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땅에 떨어지며 기분 좋은 소음을 일으키고, 그 소리에 서서히 아침을 깨운다.
방금 일어나 몽롱한 눈을 비비며 머리맡에 두었던 스마트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00'
주말을 맞아 알람을 꺼둬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늦잠을 자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늦었다고 아영이에게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기지개를 펴며 뻐근한 몸을 풀어주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냉수를 꺼내어 한 잔 마셨다.
"모처럼의 주말을 뭘 하면서 보내야 하나."
평소 성격이 집에만 있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휴일이라 해도 생활패턴에는 크게 변화가 없는 편이다. 기껏해야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영화관에서 보곤 하는데, 그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야외활동은 지양하고 있다. 이런 나를 보며 몇 안되는 친구들은 걱정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신경 쓰지는 않아서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아무튼 나는 오늘 별달리 할 일이 없었다. 가게에 필요한 물품도 저번 주에 모두 구비하였기에 당분간 마트를 가지 않아도 됐다. 한참을 고민하다 오랜만에 못다 한 게임을 하기로 하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컴퓨터에 전원을 넣어줬다. 의자를 빼내어 책상 앞에 앉아 게임을 실행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며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평소에도 통화를 잘 하지는 않지만 주말은 더더욱 없었기에 누가 나한테 전화를 한 것인지 의아했다. 잠시 책상을 벗어나 침대에 놓아둔 전화기를 들어 발신자를 보니 아영이가 걸어온 전화였다. 평온했던 나의 마음은 일순간 긴장감으로 넘쳐났고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엔 그녀와 마주칠 때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여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따듯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 혹시 지금 바빠?"
"딱히 바쁘진 않아. 그냥 게임이나 하려고 앉아 있었어."
"게임이라~ 혹시 시간 되면 나랑 같이 쇼핑이나 갈래?"
"쇼핑? 가게에 필요한 물건이 더 있었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오랜만에 너랑 가고 싶어서 그래."
그녀와 함께 하는 것이 싫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좋아한다. 주어만 진다면 그녀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아영이와 만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나도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 알았어. 언제 만날까?"
"정말? 고마워. 그럼 3시까지 쇼핑몰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만나. 늦으면 안 돼~"
"응. 준비해서 나갈게."
그렇게 짧은 통화를 끝내고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다시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분명히 즐거운데
즐겁지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이 오묘한 감정은 대체 뭘까? 마음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만나라 하는데, 머리는 그래선 안된다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며 나를 혼란에 빠트린다. 어찌 됐든 나는 이미 약속을 했고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기에, 켜놓은 컴퓨터를 끄고 샤워를 하기 위해 한 겹 두 겹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던졌다.
깔끔하게 씻고 나온 다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외출용 옷을 꺼내 입은 뒤 로션을 발라 나갈 준비를 끝냈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약한 빗줄기에 안심이 되었다. 10분 정도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의자에 앉아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항상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조금 감상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타고 갈 버스가 도착했고, 그곳에 올라 그녀와 만나기로 한 쇼핑몰을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달려 쇼핑몰 앞 정류장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곳에서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아영이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아직 2시 30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소와 같이 일찍이 집을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훗, 오늘도 내가 먼저 왔네."
"이 정도면 반칙 아니야?"
"늦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럼 슬슬 가볼까?"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영이와 함께 쇼핑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주말이라 그런지 쇼핑몰 내부에는 장을 보러 오거나 옷을 사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나려 한다. 그래도 오늘은 아영이와 같이 있기에 그런 감이 덜해서 다행이었다.
"조금 출출하지 않아?"
"하긴 늦잠 자느라 밥도 못 먹어서 배가 고프긴 하네."
"좋아, 그럼 우선 밥부터 먹으러 가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영이는 덥석 내 손을 잡고 푸드코트를 향해 달려갔다. 오후 4시를 넘어가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 메뉴를 고르고 금방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푸드코트에서 밥 먹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치?"
"응, 항상 가게에서 대충 때우거나 거르곤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요 근래 참 바쁘게 지내온 것 같아. 우리 가게 열려고 고군분투했던 거 기억나?"
