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 50분, 서서히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은하수 빵집이 문을 여는 시간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유일하게 환한 빛을 내뿜는 그곳이 보이면 난 뜀박질을 멈춘다. 호흡을 조절하며 활짝 열린 문을 지나치자 갓 구운 빵 냄새가 화악하고 덮친다. 적당히 찬 공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를 부각시키는 조미료다. 냄새가 희미해지자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입은 꾹 닫고 코로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기를 반복했다. 한강에 도착해 입으로 공기를 뱉으니 입김이 났다. 이제 정말 겨울이다. 재회를 약속한 그 계절이 와버렸다. 난 두꺼운 패딩을 벗어 벤치에 뒀다. 집에서부터 달려와 몸이 달궈졌기 때문에 춥지 않았다. 땀이 식어버리기 전에 줄넘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빵을 반으로 쭉 찢으며 행복해하던 표정이 영상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줄넘기가 찰싹찰싹 소리를 내며 농구장 바닥을 때리자 그것은 빠르게 사라졌다. 팔이 조금씩 저리기 시작할 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새침하고 경쾌한 말소리, 재회를 약속할 때의 흔들리던 목소리. 줄이 발에 걸려 줄넘기를 멈췄다. 헛구역질이 나 침을 뱉었다. 그녀는 분명히 약속을 잊었을 거다. 나에게 빵집은 은하수 빵집뿐이지만 그녀가 가는 곳엔 어디나 빵집이 하나쯤은 있을 거니까. 집에 가는 길에 난 은하수 빵집을 뛰어서 지나갔다. 시계를 보니 5시 45분이었다. 내일부터 시간도 확인하지 않을 거라 스스로 다짐하며 계속해 뜀박질을 했다.
내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시계를 보는 버릇이 있다. 이런 버릇은 나에게 해가 되지 않기에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 버릇이다. 적어도 예전엔 그랬다. 이것이 거슬리기 시작한 건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였다. 그 무렵 난 은하수 빵집의 알바생이었다. 틈틈이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다. 알아주는 대학에서 경쟁력 있는 과를 나와 괜찮은 스펙도 쌓았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면접관들의 눈을 마주치며 자신 있게 질문들에 대답했다. 어쩌면 이걸로도 부족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만큼 하는 애들은 널렸을 거야. 자신감은 곤두박질쳤고 부모님껜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손목에 찬 태그호이어 시계가 날 바닥으로 잡아끄는 기분이 들어 시계를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시계에 매몰되어 가는 날 한 여자가 다시 끄집어 냈다. 그녀는 내 얼굴에 대고 손을 휙휙 흔들고 있었다.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세요?”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일이시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해 그녀의 비위를 맞추도록 했다. 빵집에서 해고까지 당한다면 정말 자살하고 싶을 것 같았다.
“이해해요. 새벽에 혼자서 카운터를 보는 건 정말 힘들 것 같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뜻밖의 친절한 말에 마음이 놓이자 그녀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연청색의 살짝 큰 셔츠에 살짝 붙는 하얀 티, 진청색의 스키니진이 눈에 선명히 비쳤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정말 예뻤다.
“저기요, 또 딴 생각하는 거예요? 나 놀리는 거죠?”
그녀의 말에 정신이 다시 퍼뜩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아요.”
사실대로 다른 생각을 했다곤 말할 수 없었다. 난 그녀와 친해져 고백을 하고 진하게 스킨십까지 하는 상상을 그 짧은 시간 동안 했으니까. 그녀가 이걸 안다면 날 한심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그녀는 한참을 날 걱정해주며 피로회복에 좋은 음식들을 몇 개 추천해주곤 빵을 시식해 볼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반드시 살 테니 뭘 살지 결정을 하게 도와줬으면 한다고 했다. 당연히 시식은 할 수 없다. 여긴 백화점이나 마트가 아니다.
“맛있어요. 내가 여기서 제일 좋아하는 빵이에요 먹어봐요.”
난 번을 하나 집어 그녀에게 내밀며 속삭였다. 그녀는 이러면 미안하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빵을 굽고 있는 사장님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번을 받아 반으로 쭉 찢었다.
“빵 먹을 줄 아시네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반으로 나눈 빵을 또 반으로 나눠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내 입에 넣어줬다. 난 당황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맛있게 남은 번을 다 먹고 사장님 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여기 있는 번을 모두 사겠다 말했다. 사장님은 큰 손을 가진 고객을 향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 직접 포장과 계산을 했다.
“원래 조금만 사가려 했는데 알바 분이 너무 친절하셔서 다 사 가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빵집을 떠났다. 사장님은 만족스러운 듯 내 등을 토닥이며 앞으로도 이렇게 잘 하라고 말하곤 다시 빵을 구우러 갔다. 눈, 귀, 그리고 머리에 그녀가 남아있었다. 어쩐지 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녀는 여느 여자들처럼 독한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남아있는 은은한 샴푸 냄새가 빵 냄새와 어우러져 달콤하게 느껴졌다. 5시 26분이었다.
[좋아 보여 잘 지내나 봐 헤어스타일도 바꿨네 역시 태가 나]
핸드폰에서 나오는 노래가 귓가를 세게 때렸다. 점심에 페이스북에서 본 그녀의 사진이 생각났다. 새로 사귄 듯한 친구들과 찍은 사진에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도저히 나를 찾을 수 없었다. 짧게 자른 머리는 예전의 긴 생머리만큼이나 잘 어울렸다.
