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으앗!”
“앗! 아, 팀장님. 다녀오셨습니까?”
“어, 그래. 정완이. 어디 나가?”
정완과 원석은 본의 아니게 사무실 문고리를 붙잡고 씨름을 시작했다. 정완은 나오려 하고 있었고 원석은 들어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그 사이에 껴 열리지도 닫히지도 못하고 있는 문만 불쌍할 따름이었다.
“저는 박승태 요원 찾으려고 합니다. 팀장님께서는 갔다 오신 겁니까?”
“그래.”
“저희 할 일 생겼습니까?”
“우리? 묶였다.”
“잘 못 들었습니다?”
원석은 한 번 한숨을 뿜었다. 그는 정완을 손짓만으로 사무실 안에 다시 밀어 넣었다. 정완은 잠시 상황을 살피며 안으로 들어섰다. 따라 들어간 원석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정완은 그런 그에게 재빨리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타주었다. 원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지원해주러 갈 수 없댄다. 어차피 연락도 닿질 않고.”
“그럼, 그냥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 지부 내의 모든 현장 활동이 정지당할 지도 모른대.”
“그건 왜 그런 답니까?”
“이번에 우리가 막지 못 한 피해가 커서래나 뭐래나. 애들은 2본부가 해결해주길 바라야지. 어쩌면 이번 정지도 2본부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원석은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크게 들이키곤 그 만큼 크게 한숨을 뱉었다.
“……정지도 정지지만. 왜 갑자기 우리 팀 애들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니. 어? 정완아. 네가 말해봐라. 뭐가 문제일까? 야, 네 수색담당 선임도 모자라서 이젠 암습당당 애들을 동시에 둘이나 잃게 생겼어. 부팀장도 영준이……영준이 키워서 앉혀놓으려고 안 받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까 너무 인원이 줄잖냐.”
정완은 원석의 넋두리를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 오히려 신세한탄 하는 말에 답했다간, 괜히 그의 감정과 자존심을 건드리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저격담당 날라리는 어디 갔는데?”
“팀장님 나가시고 한참 있다가 나갔습니다. 나간 건 얼마 안 됐습니다. 어디 간다고 말은 안하고 나가서, 찾으러 갈까 하다가 팀장님이 오신 겁니다.”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정완은 씁쓸한 표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그 표정 그대로, 사무실 한 구석으로 눈길을 돌렸다. 원석도 그가 보는 곳을 따라 보았다. 한 야구 글러브가 누워있었다.
“저거 혹시, 영준이 꺼 아니냐?”
“맞습니다.”
“왜 저렇게 버려져 있어?”
“……박승태 요원이 나가기 전에 던졌습니다.”
“뭐?”
“아마도, 그 때 이후로 계속 처분하고 싶어 했잖습니까? 그게 좀, 폭발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야구 말고 농구 좋아하는 걸 가지고 5분정도 화를 내더니 저걸 던지고 나갔습니다.”
“새끼……. 그거 말고 다른 짓은 안하디?”
“그 전에는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있었습니다. 뭐라 중얼거리기도 했고,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가. 책상에 손가락으로 뭘 그리기도 했습니다.”
“뭐야. 갑자기 심해진 건가, 그 정도면?”
“그래서 찾아볼까하고 나가려고 했던 겁니다. ……솔직히 좀 무섭기도 합니다. 방금은 아마 그냥 화 난 것뿐이니까 당장에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말씀하신 데로 저희 지부가 일이 없다면 아마 좀 쉬게 해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심하다 싶으면 그래야겠지. 애들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야…….”
둘은 표정을 공유하며 사무실에 침묵을 깔았다. 그런 와중에 문이 열리더니, 박승태가 들어왔다. 그는 뭔가 두꺼운 간이책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아, 어 그래. 넌 어디를 갔다 왔냐?”
“잠시 아는 분 좀 뵙고 오는 길입니다.”
승태는 매우 자연스럽게 사무실 구석으로 가, 글러브를 집어 먼지를 털었다. 그러곤 책상 위에 대충 올려두고 그 옆에 책자를 놓고 앉았다. 그는 말없이 책자를 펴 읽기 시작했다. 정완과 원석은 사무실에 무거운 공기까지 깔아놓는 그에게 눈을 고정했다. 그러던 중에 원석은 승태가 읽고 있는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야, 너 보는 그거. 뭐냐?”