"그걸 어떻게 잊겠어. 좋든 싫든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인데. 그래도 그렇게 온갖 고생하고 나서 우리 가게를 오픈할 때는 정말, 뭐랄까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더라. 가게를 오픈한 뒤에도 바쁘다 보니까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도 고마워, 내 어처구니없던 요구를 진심으로 들어줘서. 네가 없었다면 가게를 연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을 거야."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녀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로 대신했다.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미소를 머금은 얼굴엔 어딘가 우울한 감정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했다. 오늘 아영이는 내가 알던 그녀와는 달리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다 먹었어?"
"응, 이제 뭐 하지?"
"밥 먹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옷이나 사러 갈까?"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그녀와 함께 의류매장이 있는 2층으로 이동했다. 1층보다는 못했지만 2층 역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너는 뭐 필요한 거 없어?"
아영이가 옷걸이에 걸려있던 셔츠를 둘러보며 넌지시 물었다. 딱히 필요한 옷이 없었기에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그렇구나'라는 짧은 대답과 동시에 다시 옷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셔츠 중 하나를 골라 들어 보이며 내가 보기엔 어떤지 의견을 구했다. 아영이가 보여준 셔츠는 깔끔한 스타일에 귀여운 리본이 달린 흰색 셔츠였다.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녀는 고맙다며 옷을 구매하기 위해 계산대로 걸어갔다.
금방 계산을 끝내고 돌아온 아영이는 내 등을 밀며 이제 쇼핑몰을 빠져나가 근처 카페에 가자고 말했다. 자신이 찾아놓은 케이크가 맛있는 집이 있다며, 나의 손을 이끌고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도착하자마자 생각보다 한산한 가게의 모습에 그리 많이 알려진 집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한 외관처럼 내부 공간도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아기자기한 소품과 따뜻한 조명, 그리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가게 안은 우리를 제외한 2명의 손님이 자리하고 있었고 나와 아영이는 창가로 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기다리자 점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무엇을 먹을지 고르느라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나같이 맛있어 보이는 메뉴들은 선택을 하는데 더욱 갈등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영이는 벌써 주문할 메뉴를 정했는지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조바심이 생긴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중 딸기 들어간 것을 찾았고 그중에 하나를 골라 아영이에게 말해주었다.
음료는 뭘로 할 거라는 아영이의 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대답 한 뒤에야 그녀는 주문을 끝낼 수 있었다.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주문한 케이크와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나와 아영이는 멍하니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는 대체 뭐지..'
싸우거나 다툰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둘 사이에 대화가 적었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는 활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도 비가 오네."
무심한 듯 내뱉은 그녀의 말을 듣고 창문 너머 길가를 바라보았다. 아영이의 말대로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거리는 점차 어두운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주문한 케이크와 커피 나왔습니다~"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 점원이 케이크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실제로 보니 메뉴판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욱 먹음직스러웠고, 함께 나온 커피의 진한 향은 절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아영이가 먼저 맛을 보고 나도 뒤따라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 한 입 먹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케이크의 맛은 아주 훌륭했다. 잘 모르고 시킨 딸기 케이크였지만 신선한 딸기와 부드러운 빵과 크림이 잘 어우러져 좋은 맛을 만들어 냈다.
"정말 맛있는데? 이런 케이크는 처음 먹어봐."
"그래? 다행이네."
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저기 있잖아, 강우야."
망설이듯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불안감이 밀려왔다.
"사실, 많이 고민했어. 너한테 이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지. 그렇지만 더는 안될 것 같아."
"갑자기 무슨 말을.."
"당분간, 서로 각자의 시간을 가졌으면 해. 실은, 요즘 들어 많이 지쳤어.."
그 후로도 아영이는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내 귀엔 단 하나의 단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어라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머리로는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거부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나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카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카페에 도착했다. 막상 앞에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더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깊은 한숨을 쉬며 잠겨있는 문을 열어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오직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야심한 밤의 카페는 낮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도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보다는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조금이라도 진정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잠시 동안 눈을 감기로 했다.
5분 정도를 그러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뭐라도 따듯한 걸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곧바로 일어나 간단히 커피를 한 잔 내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이 코끝을 맴돌며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커피와 가까워질 거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녀의 제안으로 알게 된 커피가 이제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부분이 되어 함께 성장하는 친구가 되었다. 방황하던 그 시절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은 나를 당황케도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준 유일하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때 그런 제안을 해준 그녀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이유에선지 많이 지친것 같다. 혹시 그 이유가 나 때문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내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당장에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를 또 아프게 하는 일이기에 그럴 순 없었다. 이곳엔 그녀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이 담겨 있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또는 사랑이든 간에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낸 추억들이 간직된 둘만의 특별한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나나, 그녀나 마음 한구석 어딘가 괴로워하며 계속 숨으려 한다.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말끔히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홀로 앉아 있는 카페는 고요했고, 나는 그런 고요함에 조금만 더 기대기로 했다.
