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기 던파캐스터 냠키입니다.
감염 소설은 2편으로 끝나요!
아래는 1편 링크입니다.
https://m.ruliweb.com/game/2230/read/9932183?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524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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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 수건 없나? 헝겊이라도!”
“…….”
“피를 닦아야 하지 않나!”
페드로가 절박하게 외쳤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장자의 피에 닿기만 해도 위험한 건 맞지만, 지금이라도 피를 닦아낸다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성직자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딸아이와 사위까지 잃었다. 이렇게 손주까지 잃을 수는 없다. 옷소매를 라나의 목덜미로 가져가면서도 페드로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조차 몰랐다.
“어르신! 손 떼세요!”
페드로의 손이 피에 닿기 직전이었다. 성직자가 달려들었다. 그를 뒤에서 안고 뒤로 누워 떼어놓았다. 페드로가 발버둥 쳤다. 그의 허리를 붙잡고 외쳤다.
“늦었어요! 이제 와서 닦아낸다고 해도 소용 없다고요!”
“이거 놓게!”
“어르신!”
페드로의 발버둥은 이내 거센 저항으로 바뀌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다가, 끝내 성직자의 팔을 물어뜯으려 하기까지 했다. 흙먼지가 일었다. 성직자에게 욕을 퍼붓던 입은 어느 순간부터 손녀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라나야, 라나야! 할애비가 구해주마! 라나야!”
성직자는 울음을 토해내는 노인을 붙잡고 있는 힘껏 버텼다. 이대로라면 이 노인은 탈진하고 말 것이다. 만일 마을에서 벗어난 위장자가 두 사람을 덮치기라도 하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 생각을 하자 덜컥 겁이 났다. 그 순간, 결코 해서는 안 될 생각이 떠올랐다. 이성의 판단을 거칠 새도 없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라나를 되돌릴 수 있습니다! 어르신!”
페드로가 저항을 멈추었다. 떨리는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성직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놓게.”
노인의 목소리가 놀랍도록 차분하게 들렸다.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황급히 부축했다. 그는 시선을 라나에게서 떼지 않았다.
“라나를 되돌릴 수 있다고?”
난처했다. 헛된 희망을 심어준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프리스트라면 몰라도, 일반인이 위장자에서 되돌아왔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었다.
성직자들 중 계시를 받은 이들을 프리스트라고 부른다. 이들은 위장자와 직접 마주할 일이 잦다. 때문에 늘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저주는 빠르게 전파되기에 성직자들은 설사 동료라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감염된 사람을 변이 전에 죽이도록 훈련받는다.
그런데 감염된 성직자가 독실한 믿음과 신의 은총으로 저주를 이겨내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 경우 성작지는 끊임없는 환청과 고통에 시달리지만, 악마의 형상을 하고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반(半)위장자가 되어 그 힘으로 악을 징벌하는 성직자를 ‘어벤져’라고 부른다.
페드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설명을 들었다.
“어쩌면 라나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레미디아 바실리카에는 고위 크루세이더 분들이 많습니다. 늦지만 않는다면 성령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레미디아 바실리카. 교단의 총본산과도 같은 대성당이다. 그곳에는 고위 성직자들과 계시를 받은 크루세이더가 있다. 위장자로 완전히 변이한 사람이라면 되돌릴 수 없지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남자보다 여자가, 성인보다 아이가 더 느리게 변이한다. 완전 변이까지 시간은 제법 남아있다. 그 사이에 대성당으로 데려간다면, 어쩌면…….
하지만, 공국령 끝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에서 대성당까지 가기 위해서는 몇날 며칠을 쉬지 않고 걸어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해주자 페드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라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놀라서 어깨를 붙잡았다.
“걱정 말게. 나 까지 감염될 생각은 없어.”
“네?”
목덜미에 피부가 닿지 않게 조심해서 아이를 업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무릎이 힘을 이기지 못해 균형을 잃었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다.
“가보겠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라나를 구할 수 있겠어.”
당장이라도 출발하려는 듯 했다. 성직자는 입술을 깨물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라나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가자 푸른빛이 일렁였다. 위장자의 검은 피가 점차 투명하게 바뀌었다. 피에 서린 저주를 해제하는 일종의 응급처치였다.
“같이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자네도?”
“예. 마커스라고 불러주십시오.”
노인이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페드로는 지쳐있었지만 그의 눈에 라나를 구하겠다는 일념이 선명히 서려있었다. 마커스는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마커스는 성직자로써 간단한 치유나 정화는 행할 수 있지만 여타 프리스트와는 비견할 수 없다. 때문에 이번 위장자 척결에 보조자로 따라왔다. 마커스는 자신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비위가 상해 도망쳤다고 생각하시겠죠. 그게 아니라면 위장자에게 당했거나.”