승태는 말없이 책자를 들어 표지를 원석에게 보여주었다.
“그거 전술 매뉴얼이잖아. 이번 수색에 쓰였던.”
“지휘부에서 집어왔습니다.”
“그걸? 왜 보는데?”
“그냥입니다.”
승태는 다시 무겁게 말을 끊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원석과 정완은 결국 더 불편해지고 말았다. 이번 사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증거물품 중 하나를, 그냥 집어와 그냥 읽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4-2.
은비는 성적우주선 안에 갇혔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에 비하면 지금 갇힌 곳은 쾌적할 정도로 넓었다. 거기다가 포박을 당하지도 입이 막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보다 무조건 낫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갇힌 곳은 철창도 없었고 어둡지도 않았다. 흙바닥에 풀과 나무가 보였고, 먼 풍경에는 섬 중앙에 솟은 산도 보였다.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과 자연광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은비는 도망은커녕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신형 대인병기 둘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듯 둥글게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대학교에서 보았던 대인병기는 그저 큰 바퀴가 달린 총이었다. 하지만 이 대인병기는 정말 로봇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뼈대에 온갖 무기와 기계장치가 붙어있었다. 몸통 꼭대기에는 둥글고 구멍이 수십 개 뚫린 쇳덩어리가 머리처럼 달려있었고, 집게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손도 달려있었다. 효율성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에 애쓴 것 같았다. 하지만 흉내의 한계인지 걸음걸이는 빠르지만 어설프게 뒤뚱거리는 모습이었다.
기계 허수아비 경비병들의 경비 말고도 은비가 도망가기 힘든 이유는 또 있었다. 그녀는 지금 거의 벌거벗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속옷과 양말, 야상만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들은 어느 암살병기가 뺏어가, 입고 사라졌던 것이다. 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암살병기였다. 은비 말고 다른 검은요원들도 마찬가지로 암살병기‘들’에게 옷을 빼앗겼다.
흑인 암살병기와 대인병기들에게 끌려와 섬 중심부에 도착한 일행 앞에, 암살병기들이 나타났었다. 다양한 인종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무기를 몸속에 감춘 채 평범한 가이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암살병기들 중 몇몇이 기다렸다는 듯 검은요원들을 한 명씩 데려갔다. 물론 은비도 끌려갔다.
강력한 악력에 붙들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려간 은비는 반강제로 옷을 벗어야했다. 여성 암살병기는 그녀의 옷을 받고, 자신의 해지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의 옷을 갈아입었다. 모두 갈아입고 나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은비에게 야상을 다시 던져 주었다. 은비가 다시 야상을 걸치자마자 암살병기는 다시 은비를 끌고 갔다. 그때부터 은비는 지금 이 상태로 갇혀있게 되었다.
그녀가 갇힌 곳 가까이에는 예크 인드히 밖에 없었다. 검은요원들은 분명 다른 곳에 따로 갇혀있는 모양이었다. 은비는 검은요원들이 자신처럼 검은 옷을 빼앗겨 끌려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 하지만, 이 옆의 가이우스인은 옷이 벗겨지기는커녕 하늘색 중절모마저 멀쩡했다. 은비는 아무리 암살병기라도 저런 옷은 뺏어 입고 싶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 옷매무새는 난리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흐트러졌으면 그것대로 더 산만한 옷차림이 되었겠지만.
은비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인드히도 그녀처럼 대인병기에게 둘러싸여 갇혀있었다. 두 사람의 감시는 처음 마주쳤던 흑인 암살병기가 하고 있었다. 그도 비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옷을 뺏어 입지는 않았다. 그런데 은비가 그 모습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다시 대인병기가 그녀 앞을 지나가며 시선을 뺏어갔다.
대인병기들은 빠르지 않지만 꾸준히 그녀의 주변을 돌았다. 그 강강술래에 은비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은비는 그 어지러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느 샌가 은비는 눈을 흐린 채 대인병기가 지나가는 모습만을 시야에 담고 있었다. 어지러움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목의 힘이 빠져 고개를 떨구었을 때, 은비는 어지러움의 분명한 원인을 깨달았다. 대인병기들이 끊임없이 미세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경험상 그것은 외계의 정보파임이 분명했다. 그것들이 은비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던 것이다.
