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알 수가 없다
*
나는 불을 끌고 누워 피에르 르베르디의 시집을 읽
는다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고독의 투쟁, 침묵의 투쟁
*
무엇이 따스함이고 무엇이 차가움인가, 북반구의 겨
울을 왜 전 지구적인 겨울처럼 말하는가, 우리가 거처
하는 이 조그마한 행성의 창밖으로도 눈이 내리는가
역시 알 수가 없다
*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왜 그럴 수 없다는 것일까,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창문을 열고 세계의 날씨를 관찰한다
*
내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한 줄의 시를 쓸 때
세계의 날씨는 이미 변해 있다, 시는 무력하지만 너
무나 무력해서 무력 무력 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기
도 한다
*
무장 혁명 봉기가 필요한 날들 속에서 나는 시를
쓴다, 나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여 무장 혁명 봉기
를 시도해본다
묵시록처럼 불어 가는 바람, 구름의 생
오염된 내 생의 대기권을 전복하고 갱신하는 유일
한 무기는 고독과 침묵의 시
*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덜컹거리는 천사의 심장
*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알 수가 없다
*
본질적 고독을 향해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 체의
마지막 날들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그 어떤
따스함과 안락함보다도 신념의 진지 구축이 한 인간
의 내면에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도 하는
것이다
*
체 게바라 만세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려본다, 날짜
변경선의 안팎을 넘나들 뿐인, 혁명 노선의 변경이
불가능한 고질적 영혼의 탄식
*
결론이 명쾌하게 정해진 여명의 뒷골목에서 나는
취객처럼 고독의 권리장전을 쓴다
모든 것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어딘가로 돌아들 간다
그러고도 남는 게 있다면 태양과 라이터와 담배를
움켜쥐고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훔쳐내는
사내의 손등이다
사내의 손등으로부터 돋아나는 봄에 대하여 지구의
봄으로 귀환하는 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하고픈 말이
남아 있는 자들이 끝내 본질적인 꿈을 꾼다
고독한 영혼들의 원동력, 그것은 결론이 명쾌하게
정해진 삶 속에서 그래도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
이다
*
시집 제목을 체 게바라 만세로 하자고 했더니 사람
들이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
욕망이 바람처럼 나를 관통한 그 거리엔 고독만이
텅 빈 한 켤레의 신발로 남았다, 나는 이제 신발을 벗
고 또 다른 나의 고독 속에 들어가 눕는다
고독의 영유권에 관한 오래되고 끈질긴 나의 요구
는 언제나 묵살되었다, 누가 나의 고독을 점령했는
가,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영유권 주장, 나는 이제 신
발을 벗고 나의 본질적 고독 속으로 들어가 단단하게
누울 것이다
음악을 끄고 세계를 정리한 다음 나는 처음으로 나
와 대면한다, 세상의 각질 같은 별들이 단단하게 자
리 잡은 밤하늘 아래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아픔과
대면한다
고통, 죽음, 무중력의 세계, 내가 처음으로 나의
아픔과 대면하듯 나는 고독할 권리가 있다, 나는 다
시 나에게로 돌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시선을 차단하고 세상의 저녁을 꺼버리고 이제 나
는 비로소 고독의 권리로 자유다
*
다락방에서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한다
천창을 흐르던 구름의 스틸 사진, 정지 화면 같은
연애 사건, 모든 사랑이 일회적 사건임을 안다
반복되지 않는 담배 연기, 지독한 고독의 후유증,
모든 인생도 일회적 사건일 뿐이다
이별은 저녁처럼 빨리 오고 저녁처럼 빨리 당도한
이별은 어둠 속에 무수한 상념의 별을 띄운다
다락방에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고 그다음은 현실이다, 눈 감
고 잠들고 싶은 시간, 나는 다락방에서 인생을 다 찍
었다
*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알 수가 없다
*
이 시는 어쩌면 이야기를 하는 한 남자와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검지를 올린 남자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
며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코트를 걸치고 입에 담배를 문 여자와 다리를 꼬고
앉은 다른 한 남자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다락방이다
이야기를 하는 남자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
에게 조명은 강조되어 있을 뿐 주변은 어둡다
그러나 조명은 알 수 없는 친밀감을 형성한다
조명에 의해 강조된 그 친밀감은 내가 알 수 없는,
내가 들어가 살아본 적 없는, 비밀의 생으로부터 온다
내가 찍고 싶었던,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의 한 장
면이다
*
검지의 대가 혹은 강조된 조명이라는 제목으로 언
젠가 나도 한 편의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
히말라야엔 왜 가지? 사람들이 묻는다
글쎄 안 가봤으니까 가겠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
한다
히말라야엔 왜 가지?
나의 고독과 더불어 하얀 침묵의 눈 속을 오래 걷
고 싶어서 나는 히말라야로 간다
*
지금도 창문을 열면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 내가 보
인다
고독의 투쟁, 침묵의 투쟁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
창밖에 눈이 내리는가
체 게바라 만세
체 게바라 만세
눈이 내린다
삶이라는 직업
박정대,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