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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문화권, 왜 문제인가?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은,
겨레 문화의 독자성은 버려야 할 것으로 녀기는 것
[한글 새소식 2002 제362호 10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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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환 /부경대 교수
한글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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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자 문화권 시대?를 대비하여 초등학교부터 한자 교육을 해야 한다." 바로 전국 한자 교육 추진 총연합회(상임 위원장: 진 태하)의 주장이다.
21세기가 한자 문화권 시대란 말은 무슨 뜻일까? 머지않아 아마도 치나나 니혼이 유엣에이와 같은 패권 국가가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어떤 나라의 인구가 몇 억이라는 말까지도 들린다. 정치나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에서도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으로 동‧아시아(한자, 아시아, 유교) 문화가 되살아나고, 이 문화의 주역인 그들 나라가 쓰는 한자도 되살아날 것이라 보는 것 같다. 유엣에이가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유엣에이말을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을 그대로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의 앞날에 대한 이해를 크게 그르치고 있다. 먼저 '문화권'이란 개념부터 문제다. 헌팅턴의《문명의 충돌》에서 보이듯이 이 개념은 편가르기와 대결에 주로 쓰인다. 순전히 역사적인 개념으로 한정하면 그래도 문제가 적어 보이지만, 민족 국가 단위로 움직이는 국제 정치나 경제에서 이런 문명권에 대한 논의는 한가한 사람이나 하는 몽상에 가깝다. 지난 2001년에 유엣에이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을 때, 같은 이슬람 문화권인 파키스탄은 어떤 태도를 보였던가. 무샤라프 대통령이 '파키스탄이 살기 위해 유엣에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 문화의 강한 동질성마저도 정치적-경제적 이해 관계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한문 문화권이나 유교 문화권과 같이 막연하고 느슨한 동질성은 말할 것도 없다.
동‧아시아에서도 정치나 경제의 통합이나 연대는 개별 국가 사이의 이해 관계가 서로 어긋나지 않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삶의 방식에서 같음보다 다름이 너무 큰 동‧아시아에서는 정치나 경제에서 서로 기대더라도 그 다름은 줄어들 것 같지 않다. 동‧아시아에서의 연대와 교류를 하더라도 이를 한 울타리로 묶어 문명론적인 시각에서 뜻을 주는 것은 근거 없는 동서 이분법이다. 그것은 치나나 니혼의 패권주의자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경제 '교류'와 '협력'에서도 서로가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뜨겁다.
이슬람 문명권에서 우리는 석유를 사오고 자동차를 팔고 있지만 이슬람 문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몇몇 전문가들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명권의 동질성은 개별 국가 단위의 이해 관계의 충돌 앞에서 아무 뜻도 없다. 한 세기 전의 러 일 전쟁 때 조선과 치나가 니혼에 걸었던 큰 기대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돌아왔던가. '문명권의 동질성을 배타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류 문명의 동질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간 거점으로 이용하자'<주1>는 논의는 역사와 현실을 외면한 당위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바람과는 반대로 문명권에 대한 논의는 다원성과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에 대해 '배타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개념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자 문화를 예찬하는 사람 가운데는 동양적 가치를 내세우는 사람이 많다. 유럽 중심주의를 경계하자면서 동양적(아시아적)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젊은 세대가 한문을 모른다고 꾸짖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런데 동양적 가치를 그 내용으로 보면 어짐(仁), 덕(德), 예(禮) 등의 유교적 가치관이다.<주2> '어짐'이나 '덕'은 치나 역사에서 법치주의에 반대하는 지배자의 온정주의적 태도를 이르는 낡은 사회 규범이고, '예'는 치나 사회의 관습이 반영된 것으로서 혈통주의와 신분 차별에 기초한 질서 유지가 그 목적이었다. 이것이 '동양'에 보편적이라거나 앞으로도 유효한 규범이라고 생각할 까닭은 없다. 동양 고전은 치나 고전이고 아시아적 가치는 치나적 가치이고 한자 문화권은 치나 문화권이다. 여기에는 치나인의 세계 지배가 당연한 질서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문화의 보편성에 대해 잘못된 생각에 빠지면 이러한 외래 문화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위장된 보편성은 오늘날에도 되풀이된다. 세계화로 알려진 지구화는 곧 '팍스-유엣에이'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판문점에서 지난 달 29일에 발생한 서해 교전에 대한 유엣에이 측의 공식 항의를 전달했다."고 할 때, '유엔군' 또는 '국제 연합군'은 사실상 유엣에이군이다. '보편성'이란 언제나 지배 계급과 패권 국가가 독점해 온 것이었다. 이것은 유엣에이말이 '세계어' 또는 '국제어'가 되는 것과 나란히 진행된다. 치나의 패권이 관철된 중화적 동‧아시아 질서도 이와 같은 것이다. 유럽 중심주의와 치나 중심주의도 우리에게 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문명권의 '보편성' 또는 '동질성'에 대한 소박한 생각은 어제오늘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 녀기는 문화는 보편적이기보다는 특수한 시대에 특수한 민족이 이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세 문명이 보편적이라고 녀겨진 것은 특정 문화를 강요하고 번지게 할 힘을 가진 거대 조직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보편적'이라 주장된 문화와 개별 국가의 문화가 충돌하여 고유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한 특수한 역사적 시기의 특정한 문화를 보편적이라 믿게 되면 그 문화와 다른 민족은 곧바로 오랑캐가 된다.
