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가 다르니 뭐니 해도, 결국 높이 올라가면 상대 플레이 잘 막고 자기 플레이 잘 뽑는 덱만 남는구나.”
접이식 침대에 누워 패드를 만지며 덱을 읽어보던 남해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머리맡의 그림자 안에서 가이저의 머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무슨 소리냐?”
“아니 생각해봐. 여기의 듀얼은 ‘보는 재미’가 중요하단 말야. 그래서 메타도 전투 위주로 흘러간다 알고 있고. 근데 이번 4강 멤버좀 봐봐. 응? 룡성, 테라, 섀돌, 카디언... 어디 비공인 4강 멤버래도 믿을걸?”
다음 승부에서 겨룰 상대는 성동고의 양은하 대표. [테라나이트] 덱을 사용하는 남자애였다.
듣도보도 못한 [드래곤메이드]나 처음 보는 지원 카드가 등장한 [여섯 무사]와 달리 로그의 내용은 남해가 알고 있던 테라나이트의 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벨이 같은 몬스터를 착, 착, 착 하고 늘어놓은 다음 랭크 4 엑시즈 몬스터를 에이스 삼아 공세를 펼친다.
“정말 제알하이가 종영 안해서 다행이야.”
남해가 여기 넘어온 직후까지만 해도 넘버즈는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실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TV에서 방영하는 청춘 드라마 [제알하이]에서는 넘버즈가 나오고 있던 것이다.
-“신영월, 난 살고 싶어. 너와 함께!”
-“멍청한 녀석, 너 같은 바보랑 함께 죽는 건 수치라고! 죽는 건 나 하나로 족해, 잘 있어라 강유마...”
-“영월아!!!”
“거 봐, 내가 쟤 죽을 거라고 했잖아.”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하다못해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 무엇하나 남해가 옛날에 본 ‘그 만화’를 떠올리지 않게 하는 내용이 없던 그 드라마의 작중에서는 넘버즈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드라마 종영 이후에는 실제로 넘버즈 카드들이 발매될 예정이었다.
대충 남해가 기억하던 작품과 드라마의 흐름이 비슷하다면 아마 올해 말에는 종영되어 내년에는 넘버즈 카드들도 꽤 대중화되겠지.
-“더블 업 찬스도 막혔어. 그렇다면...”
-“아니, 아직이야! 전력 승부다! 엑시즈 체인지다!”
“기승전호프. 막히면 더블 업 찬스에, 또 막히면 라이트닝. 다 좋은데 전개가 늘 똑같단 말이지.”
“그게 매력이야. 다 없어졌지만 그래도 희망은 남았다. 그런 느낌이잖아.”
몇 번 교회의 다른 아이들과 그 드라마를 같이 본 기억이 난 남해는 여기도 넘버즈가 보급되고 나면 또 환경이 어떻게 변할까, 그리고 지금은 넘버즈가 없어 참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패드의 화면을 껐다.
...
실전이 다음 주인 나름대로 중요한 주의 주말이었지만 남해는 교회에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대신 남해를 꼭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며 나의주 목사의 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다지 멀지도 않은 거리를 차를 타고 움직인 끝에 남해와 목사가 도착한 곳은 어느 카드 가게였다.
“오늘 여기에서 내 지인들끼리 모임이 있거든. 방송국 높으신 분들부터 현직 코치, 감독... 하여튼 여럿 모이는 곳이라서 널 꼭 소개해주고 싶었단다.”
“되게 중요한 자리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영업하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이 걸린 카드 가게의 문을 열고 나의주 목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문에 걸린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개중엔 남해가 들어본 목소리도 있었다.
“나형, 여기요 여기!”
남해가 다니는 학교의 채은월 교장부터 경기장에서 몇 번 보인 방송국 관계자들, TV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아저씨들까지.
다른 세계에서 넘어와 이곳의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남해라도 이 자리가 여간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주 목사를 보고 반가워하던 교장과 눈이 마주치자 남해는 바로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채은월 교장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남해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주었다.
“여어 남해로구나! 그래, 대회 준비는 잘하고 있고?”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4강까지 왔으니까 한번 결승 가보자! 네가 결승 이번에 가면, 우리 학교에서 처음으로 결승 진출자 나오는 거다. 알지?”
