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동 인원을 구하는 게시판을 보며 남해는 고민하고 있었다. 벌써 30분은 지난 상황이었다.
-“그렇게까지 고민할 거리냐?”
“고민거리지.”
작년 한해를 돌아보면 그랬다. 교대표로 시작해서 온갖 대회를 나간다고 동아리 활동은 몇 번 해보지도 못한 채 일년을 보냈다.
심지어 동아리 활동도 일찍 끝나는 사실상의 귀가부라 그나마 참여한 부활동도 하나마나한 일들이었지.
“으으으음…”
영화부를 비롯해 흥미가 가는 대부분 동아리는 진즉에 인원이 가득 찼다.
종교부? 남해는 종종 심신의 안정이 필요하면 성호를 긋기도 했지만 학교에서까지 종교 활동을 할 생각은 없다.
-“도서부는 어떻습니까 주군? 책은 마음의 양식. 사람은 배만 채울 것이 아니라 머리 또한 채워야 하는 법입니다. 낙랑 아씨 또한 도서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얜 지금 카드만 읽기도 머리 아플 걸. 몸을 좀 쓰는 동아리들은… 다들 꽉 찼군. 이런.”
괜찮은 동아리는 자리가 없었고 그나마 자리가 있어도 썩 내키는 곳이 보이질 않았다.
“그림 동아리… 여긴 나랑 안맞을 거고… 프라모델부는 벌써 다 찼구나… 한자부. 윽. 안가.”
남해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어느 부분에서 멈춰섰다.
[오컬트 동아리]. 여타 동아리와 달리 동아리를 광고하는 종이 내용도 허접했고 별로 괜찮아보이는 내용도 없었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넌 귀신이 안 무섭냐?”
“네가 더 무서워 임마.”
-“주군 말이 이번만큼은 옳습니다.”
-“난 귀신 같은 건 질색이다.”
“너 귀신 아니었어?”
아직은 동아리 결정에 대한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한번 탐방이나 해볼까. 남해는 발걸음을 그 방향으로 옮겼다.
위치는 4층의… 위치도 참 구석이다.
…
“실례합니다. 동아리 활동으로 왔는데요.”
"와… 와아… 어, 어서와… 그, 입부 신청하러 온 거야…?"
부석부석하고 약간 곱슬진 머리, 뽀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피곤하고 흐리멍텅한 눈빛.
동아리 부장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참 오컬트부 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그, 그치… 여기서… 어딨더라. 아, 이거 작성하면 돼, 랄까…"
"아… 네…"
남해는 동아리실 안을 한번 슥 둘러봤다. 1학년 때도 이곳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대충 영화를 틀기 위한 커다란 프로젝터가 책상 위에 얹혀있었고 창문에는 암막커튼이 드리워 있었다. 형광등은 하나가 나갔는지 참 을씨년스러웠다.
한쪽 구석에는 부장만큼이나 참 오컬트부하게 생긴 부원 한명이 말없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신비주의 구락부라더니 안의 광경마저 참으로 신비주의자들 모임 같은 풍경이로고…”
바닥에는 위저보드가 놓여있었고, 점을 칠 때 쓰는 수정구나 타로 카드도 있었다. 그 외엔 뭐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종이와 촛불도 보였다.
책장에는 빛바랜 괴담집이나 호러 소설 같은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낡은 물건이었다.
“강… 남… 해… 남해… 아! 그… 교대표! 교대표구나! 난 안소야라고 해… 매니지먼트부 3학년이야…”
“아, 예… 반가워요 안소야 선배.”
‘매니지먼트과… 나애리 걔가 매니지먼트과였지…’
남해가 슥슥 써내려간 입부 서류를 소야는 보물처럼 받아들더니 총총 걸어가 교탁 위에 얹어놓는다.
그리고는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돌아왔다.
가뜩이나 다른 동아리들과는 동떨어진 자리에 위치한 오컬트 동아리지만, 그나마 주변에 있는 동아리들마저 도서부처럼 조용히 활동하는 곳이었기에 안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소야 부장의 발소리 뿐.
퀴퀴한 동아리실 냄새와 섞이니 이 고요함은 편안하고 조용한 것보다 어색하고 불길한 침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으헤… 한명 늘었다…”
“그럼 저는-”
“그, 그치! 자, 잠깐만!”
입부 서류를 냈으니 이야기할 거리도 별로 없다. 남해가 돌아가려고 하자 급하게 소야가 남해를 불러세웠다.
“아, 아! 아니, 오늘 저녁에… 현장답사 가려고 했는데…”
“현장답사요?”
“으… 응. 학교 근처에 그… 심령 스팟… 있다길래…”
-“그건 좀 무서운 이야긴데.”
-“가이저 공, 너무 그러지 마시지요. 원래 학교란 막대한 양기가 실리는 곳이라 무덤 근처에 지어지는 일이 꽤 흔합니다.”
남해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조금 올려 남해를 쳐다보던 소야는 한참동안 손만 꼼지락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도… 같이 갈래…?”
남해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 아직 동아리를 정할 기간은 여유가 있으니 한번 뭐하는 동아리인지나 확인해보면 되겠지.
“네, 갈게요. 시간은요?”
“그, 그치! 연락처 줄테니까… 헤헤… 헤헤헤헤…”
소야가 급하게 팔을 들었다. 그리곤 교내 범용 D-패드의 블루투스 기능을 켜기 위해 한참이나 손을 꾸물거렸다.
소야의 준비가 끝나자 남해는 익숙한 듯 순식간에 D-패드의 블루투스 기능을 켰다.
띠링-! 맑은 효과음과 함께 연락처 교환이 끝났다. 남해는 다른 부원과도 번호를 교환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지만 그 부원은 보이지 않았다.
‘뭐, 약속 시간이 되면 오겠지…’
남해는 대충 넘겨버리고 D-패드를 다시 확인했다. 그새 소야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있었다.