치나나 그리스, 중세 유럽에서도 이런 편견과 차별은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기독교가 자리잡게 되면서 이는 야만적인 이교도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난다. 6세기에 아카데메이아가 문을 닫았을 때, '이교도적'이라는 이유를 둘러댔다. 이런 편견과 차별도 나름대로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리스와 중세 유럽은 치나와 아주 다르다. 그리스는 그런 편견을 강요할 군사적인 힘이 없었고, 중세 유럽 문명은 특별히 민족 중심적 성격이 없다. 그러나 치나는 치나 중심주의가 깊숙이 자리잡은 유교적 정치 제도, 삶의 방식을 강요할 힘을 갖고 있었다. '한자 문화권'의 동질성의 뿌리에는 치나의 이민족에 대한 편견과 힘의 우위가 뒷받침되어 생겨난 것이다. 김 춘추가 당의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하여 당나라의 관복으로 바꾸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또 유교 고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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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길이 있으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온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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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는 치나의 영역을 뜻하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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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악이라는 치나의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는 군사적 정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생각에 젖은 치나는 다른 겨레를 멸시하고 이웃 나라에 대한 군사적 정벌마저 당연한 것으로 녀겼다. 이런 점에서 치나는 그리스나 로마와 달랐다. 그리스도 다른 겨레에 대한 편견을 가진 점에서는 치나와 같았으나 그 다른 겨레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할 만큼 강력한 제국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로마는 제국을 세웠으나 학문과 예술에서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중세 기독교가 유럽의 토착 문화나 이슬람 문화를 이교적이라 배척한 것은, 성리학에서 불교를 '오랑캐' 종교라 비판하고 화하족 문화가 중화로서 치나 주변의 여러 고유 문화를 억눌러 온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은 치나에 견주면 훨씬 짧았고 기독교 자체가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치나의 지배자인 황제는 동시에 하늘의 아들로서 군사력도 갖고 있었다. 그리스나 중세 기독교와 달리 치나는 그들 중심의 편견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선전하며 강제할 힘을 가졌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도 예(禮)를 어겼다는 점을 내세웠다. 조공과 사대도 예로 생각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를 예조에서 관장하였다. 예가 내면적이고 자발적인 규범이라고 하면서도 나라에서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여 실질적으로 법률 구실까지 아우르고 있다. 헤겔이《역사 철학》에서 "치나에서는 도덕적인 것(예)과 합법적인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 적용되던 사대의 예도 현실에서는 강제 규범이었다.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예는 치나를 위해 치나가 만든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이러한 중화주의에 가장 큰 값을 치른 나라는 비엣남이나 니혼이 아니다. 15세기의《대월映?大越史記)》는 치나를 '북쪽 나라(北朝)'로 상대화하고 있다. 니혼은 8세기 말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주자학을 치나보다도 더 숭상하였으며 중화주의를 치나만큼 내면화하고 있었다. 100여 년 전의 위정 척사파는 그 좋은 보기다. 특정한 문화를 상대화 객관화하지 못하고 보편성을 지닌 문화 그 자체로 맹목적으로 믿게 될 때, 그 사회의 사상과 문화는 배타적으로 되며 교조화한다. 조선조의 주자학은 이런 성격을 잘 보여 준다. 그들에게 문화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밖에서 들여오는 것이었다. '신 채호'는 이미 이런 우리 역사를 가리켜 '조선의 공자'는 없고 '공자의 조선'만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치나 닮아가기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생겨난 '보편성' 또는 '동질성'이 바로 오늘날 국제 사회에서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쑨 원'은 1923년 8월에 "치나가 부강해지면 고려와 안남(비엣남)이 치나에 가입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해 올 가능성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이는 유교의 고전적 천하관에 따른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봉건주의와 사대주의를 말끔히 씻어내는 무엇보다도 값진 일이며 겨레의 역사적 과제다. 지난날 우리 문화가 크게 치나(한자, 유교,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이 앞으로의 우리 역사에 큰 뜻을 갖는다는 생각은 문화의 보편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주4>