4-3.
“지능적이로구먼.”
인드히가 말했다.
“검은요원과 피해자의 흉내를 내어 섬을 순찰하기로 한 모양이구먼, 하긴 그렇게 하면 원거리에서의 육안 식별에 혼란을 줄 수 있겠지. 그 외의 효과는 보지 못한다 해도 손해되는 것이 없다면 행하여야지. 거기다가 암살병기의 수가 아주 많더군. 방금 봤던 것만 해도 30개체 이상이야. 여기에 온 후로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겐가?”
그는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와 은비를 감시하고 있는 흑인 암살병기였다. 물론 그것은 인드히를 열심히 무시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암살병기들 대다수가 의복이 하주 심하게 훼손되어 있더군. 깔끔한 사망은 겪지 못한 모양이지? 아, 그렇다면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활동을 하다 보니 사건에 휘말려 사고사한 시체들을 이용한 모양이구먼. 허참, 뛰어난 절약정신 아닌가. 가이아 일반 주민들도 본받았으면 하는 군. 자네의 복장을 보아하니, 자네 또한 재활용품인가?”
인드히의 계속된 도발에, 암살병기가 돌아보았다. 하지만 분노치는 않은 표정이었다. 어설프게 가이아인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 무표정일 뿐이었다.
“그래그래, 마침내! 이쪽을 보는구먼. 이제 내 말을 조금만 진지하게 들어주시게나. 우선, 여기 이 신형 대인병기들 좀 뱅뱅 돌지 말아달라고 해주게. 어지러워 죽겠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도망 갈 일은 없을 걸세. 어차피 도망가기도 힘들겠구먼. 이런 섬에서 도망칠 곳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자네들이 뺏어간 내 약병 좀 가져다주게!”
「……내가 그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나?」
암살병기가 대답했다. 하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입을 소리에 맞춰 벌리고 움직였지만, 나오는 것은 그냥 소리였다. 마치 스피커 같았다. 그리고 가이아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인드히에게 완벽한 가이우스 공용어를 구사해 대답했다. 구강구조상 가이아인이 따라하기 힘든 발음까지 완벽하게.
“다른 것은 모르겠고. 약 만이라도 좀 가져다주시게. 그게 없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인질이 죽어버리면 의미가 없잖은가? 내 이렇게 부탁함세. 아니면 그 안에서 한 알만 꺼내서 건네주어도 된다네. 농담이 아니란 말일세!”
「……그러지.」
암살병기는 인드히를 한번 노려보고는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는 암살병기가 멀어진 것을 보곤, 은비를 바라보았다. 번역기가 아직 그녀의 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말했다.
“자네! 많이 어지럽나?”
은비는 고개를 숙인 것도 모자라, 거의 엎드린 상태였다. 괴로움이 온 몸에서 느껴지는 자세였다. 무릎을 꿇은 채 왼팔은 힘을 다해 바닥을 딛고, 오른손으론 머리를 감싸는 모습. 멀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지러움과 매스꺼움. 몸살 정도는 우스운 무기력증과 오한과 떨림. 은비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혹시 신형 대인병기 때문인가?”
“……점점 어지러워져요. 이 두 로봇……서로 다른 소리를 내요. 계속 돌면서……. 쉬지 않고. 번갈아서. 크기도 달라져……. 멈춰……줘. 그만…….”
인드히는 은비를 관찰하다가, 다시 암살병기가 걸어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때 때맞춰 암살병기가 되돌아왔다. 그것은 한 손에 흰색 약통을 쥐고 있었다. 암살병기는 인드히에게 약병을 던져주었고, 약을 받아든 인드히는 재빨리 한 알을 집어 삼켰다.
“고맙군. 덕분에 내 문제가 해결이 되었네. 그럼, 이제 저 소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겠나? 이번엔 저 인질이 죽을 것 같네만.”
암살병기는 능청떠는 인드히를 노려보았다. 인내력인지 기능의 한계인지 아직은 무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그것은 시선을 돌려 은비의 상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정보파에 반응하는 것이라네. 자네들 전함이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감신성이 생겨났지. 아직 익숙지 않아서, 내뿜는 것은커녕 받아들이는 것도 조절하지 못 해. 그런데다 외계의 기계가 내는 정보파가 저리도 어지럽게 뿜어져 나오니 상태가 성치 않을 것은 자명하지.”