“너무 부담 주진 말고. 너 간절한 건 알겠지만 얘는 얘대로 얼마나 부담되겠어?”
나의주 목사의 이야기에 채은월 교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남해를 탁자 쪽으로 데려가 앉아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남해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곳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남해였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은 언젠가 TV에서, 기사에서, 광고에서... 하여튼 어딘가에선 본 얼굴들이었다. 긴장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다.
“이 친구가 바로 그 우리 학교 특례입학생이야. 이번에 교대표로 4강 올라간 그 룡성 쓰는 걔!”
“아, 나도 알지! 경기 잘 보고 있다?”
“야~~ 얘가 걔야?”
한동안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여러 덕담도 듣고 난처한 시간을 보내고서야 신부를 비롯한 일행들은 가게의 다른 방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고 그제야 남해는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카드를 손볼 수 있었다.
휴우 하고 남해가 한번 한숨을 내쉬자 남해의 그림자 안에서 가이저의 머리가 올라왔다.
-“지쳤구만.”
“지치지...”
그때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들리자 남해는 그쪽으로 문득 시선을 옮겼다.
“재고 정리하러 왔어요 할아버지.”
“아, 뒤쪽에 있다. 음료는 충분하니까 과자나 좀 진열하렴.”
알이 무진장 두꺼운 안경과 대충 손만 봤다고 말하는 사과머리. 목 부분이 조금 늘어난 편해보이지만 격식은 보이지 않는 티셔츠와 슬리퍼까지.
남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같은 교회의 연지가 나가기는 해야 하는데, 꾸밀 필요가 없는 가까운 곳에 대충 나갈 때 대충 손보고 나오는 스타일이 딱 저런 모습이었다.
대체 저게 누군지는 몰라도... 까지 생각한 남해는 문득 저 여자애가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가만있자, 저 정도 키에 이 목소리면-
“너 유지민이지?”
남해가 지민을 부르자 그 여자애는 남해를 한번 보더니 몇 초간 제자리에 굳어있다가 쏜살같이 직원실로 뛰쳐들어가선 문을 쾅!하고 소리 나게 닫았다.
깜짝 놀란 남해가 움찔하고 몸을 움츠리고서 대충 10분쯤 흐른 후 직원실 안에서 평상시 보던 것보다는 덜 손본 상태지만 남해가 기억하던 학교에서의 모습과 거의 닮은 모습으로 지민이 나타났다.
학교에서는 필기도 실기도 둘다 잘하는데다 항상 자신감으로 꽉찬 우등생 그 자체였는데, 얘도 언제나 그런 건 아니었구나.
“네... 네가 왜 여깄어?”
“신부님이 소개해줄 사람들 있다고 데려왔어.”
서로 이곳에서 상대를 만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한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만 돌았다.
지민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한번 내더니 진열되어 있던 감자칩 한통과 그릇 두개를 가져왔다.
“그러는 너는 여기 왜 온 거야?”
“여기 우리 할아버지 가게야. 일주일에도 몇 번씩 와서 가게 일 도와드리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네.”
듣고 나니 이전에 지민이 가게 일 도와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인가 했던 것도 같았다.
지민은 감자칩 뚜껑을 열고 그릇에 반씩 내용물을 쏟아냈다. 남해는 무작위 패로 이리저리 전개를 해보기도 하고 상대의 플레이를 예상하며 이리저리 플레잉을 하다가 지민이 건넨 그릇을 받았다.
“어, 프링글스야?”
“그건 무슨 나라 브랜드야?”
남해는 감자칩 캔에 써진 익숙치 않은 브랜드명을 확인하고선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지민은 남해가 무작위 패로 늘어놓은 전개 결과물을 보더니 자기 몫의 감자칩이 담긴 그릇을 자신 앞으로 당겨오고 후속을 계속 지켜봤다.
전개하고, 끌어오고, 소환하는 결과물들을 계속 지켜보던 지민이 먼저 남해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보기에는 넌 룡성이나 크리스트론보다 자체특소 패특소 덱특소 이런 거 주렁주렁 달린 전개덱을 하는 게 더 성적이 잘 나올 거 같아.”