치나 문화만이 보편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리는 외래 문화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이런 생각은 쉽게 교조주의에 빠지며 새로운 문화를 애지을 상상력을 잃게 된다. 유학의 치나 중심주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우리는 수많은 고유 문화를 잃었다. 치나 문화만이 문화였고 이와 다른 것은 오랑캐 풍속이 되어 버렸다. 이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우리 말과 글이었다. 이런 세계관에서 말과 글이 다름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오랑캐를 나타내는 그리스말 "barbaroi"는 '그리스말에 서툰 사람'이란 뜻이고, 우리말에서도 알기에 '까다로운 말'은 곧 오랑캐말이었다.<주5>
치나에서는 남쪽과 북쪽에서도 이런 편견이 나타난다. 맹 가는 치나 남부에서 세력을 얻고 있던 학파를 비판하면서 '남쪽 오랑캐의 왜가리 소리'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주6> 예로부터 말과 글은 겨레가 홀로 서는 가장 중요한 빛임을 알 수 있다. '문자'는 곧 치나 글자인 한자였으며 '참 글자'로 떠받들었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 한글은 '언문'이 되었다. 최 만리 무리는 그 유명한 상소문의 첫머리에서 '조종 이래로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라 이제 치나와 글자와 제도가 통일되는 시대가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주7> 이 또한 유교적 천하관의 표현이다. 그들의 눈에는 치나와 다른 글자를 갖는 것은 오랑캐의 일로 보였다. 유엣에이의 패권을 정당화하는 세계화를 우리가 무턱대고 따라야 한다고 선전하는 무리나, 유엣에이말을 공용어로 삼자는 사람의 주장을 그대로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끝없이 겨레 문화의 창조성을 갉아禿駭? 문화란 애지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치나를 본뜨는 것이란 생각은 유교-치나 고전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한 보기로 우리 옷을 보자, 고구려 벽화를 보면 우리는 왼쪽으로 여민 옷을 입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오른쪽 여밈이 보편화하면서 고유 풍속은 자취를 감추었다.《논어》에서 그런 풍속이 오랑캐 풍속이라고 비난받고 있기 때문이다.<주8>
우리가 아직도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는 생각에는 겨레 문화의 독자성은 버려야 할 것으로 녀기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한자 문화권이란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웃 나라의 아류로 머물 수밖에 없다. 참된 뜻으로 교류나 연대, 통합을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겨레 문화의 독자성이 확립되어야 한다. 제 눈으로 보고 생각하려는 애씀이 없다면 '교류'나 '연대'는 남을 본뜨고 남에게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 될 뿐이다. 국립 국어 연구원(겨렛말 훼방꾼)이 낸《북한의 언어 정책》(1992. 7.)은 첫머리에서 우리가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한자 문화권 또는 중세 한문 문명권에 대한 비판 없는 태도는 우리 겨레가 분열과 예속으로 가는 지름길이다.《새 국어 생활》(2002. 7.)은 국어 연구원이 마카오에서 열린 국제 한자 관계자 모임에서 '이름과 전자우편, 누리그물 주소창에 쓸 한 중 일 전산 상용을 위한 기본 한자 제정'을 결의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자 문화권(동양, 동‧아시아)이 하나란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보편성과 국제성을 갖는다는 생각은 아마도 지난날 유럽의 침략에 시달렸다는 점(니혼은 이 체험을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과 지금도 진행 중인 유럽 통합을 보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과 현실이 유럽과 동‧아시아는 너무 다르다. 20세기에 두 번에 걸친 패권 다툼에서 유럽의 분열은 어느새 주도권을 유엣에이에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아시아는 이제 나름대로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이제 초라해진 유럽은 옛 영광이 그리운 것이다. 유럽 통합을 끌고 가는 힘은 여기서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