…
“이정도면 되나?”
봄이지만 아직도 해가 지면 공기가 쌀쌀했다. 하늘은 어느새 꽤 어두워졌다.
적당히 입은 옷 위에 얇은 잠바를 하나 걸친 후 남해는 손전등을 비롯해 필요한 도구를 조금 챙겨 교회를 나왔다.
띠링-! D-패드의 알림음이 울렸다. 소야에게 온 문자였다.
-“묵주?”
남해의 손에는 묵주가 하나 들려있었다. 그 묵주를 보고 의아한 듯 가이저가 물었다.
“응, 전에 대회 있을 때 목사님이 하나 챙겨주셨어.”
-“너희 목사 나이롱 목사잖냐.”
-“심적인 것도 중요하긴 합니다… 그래도 못미더운 것 또한 사실입죠.”
가이저와 용연은 영 미덥지 못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남해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목사님은 목사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신앙심은 얕고 포교나 종교 활동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고 계셨으니.
사실 남해도 생각은 비슷했지만.
“아…! 왔구나…”
약속 장소로 이동한 남해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소야와 만났다. 소야 또한 교복 대신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소야의 이미지다운 칙칙하고 시커먼 옷이었다. 낮의 그 부원은 보이지 않았다. 안 나온 것인지, 아니면 대충 간보고 아니다 싶어서 입부를 취소했을 수도 있다.
“설마 저희 둘이만 가나요?”
“으, 응, 그렇게 되겠네…”
남해는 굳이 이야기를 더 잇지 않았다. 소야 선배는 여전히 눈치만 살피며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앗, 찾았다. 이쪽이야…”
소야의 안내를 따라, 남해는 학교 근처 산길로 들어갔다. 산길 입구에는 그래도 밭도 보이고, 판자로 세워진 공장도 보였다.
어둑어둑하지만 빛이 곳곳에 있어 그래도 좀 지날만 했지만… 제대로 산길로 접어들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남해와 소야는 손전등을 켰다.
산길 입구에 누군가 있었다. 아까의 그 아이… 같았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두워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표지판을 지나 내리막길로 들어서자 부원은 어느새 남해의 뒤를 졸졸 따라와 일행에 합류했다.
“저긴가요?”
남해는 손전등을 들어 저 멀리를 가리켰다. 산길 입구를 지나 나온 분지에 주택 같은 것이 보였다.
멀리서 보이는 모습은 자세하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보이는 모습도 꽤 을씨년스러웠다.
가까이 가서 보면 벽의 페인트는 거의 다 벗겨졌고, 지붕을 비롯해 곳곳에 낙엽이나 나뭇가지 같은 부스러기들이 잔뜩 보였다.
마침 구름이 끼어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참 저 주택에 어울리는 날씨였다.
“와… 가… 가까이 와보니 생각보다… 더… 무섭네…”
“이정도면 귀신 나온다고 괴담 돌 법도 하네요.”
남해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문은 끼기기긱 쇠긁히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도어스토퍼를 내린 남해는 안을 손전등으로 가볍게 훑었다.
-“흐으음…”
이런 곳에서 가이저의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귀신이 옆에서 중얼거리는 것 같아서, 남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남해가 뒤를 돌아보자 부원이 때좋게 안으로 따라왔다. 얘는 겁도 없나보다.
“선배는 안 들어와요?”
“아! 그… 그래… 그렇지… 그렇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오컬트 동아리 부장인 소야가 남해보다 겁이 많았다. 소야는 벌벌 떨며 손전등 밝기를 키우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야까지 들어오고 남해는 그제야 주변 모습을 하나씩 확인해갔다.
깨진 유리창, 찣어져서 솜이 튀어나온 소파, 문 하나가 빠지고 열려있는 옷장.
벽지는 색이 빠지고 너덜너덜한 벽지들이 축 처진데다 내벽은 구정물이 위에서부터 흐른 자국이 남아 매우 보기 흉했다.
다른 벽은 먼저 왔다간 사람이 장난쳤는지 스프레이로 아무렇게나 낙서가 되어 있었고, 이곳 또한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긴 진짜로 뭔가 있는 모양입니다.”
-“뭐?”
-“예부터 양지바른 땅, 배산임수, 홍동백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이곳은 그 가장 나쁜 사례 그 자체입니다.
낮은 지대에 있어 물이 흘러들어오고, 산이 남쪽에 있어 햇빛을 막아 양기가 없고 음기만 가득하니, 그야말로 귀신이 꼬이라고 잔칫상을 차려놓은 곳입니다.“
용연의 이야기에 남해는 벽을 슥 보았다. 찢어진 것은 비단 벽지만이 아니었다.
벽에 붙어있던 부적 대부분은 너덜너덜해져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용연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마침… 얼마 전에 있던 봄비에 벽의 부적마저 뜯겨나갔으니 무슨 일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부적?”
-“무언가 억눌러두고 싶은 존재, 풀려나면 안될 존재,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벽 역시 부적 위에 낙서가 되었거나 벽지처럼 색이 다 빠진 부적이 붙어있었다.
용연의 표정이 불편하게 변했다. 하나같이 이미 효력을 다해 휴지조각이 되었거나 훼손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물건뿐.
정말로 여기 무언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있지, 그… 그럼… 한번 귀… 귀신을… 불러 볼게…”
소야는 덜덜 떨면서 가방에서 촛불과 부실에서 본 종이를 꺼냈다. 그 다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공포에 손가락 마디마저 절어버린 탓인지, 아니면 그냥 데일까봐 그런지 라이터를 켜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있지 않았다.
그렇게 틱, 틱, 부싯돌이 일곱번을 소리만 내고서야 조그마한 푸른 불꽃이 올라왔다.
“에헤헤… 켜, 켜졌다.”
