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는 체계(랑그) 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됨.
'미역'이란 기표(기호의 형식)는 체계 속에서 존재할 때,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해초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거지.
이 맥락에서 번역을 이해하자면
A체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단어를 B라는 언어의 체계에 끼워 넣는 행위임.
예컨대 한국어 '미역'을 영어 속 단어 'seaweed'라는 단어로 바꾸는 거지.
하지만 번역이란 행위는 완벽할 수 없음
A와 B 언어의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의미상의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
위의 미역을 seaweed로 번역한 예시를 돌아보자면, seaweed로 번역한 시점에서 '한국인이 즐겨 먹는 해초'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바닷속에서 번성하는 식물(또는 해조류) 중 하나란 의미만을 가지게 되는 거지.
그래서 완벽한 번역은 없는 것이고, 그래서 봉준호는 '옥자'에서 '번역은 신성하다'라고 표현한 것임.
인간의 능력으론 불가능한, 오직 신성의 영역에서만 온전히 가능한 것이 번역이기 때문에.
이를 번역의 불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이렇듯 번역은 불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번역을 지향하는 인류의 발명품이 있음
마르크스를 끌고 오는 지점이 이거임.
마르크스 본인은 번역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지만, 그가 설명한 자본주의를 고찰하다보면
자본이야 말로 왕성한 번역기계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지.
자본은 모든 의미를 화폐로 번역함.
미역은 kg당 15,000원으로
인간(노동력)은 시간당 최소 8720원으로
등등
자본 앞에서 번역이 불가능한 것은 없음
의미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화폐값으로 번역을 하는 거지
이런 맥락에서 영화 옥자를 보면
마지막에 미자가 옥자를 황금 돼지로 사오는 장면이 묘하게 느껴지지
미자의 옥자에 대한 사랑 혹은 애정이 금덩이로 번역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이런 빨갱이적인 감상으로 끄적인
잡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