55:18 #28964327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몸이 굳어 있었다. 소방대원이 나를 난삽하게 붙잡아 곤돌라에 끌어올렸다.
그 때, 옆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구두였다. 누구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의 공포는 정점에 달했다. 그때까지 굳어 있던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난간을 움켜쥐고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난간은 터무니없이 차가웠다. 난간에 닿는 순간 떨림은 거짓말처럼 멈추었고, 그 대신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한기가 몸 밑바닥에서 용솟음쳤다.
그리고, 상승이 시작되었다.
yonozun 22/6/28 (목) 21:59:38 #28964327
내 바로 위에서 구름이 거대한 소용돌이로 화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 광경이 무서워서, 나는 필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현실이 멀어진다. 아득히 아래쪽에 보이는 교정에는, 오와 열을 맞추어 앉아 있는 학생들이 재봉틀로 뚫은 절취선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주인은 저 소용돌이치는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본 건 아니다. 절대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것”과의 해후(邂逅)가 나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을 본능으로 깨달았다. 다만 그것이 구름 속에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 정도로 그 시선은 무거웠다.
그것은 나의 모두를 보고 있었다. 마치 아까의 소방대원처럼, 나의 모든 것을 차분히 음미하고 있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갑자기 시선이 다른 데로 돌아갔다. 그 때였다.
상승이 멈추었다.yonozun 22/6/28 (목) 22:06:14 #28964327
「어엇, 이상한데」
소방대원들의 맥빠진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직 교사 건물 정도 높이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힘이 빠져서 주저앉았다. 대원들은 자기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진 것임은 분명하다.「거 봐, 역시 한 명 더 많이 골랐으니까」 「에에ー, 한 명 정도는 여분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ー」 「역시 필요 없었나…」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사다리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지상의 그들은 신묘한 표정으로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위에까지 못 가서 아쉬웠지」
소방대원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다음에는 꼭 갈 수 있게 해 주마」
yonozun 22/6/28 (목) 22:09:57 #28964327
정신을 차려보니, 학생들이 교사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은 없고, 태양이 교정을 내리쬐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선생이 억지로 끌고 보건실에 옮겨 놓았다.
하늘로 올라간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뒤로 영영 들을 수 없었다. 밝혀지는 것도 무서웠다. 다만, 구석에 놓인 빈 자리에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yonozun 22/6/28 (목) 22:14:49 #28964327
그래도 일상은 계속되었다. 나는 학교를 계속 다녔지만, 도저히 그 소방서 근처를 지나갈 수는 없어서, 항상 꽤 먼 길을 돌아서 다녔다. 동급생 놈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았지만, 그 소방대원들을 다시 만나는 것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동아리나 수험공부 때문에 바빠졌기 때문에, 나는 점점 그 때의 일,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공포를 잊어버렸다. 멀리 돌아가기도 계속되었지만, 형해화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 소방서도 통학로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었다.
yonozun 22/6/28 (목) 22:17:54 #28964327
그 날은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노래방에 갔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고, 우연히 중학교 근처를 지나쳤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 소방서가 있었다. 그대로 지나간다. 그 때, 시선이 꽂혀왔다.
순간적으로 곤돌라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시선은 하늘 위가 아니라, 등 뒤에서 왔따. 공포로 온몸이 떨려왔다.
바로 뒤에 있는 소방서. 그들이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과 같이. 꿈이 아니었다. 땀이 폭포처럼 흘렀다.길고 긴 시간,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야 가장자리 쪽으로, 귤색 소방대원복이 슬쩍 보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달아났다. 그들의 시선은 모퉁이를 돌 때까지 계속 내 등에 붙박혀 있었다.
yonozun 22/6/28 (목) 22:20:19 #28964327
내가 잊어도, 소방대원들은 나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그 동네를 떠났다.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진학처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과 다시 만날 일이 없도록. 그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yonozun 22/6/28 (목) 22:25:34 #28964327
지금 이 피난훈련 글을 쓰다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훨씬 더 옛날 일」이 떠올랐다. 내가 대략 4살이나 5살 정도 되었을 때였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소방서 출초식에 갔었다. 내가 살던 그 동네의 출초식은 몹시도 호사스러웠는데, 그 중에 화룡점정이 사다리 타기였다. 소방대원들이 사다리에 올라가 곡예를 보여주는 것인데, 다른 지역에서는 추락해서 중상자가 나오기도 하는, 조금 위험한 퍼포먼스다.그 사다리는 아주 높았다.
나는 키가 작아서 사다리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내가 보기에는 사다리가 구름까지 닿은 것 같았다.
소방대원들이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한 이후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물론, 사다리 위에서 무슨 곡예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다만, 그 때 나는 계속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모님도, 다른 관객들도,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yonozun 22/6/28 (목) 22:27:55 #28964327
진짜 그랬을까?
아무리 키가 작은 어린아이라고 해도, 사다리 꼭대기가 안 보인다는 게 말이 되나?
애초에 곡예 같은 걸 하기는 했나?
그 초출식이 열리던 장소, 내가 다닌 중학교 운동장 아니었던가?
그 때 소방대원이 안고 있었던 건 뭐지?
시장이 바뀌고 나서, 사고 위험이 있다는 명목으로 사다리 타기가 폐지되었다. 소방서에서 반대가 심했다는 것 같다.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의 단편적인 기억이다. 하지만, 그 날과 똑같은, 무언가 사악한 일이 사다리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동네를 멀리 떠난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동네를 떠난 지는 꽤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곤돌라를 타고 덜덜 떨던 어린애 그대로일지 몰라.
염병할 두꺼운 구름이, 내 바로 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어.
yonozun 22/6/28 (木) 22:39:08 #28964327
언제고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다음에는 꼭 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소방대원은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제발 그냥 좀 눈감아줄 수 없을까. 두 번 다시 하늘 같은 거 올려다보지 않을 테니까. 제발요. 제발 좀요.
오... 섬뜩하네요. 인신공양인가?
오... 섬뜩하네요. 인신공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