암살병기는 은비를 보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아 뜯듯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통제가 풀린 턱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고, 덕분에 침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은비는 신경 쓰지도 않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땅을 받치던 팔은 꺾여, 그녀의 상체를 지탱해주기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최소한 저 회전이라도 멈춰주시게. 어설픈 다리로 뒤뚱거리며 도는 것이 내가 보기도 어지러운데, 최소한 자극의 정도라도 줄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해주지 않아도 되니 저 소녀라도 어찌 해주시게.”
암살병기는 인드히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순찰을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은비의 주변을 돌던 병기들이 멈춰 섰다. 그것들은 은비의 양 옆에 멈춰서, 그녀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감시의 형태를 바꾼 것이었다. 그 모습은 오히려 은비를 호위하는 모양과 비슷했다.
인드히가 살짝 웃으며 암살병기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직전이었다. 남미계 남성의 모습을 한 암살병기가 나타났다. 검은요원의 옷을 입은 그것은 흑인 암살병기에게 다가갔다. 둘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인드히도 그것들이 보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4-4.
“들어와.”
에스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문을 두드리던, 승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간이책자를 한 권 들고 있었다. 승태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네 행동이 아주 맘에 들었어. 내 연구원들을 통해 연락 가능여부를 미리 알아보고, 연락을 한 다음에 방문 15가이아분 전에 다시 연락. 그리고 약속시간에 정확히 찾아오다니. 내 일에 지장이 없는 시간을 고른 것도 현명했어.”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개인적으로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입놀림도 나쁘지 않네. 앉아.”
승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았다. 에스텅도 책상에서 만지작거리던 종이서류를 정리하고 승태 건너편으로 가 앉았다.
“네가 그랬지. 개인적인 부탁이 있으며, 나만 들어줄 수 있다고. 뭔 일인데?”
“……선생님께서는 이 지부 내에, 제가 접촉할 수 있는 가이우스인 중 한 사람이십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가이우스인들과는 달리 정치외교적인 이해관계에서 떨어져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 연이 아주 없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우스인은 필요한데, ‘가이우스’는 필요 없다?”
“면목 없지만 맞는 말씀이십니다.”
“난 신경 안 써. 일단 찾아온 이유부터 말해봐.”
승태는 들고 있던 책자를 탁상위에 놓았다.
“며칠 전 있었던 EE-3내 성적 수색 당시에 지휘부에 사용된 전술 매뉴얼입니다.”
“그런 걸 하달 받아 썼다는 건 들었지. 그걸 활동요원에게도 제공해 준 건가?”
“지휘부에 아는 분이 한 분 계셔서 얻어왔습니다. 이미 조사는 마무리 되었다기에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내용에 문제가 있던가? 그 수색에 문제가 있어서 성적이 설쳤으니까, 그 매뉴얼이 의심스럽긴 했는데.”
“이미 마무리된 조사대로 이 매뉴얼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주 상세한 지시사항이 적혀있었을 뿐입니다. 아주 상세하게 말입니다.”
“상세한 지시가 있다면 현장에서도 편하고, 지휘하는 입장에서도 상황 대처에 유리하지 않아? 지휘부 쯤 되는 것들이 내용 찾느라 헤매서 시간 허비할 것들은 아니고.”
“매뉴얼 중에 수색과 관련해, 수색 실시 지점부터의 동선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수색 동선을 방위, 거리 단위로 상세하게 설계해 지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약간의 예시와 함께.”
“수색 과정을 지시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성적들이 숨어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은 각 팀의 수색구역 사이사이에 길게 이어진 틈이었습니다. 겹쳐도 불안한 팀 별 수색구역이 사이가 벌어진 것입니다. 상세한 동선 설계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또한 수색을 실시한 팀들은 상부의 지휘를 정확히 이행했습니다. 솔직히, 그 지휘만 이행했습니다. 그 결과 저희는 오직 명령을 통해서만 수색 진행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시받은 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다른 팀이 수색했으니 필요 없다는 말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결과가 빈틈이란 거고?”