역사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아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도 교류와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서로의 이해가 어긋나지 않는 경제 분야가 더 쉬울 것이다. 유럽이 하나되니 동‧아시아도 하나되자는 투의 생각은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에서 보듯이 또 하나의 지역주의다. 이제 유럽을 하나로 묶는 힘은 중세와 같은 기독교가 아니며 개별 민족 국가의 이해 관계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통합이나 유대는 깨지고 만다. 브리튼과 덴마크는 유럽 공동 통화인 유로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아시아의 유대와 통합은 유교나 한문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개별 민족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인 필요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이 통합이나 유대의 현실적 성격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통합을 주도하는 개별 국가들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게 다른 점은 여러 작은 나라로 갈라진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서 치나는 그 자체가 자족적인 대륙이란 점이다. 지난 역사를 보면, 니혼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이 되자고 하다가 동‧아시아의 공영을 내세웠다. 어느 쪽으로의 국제 연대든 니혼이라는 개별 국가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유럽처럼 통합의 '두드러진 성과'가 없는 것은 '책봉 체제를 역사적 과오라고 규탄하는 근대주의 학문'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주9> 유럽과 달리 나라 사이의 통합이나 유대의 필요성을 공감하지 못하고 서로간에 격차가 너무 커 개별 국가 사이의 이해 관계가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니혼과 치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변수일 것이다. 이 지역의 활발한 교류와 통합이 이루어지더라도 이는 추상적인 보편성에 머문 공통 문화권에 대한 논의와 별다른 관계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지난날의 한자 문화권 나라들(치나/니혼)이 세계 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이것이 곧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이 되살아남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자 문화 또는 유교적 세계관의 보편성을 소박하게 가정하는 것은 우리 역사와 유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문화의 상징으로 한자마저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21세기 한자 문화권 시대'를 대비하여 치나 글자를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자는 주장에는 미래에 정치와 경제의 패권을 거머쥘 나라의 문화를 전해 주는 글자를 배워야 덕본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유로화로 돈의 통일을 이룬 유럽 연합이 유럽 중심주의를 되살리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으며,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 다양성은 결코 '통합'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말의 계통이 아주 다르고 글자마저도 성격이 완전히 서로 다른 동‧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오랜 시기에 걸쳐 중화 사상과 식민 지배에 시달려 왔다. 21세기가 한자 문화권 시대란 말은 중화 체제나 동‧아시아 공영권 체제가 다시 온다는 말이다. 이에 대비하는 게 겨우 한 나라의 홀로 섬을 상징하는 글자부터 딴 나라를 그냥 따라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는 겨레 문화를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참된 문화의 보편성이란 딴 나라를 본뜨는 데서 찾을 수 없다. 사람들 사이가 그런 것처럼 나라 사이에서도 참된 유대와 평등한 통합의 관계는 몹시 힘들고 드물다. 유대와 협력은 스스로의 독자성을 전제한다.
21세기에 치나가 일어서더라도 분별없는 국제유대나 통합이 겨레의 자주성을 흐려 놓아서는 안 된다. 겨레의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주체적 현실을 잊어버리고 무턱대고 국제화나 통합을 말함은, 큰 나라에 빌붙자는 사대주의일 뿐이며 제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하고 남에게 기대려는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국립 국어 연구원(겨렛말 훼방꾼)에서는 '동양 삼국의 한자 약체자'를 통일한다며 돈을 낭비하고 있고(이런 삽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얼마나 말글에 대해서 무지한 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꼴), 전국 한자 교육 추진 총연합회는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치자며 치나와 니혼 사이에 있는 나라가 한글‧올쓰기(전용)하는 것을 '고립'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이라는 막연한 외세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난다면 이는 고립이 아니라 가슴 벅찬 독립이 된다. 사대주의는 우리 역사의 숙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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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악어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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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박이들의 주장:
"한자는 외국어가 아닙니다. 한자 자체가 바로 우리말입니다. 기록이 있은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우리 글입니다."