다음 날, 오랜만에 듣는 알람 소리가 월요일이 되었음을 실감 나게 해준다. 찌뿌둥한 몸을 펴며 힘겹게 일어났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달콤한 주말은 항상 빨리 지나가 버려서 아쉬움이 남는다. 밤새 부스스 해진 머리를 보고 있자니 어서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옷을 벗고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 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짐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영이가 먼저 출근해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로 인해 망설여졌다. 그렇다 해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가가 나도 주변에 어질러져 있던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하던 일을 조금씩 마무리 지어갔다. 어느새 모든 정리가 끝나고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손님들이 찾아와 출근하는 길에 향 좋은 커피를 사 가셨다. 그분들에게 언제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만드는 커피가 손님들에게 자그마한 힘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정성을 다해 만든다. 그 후로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의 방문에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후아~"
눈 깜짝할 새에 바쁜 오전이 지나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그녀는 이미 점심을 먹기 위해 가게 문을 나서버렸고, 나는 파김치가 되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욕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래도 오후에 일을 하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야 했다. 먹을게 없나 주변을 둘러보다 아영이가 만들다 실패한 빵이 있어서 그것과 커피를 함께 먹기로 했다.
"이것도 나름 맛있네."
한 입 베어 문 빵의 맛은 파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먹을 만 했다. 확실히 몸에 당이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님도 없었기에 잠시 눈을 감고 낮잠을 잘까 고민됐다. 그러다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오르며 눈앞에 아른거렸다.
...
폭우가 쏟아지던 7월의 어느 날, 계속되는 반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억울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집 근처 공원에 있는 분수대 앞에 혼자 쭈그려 앉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하필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나오는 바람에 우산도 없던 나는 그 많은 비를 온몸으로 받아냈고, 부르르 몸을 떨며 나를 원망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런 괴롭힘을 당했을까? 아마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 녀석들은 원래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억울했다.
그렇게 홀로 아픔을 껴안은 채 흐느끼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비가 그치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땅을 향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에게 일어난 상황을 살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엔 한 소녀가 서있었고,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산을 나에게도 씌어주며 더 이상 비가 나를 때리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있었다.
"혼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소녀가 물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던 나는 '그냥 울고 있었어.'라는 대답과 함께 찾아오는 부끄러움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녀는 내 말을 듣고는 혼자서 잠시 웃더니, 곧바로 내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여 주며 곁에 있어 줄 테니 이제 그만 울어도 된다고 위로해 주었다. 소녀의 그 말을 듣자 참고 있던 서러움과 고마움에 벅차올라 그만,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소녀는 갑작스러운 나의 반응에 깜짝 놀라 연신 괜찮냐는 질문을 보내왔고, 나는 그런 소녀의 곁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상처를 씻어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특별한 친구가 되었고, 서로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의 도움으로 나는 새롭게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우울했던 나의 감정은 점차 밝아졌고, 내성적이었던 성격은 조금씩 활발해져 갔다.
우연히 만난 그녀와의 인연 덕분에 나는 상처 입었던 마음을 조금씩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이 날 때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더욱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 날,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강우야! 내가 생각을 한 번 해봤거든."
"뭘?"
"그게,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둘만의 가게를 차리자!"
".. 뭐!?"
"줄곧 생각해왔어. 언젠가 우리 둘만의 카페를 차렸으면 하고. 만약 싫으면, 싫다고 말해줘."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은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좋아. 나도 함께 할게."
"정말? 정말로 괜찮은 거야?"
"날 이끌어준 건 언제나 너였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신세 좀 질게."
"뭐어~? 나 참, 좋아 그렇다면 나중에 가서 힘들다고 포기하기만 해봐.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
이렇게 해서 우리 둘은 이때부터 가게를 열기 위한 조사와 준비에 들어갔고, 갖은 노력 끝에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개월 전 기적처럼 작은 가게를 차릴 수 있는 기회가 왔고, 우리는 그 기회를 잡은 덕분에 오래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이 장소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이자 안식처였던 이 공간은 당분간은.. 어쩌면 계속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곳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다녀왔어."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점심을 먹으러 갔던 아영이가 돌아왔다.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곧바로 영업 준비를 시작했고, 나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일할 준비를 서둘렀다. 아직 날씨가 꽤 더워서 그런지 오후가 되자 많은 사람들로 가게가 북적였다. 손님이 주문한 커피를 만들던 도중 매장 구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달려갔는데, 그곳엔 아영이가 넘어져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는지 물었다.