“네, 그렇다면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빈틈을 만들었는가 아닌가입니다.”
“네 윗대가리들을 의심하는 거냐?”
“네.”
“솔직하네.”
“제가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온 겁니다. 이 정도 말을 해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그럼, 의도적인 경우와 아닌 경우에는 각각 어떤 혐의를 의심하는 거지?”
“후자는 잘못된 지도를 사용했을 혐의, 전자는 어느 가이우스인의 말을 무조건 신용했을 혐의입니다.”
“뭔 소리야? 똑똑한 나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잘못된 지도에 대해서입니다. 당시 지휘부는 두 방으로 나뉘어 지휘를 했습니다. 현장에서 무전을 받는 통신실과 계획을 하는 회의실이었습니다. 활동요원들이 무전 내용을 상부에 전달하면 상부는 지휘 내용을 활동요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때 지휘부는 회의실에 따로 지도든 뭐든 두고 사용했을 겁니다. 수색 보고를 받으며 지도위에 그림을 그려나갔을 테고, 그렇게 모든 지도를 꽉 채우고 상황을 종료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틈이 생겼습니다. 지휘부가 그린 그림이 실제 그림보다 컸던 겁니다. 이 사실과 동선 단위 지휘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한 가지 가설이 생깁니다.
지휘는 ‘어디서부터 인근 몇 미터’같은 방식이 아닌 ‘어디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이동’같은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이동’지시부터는 실제 수색팀과 연락하는 활동요원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면 발견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오류가 생긴다면 지시와 관계가 없는 ‘어디서부터’에서 생겼다는 겁니다. 수색 팀의 실제 위치와 지도위 시작 위치를 다르게 그린 겁니다. 만약 시작점에서 둥글게 퍼지는 모양을 했다면, 중심점이 다르니 원의 위치만 달라졌을 겁니다. 그렇다면 완성된 그림엔 결국 빈공간이 생기니 오류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동선 단위로 지시를 하는 경우, 시작점이 다르면 폐곡선의 꼭짓점 하나만 달라지는 겁니다. 그림을 크게 할 수도 작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지도에 점 하나를 잘못 찍는 것만으로도.”
“……야, 나 네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 취소해도 되냐? 이해하기 힘든 말을 계속하고 있는데. 논점의 주변에서만 놀고 있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서론이 필요했습니다.”
“서론이었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봐.”
“제가 말한 대로라면, 매뉴얼의 지나치게 세밀한 구성은 이를 위한 초석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매뉴얼은 가이우스 측에서 제공되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 혐의와 이어집니다. 지휘부가 지나치게 특정 가이우스인, ‘프로스 퀑’의 말을 따랐을 경우입니다.”
“……좋아, 나 다시 너 마음에 들었어.”
4-5.
아주 무식하게 튼튼한, 문과 작은 구멍 몇 개만 있는 쇠 상자가 있다고 치자. 여러 개. 이 상자들을 나무뿌리로 연결한다. 그리고 그 나무뿌리가 나무 대신 기괴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핏빛 근육덩어리로 이루어져있는 것이다. 동시에 근육 덩어리로 쇠 상자 사이를 빈틈없이 메꾼다. 그리고 기계와 생물이 뒤섞인 온갖 장치를 곳곳에 장식한다. 이렇게 조립을 하되, 결론적으로는 유선형에 좌우대칭, 무엇보다 튼튼하게 만든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그림자는 이런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하늘의 자리를 빼앗은 상황. 이 근래에 가장 가까운 현상은 불칸 전함의 추락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괴한 그림자는 경박하게 추락하지 않았다. 엄숙하고 차분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암살병기들과 인드히는 그 그림자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마르트의 전함이었다.
이 하늘에서 내려온 기괴한 불청객을 향해 불청객 비행병기들이 날아올랐다. 마르트의 괴수들과 열전을 치르던 비행병기의 일부는 물론 아직 바다에 숨어있던 여분의 비행병기, 심지어는 섬 곳곳에서도 병기들이 솟아나와 날아올랐다. 하지만 참새가 호랑이를 쪼는 것만 못한 공격이었다. 행성 중력과도 싸워야 하기에 질량과 합의를 봐야했던 대기권용 비행병기에 비해 마르트의 전함은 대학을 때려 부순 불칸 전함보다도 두 배 가까이 컸다.