종이에는 붉은 펜으로 뭐라 써져있었고, 가방 안에서 작은 봉제인형을 꺼내 소야는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여덞 번의 심호흡을 하고서 눈을 감고 종이 앞에 무릎을 꿇고 이상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여기가 뭐라고 넷씩 끌고 왔을까.”
남해가 괜히 중얼거린 혼잣말에 가이저도 고갤 끄덕였다.
그때 남해의 그림자로 도로 들어가려던 가이저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넷을 끌고 와?”
“너랑 용연 합쳐서 소야 선배가 넷 데리고 왔잖아.”
-“그럼 네 명을 끌고 온 것이 아니고, 네 명씩 온 거겠지. 너, 쟤, 나, 용연. 이렇게 넷이잖나.”
“걔 이름도 모르는 부원도 있잖아. 나 다음에 들어온 애.”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처음부터 그 동아리는 너랑 저년 둘 뿐이었어.”
남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손전등으로 등 뒤를 비춰보았다.
얼마 전의 봄비로 흙은 아직 축축했기 때문에 남해와 소야가 걸어간 자리는 새로 생긴 흙발자국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부원이 지나간 자리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꼭 이 때를 기다린 것처럼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촛불도 훅 꺼졌다. 공기가 차갑다 못해 시리고 부장의 기분 나쁜 주문도 어느새 멈췄다.
“선배?”
남해가 다시 몸을 돌려 확인해보니 소야는 쓰러져 있었다.
밖에서 불어온 돌풍에 건물 안이 혐오스런 소리를 내며 울렸고 소야와 남해의 손전등이 동시에 불이 꺼졌다.
남해는 여유를 잃고 주위를 바쁘게 두런거리며 손전등을 다시 켜려했다.
밖에서 빛이 새로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어둠 안에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꾸물거리며 이리저리 굽이치던 그림자 중 천장의 녹물자국에서 뻗어온 그림자가 남해에게 그 비수를 내리찍었다.
캉-!! 남해를 덮쳐온 그림자는 이내 불티를 튀기며 튕겨났다. 남해의 묵주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림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바닥에서부터 남해를 향해 그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었다.
남해의 그림자 또한 일렁였고 그 칼끝이 남해에게 닿기 전, 가이저의 커다란 손이 그림자를 낚아채 마치 어망을 끌듯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그림자 위에서 노란 불티가 튀기며 용연의 상검이 드러났다. 한순간에 그림자의 촉수가 토막났다.
아무것도 없던 양 잘려나간 그림자도 흩어졌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오, 오…”
가이저가 그림자 안에서 긴 목을 빼내 남해의 오른편을 경계했고, 용연 또한 등을 가이저와 맞대고 남해의 왼편에서 금빛 상검을 겨눠 남해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범 아가리에 고갤 들이민 줄 알았느냐. 지금 그 아가리 안에 예검 두 자루가 세워져있다. 그 턱주가리를 닫는 순간 네년에게 못볼 꼴이 뭔지 보여주마!”
용연이 목청을 높여 허공에 소리쳤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참동안 남해의 주위를 몰아치던 그림자는 서서히 남해의 주변에게서 물러서다가 소야의 그림자 속으로 슈우욱 들어갔고 쓰러져있던 소야는 마치 인형을 억지로 일으키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너는평범한 수로는 안 되겠구나.”
소야의 목소리도 억지로 긁어서 내는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다.
가이저의 핏빛 눈동자가 타오르듯 이글거렸고 남해도 묵주를 꽉 쥐고 잔뜩 긴장한 채 부장을 쳐다봤다.
그림자는 물러나 거리를 벌린 후에도 남해에게 불규칙하게 공격해왔다.
-“저 처자는 최악의 재능이외다. 기가 허하고 음기만 가득해 귀신이 머물기 최적화된 몸이나 정작 본인이 요기를 느끼는 감각이 둔해 재해를 면하기는 어렵다니.”
“용연! 태평하게 설명하지 말고 뭐라도 방법을 말해봐!!”
-“별 수 있겠습니까! 구마해야지요. 화기火氣나 양기陽氣가 필요합니다!”
무슨 수로 구할 것인지도 말해야지. 가이저는 그 말을 꺼내려다 참았다. 아주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양기든 화기든 음기든.
-“주군, 결투는 자신 있으십니까?”
“듀얼이라면 항상 그렇지!!”
남해가 소리치자 용연이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네년이 지박령인지, 비틀린 가택신인지, 지나가던 잡귀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있을 터! 그렇다면 우리 주군과 결투로 정하도록 하자!”
“뭐?”
용연의 외침에 그림자의 공격이 멎었다. 그리고 주위가 어둠으로 뒤덮히며 조금의 빛이 새어들어오던 깨진 창문마저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끝을 모르는 시커먼 암흑 속에서도 남해와 소야의 모습만은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전에도 해본 적 있었다.
“어둠의 듀얼…”
둘의 D-패드가 조작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인가 하고 놀라기에 앞서, 어쨌든 결투 승인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라 일동은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물러날 곳이 없다. 베어버리고 넘어서 가는 수밖에 없다.
‘아니 근데 귀신도 듀얼이라니 이래도 되… 겠구나.’
생각해보면 원래 세계에선 개나 원숭이도 듀얼을 하는 걸 본 적 있는데, 듀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에너지까지 발전시키는 이세계에서 귀신이 듀얼하는 것 정도야 무슨 문제일까.
선제 공격권은 소야 선배의 몸을 차지한 귀신에게로 돌아갔다.
“카드패하나 버린다. 패. [다크 오컬티즘]. 발동. 덱. [위저 보드]. 패에 넣는다.”
소야는 꼭 누가 인형을 붙잡고 움직여주는 것처럼 기괴한 움직임으로 어렵게 카드 하나를 뽑아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그 카드 또한 아주 부자연스럽게 휘날려선 D-패드의 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몬스터 세트, 카드 세트, 두장. [일시 휴전]. 발동. 덱, 드로우. 턴 종료.”