아영이는 괜찮다고 말하며 손님들께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녀는 조용히 어질러진 바닥을 청소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평소에 덜렁거리는 성격도 아닌 그녀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넘어진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말 못할 고민이라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바쁜 오후를 보냈다. 손님들은 모두 떠나갔고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아영이에게 안부를 물어봤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무심한 대답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어색하게 서있는 나를 두고 아영이는 떠나 버렸다.
".. 그녀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가게 문을 나섰다. 어떻게 해야 우리 사이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을까? 고민만 깊어지는 밤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고 계절도 이젠 가을로 접어들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푹푹 찌던 무더위는 물러나고 쌀쌀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했고, 초록으로 물들었던 나뭇잎은 서서히 단풍이 들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변해가지만 우리 사이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둘 사이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고,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아영이가 나를 영영 떠나버리게 된다면, 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가 그냥 떠나가도록 놔둘 수는 없다.
"아오! 이 답답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스스로를 자책하다가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언제부터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거지? 아영이는 날 어떻게 생각해 왔을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단연코 사랑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따뜻함과 친절함에 고마움을 느껴 내가 받은 것을 갚아야 한다는 감정이 더욱 컸다.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하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보단 항상 도움을 받는 입장에 가까웠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먼저 나서서 나를 도와주었고, 기쁘거나 슬플 땐 옆에서 항상 함께 웃고 울었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늘 아영이한테 받기만 해왔어."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날, 그녀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나는 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녀에게 의지하며 살아왔다.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내 마음은 아영이를, 단순히 친구라는 감정을 넘어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단계로 변해왔다. 혼자 좋아하며 그녀가 나를 바라봐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마음이 변한 것 같다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정작 그녀의 마음은 관심 밖이었다.
"정말 이기적인 놈이구나, 나란 놈이..."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는데, 나는 그것을 나의 어긋난 줏대로 멋대로 판단하며 자신의 감정만 우선시한 이기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아영이가 그날 밤 나에게 지쳤다는 말을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녀는 이런 일방적인 태도와 마음에 상처받고 지쳤던 것이다. 그 때문에 참고 참았던 감정을 나에게 말했던 거고, 나는 그런 그녀의 진심을 깨닫지 못한 채 혼자 바보 같은 생각을 해온 것이다.
몇 번을 생각해도 한심하다. 그녀는 나를 믿었는데, 나는 그녀를 믿지 못했다. 정말 부끄럽다. 그녀는 내가 변하기를 원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지 못하면 나는 그녀를 허무하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그건, 싫다. 그럴 수는 없다.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을 나의 무지함으로 잃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반드시 그녀에게 사과하고, 나의 진심을 전해 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영이는 이미 나에게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그런 그녀에게 무작정 내 마음을 전하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초조해가던 그때 한 장소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 공원 분수대."
거기라면, 그 장소라면 그녀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한다. 어서 내일이 되어 출근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
낡이 밝아왔다. 심란한 마음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퀭한 눈이 도드라져 보인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다크서클도 생길 정도니 지난밤 어지간히도 걱정을 했나 보다. 손으로 두 뺨을 치며 정신을 차리고, 출근을 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샤워를 마친 후 옷을 차려입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집을 나섰다. 날씨는 화창하여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져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카페에 도착하니 평소와 달리 아영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출근 시간이 아니긴 하지만 가장 먼저와 오픈 준비를 하던 그녀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상황이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괜한 기우라고 생각하며 가게 문을 열어 내부를 정리해 나갔다. 바닥 청소를 끝내고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 아영이가 뒤늦게 출근했다. 어제 보다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였는데 상당히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별달리 힘든 티도 내지 않고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필요한 물품들을 정리하고 가게 오픈 팻말을 내걸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둘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저마다 원하는 메뉴를 주문했다. 아침 시간에 줄을 서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생각지 못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주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덕분에 힘이 났다.
