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의성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에 부쳐
우리들의 삶이란 높고자 하는 산과
낮고자 하는 물이 서로 인연으로 만나
세상으로 흘러드는 강물처럼
그렇게 덧없이 흘러가는 게 아니겠느냐.
그대들과 나의 인연 또한 그런 게 아니더냐.
오늘 잠시 세상에 나와 들꽃을 보니
평지보다 벼랑의 꽃들이 먼저 피었구나.
어둠도 복면을 하는 세상은 여전하지만
종일 골짜기에 울던 총성은 사라지고
새들 노래 자욱하구나.
아직 낡은 것들 갔으나 새로운 것들 오지 않았으니
어디 영문 없이 지는 게 7월의 꽃들뿐이겠느냐.
열일곱 소년이 이젠 백발의 팔순 노인이 된 나의 아들아.
뜨거운 여름,
포승줄에 묶여 잠깐 끌려갔다 오리라 생각하며
신작로 미루나무 사이로 너를 잠깐 힐끗 본 게 마지막이었
구나.
그 잠깐이 60년이 될 줄 난들 어찌 알았겠느냐.
그러나 이 아비의 제사상을 차리는 데
60년이나 걸렸다고 비통해하지 말거라.
600년 이상 걸려도 사과 하나, 배 하나
구경 못하는 넋들이 얼마나 많더냐.
그리고 나의 손주들아,
이 야만의 세월을 탓하거나 저주하지 말거라.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더 말이 없지 않더냐.
오늘따라 이 작두골에 피는 꽃들이 더욱 눈부시구나.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바위에 부서질 때가
가장 찬란한 순간인 것처럼
60년 만에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숨을 끊는 대나무가
더욱 사무치는구나.
역사는 우리에게 강자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강해져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 고비마다
꺾이고 말았지 않더냐.
꽃이 아름다움을 버려야 열매를 맺듯
사람도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정의로운 창이 되고
구부리면 밭을 일구는 호미가 되고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는 대나무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대들의 영혼으로 피어나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그대들이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아주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역사의 정수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깨달은 자가 아니겠느냐.
거듭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현다사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이거늘
끝까지 그대들이 그대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숨 쉴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디며 숨을 쉬어야 한다.
빗줄기가 바람 한 점 없이도 허공의 허리를 베어내고
오래 참고 참았던 꽃들이 마침내 피어나는 이 작두골에서
그대 산 자들에 대한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이 추도시를
쓴다.
악의 평범성
이산하, 창비시선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