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이의 입지를 생각하면
그래도 명복이는 유교적인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한 군주였음
근데 당시 조선에게 가장 필요했던 기술적 근대화가 명복이의 취미생활로 끝난건 변명의 여지가 없음
제도적으로는 오히려 명복이가 유교적, 전제군주적 권위를 어떻게든 세우려고 한게 나름 이해가 되는 시기임
19세기조선이 세도정치로 인해서 군왕의 권위가 너무 떨어져있던 그 상황에서
명복이가 자력으로 올라간것도 아닌 아비의 허수아비로 옹립된 군주라는 점이 제도적 근대화의 한계를 초래했다...
라는 실드는 칠 수 있음.
그 아버지 쫓아내고 친정한 시점에도 사실 뭐...
노력을 한건 알겠는데 마누라 간수부터 했어야지 그렇게 보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어디까지 가는건지 ㅋㅋ
솔까 동양의 세계관이 뒤집히던 시기였는데 궁궐속에 틀어박혀 십여년간 아버지에게 정권을 이양당한 채 산 한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었지. 다만 그걸로 망국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전제군주일 뿐.
작게보면 제국주의의 침략이지만 이 하이패스가 뚫린 원인은 크게보면 아시아 전체 근세제국들의 몰락이 있었는데 이명복 주제에 청나라 바깥의 몰략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왔는지를 이해하긴 어려웠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