“이 덱 구성을 엎는 한이 있어도 룡성은 포기 못 해.”
남해의 단호한 대답에 지민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덱에서 카드를 하나 뽑아들고 고민하던 남해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카드에서 시선을 뗐다.
“어, 잠깐만. 너희 할아버지가 이 가게 주인이라고? 그럼 너희 할아버지랑 목사님이 서로 아는 사이인 거야?”
“두분 다 전직 프로였으니까. 뭐야, 몰랐어?”
“지민아! 물건 정리했니!”
“네 알겠어요 이제부터 할게요-”
목사님이나 교장님이 전직 프로였던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지민의 할아버지까지 업계 관계자였고 둘 사이에 친분까지 있을 줄은 몰랐던 남해는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지민이 할아버지의 목소릴 듣고 상자를 향해 후다닥 달려가자 남해의 그림자 안에서 스윽 가이저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민의 뒷모습을 이상한 듯 바라보는 남해의 반응에 가이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뭐야, 저 애한테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 나 지민이랑 그렇게 친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남해의 기억으로는 자신은 사실 지민과 그렇게 자주 대화하진 않았다.
가끔 듀얼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누기는 했고 교내에서 몇 번 접전을 벌이긴 했지만 적어도 자신은 지민을 지인 이상 친구 미만의 애매한 상대라고 여기고 있었다.
-“전력으로 듀얼한 이상 남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의 의지, 자신의 진심을 모두 꺼내서 맞부딪히고 교감했는데 남이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럼... 나랑 이사도 남은 아니네?”
-“빚쟁이랑 채무자도 일단 남은 아니다.”
“오...”
가이저의 우문현답에 남해는 괜히 짧은 감탄을 내뱉고 고갤 끄덕이고는 다시 카드 뭉치를 들고 이리저리 전개도 해보고 필드도 깔아놓으며 이리저리 모의전을 돌렸고 정리가 끝난 지민은 뭔가 볼일이 떠올랐는지 남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오다 말고 카운터로 향했다.
‘이거 난감한데.’
남해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고는 있었지만 넘버즈가 없대도 4축이면 어디까지 카드가 나올지 감도 잘 오지 않는다.
테라나이트 엑시즈들은 확정적으로 투입하겠지만 4축답게 워낙 전술이 유동적인 테라나이트라 그간 로그에서 등장한 몬스터들만 모아봐도 에메랄부터 공아랑까지 4축 몬스터라는 것만 공통점이었다.
아예 16강 로그에선 상황이 막막하자 엑스칼리버를 꺼내 깡타점으로 밀어붙이는 것까지 있던 걸 읽은 뒤엔 혀를 내두르고 싶을 정도였다.
“자, 실물 카드가 역시 있어야지.”
남해가 끙 하고 앓는 소릴 내며 고민하던 그때 지민이 손에 카드 뭉치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지민은 남해의 앞자리에 털썩 앉아서 다른 손에 들고온 장패드를 자신의 자리에 깐 다음 카드 뭉치를 섞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되는 건데 할아버지가 나목사네 애들은 이정도는 해줘도 된다면서 허락해주셨어.”
지민은 카드 뭉치에서 다섯 장을 뽑아서 쥐더니 패에서 몬스터를 한 장 냈다. [사테라나이트 베가]였다.
그림자 안에서 슬쩍 고개를 내민 가이저는 과연, 하고 고갤 끄덕였다.
-“가게라면... 확실히 매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대충 모은 거라 걔 덱이랑은 좀 다를 거야.”
지민이 패에서 카드를 내고 턴을 넘기자 남해도 역시 패에서 카드를 내고 덱에서 다른 카드를 가져오며 맞대응했다.
대충 모았다는 말과 달리 지민이 가져온 덱은 꽤나 내용물이 충실했는지 공세를 견디고 반격해서 다시 밀어붙이던 남해는 한 발짝을 남겨두고 결국 졌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 네 번에선 간신히 이길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쉽지 않았다.