“동료들이 걱정할 텐데.”
“괜찮습니다. 위장자와 싸우는 인파이터들은 서로에게 정을 붙이지 않습니다.”
마커스가 라나를 업고, 페드로가 마커스의 배낭을 들었다. 대성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와 긴 숲길을 통과해야 한다. 대성당은 공국의 수도 헨돈 마이어에 있다. 어쩌면 마을에서 마차를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페드로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대화를 멈추면 마을에서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의 몸을 찢는 손톱. 피와 살을 갉아먹는 이빨.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도 생생했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서 귓가에 맴도는 그 소리들을 다른 소리로 덮어야만 했다. 페드로는 자신이 젊었을 적에 메리다를 만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냥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가출을 감행한 날, 사과를 따던 메리다를 만났던 일에 대해.
“그때는 참 예뻤지. 갈수록 쭈그렁 할망구가 되어가기는 했지만, 메리다만큼 겉도 속도 예쁜 사람이 없었다네.”
“정말 사랑하셨군요.”
“그럼.”
메리다를 떠나보내고 페드로는 홀로 남았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자 이웃이 갓 수확한 사과를 가지고 오두막을 방문했다. 하지만 먹을 수 없었다. 사과를 볼 때마다 사과농장에서 환히 웃던 메리다가 생각났다. 낡은 탁자 위에 사과를 두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응시했다. 떠나간 사람을 기억에서 끌어와, 붉은 사과껍질 위에 비추었다. 며칠씩이나 그 짓을 반복했다. 딸아이와 사위가 손녀를 데리고 이사 오고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딸년이 홀로 둬서 미안하다고 그러던데, 내가 더 미안하지……. 다 죽어가는 노친네가 뭐가 외롭다고…….”
“어르신.”
“오지 말았어야 했네. 괴물들에게 나만 죽으면 끝날 일을, 애들이 죽었잖아……. 쓸모도 없는 노친네 구하겠답시고 말이야……. 그러니 이 몸뚱아리, 쓸모 있으려면 라나라도 구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못 했어.”
페드로가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그리고는 사과를 했다.
“내 이야기만 늘어놓아서 미안하네. 듣기 싫었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지는 마십시오. 쓸모가 없다니요.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쓸모’를 기준으로 두는 일 만큼 무의미한 일이 또 없습니다.”
마커스는 계시를 받지 못했다.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신이 그를 저버린 것일까? 마커스는 신의 전능함과 자비로움에 대해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도 계시가 내리지 않자 서서히 지쳐갔다. 위장자와의 싸움에서 돌아오는 프리스트는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었다. 한 시라도 빨리 계시를 받아 그들을 돕고 싶었다. 교단 내에서 ‘징벌자’라고 불리는 테이다 베오나르는 그런 마커스에게 말했다. ‘쓸모’는 가치가 될 수 없다고.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고.
“사람들은 테이다 님의 심판에 필요 이상의 잔혹함이 담겨있다고 말하지만, 그 분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프리스트입니다. 그 분 덕에 저는 조급함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대단하신 분이군. 어쩌면 메리다가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메리다는 종종 성당에 다니곤 했었지.”
이들은 대화를 나누고 힘이 들면 앉아 쉬었다. 밤이 오면 마커스가 천막을 펼쳤고, 라나를 사이에 두고 잠들었다. 아침이 밝으면 마커스의 배낭에서 딱딱한 빵을 꺼내 나누어 먹었다. 그렇게 이틀째 되던 날, 라나가 깨어났다.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라나의 눈을 응시했다. 붉은 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 여기 어디야?”
“…….”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감염되었다. 거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조금 더 서두르면 라나도 나을 수 있다.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정말로.
“나 배고파.”
“오냐. 할애비가 금방 빵 꺼내주마.”
마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혹시라도 변이가 빠르게 진행되었다면 두 사람은 지금쯤 위장자가 된 라나에게 죽었을 수도 있다. 하늘이 도왔다. 게다가 아이가 의식을 차리게 되었으니 변이 과정도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페드로는 얼른 배낭을 뒤적였다. 그런데, 마커스의 눈에 이상한 점이 들어왔다. 라나의 시선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집요하게 페드로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목에 비치는 동맥을.
라나의 뺨이 실룩거렸다. 동공이 작아지더니 붉은 기가 차올랐다. 간발의 차로 마커스가 라나를 붙잡았다. 그 바람에 텐트가 무너졌다. 아이가 버둥대며 기묘한 괴성을 질렀다. 페드로가 뒤를 돌아보았다. 라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라나야!”
