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낡은 소가죽 구두
발목까지 푹 감싸주는 구두
20년 동안 함께 걸으며
밑창을 열 번 넘게 바꾼 구두
도시가 아름다운 건
그 도시가 지닌 발냄새 때문이야
힘들 때마다 내게 속삭여주는 구두
그 어떤 용도 신어본 적 없는 구두
카잔차키스와 타고르의 고향에 함께 갔지 톱카프 궁전에
서 모세의 지팡이를 보았고 천산산맥 티엔츠 오르던 산언덕
에서 동충하초 캐던 사람들과 밀크차 마셨지 볼쇼이 대극
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았고 MOMA에서 마티스의 <춤>
과 앤드류 와이어스의 <크리스타나의 세계>를 만났지 수즈
달과 블라디미르에서 착한 강을 따라 걸었고 우즈또베에서
만난 고려인들과 두부된장국을 먹었지 팔각 기와지붕에 하
얀 회칠한 벽 채송화와 분꽃을 심으며 <아리랑>을 노래하던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동안 산
거머리에 빨리면서도 화 한번 내지 않았지 알든 굼에서 하
얀 종이배를 띄워 전설을 위로했고 자아살메르에서 내 이름
Jaigu가 산스크리트어로 똥의 승리란 걸 알고 행복했지 영
하 20도 이도백하의 난방 없는 여인숙에서 함께 고드름이
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고대 세계의 등대를 보았지
단 한 번 사랑한다 말한 적 없으나
바람 불고 꽃 피면
일어서
걸을 시간이야
사랑해
내 등을 토닥거린 구두
이국의 도시 아침 빵 가게의 빵 냄새보다 포근한 구두
어느 날 푸른색의 용이 내게 신발 한번 바꿔 신자고 말하
던 구두
신발장 안 설산처럼 고요히 빛나던 구두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곽재구, 문학동네시인선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