다섯 번째의 듀얼이 끝나고서 남해는 조금 지쳤는지 몸을 뒤로 쭉 빼고 몸을 쭉 늘어트린 다음 곰곰이 패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꾸 한발짝이 모자라다. 승리를 다 붙잡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코앞에 승리를 두고서 마지막으로 테라나이트가 던지는 승부수를 막지를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승 진출은 절대 확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남해 너는 왜 듀얼을 하는 거야? 프로 듀얼리스트가 목표는 아닌 것 같은데.”
한창 고민하던 찰나에 예상치 못하게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지민의 질문에 남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다른 세상에서 왔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듀얼 에너지를 모으고 있다고 말한다면 누구라도 괴짜로 취급할 것이다.
남해는 잠시 고민 끝에 결국 입을 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남해가 쌓아온 학력, 지식, 경험은 모조리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고 남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것 정도였다.
그리고 돌아갈 수 있다는 막연하고 희미한 꿈에 조금이라도 가망이 붙어있는 방법도 이 듀얼 뿐이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 뭐...”
“그럼 너는?”
“나? 나는 가게 물려받을 생각이지만 그러려면 듀얼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니까. 무슨 카드가 대세인지, 메타는 어떻게 흐르는지, 룰 개정은 어떤지... 그런 거 하나도 모르면 어떻게 가게를 끌고 가겠어?”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강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해는 그 말까지 굳이 하진 않았다.
그래도 그 이야기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뭔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이런 지민도 액셀 싱크로를 할 수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를 못하다. 처음으로 트리슈라의 소환을 시도한 날 너무 아무렇지 않게 트리슈라의 소환이 불발되고, 그러길 몇 번이고 시도한 다음에야 액셀 싱크론을 경유해서 간신히 트리슈라를 소환할 수 있었다.
몇 번을 그러고서는 액셀 싱크론 없이도 트리슈라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도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한계점은 트리슈라[까지] 였다.
그 이상의 택틱스를 요구하는 싱크로 몬스터는 남해에겐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원래 세상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소환하던 피니키시온 같은 카드라도,
“너 아직도 액셀 싱크로 같은 거 못하는 거야?”
“응...”
“끙, 내가 이런 애한테 졌다니.”
-“그러게 말이다.”
둘의 대화 사이에 가이저가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편인 가이저까지 이런 소리를 하자 남해는 괜히 뾰루퉁해져서 입을 비죽 내밀었다.
“넌 언제부터 얘가 보인 거야?”
“가이저 말이야? 아마... 올해 초부터 소리가 들리거나 모습이 보이거나 했는데 이렇게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건 4월부터였어.”
“카드로 처음 만난 건?”
“음... 2년 정도 됐나?”
만화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정령이 보인다는 것은 굉장히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일이었다. 가이저는 그래도 평소에 그림자 안에 숨어있으니 크게 걸리적거리진 않지만, 여타 정령들이 시야를 가리거나 때론 자신과 접촉했다가 서로 놀라는 일은 정령이 보인지 한달이 넘은 지금도 학교는 물론 거리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햐, 이런 말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대체 누가 이런 거 보인다고 하면 믿겠어?”
“맞아. 교회 사람들한테도 말 못하고 있는걸.”
“어릴 적부터 얼마나 불편했는데. ...아, 너 말하는 건 아냐.”
맞는 말이다. 남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정령이 붙은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선에서는 자신을 포함해 지민과 미자까지 셋뿐.
물론 이런 사실을 털어놓지 않은 사람 중에서 정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확실한 사람은 고작 셋이다. 이걸 누가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엔 이런 능력이 있으면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남해는 괜한 투정을 부리며 카드를 정리했다.
이세계에 오기 전에 가끔 읽던 소설 같은 데서는 이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은 특별한 힘을 얻고, 대활약도 하고, 겸사겸사 자기 좋다는 여자들도 무더기로 달라붙는 내용이 나왔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자신은 그래도 운이 좋아 교회에 얹혀라도 살고 있지, 하마터먼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 신세가 될뻔했다.
특별한 힘이란 것도 기껏해야 귀신을 보고 대화나 하는 무슨 무당 같은 능력일 뿐이고 치트 플레이니 뭐니 하는 건 “스포츠화”라는 규격에 의해 평준화 당하면서 그럴 일 없는 상황이 되버렸고...