라나의 입에서 나오던 괴성이 한순간 뚝 끊겼다. 붉은 기도 사라졌다. 순식간에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라나가 당황한 듯 페드로와 마커스를 돌아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고 지친 목소리였다. 마커스는 계속 아이를 붙들고 있다가 아이가 저항을 멈춘 것을 알고 손을 놓았다. 숲길 전체에 울음소리가 퍼졌다.
그날 저녁까지 계속 걸었다. 페드로가 계속 빵을 권했지만 아이는 먹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손을 잡지 않고 홀로 걷다가 계속 넘어졌다. 그런데도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라나가 잠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르신.”
“말하게.”
“아침에 있었던 일은 라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찢어죽일 위장자 놈들 때문인 게지. 이해하네.”
페드로는 텐트 밖에서 단단한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칼로 다듬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으니 지팡이라도 만들어 쥐어주려는 생각이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우리 라나는 괜찮겠지?"
무덤덤한 어조였다. 마커스도 무덤덤히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가 만약 계시를 받았다면 알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계시라는 건 신께서 성직자들에게 내리는 게지?"
"예."
"그걸 받으면 어떻게 되나?"
"눈이 트입니다. 위장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직접 겪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페드로가 나뭇가지를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굵직한 나뭇가지가 라나의 키에 딱 맞는 작은 지팡이로 변해 있었다.
“자네는 성실하니 곧 받게 될 거야. 이제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왔습니다. 이틀 안에 도착할 거예요.”
그날 이후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종종 라나가 핏줄을 보고 이성을 잃기는 했지만 그 때마다 마커스가 붙잡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페드로가 한숨을 더 자주 내쉬었고 마커스는 편집증적이 되어갔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갑작스러운 난동도 막을 수 있었다. 아이는 갈수록 의기소침해졌고 어른들은 절망스러워했지만 이 또한 일상이 되었다.
마을을 떠난 지 엿새 째 되는 날, 헨돈 마이어에 도착했다. 대여한 마차를 타고 간 덕에 금방 도착했다. 헨돈 마이어는 변두리의 작은 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도시이지만, 이곳 또한 사람들 사이의 불신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서로를 보는 눈은 의심을 감추지 못했다.
“성당이 있는 도시인데도…….”
“의심은 떨쳐내기 어려우니까요.”
마차를 대여소에 가져다주고 라나를 가릴만한 긴 망토를 구입해 입혔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위장자임을 들키기라도 하면 낭패라고 마커스가 말했다. 마침내 다다랐다. 레미디아 바실리카는 마치 거대한 고성을 연상케 하는 크기였다. 벽에 신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거대한 십자가가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거대한 종을 매단 첨탑에서는 성가대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마당에는 기도하는 성자 조각상이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드디어 라나를 구할 수 있다. 저 안에 라나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줄 사람이 있다.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해서는 안 된다. 마커스는 계시를 받지 못했기에 저주의 진행 정도를 알 수 없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복도를 걸으며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라나가 성당 안에서 이성을 잃는 일이지요. 그러니 그 전에 메이가 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 시간이면 아마 서관에 계실 겁니다.”
"그 분이 우리 라나를 구할 수 있다고 했지? 정말 다행이야……."
라나와 페드로를 방문객 휴게실에 들어가게 한 후, 마커스는 홀로 나와 성당 복도를 달렸다. 서관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마커스를 보내고 앉아있자 저릿한 피로가 발에서부터 꾸물대며 올라왔다. 여독이었다. 엿새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걸은 탓이었다. 라나도 지쳐있었다. 그런 라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페드로는 벽에 그려진 그림을 가리켰다.
"라나야. 이걸 보렴. 예쁘지 않니?"
휴게실 벽에 그림이 한 점 걸려있었다. 성안의 미카엘라가 대지를 정화하는 과정을 보다 추상화하고 신격화하여 그린 성화이다. 하지만 일평생 성당에 갈 일이 없던 두 사람에게는 그저 예쁜 그림일 뿐이었다.
"메리다에게 성당 얘기좀 해달라고 할 걸 그랬구나. 이렇게 멋진 곳에 오고서도 아는 게 없으니 느껴지는게 많지 않아."
"할아버지. 그림이 예쁘다고 그랬잖아."
"만약 더 많이 알았다면 예쁘다고만 느끼지는 않았을 게다. 저 그림에도 의미가 있을텐데, 이 할애비는 무식해서 모르겠구나."
"씨 뿌리는 것 같아. 할머니처럼."
