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루는 마른 몸으로 미꾸라지처럼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아자니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을 비집느라 점점 힘이 부치던 차에 마침 아자니가 몸집이 큰 남자 둘 사이를 비집고 가려고 바둥댔다. ‘드디어 잡았구나.’ 앞니를 활짝 드러내고 웃다가 갑자기 컥 하고 숨이 막혔다.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뚝이 목을 감고 옥죄었다.
“뭐.. 뭐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잘 알지. 와스프의 검은 삼형제 중 둘째 테루잖아.”
깜짝 놀란 테루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애런은 더욱 목을 조이며 아자니가 몸집 큰 남자 둘 뒤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크윽, 넌 죽은 줄 알았는데? 그 검기란 것을 쓰면 벼랑에 떨어져도 살 수 있는 거냐?”
“당연하지, 난 하늘도 날 수 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 아자니를 쫓지 마.”
“네놈이나 우리를 더 쫓지 마라.”
두툼하고 커다란 손아귀가 애런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목에 닿은 차가운 금속이 번뜩였다. 애런이 팔을 풀자 고개를 돌린 테루가 히죽 웃고는 아자니를 쫓아갔다.
“저쪽으로 가.”
보글러가 애런을 몰고 광장 가외로 나왔다. 사람들 사이에 꽉 끼어 있던 몸이 홀가분해진 그는 주머니칼을 애런의 허리에 댄 채 어깨를 털고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건물 사이의 막다른 곳으로 향했다.
“허튼수작 부리면 곧바로 목을 따버린다.”
보글러는 골목 끝의 막다른 벽에 애런을 몰아세우고 검을 뺏어 뒤춤에 꽂은 뒤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통로를 막아섰다.
“거래가 끝날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어.”
해머를 어깨에 걸고 힘주어 목을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났다. 애런은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저번처럼 해머를 빙빙 돌려대면 맨손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어. 가만, 스승님처럼 물건에 프라나를 맺을 수 있으면…’ 애런은 주변을 살펴봤지만 찢어진 종이 조각만 있을 뿐 무기로 쓸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신호가 없는 걸로 봐선 다들 찾는 중인가.’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크게 들이마신 숨을 길게 불어 넣었다. 달밤에 목을 세우고 우는 늑대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뜬금없이 호각을 꺼내들고 헛바람 소리만 푸우우 내는 애런을 보글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다 껄껄 웃었다.
“야, 벼랑에 떨어져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갑자기 망가진 호각은 왜 불어?”
“날 여기 붙잡아둬도 소용없어. 벌써 아자니는 멀리 도망 갔을거야. 이렇게 큰 도시에서 당신 형제들만으로는 찾을 수 없을걸?”
보글러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맹아. 여기서 매물이 도망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하지만 우린 한 번도 거래를 실패한 적이 없어. 왠 줄 알아? 녀석들은 이곳이 처음이지만 우리는 벨로즈만큼이나 여길 속속들이 잘 알거든. 그리고 큰형님은 도망치는 놈들이 갈만한 곳이 어디일지 족집게처럼 잘 맞추지. 그러니 괜한 희망 품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그 여자를 잊어.”
아자니는 덩치 큰 남자 둘을 지난 뒤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돌렸다. 바짝 따라붙던 테루가 보이지 않았다. 휴우- 갑자기 누군가가 팔을 움켜쥐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앗! 소리가 튀어나오려는데 다른 손이 입을 막았다. 팔꿈치를 마구 흔들어 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수갑을 채운 것처럼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쉿!”
처음 보는 은발의 여자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었다. 손목에 감긴 붉은 띠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는 아자니를 데리고 사람들 밖으로 나갔다.
“누구시죠?”
“어서 그 망토를 벗어요.”
여자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아자니에게 걸치고 후드를 씌워 광장 입구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도 흥정을 하던 자들이 돌아오지 않자 알리스터는 얼굴에 초조한 기색을 띠었다. 카스노아가 힐끗 그를 보고는 하품을 했다.
“아-흠. 아무래도 거래는 틀렸나 보군. 그리니어 신부를 얻고 싶었는데 아직은 인연이 아닌듯싶네. 인내하는 자가 미인을 얻기 마련이거늘 쌓인 여독이 참기 힘들군. 아쉽지만 이번은 자네에게 양보하지. 그럼 또 보세.”