-안소야/패 1장/LP 8000
“드로우. 그럼…”
[일시 휴전]의 효과로 패는 7장이나 되지만 이번 턴 안에는 승부를 볼 수 없다. 소야 선배의 덱은 위저 보드 덱. 남해는 패 한 장을 일단 뽑았다.
‘확실하게 카드를 무효로 하는 카드가 있다면…’
세트 카드 중 하나는 틀림없이 [위저 보드]. 발동 자체를 무효로 하는 카드는 지금 남해의 덱에는 몇 장 존재하지 않는다.
퍼미션도 하고 기동효과로 제거도 되면서 양호한 능력치에 소환하기도 쉬우면서 상황에 맞춰 교환도 되는 몬스터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 그런 사기적인 몬스터가 있을 리 없지.
“패에서 [천위룡-아슈나]를 특수 소환하고 아슈나를 링크 마커에 세트, 링크 1 [천위의 권승]을 링크 소환한다.”
[천위의 권승/Lnk-1/↓/1000]
“그 다음, 패에서 [텅 빈 용륜]을 발동. 덱에서 [천위룡-비슈다]를 묘지로 보내고 [천위룡-아다라]를 패에서 넣은 다음 [상검사-태아]를 일반 소환. 태아의 효과로 묘지의 아슈나를 제외해서 상검 토큰을-”
“효과발동. 패, [말살의 사악령]. 묘지, [커스 네크로피어], 특수 소환.”
[커스 네크로피어/Lv8/2800/2200]
용연은 찌푸린 얼굴로 칼 손잡이에 자꾸 손을 가져갔다. 저 몬스터는 그냥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코를 찌를 정도로 혐오스런 영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소야라는 저 아이는 최악의 재능에 덱까지 저런 걸 쓰고 있으니 언젠가 이런 일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주군이 있을 때 이런 일이 터진 것이 다행이다.
“파괴당하면 필드를 견제하는 카드. 그렇다면 레벨 4 태아에 상검 토큰을 튜닝! 별을 잇는 용이 되어라! 레벨 8, [휘룡성-쇼후쿠]!!”
[휘룡성-쇼후쿠/Lv8/2300/2600]
쇼후쿠의 등장과 함께 필드에도 빛이 돌아왔고 쇼후쿠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빛이 흩날렸다. 소야는 빛에 거부감을 느끼듯 몸을 움츠렸다.
“태아의 효과로 덱의 [광룡성-리훈]을 묘지로! 그 다음, 쇼후쿠의 소재로 사용된 환룡족 몬스터의 속성은 둘!
커스 네크로피어와 가운데의 세트된 카드를 덱으로 되돌린다!”
쇼후쿠가 포효와 함께 밝은 파동을 몸에서 내뿜었다. 파동에 닿은 두 카드는 그림자가 걷히듯 스르륵 사라졌다.
남해는 D-패드를 한 번 눌러 배틀 페이즈로 들어갔다.
“쇼후쿠로 세트된 몬스터를 공격한다! 환룡파!”
쇼후쿠가 토해낸 섬광의 브레스가 세트된 몬스터에게 작렬했다. 그 직후 바닥에서 올라온 붕대들이 쇼후쿠를 칭칭 옳아멨다.
남해가 반응하기도 전에 쇼후쿠는 바닥의 그림자 안으로 끌려갔다.
잠시 후 쇼후쿠를 집어삼킨 그림자 안에서 이상하게 생긴 몬스터가 올라왔다.
“저 카드는…”
-“[그레이브 스쿼머]. 꽤 옛날 친구로군.”
마치 남해를 비웃듯 몸을 비비 꼬며 끅끅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던 그레이브 스쿼머는 다시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카드 두장을 세트하고 턴 종료.”
-강남해/패 4장/LP 8000
“발동, [죽음의 선고], [위저보드].”
-“제기랄, 꽝을 뽑았군.”
-“살아도 저 둘이 살다니.”
“[죽음의 메시지]. 한장 낸다. 악마족, 두장, 패에 넣는다.”
소야의 묘지에서 [그레이브 스쿼머]와 [원한의 사악령]이 패로 들어왔다. 턴을 받은 소야는 다시 기분 나쁜 움직임으로 덱에서 카드를 한 장 뽑았다.
“몬스터 세트. 카드 세트. 턴 종료.”
-안소야/패 1장/LP 8000
“드로우.”
세트된 몬스터는 당연히 [그레이브 스쿼머]일테고, 그러면 남은 패는 아마 당장은 쓸 수 없는 [원한의 사악령].
남해는 패를 살피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가슴팍에 성호를 그렸다.
“그래, 그럼 메인 페이즈 돌입! 묘지의 비슈다의 효과를 발동! 패로 올릴 카드는 당연히-
위저 보드의 아래에서 검은 용오름이 솟구쳤다. 용오름이 위저 보드를 집어삼키자 그 옆의 악령도 함께 필드에서 사라졌다.
“그 다음엔 패의 [천위룡-아다라]를 특수 소환하고, 아다라를 릴리스해 세트한 [천환의 용륜]을 발동!”
팡-!! 남해를 중심으로 금빛 파동이 퍼져나갔다. 밝아진 남해의 필드로 두 마리의 환룡족 몬스터가 밝은 빛을 뿌리며 나타났다.
[천위룡-아슈나/Lv7/1600/2600]
[일루미라지/Lv3/1600/1000]
“용륜의 효과로는 환룡족 몬스터 [일루미라지]를 패에 넣고, 묘지의 아다라를 제외해 제외된 [천위룡-아슈나]를 패에 넣은 다음!
패의 아슈나를 특수 소환하고, 일루미라지를 일반 소환해서 레벨 7 아슈나를 레벨 3 일루미라지에 튜닝! 영봉의 통치자! 레벨 10 [상검대공-승영]을 싱크로 소환!!”