신중히 커피를 만들어 서빙하고 돌아와 아영이가 갓 만들어낸 디저트도 마저 서빙했다.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은 좋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 타이밍이 애매했다. 혹시나 싶어 잠시 그녀를 훔쳐보았는데, 디저트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우선 여유로워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나도 내 일에 다시 집중했다.
오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앉을 여유가 생겼다. 기진맥진해진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도 힘든 건 매한가지일 텐데 앉기는커녕 내일 영업 때 필요한 재료를 미리 손질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체력이 남아서라기보단 일부러 그러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애써 피곤함을 숨기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더는 지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곧장 아영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는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다.
"아영아, 사실 할 말이 있어."
".. 뭔데?"
"그게, 지금 여기서는 할 수 없는 말이야. 그러니까 만약 시간이 괜찮다면.."
"미안, 그렇다면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너를 만나고 싶지는 않아. 지금 할 수 없는 말이면, 그냥 그대로 두었으면 해."
"하지만.."
"저기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잖아. 어서 가봐."
그녀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엔 남성 손님이 카운터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카운터로 돌아가 손님의 주문을 받았다. 주문받은 커피를 내놓고 나니 이젠 정말 끝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어쩌지.."
내 진심을 전하겠다는 모든 생각이 물거품이 되었다. 우울한 오후 속 밀가루와 여러 재료들이 떨어져 간다는 사실은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당장 쓸양은 되지만 내일까지 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아영이는 그것을 보자 자신이 사 올 테니 가게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날이 어두워져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차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두고 부족한 재료를 사기 위해 마트로 떠나 버렸다. 텅 빈 가게에 홀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녀가 마트에 간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5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간 것치고는 이상하게 오래 걸렸는데, 괜한 불안감에 걱정이 되었다. 어차피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기에 나는 대충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근 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계속 들려왔지만 끝내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나는 곧바로 마트를 향해 달려갔다. 가는 도중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변이 생긴 건 아닐지 초조해졌다.
미친 듯이 달려 3분 만에 근처 마트에 도착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며 골목골목 샅샅이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근처에서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곧바로 소리를 추적해 그곳으로 향했다.
"당신들 누구야?"
"아~ 거참. 반반하게 생긴 아가씨가 말이 많네.
길모퉁이 너머에서 아영이와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살펴봤다. 아영이는 성인 남성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위협을 받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경찰에 신고한 뒤 아영이를 어떻게 도울지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버려진 각목이 하나 보였고, 그것을 보자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음이 준비를 하고 심호흡을 한 뒤 나는 크게 소리치며 불량배들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x끼 들아!!"
...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그녀와 함께 안전한 장소에 피신해 있었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도망은커녕 샌드백이 되어, 불량배들로부터 간신히 그녀를 지키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자신만만하게 들었던 각목은 한 명을 강타하고는 곧바로 부서져 무용지물이 되었고, 당황하던 나를 한 녀석이 치더니 그 충격으로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한참을 얻어맞았다.
"이 미x놈은 도대체 뭐야?"
"그래 더 때려라! 내가 이 정도로, 컥..!"
치사한 놈들이 말하는 중에 복부를 강타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속에 있는 것을 올릴뻔했다. 이대로 맞기만 하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녀석들도 때리다 지쳤는지 잠시 멈춘 틈을 타 나는 나뒹굴던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그러자 불량배들은 기겁하는 표정을 짓더니 조금 주춤하는 것처럼 보였다.
"야, 이놈은 정신이 어떻게 된 거냐? 맞았는데 왜 웃고 있는 거냐고!"
"네놈들이 백날을 때려 봐라. 내가 우나.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또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간신히 피하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머릿수에서 밀리니 곧바로 제지 당했다. 세명 중 가장 인상이 나쁜 녀석이 반으로 갈라진 각목을 들고는 내 앞에 다가왔다.
"보아하니, 저 여자 남자친구라도 되는 모양인데. 너 오늘 잘못 걸린 줄 알아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네놈들이잖아!"
"하! 이 x끼, 네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거지? 오냐 너 한 번 오늘 죽어봐라. 야 잘 잡고 있어!"
내 앞에 서 있던 한 녀석이 각목을 높이 들어 올려 나를 치려고 했다. 나는 망했다는 생각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강우야!!"
