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이네?"
가만히 컵을 바라보고 있었던 너는 어느 새 벽지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문득 그제야 나는 벽지의 색이 파란색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사 한지 한참 지난 오늘에야,
"나는 좋아해, 파란색"
너는 언제나 그렇듯 베시시 웃으며 그리 말했다.
벽지가 파란 이유는 없었다. 그저 파란색이었을 뿐이었다.
"나도"
네가 좋다고 해서 나도 그리 말했다.
그 뒤로도 짧은 말들이 이어져 갔다. 평소처럼 묻은 안부 그리고 되짚어 보던 지난 날들
하나 둘씩 꺼낼 때 마다 너는 여느 때처럼 웃고, 또 웃었다.
까마득히 먼 날의 기억도 마치 엊그제인 냥 이야기하면서 너는
평소보다 더 웃었다. 마치 조용히 비워져 있던 말 사이에 우겨 넣듯 웃었다.
나는 손에 든 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괜찮아"
당연히 다가 올 미래 였을 것이었다.
흔히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상자를 열었을 때 나는 어렴풋이 보았다.
구석에 틈 사이로 살며시 보인 바닥을
너는 그 뒤 말이 없었다. 조용히 마음 속을 정리하는 게 아닐까
나에겐 그녀만큼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아까 말 하였 듯 나는 어렴풋이 보았고 일찍히 이런 미래를 예상했기에
너는 말 없이 그저 한참을 손에 쥔 머그컵만 바라 보았다.
옆에서 살며시 본 너는 한바탕 쏟아 낼 먹구름 같았다.
그렇게 너는 긴 시계바늘이 세 정거장 더 갔을 때 즈음
내게 상자 하나를 건네 주며 말했다.
"여기 이거, 선물"
흐를 듯한 눈물에, 새빨간 코와 눈을 보며 나는
이제야 끝이 났다는 것을 실감 하고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뒤로 그녀는 모든 미련을 정리한 듯
살며시 흐르는 눈물을 평소의 웃음으로 숨긴 채
우리는 이별을 맞이 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
일년이 지난 오늘 그 일이 떠오른 이유는
잊고 있었던 상자를 오늘 발견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냥 버리려 하였지만
나는 어렴풋 떠오른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 살며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살펴보았다.
여행 갔을 때 찍었던 사진들, 함께 보았던 영화표
함께 만들어 먹었던 요리들,
그러한 추억들에 너는 하나 하나 메모장으로
말들을 새겨 놓았음을 그제야 알았다.
비 오는 날의 여행에는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는 말을
그래서 집에 함께 만들었던 파전은 밀가루가 너무 많았다는 말을
함께 본 영화는 사실은 너무 지루 했다는 투정을
하나 둘 읽어 가는 너의 메모지에서 나는 이미 지나간 너를 알아갔다.
이런 생각을 했구나, 이렇게 느꼈구나 하고 알아 가는 것 속에 나는
뒤로 갈 수록 메모지에서 네가 느꼈던 내가 보였다.
읽어 가는 말들은 서운함으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런 말들 속에서 너의 노력이 보였다.
너 역시 처음 상자를 보았을 때, 바닥을 보았지만
나와는 달리 그런 바닥을 채우려 했었다는 사실을,
남은 말들에서는 나는 몰랐던 나를 알아갔다.
아무 이유 없었던 파란색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내가 보여준 사랑이 미숙했음을
그리고 마지막에 너에게 해 주어야 했던 말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 년이 지난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네가 남긴 상자에서
나의 서투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