남해 곁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아까의 소름끼치는 한기와는 다른, 약간 서늘해 체온을 살짝 낮춰주는 신선한 냉기였다. 살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대검을 든 푸른 용인이 남해의 뒤에서 나타났다.
[상검대공-승영/Lv10/3000/3000]
위저보드가 전부 모였을 때 승부에서 패배한다면, 다 모이기 전에 승부를 보면 그만이다.
생각해보면 첫 어둠의 듀얼도 작년 이맘때 즈음이던가. 어둠의 듀얼은 오랜만이지만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로 긴장하기엔 그 일년간 남해는 정말 전쟁터를 헤치고 다니듯 듀얼을 반복해왔다.
남해의 눈에 승리에 대한 의지가 한창 불타올랐다.
“배틀! 권승으로 세트된 몬스터를 공격!”
권승은 세트된 그레이브 스쿼머를 격파했고, 그레이브 스쿼머는 파괴되면서 권승을 붙들고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승영을 막아설 장애물이 더 없자, 승영은 거리낄 것 없이 빈 필드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나뭇가지라도 휘두르듯 가벼운 동작과 함께, 승영이 검을 휘두르자 그 동작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충격파가 일어나며 커다란 검기가 소야를 덮쳤다.
-안소야/LP 8000 → 4800
“턴 종료.”
-강남해/LP 8000/패 3장
검기가 사라지며 소야의 몸도 절반 조금 안되게 없어졌다. 꼭 그림자에 먹힌 듯 남은 부분의 경계는 흐릿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때의 그것과 똑같은 풍경이다.
정신적인 것과 별개로, 상황은 충분히 낙관적이다. 어드밴티지 차이도 벌어지고 위저 보드도 또 한턴 뒤로 밀어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이 정도 쯤은 문제없다.
남해는 이제 상대의 플레이를 기다렸다. 맞설 수단은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
“드, 로오. 우. 묘지. [다크 오컬티즘] 제외… 죽음의 메시지 한 장… 되돌린다. 한 장 드로우…”
“승영의 효과 발동! 필드의 [죽음의 선고]와 묘지의 [그레이브 스쿼머]를 게임에서 제외시키겠어!”
상검대공-승영/A 3200 → 3500
소야는 팔을 이리저리 비틀며 방금 드로우한 카드 하나를 어색하게 필드에 냈다.
“[암흑 성역]. 발동.”
“저 카드는…”
오랜만에 남해가 원래 세계에서 본 적 있는, 남해도 아는 카드가 나왔다. 그래서 더욱 반갑지 않은 카드였다.
소야의 등 뒤로 새카만 성채가 우르르 울리는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성의 열린 창문에서부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곳곳엔 커다란 눈동자들이 불규칙하고 난잡하게 떠있어서 혐오감을 배가 시켰다.
저 징그러운 비주얼만큼이나 효과도 징그러운 카드였다. 남해는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표정으로 소야 뒤의 성채를 노려봤다.
"몬스터, 세트. 카드, 두 장 세트. 턴, 종료…”
-안소야/LP 4800/패 없음
“박살내면 그만이지! 드로우!”
“발동, [위저 보드]…”
아까 그 보드가 소야의 머리 위에서 스르르 다시 나타났다. 남해는 드로우한 카드를 확인했다. 지금 뽑은 카드는 [지룡성-헤이칸]. 완전히 패가 말렸다.
다른 세장의 카드도 수룡성과 [룡성의 휘적], [어버이해마]. 하나같이 당장은 쓸 수 없는 카드들이다.
“헤이칸을 일반 소환하고 배틀! 두 몬스터로 상대를 직접 공격!!”
“암흑 성역. 효과…”
헤이칸과 승영이 움직이자 안개가 의지를 갖춘 것처럼 스르르 뻗어와 둘을 집어삼켰다. 안개 속에서 헤이칸이 먼저 날아올랐다.
헤이칸의 우렁찬 포효와 함께 바위사태가 세트된 몬스터, [원한의 사악령]을 향해 쏟아졌다.
헤이칸의 공격으로 일어난 굉음과 흙먼지에 남해는 자신도 모르게 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먼지구름이 살짝 잦아들 무렵 남해는 슬쩍 팔을 내리고 전방을 확인했다.
그리고 먼지구름 속에선-
“아.”
-승영이 대검을 들고 남해를 내리치기 직전이었다.
콰아앙-!! 승영의 대검이 남해의 바로 옆 땅을 내리찍었다.
큼직한 대검의 끝부분, 거의 자신의 다리만큼의 길이가 땅 속으로 박힌 모습에 남해는 이번 듀얼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꼈다.
-강남해/LP 8000 → 6250
[암흑 성역]의 효과로 판정에 실패한 공격이 돌아왔구나.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이 아직 떨렸다. 그와 함께 왼쪽 다리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더럽게 기분 나쁘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이 감각. 남해는 자신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올 뻔 했다.
“턴 종료.”
“발동, [위저 보드]… 죽음의 메시지… 한 장 낸다.”
성대를 억지로 긁는 것 같은 소야의 목소리, 그리고 판을 긁는 끼기긱 소리와 함께 아까의 죽음의 메시지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주군, 이런 말 드리는 것도 뭐합니다만.”
“왜.”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도 느꼈나?”
남해의 옆에는 가이저와 용연이 있었다. 둘이 남해의 뒤에서 나타나자 남해의 왼쪽 다리가 스르륵 무릎 근처까지는 돌아왔다.
그 대신 용연의 왼쪽 발목 아래는 더 보이지 않았다.
가이저와 용연이 남해의 부담을 조금 덜어준 덕분에 남해의 영혼은 어둠에 일부가 빨려간 상태에서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소야는 다르다.
듀얼의 승패와 별개로, 어둠에 영혼이 빨려들어간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면 절대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남해는 대충 용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그 말대로면…”
-“마무리만 된다면… 뒷일은 소생과 가이저 공에게 맡겨주십시오. 어떻게 될 겁니다.”