“팔리오네로 돌아가시는 길에 마라님의 축복이 있으시길.”
돌아서서 걸음을 떼는 카스노아에게 예를 표한 알리스터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흠. 저 바람둥이가 포기해서 다행이야. 노예상들이 아직도 여자를 찾지 못했다면 차라리 더 잘 됐어. 병사들을 시켜서 먼저 찾아 발라스로 데려가면 그만이야.’
카스노아는 대도를 찬 남자에게 낮게 속삭였다.
“저 쭈그렁 영감보다 먼저 그리니어를 찾아. 이제 막 피어나는 용담화가 저렇게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와 함께 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남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 끝나지 않은 거미와 남자의 싸움을 바라보다가 카스노아와 함께 광장 입구로 향했다.
광장 입구에서 나무에 올라 싸움을 구경하던 넬은 손발에 치렁거리는 붉은 띠를 맨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늑대 가죽으로 자신을 산 남자가 나즈라고 부른 여자였다. 그녀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가린 사람을 이끌며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빠져나왔다. ‘아자니라는 여자를 찾았나 보네. 좋은 사람들인데 일이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얼마 안 지나서 카스노아와 대검을 든 남자가 광장 입구로 나왔다. 갑자기 넬의 두 눈이 확 커졌다. ‘저.. 저 남자는!’ 손톱이 나무껍질에 박히도록 가지를 꽉 움켜진 그녀는 낮게 으- 소리를 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대검을 든 남자는 나즈와 아자니가 간 방향으로 가고 카스노아는 반대 방향으로 길을 나서자 넬은 양쪽을 몇 차례 번갈아 보았다. 카스노아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하관이 도드라질 정도로 입을 굳게 다물고 나무에서 내려와 그의 뒤를 쫓아갔다.
해머를 어깨에 걸치고 애런을 주시하던 보글러는 갑자기 뒤춤이 헐렁해지면서 등에 뭔가 차갑고 단단한 것이 닿은 것을 느꼈다.
“꼼짝마시…!”
보글러는 망설이지도 않고 재빨리 몸을 틀며 해머를 휘둘렀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몇걸음 물러난 드워프가 애런의 검을 어깨에 걸고 양손에 커다란 쌍도끼를 고쳐 쥐었다.
“허어, 덩치에 비해 몸놀림이 제법 빠르구만.”
“뒤렉씨!”
반가워하는 애런에게 뒤렉이 빙긋 웃으며 한 쪽 눈을 찡긋했다. 보글러가 망치를 다시 어깨에 둘러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뭐야? 저 녀석 일행이야? 이번 일은 귀찮게 계속 뭐가 달라붙네.”
“노예상 양반, 난 아난의 피송곳니 뒤렉이라고 하오. 저기 내 친구가 바쁜 일이 있으니 어서 보내주시우. 그렇지 않으면 이 피송곳니가 가만있지 않을 거우.”
보글러가 고개를 기울여 뒤렉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피송… 뭐? 크핫핫핫. 이봐. 똥자루야. 아직은 이 보글러님이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피똥싸개가 되고 싶지 않으면 얼른 멀리 가거라.”
“허참, 오늘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내가 싫어하는 말을 벌써 두번이나 듣다니. 여기서 좋은 기억 하나는 만들어야 겠소.”
뒤렉이 몸을 날려 도끼를 휘둘렀다. 보글러가 내리찍는 도끼를 피해 그의 양 다리를 번갈아 노렸다. 보글러가 공격을 피하느라 통로 벽에 등을 붙이면서 공간이 열리자 애런이 곧바로 뛰어들었다.
보글러는 애런이 그의 앞을 지나는 것에 맞춰 해머를 내리쳤다. 둔탁한 금속 파열음과 함께 뒤렉이 머리위로 쌍도끼를 교차해 해머를 받아냈다.
“어서 넘어가시우.”
뒤렉의 어깨를 밟고 넘는 애런을 보며 보글러는 다시 해머를 들려 했지만 좁은 틈에 꽉 낀 것처럼 엇갈린 도끼 사이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어, 밥은 제때 먹고 다니시우? 힘쓰는 게 어째 살거죽에 바람만 채운 것 같구려.”
뒤렉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