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자무시 67 행성
각각의 숏들을 연결시키면 영화가 된다
그대와 내가 적어나가는 시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의 고독이 끝내 한 생의 얼굴을 이루듯, 사물의 상태
는 끊임없이 유동적이다, 매질(媒質)도 없이, 사물들
은 스스로의 에너지 변화를 통해 자신만의 불꽃을 피
워 올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암전으로 분리된 67개의 행성과
고독의 시가 될, 것이다
1
Lazy Bird에서 술 취한 새들이 노래하는 저녁, 나
는 탁자의 모퉁이에 당도한 낡은 행성의 저녁 빛을
보네, 창밖은 가끔씩 낙엽들의 암전, 시인, 작가, 드
러머로 이루어진 밴드가 콘서트를 여는 여기는 핀란
드의 밤, 돌고래 쇼를 보러 가자
2
파리의 어두워지는 저녁이었네, 나는 소르본느 대
학 근처 어느 카페에서 짐 자무시의 인터뷰집을 읽고
있었지, ‘어떻게 보면 이 행성은 이미 몯느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가장 단순한 것들이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죠. 예를 들어 대화라든가, 누
군가와의 산책, 또는 구름 한 점이 지나가는 방식, 나
무 이파리에 떨어지는 빛, 또는 누군가와 함께 담배
를 피우는 일’, 책갈피가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내 내
면의 페이지들의 암전, 여기는 파리의 밤, 누군가와
담배를 피우러 가자
3
이면지에 쓴 시처럼 어슴푸레한 저녁이 오고 시인
은 눈을 감고 기타를 치네, 기타를 칠 때마다 별들에
불이 켜지고 그래서 밤은 시인들의 행성, 기타 연주
가 끝나면 다시 암전될 여기는 행성의 내면, 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러 가자
4
내 컴퓨터의 이름은 ‘리스본 7월 24일 거리’, 나는
그 거리로 스며들기 위하여 한 대의 담배를 피우고
세 개의 모음과 네 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암호를
치네, 가끔씩 갈매기들이 대서양의 녹색 별들을 물고
날아드는 여기는 리스본의 밤, 그대의 낮은 숨결이
내 귀에 와 닿을 때마다 아아 나는 암전, 대서양 주점
으로 술 마시러 가자
5
눈 내리는 밤, 불꽃의 내륙으로 서서히 번져가는
눈보라의 음악, 문풍지 한 장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적어나가는 방 안의 작은 혁명사, 누군가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 잠든 함경도의 깊은 밤, 시린 유성이 하
나 휙 빗금을 긋고 지나가면 봉창 문은 이미 착색 판
화, 바람이 불 때마다 비사표 성냥갑 같은 마을 전체
가 흔들리는 여기는 바람의 북방 한계선, 시베리아
호랑이들이 더 깊은 숲 속으로 몸을 이끌고 들어가
눈동자의 불을 끄고 잠들면 다시 암저, 여기는 내면
의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얗게 내리는 천사들의 밤
8
자무시, 그대는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이
라는 이상한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 회원이랬지, 하긴
비밀결사 조직의 이름이 평범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프리메이슨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건
몇 개의 비밀결사 조직, 가령 시로 암호를 타전하는
요원들, 드러나지 않는 영혼의 동지들, 그러니까 가
령,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또 다른 점조직, 영혼의 세포
7
아프리카, 내 관념 속 마지막 대륙으로 그대는 떠
났다, 나는 여기에 남아 대륙봉의 심장에 관하여 혹
은 북극곰의 새로 돋는 발톱 주기에 관하여 오래 생
각한다, 심장 속 빙산의 일각이 북극곰의 발톱에 긁
힐 때면 나는 남아 있는 자들의 고독과 말없이 돋아
나는 상처의 주기에 관하여 오래 생각한다, 하나의
행성 속에서 그대는 여름을, 나는 끊임없이 겨울을
살고 있다
8
시는 무척 추상적이고, 무척 부족적이에요, 오직
시인의 부족 구성원들만이 그 언어의 음악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나의 부족에 관하여 생각해본
다, 나의 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내가
아는 몇 마리의 구름과 바람, 그런 것들이 하나의 부
족을 이루었으니, 오늘 같은 날은 베를린 프로펠러
아일랜드 호텔에 투숙하고 싶어, 꿈속에서라도 프로
펠러를 달고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나의 부족을 만나
고 싶어, 바람과 구름의 부족
9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뜨거운
차를 마시고 덥혀진 몸으로 그대의 눈동자를 바라보
며 오래 이야기하고 싶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그 바람에 밀려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가는
구름에 대하여, 덜컹거리는 창문과 덜컹거리며 달려
가는 겨울 야간열차에 대하여, 대륙을 횡단하는 생에
대하여
10
사물의 상태, 내가 만지고 쓰다듬는 사물의 상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물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모든 사물들은 뜨겁고 동시에 차갑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움
직이며 정렬하는 것이다, 내가 밤에 당도한 것이 아
니라 밤과 내가 지금 여기에 당도한 것이다, 그냥 당
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꾸었기에 지금 여기에
내가 고요한 사물의 상태로 당도해 있다
11
담배 연기로 사색을 한다, 담배 연기로 항해를 한다,
참 많은 유령들의 시간이 지났다, 퇴근할 시간이다, 많
은 것들이 변형되고 더 많은 것들이 추가될 것이다, 결
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아우라를 부정하고 마
후라를 목에 휘감고 펄럭이며 퇴근할 시간이다
삶이라는 직업
박정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