-강남해/LP 6250/패 3장
그동안 턴을 받은 소야는 방금 뽑은 카드를 바로 필드에 세트했다.
“턴, 종료.”
-안소야/LP 4800/패 없음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승리 플랜인 위저 보드답게 간결한 플레이였다. 턴을 받은 남해는 바로 D-패드에서 뽑힌 카드를 확인했다.
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카드가 패에 잡혔다.
“패에서 [해피의 깃털] 발동!”
남해의 필드에서부터 강풍이 일어났다. 강풍이 소야의 필드를 집어삼킨 직후 꼭 선풍기의 전원을 내린 것처럼 바람이 멎었다.
기억과 너무 다른 감각에 남해는 소야의 필드를 다시 살폈다.
“발… 동…[대역의 암흑]…”
카드도 정말 괴담 같은 것만 쓴다. 남해의 필드에 있던 [해피의 깃털]은 새카맣게 썩어문드러지며 사라졌고 소야의 덱에서 카드 한 장이 쏜 것처럼 휙 사출되고는 묘지 안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그렇다면 배틀!”
다시 헤이칸과 승영이 세트된 몬스터를 향해 움직다. 승영의 검이 세트되어 있던 카드를 토막쳤고 붉은 개 모양 악마의 모습이 잠시 드러났다가 산산조각나며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마견 옥트로스]… 효과 발동… 몬스터… 패에 넣는다…”
소야가 덱에서 뽑아든 카드는 레벨 8 악마족 몬스터 [커스 네크로피어].
그리고 그즈음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헤이칸이 소야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지는 바위사태가 소야의 주위를 뒤덮었다.
흙먼지가 걷히면서 소야 주변에 가득 쌓인 바윗돌도 스르르 기화되듯 사라졌다.
-안소야/LP 4800 → 3200
“턴 종료.”
-강남해/LP 6250/패 3장
“죽음의 메시지… 한 장 더… 발동.”
어느새 죽음의 메시지가 하나 더 생겨서 세 글자가 되었다. 하나같이 쳐다보기만 해도 오한이 올라오고 혐오감과 불쾌감이 허파 가득 차오르는 모습이었다.
턴을 받은 소야는 다시 기분나쁜 움직임으로 덱에서 카드를 뽑은 다음 금방이라도 관절이 꺾여버릴 듯 어색하게 팔을 움직여 D-패드에 카드를 냈다.
“[트레이드 인]… 카드패, 하나 버린다. 두… 카드 뽑아서, [원한의 사악령]… 패에 넣는다…”
묘지에서 카드가 휙 날아와 소야의 패로 스윽 들어왔다. 원한의 사악령의 효과를 D-패드로 한 번 더 확인한 남해는 상황을 고민했다.
지금 자신 필드에 세트된 카드는 상황타개에 도움이 되지 않고, 공격한다 해도 암흑 성역에 가로막혀 생각대로 풀릴지도 알 수 없다.
여기에 매 턴 생겨나는 죽음의 메시지로 남은 턴도 그다지 많지 않다.
“몬스터를, 세트. 이제 턴, 종료…”
-안소야/LP 3200/패 1장
“드로우. 패에서 [염룡성-슌게이]를 소환하고, 배틀!!”
지금이라도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다면 충분히 상황을 뒤집어볼 수 있다. 남해는 다시 자신의 운을 믿고 [배틀 페이즈]로 들어갔다.
“맨 먼저 슌게이로 세트된 몬스터를 공격!”
슌게이가 입에서 화염구를 쏘아댔다. 하지만 세트되어 있던 몬스터는 [그레이브 키퍼].
오히려 몸부림치며 그레이브 키퍼가 불덩이를 한움큼 쥐어 남해에게 던져버렸다.
그 다음엔 승영이 그레이브 키퍼를 베어냈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남해의 머리 위로 헤이칸의 바위사태가 쏟아졌다.
-강남해/LP 6250 → 5350
-“큰일이구만.”
“말 안해도 알겠거든…?”
“히, 히히힉. 힉.히힉.”
소야도 애가 붙들고 휘두르는 인형처럼 몸을 이상하게 떨며 기분나쁜 고음으로 남해를 비웃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던 듯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남해가 [End Phase] 패널을 눌렀다. 그걸 기다린 듯 네 번째 죽음의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남은 메시지는 단 하나…”
-강남해/LP 5450/패 3장
“드로우… 몬스터를 세트. 턴 종료.”
-안소야/LP 3200/패 1장
턴이 돌아왔다. 위저 보드를 치우지 못한다면, 승부는 이번 턴 안으로 결정난다.
용연은 고갤 돌려 남해의 눈을 한번 들여다봤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짜증, 늘어지는 듀얼에 대한 지루함, 그런 감정이 비쳤다.
그리고 승부욕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뽑지 않은 카드에 대한 기대감, 그럼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이고 있었다.
별로 무언가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남해를 믿어줄 뿐이었다.
“드로우.”
남해는 카드를 뽑은 손끝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용연도 가이저도 고갤 끄덕였다.
“패에서 [어버이해마]를 버리는 것으로, [상검군사-용연]의 효과를 발동! 패에서 용연을 특수 소환하고 필드에 [상검 토큰]을 하나 특수 소환!”
“[원한의 사악령], 효과 발동. [커스 네크로피어]. 묘지에서 특수 소환한다.”
용연이 팔을 휘둘러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남해의 필드에 생긴 그림자 안에서 올라오며, 금빛의 상검을 만들어내 오른손에 쥐었다.
그 다음엔 고갤 돌려 남해를 돌아봤다. 남해와 눈이 마주친 용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한자루의 푸른색 상검을 왼손에 만들어냈다.
[상검군사-용연/Lv6/1200/2300]
“레벨 6 용연을, 레벨 4 상검 토큰에 튜닝!”