-“뭐야, 할 말이라도 있나?”
...여자는 무슨. 무시무시하게 생긴 가이저 정도나 붙어있지. 16강에서 만난 진호라는 애나 8강의 미자와 함께하는 정령들이랑은 비교하기도 미안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룡성 같은 칙칙하고 기기괴괴한 애들이 아니라 아로마나 령사 같은 화사한 덱을 쓰는 건데...
-“네놈 표정 다 읽힌다. 속으로 내 흉을 봤구나.”
언제나처럼 남해의 표정을 읽은 가이저의 눈치는 년 단위로 덱 에이스로 굴렀던 카드답게 기가 막히게 빨랐다.
무슨 개그맨 콤비처럼도 보이고 절친한 친구처럼도 느껴지는 대화와 흐름이 오가는 둘을 보며 한번 피식 웃은 지민은 자신 옆에 두둥실 떠오른 빛나는 구체로 시선을 옮겼다.
지민의 파트너 섬광룡의 영체였다.
“정령을 볼 수 있다고 다 같은 사이는 아니구나.”
얼굴을 가이저의 쇠몽둥이 같은 손가락으로 쿡쿡 찔리며 이리저리 몸부림치던 남해는 지민의 이야기에 잠시 몸부림을 멈추고 다른 애들과 정령들의 사이를 떠올려보았다.
어느 상황에서나 옆에서 응원해주고 믿어주는 꼭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애매한 사이 같은 진호와 윈다.
철부지에 눈치 없는 아가씨와 그녀를 항상 옆에서 보조해주고 지도해주는 가정교사 같은 사이의 미자와 하스키.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가르침을 부탁하는 제자와 그 가능성을 보고 손을 내밀어준 스승처럼 보이는 윤수와 둑스.
옆에 항상 붙어있으면서 이렇게 충돌하기도 하지만 갈 길을 헤멜 때마다 조언을 해주고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함께 해주는 절친한 친구 같은 사이의 자신과 가이저.
다들 정령이 옆에 붙어있었지만, 그 관계도 서로의 역할도 영향도 다 달랐다.
지민과 섬광룡의 관계에 대해서도 남해는 물어보려 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섬광룡을 바라보는 지민의 표정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가족과 함께 있는 편안한 얼굴이었으니까.
‘가족...’
돌아가자. 가족에게 돌아가자. 그런 생각으로 달려오다가 다시 가족에 대해 생각하니 남해는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가족과 떨어진 날도 이미 세자릿수를 지났고 슬슬 가깝지 않게 지낸 친척들의 목소리와 얼굴은 기억나지 않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대체 무엇이...
“남해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남해의 어깨에 누가 손을 얹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가 끝난 나의주 목사가 남해를 데리러 매장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가이저도 둘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남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목사의 뒤쪽에는 채은월 교장을 비롯해 아까 남해가 들어오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인사하며 가게를 떠나고 있었다.
“아니면 좀 더 있다가 오겠니?”
...
“착하지, 착하지?”
이사는 동네 외곽에 한 주택 앞에 쪼그리고 앉아 덩치가 자신만큼은 될법한 개 한 마리의 턱을 긁어주고 있었다.
개는 경계심은커녕 조금의 긴장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그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루시펠은 그런 이사의 뒤에서 말없이 이사를 지켜볼 뿐이었다.
“학생, 물러나.”
그 때, 주택 안에서 개의 주인이 나타나 이사에게 경고했다.
이사는 계속 개를 긁어주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 개 주인을 바라봤고 개 주인과 이사는 서로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먼저 개 주인 쪽에서 입을 열었다.
“학생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우리 용철이는 사냥개야.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게.”
개 주인은 이사에게 그 사냥개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다음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런 개 주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루시펠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이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사는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개를 쓰다듬는 일에만 신경 쓸 뿐이었다.
“옳지. 착한 아이구나.”
한참을 개 주인이 들어가버린 현관문과 사냥개를 번갈아 쳐다보던 루시펠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후 이사의 그림자 안으로 스르륵 녹아들어 갔다.