▷ 한자박이들이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란 주장을 할 때, 우리말이란 그들에겐 무엇일까?
우리말 어휘에 한자말이 많아 문화 민족이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주장의 뿌리는 '이 희승'의《국어 대사전》에 있다. 이 사전에는 니혼의 땅이름이 수없이 나온다. 왜 그럴까? 니혼어 사전을 베끼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부터 나온 틀린 주장을 자꾸 되풀이하여 반박하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터무니 없는 한자말이나 이미 나날살이에서 쓰이지 않아 죽어버린 옛한자 낱말들를 빼면 한자어 비중은 46% 정도이다. 그러나 46%도 너무 많다. 무릇 언어란 다른 언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섰다. 바로 우리 지식인들의 개으름과 변두리 책장사 꼼수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자박이들이 그토록 지키고자하는 46%의 한자어도 알고보면 대부분 니혼어이다. 나는 그동안 한자박이들이 주장하는 70%는 "민중의무지를 이용한 악랄한 주장"이라고 녀겼는데, 하는 짓을 봐서는 그게 아닌 것 같예…
한자박이들의 어리버리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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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조 동일, 1999,《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지식산업사, 108쪽.
<주2> 송 복, 1999,《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 생각의 나무.
<주3>《논어》'계씨', 天下有道 則禮樂征伐 自天子出.
<주4> 이런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책으로는《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조 동일, 1999, 지식산업사)이 있다.
<주5> 류 렬, 1992,《조선말 력사》, 사회과학출판사, 111쪽.
<주6>《孟子》'騰文公上', 南蠻 舌之人.
<주7> 최 만리 무리는 이름 "同文同軌"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예기》'중용'에 보이는 "車同軌 書同文"에서 온 것이다. '글자를 같게 한다'는 것은 본디 치나 안에서의 한자 글자체의 통일을 가리킨 것이다.
<주8>《논어》'헌문', 微管仲 吾其被髮 左.
<주9> 조 동일, 1999,《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지식산업사, 106,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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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눈물 님이 올리신 글들은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06수능을 본 장수생이랍니다.(그 동안 꿈꿔왔던 길을 갈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 제가 군 제대 후 2년 동안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한국어가 아직도 자기 몸을 바로 세우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교육이 횡행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어는 음운의 법칙이 깨진 언어입니다. 비극이죠.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한자의 음절이 340개 밖엔 안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건 한자어와 한자를 버리지 안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지요. 다시 말해서, 말소리는 살리고 글자는 죽이는 정책으로 말글정책이 대전환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글은 자획이 58자로 글자는 더 죽일 게 없습니다. 남은 것은 말소리를 살리는 것이죠. 한자는 이와는 반대로 글자는 늘리고 말소리는 죽이는 것이 한자의 기본원칙입니다. 사람의 언어를 죽이는 것이죠.....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한자입니다.
말살이의 음운을 살릴려면 한자/한자어의 숨통을 끊는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문명충돌이 별 거 겠습니까. ... 시인들이 쓴 시를 보세요. 한국의 시는 노래가 아니고, 그림입니다.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랬더니, 그림을 그리는 꼴이죠. 이건 기본적으로 말살이에 음운의 바탕이 깨졌기 때문에 생기는 삽질입니다.
한자가 음운의 법칙을 죽이는 건 사실이죠.. 일본어의 오십음도로도 한자의 음이 모두 표현 가능한데(물론 우리말과는 달리 한 음절에 하나의 한자가 대응되는 꼴은 아닙니다).. 우리말의 자모를 조합해서 오십음도가 실현 가능한 한자의 음을 겨우 내고 있는 꼴이니 우리 음운이 참말로 아깝죠.. 사실 동음이의어 문제는 우리 음운이 낼 수 있는 소리의 다양성을 이용하면 문제될 것도 없는 게 사실이지만.. 사회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