금빛과 쪽빛, 두 상검의 에너지가 나선을 그리며 용연의 주위로 휘몰아쳤다.
그 나선의 한가운데로 검붉은 기운이 위로 뻗어갔다. 세 기운이 용연의 안으로 흡수되며 용연의 모습이 변해갔다.
눈동자는 붉어졌고, 송곳 같은 손톱이 장갑을 뚫고 올라왔다. 가늘은 체형도 우락부락해져 거의 승영의 체격에 비견될 모습이 되었으며. 두 상검은 한자루로 합쳐져 꼬리와 일체화 되었다.
“그 힘은 산을 뽑아내고, 그 기개 세상을 뒤집는다! 만인지적의 대군사 여기에 강림! [상검대사-칠성용연]을 싱크로 소환!!”
[상검대사-칠성용연/Lv10/2900/2300]
지금의 용연은 더 이상 남해의 왼쪽에 서서 그를 보좌하는 군사의 모습이 아닌 천하를 노리는 패왕의 모습이었다.
-“후, 하. 좋구나. 간만에 도포를 벗고 갑주로 갈아입으니! 이리도 상쾌하구나!”
“용연이 싱크로 소재로 사용되었을 때, 상대 라이프에 1200 포인트의 데미지를 준다!”
-안소야/LP 3200 → 2000
쾅-! 용연이 가볍게 주먹을 쥐자 소야의 옆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서늘하던 필드에 잠시나마 열풍이 몰아쳤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단순히 강한 몬스터가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음기와 상극인 양기 덩어리의 화염 속성 몬스터 칠성용연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남달랐다.
“배틀!! 커스 네크로피어를 승영으로 공격!”
승영이 다시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 옆을 칠성용연이 나란히 서 같이 움직였다.
오히려 칠성용연이 승영보다 한발짝 더 앞서가자 계속 그랬던 것처럼 어둠이 용연을 집어삼켰고 용연은 아랑곳 않고 전신에서 검은 불꽃을 피워내 어둠을 걷어버렸다.
검은 불꽃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암흑 성역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듯 소야의 필드로 빠르게 뻗어갔다.
“칠성용연이 필드에 있을 때, 마법이나 함정의 효과가 발동하면 그 카드를 게임에서 제외하고 상대에게 1200 포인트의 데미지를 줄 수 있어! 암흑 성역을 게임에서 제외한다!”
“뭐…?”
-“장난질도 거기까지란 거다.”
용연의 꼬리가 바닥을 쾅 내리치자 그 충격으로 안개가 휩쓸려 걷혔고 소야의 등 뒤에 솟아오른 검은 고성도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져갔다.
단순히 고성만 사라진 게 아니라, 고성이 가진 힘으로 필드에 버티고 있던 죽음의 메시지들도 모래처럼 변해 바닥으로 쏟아졌다. 위저보드 또한 멀쩡할 순 없어서, 쩌저적 소리와 함께 균열이 일어나더니 이내 산산조각나며 부서졌다.
-안소야/LP 2000 → 800
“카드가 게임에서 제외되었으니, 승영의 효과로 [위저 보드]와 세트된 몬스터 또한 게임에서 제외한다!!”
서컥-!! 더는 거칠 것이 없자 승영은 대검을 크게 휘둘러 커스 네크로피어를 그대로 일도양단했다.
칠성용연 또한 더는 가로막는 것이 없는 소야를 향해 칼끝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칼끝은 허공에서 무언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배,[배틀 페이더]. 효과 발동!”
시계추가 달린 작은 악마가 용연의 칼끝을 몸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용연은 기특하다는 입가를 매만지며 고갤 끄덕이고는 시선을 소야의 약간 뒤로 옮겼다.
-“승리를 갈망하는 모습은 높이 평가해주겠다. 하지만.”
배틀 페이더의 몸이 떨렸다. 칠성용연의 칼끝은 이내 배틀 페이더마저 꿰어버렸고, 용연의 꼬리 끝은 소야 뒤의 허공에 꽂혀 멈췄다.
용연의 검에 새카만 사람 형체의 무언가가 꿰인 채 고음과 저음을 오가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절규하며 발버둥쳤다. 그림자가 소야의 머리채를 붙들려 하자 용연의 꼬리는 그림자를 더욱 뒤로 몰아붙여 소야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장난질은 거기까지라고 말했는데.”
“상대가 몬스터의 특수 소환에 성공했을 때, 용연은 그 몬스터 하나를 게임에서 제외하고 1200 포인트의 데미지를 준다!”
“아, 아아아아아…!! 아아!!”
-“승부는 결정났다.”
“이리 가고 싶지 않다. 이승에 남고 말테다. 몇 명을먹어치워서라도 나는… 나는…!!”
사람 같지만 사람은 아닌 그것을 용연이 꼬리로 들어올리자 소야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고 남해가 머뭇거리는 사이 가이저가 앞으로 나서 소야와 남해 사이를 가렸다.
검은 그림자는 발버둥치던 끝에 기기괴괴한 단말마와 함께 완전히 불타 사라졌고, 용연의 모습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림자/LP 800 → 0
그리고 그림자가 사라지자 주변의 어둠도 서서히 걷혀갔다. 어느새 원래 남해와 소야가 있던 그 폐가로 돌아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아까처럼 공기가 싸늘하진 않았다.
꼭 원래 이래야 했던 것처럼 그냥 자연스럽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
다음날 학교. 평소의 모습을 한 용연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남해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용연. 그때는…”
-“죄 없는 사람을 둘이나 해하려 한 녀석입니다. 그 자가 언젠가 치뤘을 대가고, 어쩌면 진즉에 치러 마땅했을 악령이었을 수도 있지요.”
남해는 그 말에 악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몇 명을 먹어치워서라도. 그곳에 대한 소문이 학생들의 귀에 들어갈 정도라면 피해자가 소야가 최초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태연하게도 말하는군.”