그 순간 아영이가 소리쳤고, 삐용-삐용 하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니 불량배들은 당황했고, 각목을 들고 있던 녀석은 '에이 x!'라는 말과 함께 각목을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패거리와 함께 잽싸게 도주했다. 저 멀리서 경찰 몇몇이 '거기 서!'라는 말을 하며 불량배들을 쫓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떨결에 위기에서 벗어난 나는 긴장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잠시 후 경찰 한 명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더니 괜찮냐고 안부를 물어왔다.
때마침 와준 경찰 덕에 우리는 무사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나와 아영이는 경찰서에서 간단한 증언 후 밖으로 나왔다. 꽤 오래 맞았는지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아영이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던 중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거야? 얼마나 걱정됐는 줄 알아?"
"미안해.. 하지만 널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혹시라도 네가 잘못됐으면, 난.."
"그래도 지금 이렇게 둘 다 무사하잖아. 난 그거면 충분해."
아영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울고 있는 어깨를 조용히 감싸 주었다.
"아영아, 이런 상황에서 이 말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잖아? 만약 너만 괜찮다면 이번 주 일요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공원에 나와 줄 수 있어?"
그녀는 고개를 조금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날은 쌀쌀하고 얼굴은 얼얼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그런 밤이었다.
...
아영이의 만류로 인해 강제로 휴가를 받게 된 나는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커피는 어떻게 하냐며 소심한 반항을 했지만, 그건 걱정 말라며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무조건 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아영이도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 뒀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약속 한 날까지 이틀, 떨리는 마음에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까지만.. 내일은 나가 봐야지."
맞는 한이 있더라도 내일은 카페에 출근해 일을 해야겠다.
"그런데, 일요일에 뭐라고 말을 하지?"
내 진심을 말하겠다고는 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을 할지, 아니면 좀 더 둘러서 표현을 해야 하나 싶었다.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 서랍을 뒤져 보던 중 구석에 박혀있던 졸업앨범을 발견했다.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책장을 넘겨보던 중, 고등학생 시절 나와 아영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과 별 차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멍하니 사진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심을 전하는데 이런저런 고민을 한다는 것부터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나 자신으로서 그녀와 마주할 것이다. 내 마음이 그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펼쳐 두었던 앨범을 덮어 제자리에 두었다.
...
지루했던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산뜻한 출근길을 걸어나가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에 절로 이끌려 아영이와 나눠 먹을 빵을 두어 개 구매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기분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조금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거닐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비슷한 시간에 나와 아영이는 카페에 도착했다. 그녀를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아침에 구매한 빵을 하나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아영이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나는 맛있게 빵을 먹어주는 아영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녀는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우리 사이는 여전히 서먹했다. 예전처럼 돌리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고, 그녀의 선택에 맞기는 것이 옳은 일이다.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도 우리의 인연을 끝내는 것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 있다. 나는 그저 내 진심을 전하고 그녀의 답을 기다리겠다.
'따르릉- 따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가 약속한 날이 되었음을 알려줬다. 여느 때의 주말과는 달리 늑장 부리지 않고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출발하기 전, 거울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을 보며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내 얼굴을 스쳐갔다. 정신없이 준비하느라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갈까 하다가,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두 잔 구매하고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릉-'하는 엔진 소리와 함께 버스가 출발했다. 방금 구매한 커피를 품에 안고, 창밖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며 다시 튀어 오르는 모습은 마치 살아 있다는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예전에 비란 나에겐 그저 마음을 우울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비는 나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존재란 것을 깨닫는다. 만일 그날, 홀로 분수대 앞에 앉아 울고 있던 그날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고히 땅을 적시던 비는 그녀를 통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이제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 때야."
한없이 받기 만 하던 지난날들을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갔고, 마침내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두 잔의 커피를 손에 들고 버스에 내려 곧장 공원으로 걸어갔다. 비가 내려 한적한 공원 입구를 지나 분수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5분 정도 걸으니, 저 멀리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마지막 걸음을 떼기 전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와."
"늦어서 미안해."
"때 마쳐 왔는걸."
계단 위에 노란 우산을 쓴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우산과 함께 커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빗방울이 사정없이 내 몸을 적셔왔다. 평소 같았으면 질색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촉감조차 상쾌했다.
"아니, 왜..?"
아영이가 걱정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래야만, 내 진심을 전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강우야.."
"아영아. 이제 와서 이런 말한다는 게 정말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부디 들어 주었으면 해."