[예쁜 얼굴이니 뭘 해도 어울리지]
대학교 3학년 때 엄마를 졸라서 산 bmw로 도로를 미친놈처럼 질주했다. 비수기에 온 여행이라 그런지, 아니면 서울을 벗어나서 그런지 도로는 차 하나 없이 한적했다. 오전 4시 32분이었다. 당연히 차가 적을 시간이긴 했다. 이제 와서 혼자만의 이별여행이라 거니 하는 유치한 짓을 하는 건 물론 아니다. 짝사랑에 이별여행이라니. 다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고 그녀를 나에게서 완전히 지워내고 싶었다. 공기가 맑은 곳에서 마시는 새벽 공기는 정말로 달콤한 맛이 났다. 이제야 내가 지난날 면접에서 떨어졌던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나에겐 비전이 없다. 점점 30이 다 돼가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혼자 꿈도 직장도 없이 남아있다. 이게 애초에 내 잘못일까? 갑자기 서글퍼졌다. 은하수 빵집의 냄새가 조금 그리웠다.
갑자기 은하수 빵집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빵집이었는데 이젠 동네에서 유명한 빵집이 돼버렸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지는 손님들에 혼이 나가 있을 무렵 그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땠어요? 손님들 완전 많았죠?”
그녀는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물어봤다. 그녀의 눈은 강아지의 눈처럼 둥글고 초롱초롱하게 보였다.
“다 내 덕분이에요. 그때 사간 번, 페이스북에도 올리고 지인들한테도 나눠주고 그랬거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읽어냈는지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그 하얗고 예쁜 손으로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그녀는 페이스북에서 꽤 유명한 것 같았다.
“오늘은 맘모스빵을 사러 왔어요! 갔다 온 사람들이 꼭 먹어보라 그러더라고요.”
그녀에게 맘모스빵을 보여주자 그녀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저번에 그녀를 본 내 눈도 저렇게 티가 났을까?
“정말 크네요. 이거 다 주세요!”
그녀는 이번에도 사장님 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장님이 나오자 그녀는 ‘저번에 했던 말을 또 할 필요는 없겠죠?‘라고 말하는 듯이 씩 웃으며 계산했다. 지금은 그녀의 눈이 마치 고양이처럼 매혹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하수 빵집은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이르다면 꽤 이른 시간이지만 생활패턴과 딱 맞았기 때문에 난 꽤나 만족스러웠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가 보였다. 내게 그녀는 햇살이었기에 그림자가 드리운 그녀의 얼굴을 충격이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다급하게 달려가서 물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거기에선 애절함이 느껴졌다.
“좀 걸을래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를 오솔길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었다.
“왜 자꾸 시계를 봐요?”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난 거짓으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와 있는 시간이 따분해서 시계를 본다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오해를 하지 않게끔 말이다.
“오솔길을 지나면 한강이 나와요. 같이 갈래요?”
단언컨대 내가 한 이 말엔 조금의 흑심도 없었다. 하지만 한강에 도착하자 그녀는 큰 맥주 캔 둘과 소주 두 병을 사서 사람들이 별로 없고 강이 잘 보이는 자리에 날 데려갔다. 심장이 쿵쾅거려 그동안 그녀가 했던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엔 맥주, 그리고 나서 소주를 마셨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물으며 술을 마셨다. 남녀가 술이라는 마법으로 순식간에 친해진다. 우리는 말을 놓기로 했다.
“여수에 가고 싶어. 어릴 땐 거기서 살았거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보면서 술 한잔하면 진짜 기분 좋아.”
그녀가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러워. 어깨에 기대도 돼?”
난 그녀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살포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라며 난 강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참을 재잘대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가냘픈 목이 보였다. 뒤이어 그녀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술기운이 이제야 올라오는지 몸이 뜨거워졌다. 난 다시 강을 바라봤다. 잔잔한 강물을 보니 뜨거워진 몸이 조금씩 식어갔다. 풀벌레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난 이게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은 이대로 동화인 채로 머무르고 싶었다.
바다에 도착한 난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았다. 연초가 아닐 때의 겨울바다는 인기가 없었다. 반짝이는 불빛들이 홀로 앉은 자리의 어두움을 더욱 부각시켰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노래를 들으며 말없이 소주를 꺼내 병째로 한 모금 마셨다. 핸드폰을 꺼내 페이스북을 켰다. 새로운 게시물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커피 한 잔과 도라야끼 두 개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곳에 잘 적응한 걸 축복해줘야 할 텐데 내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정말 후회할 일을 할 것 같아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왜 내 인생은 항상 불안할까?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에 대한 불안, 상대의 마음에 대한 불안. 웃긴 건 불안은 연쇄적으로 불안을 만든다는 것이다. 난 늘 그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모든 걸 놓친다. 불꽃들이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저쪽에선 불꽃놀이를 하고 있나 보다. 소리에 맞춰 소주를 들이켰다.
여행에서 돌아온 난 기자를 하기로 다짐했다. 어릴 때의 꿈을 다시 찾는 건 보물 찾기에서 보물을 찾았을 때와 비슷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막막했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 4시쯤, 은하수 빵집 안으로 오랜만에 들어갔다. 사장님은 날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이젠 알바생이 세명이나 됐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발을 한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뒀다. 며칠 전이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난 번 몇 개와 곰보빵을 사서 가게를 나갔다. 밖은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찬 공기를 들이켜며 은하수 빵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