‘이제 곧 4강. 그 다음은 결승... 그래, 그래. 기다려. 내가 뼛속까지 귀여워 해줄테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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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안그래도 한달주기로 글을 쓰는 게으름벵이가 한달주기마저 넘겨버렸습니다 으으으으 일하지 않아도 돈이 나오면 좋겠어... 일 힘들어...
그동안은 진짜 미친개마냥 스토리만 쭈우우우우우욱 달려왔습니다만, 쉬는 타임도 필요한 것 같고... 한번은 정리도 필요하겠다 싶어서 일상편을 들고 왔습니다.
결승전은 쓰고 싶은데 그 과정이 귀찮고 험난하네요... 구상으로는 2시즌 3시즌도 있지만 과연 이걸 완결낼 수 있을지도 불안합니다.
막 구상안에는 덱도 여러개 쓰고 싶고, 눈 뒤집혀서 턴킬이나 한데스 같은 거 하는 것도 쓰고 싶은데 갈길이 너무 멀어용...
여담으로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관한건데요. 나름대로 다들 모티브가 있긴 있어요.
이이사 - 리리스莉莉斯의 한자독음.
지미자 - 지미코地味子의 한자독음. 수수하고 촌스러운 여자애를 부르는 단어.
고웅혜 - 컨셉의 모티브가 된 캐릭터의 이름이 타카오(고웅)이었음. 모교인 애탕고(애탕)은 모티브가 된 캐릭터의 자매 이름.
양은하 – 테라나이트 유저라 은하라는 이름을 지어줌
그 외에도 진호나 윤수, 박준오처럼 프로게이머 같은 운동선수들한테서도 종종 이름을 따오곤 합니다.
항상 글 제목이 두글자 고정인 것도 모티브가 된 소설이 있는데... 괜한 짓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상한 거 보고 뽕차지 마세요.
일상편을 하나 썼으니 다음에야말로 4강 로그. 이제 결승도 코앞.
혹시라도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댓글로 이야기 해주세요. 답글 달아드리겠습니다!
끝으로, 글 읽어주신 여러분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드래그니티의 정령쪽은 이번 지원받고 날아오르것군요잉, RR, 팬나,.... 점점 무궁해지는 카드군들인것 열심히 건필해봅시당,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잉 ㅎㅎ
드래그니티의 정령쪽은 이번 지원받고 날아오르것군요잉, RR, 팬나,.... 점점 무궁해지는 카드군들인것 열심히 건필해봅시당,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잉 ㅎㅎ
원래는 드래그니티에게 2시즌 쯤에 10기 신규지원 쓰는 모습을 쓰려 했는데 이번에 스트R 지원이 또 나올줄이야... 글 쓰는게 늦어지니 이런 반동이 오는군요 대회 일정도 얼마 남지 않았고, 다시 힘내야지요!
지미자 모티브가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1930년대 할무이들 이름같더라니만 그보다 이번 에피소드가 쉬어가는 화라고는 하지만, 남해의 고충과 듀얼력이 모자라면 액셀 싱크로도 못 꺼내는 배경 설정 등등 디테일이 많이 보여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점점 독해력이 떨어져서 듀얼로그 읽기도 힘들어ㅈ읍읍 저도 이런 디테일을 많이 집어넣을 수 있도록 분발해야 할 것 같네요 근데 나는 소설 언제 다시 쓰냐
넴 그렇습니다. 캐릭터성을 고려해 대놓고 촌스럽게 지어주고자 비틀지도 않고 그대로 읽어버렸지요 덱도 최초 구상시에는 마돌체나 고스트릭이었습니다만, 그외의 모티브가 된 캐릭터들을 고려해 오타쿠력도 높이고 [미자]란 이름도 살릴 겸 드래곤족인 드래곤메이드로 노선을 변경했습니다. 원래는 4강을 바로 집필하려 했는데 문득 너무 스토리만 달려온 것 같아서 자잘한 배경설정도 좀 풀고 캐릭터들이 갖는 고충도 털어놓을 겸 일상편도 필요하겠다 싶더라구요. 2부는 일상편좀 왕창 넣고 싶은데... 과연 2부를 쓸 근성이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