-“마땅히 망자가 있을 곳으로 보낸 것 뿐이외다.”
가이저는 남해의 그림자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용연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용연은 아무 잘못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남해는 이사와의 승부도 떠올랐다. 꼭 죽여야 했을까. 설득할 순 없었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괜히 찝찝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생각하고 있나?”
“응?”
-“나도 이 녀석 방식은 맘에 안 들지만, 최선인 건 맞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그 녀석 손짓 봤나? 자칫 잘못했다간 그 음침녀도 딸려갈 뻔 했다고.”
남해는 그 말을 듣고 이 사건은 더 생각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4층 구석의 동아리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남해가 들어왔다.
“으응…? 아, 아! 왔구나!”
남해가 들어오자 동아리실 안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소야는 남해를 보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남해에게 다가왔다.
폐가에서 있던 일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남해한테 업힌 채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깼던 기억은 났다.
결국 버스가 끊긴 바람에 교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집에 돌아갔고…
“저, 선배.”
지금 남해의 손에 들린 것은 동아리 퇴부신청서였다.
이런 일, 두 번 세 번씩 겪는다면 절대 멘탈이 남아나지 못한다. 공포영화나 미확인 생물체 이야기나 할 줄 알았지 이런 일은 계속할 마음이 한 장도 없다.
남해에게서 퇴부신청서를 받은 소야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저, 저기… 남해야…?”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더 괜찮은 애 오겠죠.”
“가, 가지 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진짜 귀신 만나는 건 좀…”
“네가 마… 마지막 부원이란 말야… 제발 남아줘…!!”
“아잇 이런 부활동 하면 1학기 끝나기 전에 저 이승 하직하거든요?!”
남해의 옷을 붙들고 늘어지는 소야.
어떻게든 소야를 떨쳐내려고 애쓰는 남해.
복도 한쪽 구석에서 둘의 꼬라지를 용연과 가이저는 연극이라도 감상하는 모습으로 쳐다봤다.
-“청춘이구나…”
-“소생도 동의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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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삽화의 풀버전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로그에 별로 힘을 안줘서 좀 짧을 줄 알았는데 잔짜잔 7화보다 분량이 많네요.
늘 글을 쓸 때마다 “이번에는 적당한 분량으로 조진다 ㅋㅋ” 하지만 일이 생각처럼 흐르는 일은 거의 없군요.
중간에 친구네 집에서 외박도 하고 이거저거 하다보니 또 늘어져서 2주째에 투고하네요.
다음 주부턴 글이나 그림 같은 취미에 이정도로 시간을 투자할 수 없어질 예정이라 9화는… 언제 투고될지 모르겠스빈다.
-Lahmu 님에게 받은 아트
소야의 모티브는 포켓몬 6세대의 오컬트마니아. 오피셜에서 사용된 이름이 각각 [히토미]와 [사요코]라길래 안소야眼小夜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오컬트마니아는 아녔는데, 귀신 나오는 부활동 이야기로 넘어가니 뭘 해도 오컬트마니아랑 수렴진화해서 그냥 깔끔하게 포기해버렸으요....
9화도 별다른 사유가 없으면 일상편일 예정입니다. 한동안은 쭉 일상편 달리면서 설정이나 자잘한 이야기들 쌓아가야겠네요.
용연 강해욧
오컬트부 - 일러를 본다 - 오컬트마니아잖아! - 오컬트마니아였다에 웃음 특수 승리를 번으로 잡는 흐름이 좋군요,
다른 컨셉도 몇번 시도해봤는데 결국 마지막엔 오컬트마니아로 수렴진화 해버리덥니다 음기에 양기로 대응한다는 컨셉으로 떠오른 것들을 이거저거 복합적으로 엮어보니 저게 제일 괜찮았기에 이런 흐름이 되었군요
커신도 듀얼을 당연시하는 전형적인 듀얼 만능주의 사상 아주 좋군요 그 와중에 위저보드라니 캐릭터 인상에 딱 맞는 카드로군요
저 외모로 고스트릭도 위저보드도 언데드월드도 안 쓰면 반칙이잖아요ww 그리고 묵주로 마법방어 두르고 옆에 탱커 딜러 하나씩 서있는데 정면승부보단 룰에 의거한 듀얼 쪽이 차라리 승산이 있는 것입니다
단둘이 부활동이라니 히로인이군요
그렇다면 히로인이 되기 전에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남해의 히로인은... 꼭 필요한 걸까요 유흥왕은 전통적으로 아이보-아ㅁ흑사도 요한-아ㄴ티노미 -아스트랄-아이로 이어지는 파트너가 있었으니까
이게 그 Bring The Boy Next Door인지 뭔지죠?
녀캐가 엮이지 않는다면 남캐라도 엮어야...!!
큭 칠성만 아니었어도...
용연 강해욧
여기서는 용연이 칠성용연 모습까지 선보이면서 많이 활약하는군요. 제가 연재하고 있는 소설에선 용연이 나왔다 하면 순균 효과용으로 릴리스되거나, 아니면 별 다른 묘사 없이 바로 바로네스 혹은 승영 싱크로 소재용으로 쓰여서 취급이 박한데...
하림의 용연은 많고 많은 상검 몬스터들 중 한장일 뿐이고 여전히 악역 이미지지만 남해의 용연은 딱 한장 있는 상검 정령에 나름 정신도 차리고 조언자 역할도 겸하고 있으니 아직 탕아인가 정신을 차렸는가 그 차이쥬 남해는 아직도 바로네스가 없는 것도 있고...
그렇긴 하네요. 제 소설에서 나오는 용연은 "나도 나쁜 짓 저지른 놈이고, 그래서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암흑 날개 놈들은 나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다."라고 말하는 정령이긴 한데, 이 소설에서 나오는 용연은 남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조력자, 조언자 이미지로 나와서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