마르트의 전함에서 뒷부분의 가장 큰 상자의 아랫부분이 약간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긴 날개가 달린 알들이 쏟아져 나왔다. 비행병기들은 즉시 알들을 공격했다. 방어 능력이 없는지 알들은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맞았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양은 많았고 긴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땐 공격을 피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알들은 중력에 몸을 맡기며 섬을 향해 방향을 맞췄다. 그리고 섬은 그 알들을 향해 총구를 맞췄다. 섬 중심부에 숨겨져 있던 대공포들이 요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날아다니는 병기들에 비해선 확실히 강력한 화력이었다. 요격에 맞아 산화되는 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적지 않은 알들이 지상에 선명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긴 날개는 새의 날개 같지도 박쥐의 날개 같지도 않은, 오히려 무생물인 장난감 모형비행기의 날개에 가까운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알은 검은빛이었고 수류탄처럼 울퉁불퉁한 표면엔 두꺼운 가시도 돋아나 있었다. 비행병기와 대공포의 공세로 알들은 정말 수류탄처럼 상공에서 터져나갔다. 그러나 적지 않은 알들이 무사히 섬의 지표에 닿았다.
「일어서라, 두 사람 다.」
알의 착륙으로 곳곳에서 흙먼지가 일고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남미계 암살병기는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고, 흑인 암살병기는 인드히와 은비를 향해 말했다. 은비에 대한 배려인지, 암살병기는 은비의 모국어로 말했다. 물론 인드히도 귀에 내장한 번역기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신 정작 번역이 필요 없는 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고 있었다. 호흡은 어느 정도 안정화 되었지만, 아직 일어설 기력도 정신도 없는 탓이었다.
“이보게, 병기. 내가 저 아이를 부축해야지 않겠는가? 아님 신형 병기들에게 부축기능이 있나?”
인드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형 대인병기들이 은비를 부축했다. 정확히는 들어 올려 운송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따라와라.」
다시 가이우스 공용어로 암살병기가 말했다. 그리고 양팔에서 길게 칼 같은 금속막대를 뽑아내고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인드히는 시킨 데로 그것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을 대인병기들이 위성처럼 돌며 따랐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충실한 명령 이행 자세였다.
“어디로 가나?”
「다른 인질들과 합류한다. 이후 전투의 소강까지 대기한다.」
“대기는 어디서 해야 하는 거지?”
「지하에 암살병기 대기에 사용되는 공간이 있다.」
“……그곳까지 무사히 간다면 좋으련만.”
인드히의 이 말이 무슨 작용이라도 했는지. 풀숲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앞길을 막았다. 사나워 보인다고 하기엔, 표현이 너무 귀여운 야수였다. 방금 하늘에서 날아온 알에서 깨어난 괴수였다. 뒷다리는 마치 메뚜기처럼 날카롭게 접혀있었고, 그 근육은 단단해보였다. 앞다리는 뒷다리가 우스울 정도로 크게 발달된 근육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그 다리사이에 달린 덕에 빈약해 보이는 몸통은 총알 같았다.
목이 없어 몸통과 바로 이어진 머리는 몸통까지 뒤덮는 넓은 갑주에 싸여있었다. 눈은 세 쌍으로 머리 주변에 둘러져 있었고, 입은 갑주 밑에 숨겨질 정도로 작았다. 몸통 뒤에는 굵고 긴 꼬리가 달려있었는데, 꼬리의 끝에는 철퇴같이 커다랗게 뭉쳐진 갑주가 달려있었다. 이 야수의 온 몸에는 두꺼운 검은색 털이 돋아나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흉측한 핏줄과 근육이 드러나 보였다.
“방금 강습해온 녀석인 모양이군. 이보게, 암살병기…….”
인드히는 혹시 괴물을 자극할까 걱정이라도 하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암살병기는 그 야수를 노려보며, 팔에 돋아난 칼날을 달구기 시작했다. 쇠막대는 붉은 색으로 바뀌며 아지랑이를 뿜었다.
“자네가 마르트의 전쟁괴수보다 강하기를 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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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에 5쪽씩 올릴 수 있을까요.
힘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