비는 계속 떨어졌고,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알아, 내가 정말 이기적인 놈이라는걸. 네 앞에 서서 이런 말할 자격도 없다는 거. 백번 천 번을 사과해도 모자라단 것도.. 다 알아. 그런데도 내가 염치 불고하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너를 정말로.. 좋아하니까!!"
"..."
"난 줄곧 내 마음에 거짓말을 해왔어. 그러다 보니 네가 지쳤다는 말을 했을 때 네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 그 덕에 혼자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을 하며 네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했어."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변명밖에 더 되겠지만, 불안했거든. 그날 이후 많은 고민을 했어.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지. 나는 지금까지 너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너에게 내 모든 걸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오히려 아영이 네가 되려 부족한 나의 모습을 채워주고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게 된 거야. 그때, 비가 내리던 그날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너는, 나를 이끌어 주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너에게 받은 은혜를 갚겠다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 갔고, 너의 구원에 익숙해진 난 결국 너를 상처 입히고 말았어. 네가 지쳐버린 이유도 아마 그런 나를 기다리다 못해 그런 거겠지."
"참, 빨리도 아는구나?"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모자라.. 네가 나를 때린다 해도 난 할 말이 없어."
아영이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계속 얘기를 이어갔다.
"예전처럼 되돌아가자는 말은 안 할게. 그건 그래서도 안되고, 원하지도 않으니까. 마지막까지 겁쟁이 같은 짓이란 걸 알지만.. 아영아, 너에게 맡길게."
내 말은 끝났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왜 그런지 의문이 들 때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코앞까지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저기, 아영아..? 갑자기 왜.. 크헉!!"
걱정이 되어 안부를 물으려는 순간 그녀의 주먹이 복부를 강타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들어온 주먹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덕분에 나는 배를 움켜쥔 채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영아 이게 대체.."
"후후, 방금 건 비겁한 겁쟁이한테 주는 벌이야."
".. 뭐?"
해맑게 웃으며 서있는 그녀의 모습에 공포가 밀려왔다.
"솔직히 몇 대 더 때리고 싶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겠다. 나도 참 미련하지 진작 말이라도 할걸. 좋아, 네 부탁 들어줄게. 일단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아영이는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섰다. 눈물이 나려 했다. 방금 전 맞은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과 아영이가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차올랐다.
"아영아.."
"그때처럼 울고 있으면, 방금 한 말 취소한다~"
"헉!"
그녀의 말에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황급히 참아냈다. 아영이는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네가 변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넌 그때 그 모습 그대로야. 겁 많고, 소심하고, 남한테 잘 기대는.. 그런 네가 싫지 않았지만, 한 번쯤은 네가 먼저 다가와 줬으면 했어. 하지만 너는 방금 말한 것처럼 성격상 도저히 그러질 못했겠지. 나는 그것 때문에 기다리다 지쳐버린 거고."
그녀는 크게 호흡을 하며 잠시 말을 쉬어갔다.
"그렇지만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이미 지나간 일인 걸.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서로 더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언제까지 비 맞고 있을래? 그러다 감기 걸려. 자, 여기 네 우산.. 그러고 보니 이 커피는 뭐야?"
"커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원래 라면 아영이를 만났을 때 주었어야 할 커피였지만, 내 말만 하느라 우산에 가려진 채 기억 속에서 잠시 사라졌던 모양이다.
"사실, 너랑 마시려고 사 온 건데 내가 모르고 잊어버렸나 봐. 미안.."
커피가 식었을게 분명한 것일 텐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있던 커피잔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크~ 식은 커피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법이지. 자, 너도 마셔. 기껏 사놓고 안 마시면 아깝잖아."
나도 그녀를 따라 식어버린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녀의 말대로 식은 커피는 식은 커피 나름대로 괜찮은 맛을 내고 있었다.
"가자. 더 있다가 정말 감기 걸릴라."
".. 응."
처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장소를 뒤로하고 그곳을 떠나갔다.
...
꿈같던 일요일이 끝난 후 또다시 한 주가 지나갔다. 날씨는 온전히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여름의 색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나와 아영이 사이도 아직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는 바람에 소중한 사람에게 원치 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을 영원히 잃을 뻔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이해해주며 다시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지난 한 주간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다짐을 하였다. 다시는 소중한 인연의 끈을 상처 입히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 그녀가 말한 것처럼 나의 마음과 그녀의 마음을 더욱더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멀리서 아영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때마침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이번엔 식어 버린 커피가 아닌 따뜻한 커피를 들고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