라나가 말했다. 페드로는 그 말을 듣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하늘에 떠오른 남자의 손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빛이 땅으로 쏘아지는 그림이다. 씨를 뿌린다고 생각하고 보니 닮았다.
"그렇구나."
신이시여, 불경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아직 아이잖습니까. 페드로는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그림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을에서 본 프리스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구의 남자였다. 그는 육중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십자 모양의 표식이 새겨진 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위성직자가 분명했다.
그는 잔잔한 눈으로 페드로를 보았다. 그저 서있기만 해도 만물을 포용하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지쳐있던 페드로에게 그는 일종의 구원처럼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아아, 아아아!"
비명소리가 대성당의 복도로 울려퍼졌다. 비명은 복도 벽과 바닥을 통과하며 뾰족한 천장으로 올라갔고, 비스듬한 천장을 타고 다시 내려오며 마치 종소리와 같은 울림을 일으켰다. 그 소리를 들은 마커스는 황급히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뛰어갔다. 결국 메이가 로젠바흐를 찾지 못해 서관을 나왔는데, 기묘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휴게실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찢어지는 비명으로 바뀌어갔다. 잃어버렸을 때 보다 더욱 절박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 비명은 그런 몸부림을 품고 있었다. 휴게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신성한 기운이 휴게실 전체에 퍼져있었다. 따스한 물결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물결은 일종의 파괴욕이 적나라하게 깃들어 있었다. 거구의 프리스트가 그 중앙에 당당히 서 있었다.
"테이다 님!"
마커스는 경악했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테이다 베오나르가 성당에 돌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가 페드로를 붙잡아 누르고 있었기에 크게 놀랐다.
"무슨 짓입니까! 어르신을 놔주세요!"
"아, 마커스. 오랜만이네. 네 지인인가?"
"테이다 님! 놓으세요!"
"그럴 수는 없네. 이 노인이 심판을 방해하는 탓에 어쩔 수 없어."
페드로가 눈물을 쏟아내며 울부짖었다. 마구 버둥거렸지만 압도적인 체격 차이 때문에 무의미했다.
"이거 놔라, 악마같은 놈아! 라나야, 라나야!"
"가만히 계십시오."
라나. 그 이름을 듣고서야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테이다의 거구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반대쪽 벽을 보았다. 벽이 움푹 파여있었다. 거기에 검은 아지랑이에 휩싸인 괴생명체가 박혀있었다. 그 생명체의 머리에 해당되는 부위가 갈라지더니 희미한 목소리가 새나왔다.
"할……아버……."
그 말을 듣자 페드로가 더욱 크게 저항했다. 그럼에도 테이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감히 라나를! 라나야, 괜찮아. 조금만 참아!"
"어르신. 저건 라나가 아닙니다. 위장자일 뿐입니다."
"아니야! 위장자라니. 여기에 오면 고칠 수 있다고 했어! 라나야!"
테이다는 익숙한듯 그를 뿌리치고는 벽에 박힌 생명체에게 다가가려 했다. 잠시 멈추더니 테이다가 마커스를 툭 치며 말했다.
"저게 제대로 보이나보군."
"네……?"
"축하하네. 드디어 계시를 받았군."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저 검은 생명체가 누구인지. 어째서 벽이 뭉개지도록 강하게 처박혔는데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페드로가 어째서 울부짖고 있는지. 마커스는 짧게 전율했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정보들이 그를 괴롭혔다. 성당에 도달하고서부터 지금까지의 그 짧은 시간동안 계시를 받았다는 말인가. 그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제야 라나가 위장자로 보이는 것인가.
마커스의 눈에는 그저 검게 물든 괴물로 보일 뿐이었다. 그제야 마커스는 어떻게 인파이터들이 위장자가 된 동료를 망설임없이 죽일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들의 눈으로 볼때 그저 괴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나도 마찬가지이다. 본색을 숨기고 인간 행세를 해왔을지, 휴게실에서 급속도로 변이를 마쳤을지는 모르지만, 그저 괴물일 뿐이다.
그렇지만.
마커스는 바닥에 반으로 쪼개져 굴러다니는 지팡이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정당한 심판을 행하는 테이다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저 위장자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테이다와 그의 다리를 붙들고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페드로를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낄 수만 있었다.
"라나야, 도망쳐라! 할애비가 잡고 있다! 어서 도망가! 라나야아아아악!"
타종 시간이 되었다. 노인의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을 성당 첨탑의 종소리가 집어삼켰다. 여느 때와 같은 맑은 종소리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piction.network/project/gyeoli/posts/407
픽션 사이트에는 이번 글을 2편과 3편으로 나누어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